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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02. 13. 금요일

아직은투아웃




 


편집부 주


아래 기사는 체육불패 <아직은투아웃>님의

<늬들 주먹은 좀 써 봤냐?(링크)> 

편집본입니다.


편집 과정에서 빠진 부분과

원글의 살아 숨 쉬는 매력을 고스란히 

느끼고 싶으신 분은 

위 링크를 클릭해주시라. 


좋은 글을 남겨주신 

<아직은투아웃>님께 

졸라땡큐를 전합니다.














내 사랑 헤글러

     

주먹을 잘 썼던, 또 그 일을 밥벌이로 삼았던 한 남자의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프로권투 미들급에서 약 8년 동안 세계 최강자의 위치를 굳건히 차지하고 있었던 마빈 헤글러. 아직도 수많은 권투 팬들과 전문가들은 그의 이름 앞에 특별한 수식어 하나를 덧붙여 부른다. Marvellous(마블러스; 경이로운 챔피언). 그 이외의 다른 어떤 선수도 받은 적이 없는 최고의 수식어, 마블러스를.

 

권투 역사상 가장 강했던 미들급 챔피언으로 기억하는 선수언젠가 이 강한 남자에 대한 이야기를 꼭 한 번은 해보고 싶었다. 무뎌지고 흐릿해진 기억일망정 적어도 한 번은 그를 추억하는 글을 써 보리라. 그렇게 한 번은 추억한 이후에야 그를 기억에서 떠나보내리라 하는 마음이 있었다. 이제야 그에게 인사를 건넨다. 반갑소 헤글러 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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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빈 헤글러. 붕대 감는 뽄새부터가 남다르다.


마빈 헤글러. 1954523일 출생, 통산 전적 6762(52KO) 23패, 177센티의 키와 균형 잡힌 다부진 몸매. 경기가 끝나는 순간까지 한 치의 흐트러짐이 없는 강철 같은 체력, 강인한 인상을 주고 상대를 압박하던 빛나는 머리, 시종일관 머뭇거림 없는 스텝과 특유의 변화 없는 무표정한 얼굴, 상대가 쓰러질 때까지 잠시의 쉴 틈도 없이 계속해 몰아붙이던 공격적인 성향.

 

선수 생활을 하는 동안 단 한 번의 다운조차 허용하지 않은 (이에는 반론이 있다. 롤단과의 경기에서 다운이 기록된 적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가격에 의한 것이 아닌 상대의 팔목에 머리가 걸려 넘어진 슬립다운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헤글러를 더욱 완벽한 선수로 믿고 싶은 팬심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모르겠다. 그 장면을 보고 싶었지만 구하지 못했다.) 어떤 선수들을 상대해도 늘 굳건히 버텨주었던 바위와도 같은 맷집, 많은 선수들에게 귀감이 되었던 권투만을 향한 노력과 성실함. 그가 가진 장점들이며, 많은 팬들이 여전히 그를 그리워하고 있는 이유다.


 헤글러 선수 생활 중 유일한 다운이 아닐까 싶은 롤단과의 경기

(편집자 주- 필자는 못 찾았지만 우리가 찾았지~★)

 

내가 본 모든 경기에서 그는 뒷걸음치지 않았다. 그는 항상 묵묵히 커버링을 한 채 상대를 향해 전진했고, 상대의 주먹을 피해 다니는 법이 없었다. 쉴 사이 없이 펀치를 내뻗으며 상대를 서서히 혹은 순식간에 무력화시키고, 링 위에 뒹굴게 만들었다. 나는 그가 링 위에서 비틀거리는 것은 물론 지쳐 흐느적거리는 모습조차 본 일이 없다.

 

그는 15회가 되어도 1회와 똑같은 힘찬 스텝을 밟았고, 엄청난 내구력과 스테미너로 끊임없이 상대를 향해 주먹을 내뻗었다. 어떤 경기에서든 상대가 쓰러지는 그 순간까지 그는 링을 지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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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빈 헤글러의 등장, 승승장구 그리고 패배와 시련

 

간단하게 마빈 헤글러에 대한 이력을 살펴보자. 그는 1954523일 미국의 손꼽히는 빈민가인 뉴저지 주 뉴아크에서 사생아로 태어났다. 그에 대한 글을 읽어보면 어린 시절이 행복하지 않은 시절이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래도 그의 어머니는 매우 자상하고 좋은 분이었다고 한다.

 

열여섯 살이던 1970년 가족이 이사한 메사추세츠 브록턴에서 그는 한 권투 체육관을 찾아간다. 이탈리아계 백인들인 페트로넬리 형제가 운영하는 곳이었다. 이곳에서 권투를 시작하게 된 헤글러는 자신이 은퇴하는 마지막 날까지 페트노넬리 형제와 생사고락을 같이 한다이십 년에 가까운 이 시간은 세 사람의 두터운 믿음과 의리를 짐작해 볼 수 있는 부분이다.

 

이듬해인 1971년에 아마추어로 데뷔한 헤글러는 1973년 메사추세츠 주의 골든글러브 대회에 출전해 우승과 함께 최우수선수상을 받게 된다. 이어 전미선수권대회에 출전해 또 한 번 우승을 거머쥔 헤글러는 같은 해 5월 19살의 나이로 프로에 데뷔한다. 프로 데뷔 이후의 발걸음을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서술하면 이렇다.


* 19735월 프로 데뷔전-테리 라이언에게 2KO. 이후 1973년에 7연승(6KO)

* 197512월까지 8연승(5KO).

* 19783월 미들급 랭킹 8위에 오를 때까지 12연승(10KO

* 1979년, 세계 랭킹에 진입한 이후 1위에 오를 때까지 8연승(6KO).

* 197911 WBCWBA의 미들급 세계챔피언에 도전.

(전설의 복서 카를로스 몬존이 은퇴하며 반납한 미들급의 왕좌가 돌고 돌아 헤글러가 도전)

이 때 세계 랭킹 1위 헤글러의 전적은 4946(37KO) 21

챔피언인 안투페르모는 4845(20KO) 31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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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한 전설의 복서 카를로스 몬존


여기서 잠깐, 헤글러의 랭킹이 올라갈수록 그를 두려워한 챔피언과 상위 랭커들의 기피로 그는 좀처럼 도전권을 얻지 못했다. 물론 여기에는 그의 프로모터가 거물급이 아니라는 이유도 있었다. 당시 그의 프로모터는 립 바렌치로, 헤글러와는 데뷔 초기부터 함께 해온 사이였다.

 

당시에도 이미 나이가 많았던 립 바렌치는 후일 헤글러가 은퇴를 선언하는 자리에도 그의 곁에 여전히 서 있었다. 반대편의 페트로넬리 형제와 함께이 당시 좀처럼 타이틀에 도전할 기회를 잡지 못하는 헤글러에게 절친한 친구였던 당시의 헤비급 챔피언 조 프레이저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당신에게 기회가 오지 않는 것은 세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당신은 흑인이다.

둘째, 당신은 사우스포다.

그리고 셋째, 당신은 너무 강하다."


그런 헤글러에게 드디어 찾아온 세계챔피언의 기회. 그러나 19791130일에 벌어진 타이틀전의 진정한 주인공은 두 가지 이유에서 헤글러가 아니었다. 첫 번째 이유는 그날 같은 장소에서 벌어진 또 다른 타이틀전 때문이었다. WBC 웰터급 타이틀전으로, 당시 인기 절정의 슈가레이 레너드와 윌프레도 베니테즈의 시합이었다.


이날의 메인 경기는 당연히 레너드의 경기였으며, 사실상 헤글러의 WBC/WBA 통합 미들급 타이틀전은 흔히 말하는 오픈 게임 역할이었다. 우리의 정서로는 이해가 잘 되지 않지만, 그만큼 웰터급인 레너드의 인기가 하늘을 찌르던 시절이었다. 실제 둘의 지명도는 비교할 수조차 없을 정도였고, 이날 받은 대전료도 헤글러가 4만 달러에 레너드는 무려 100만 달러로 비교도 할 수 없는 숫자였다. 그리고 이날, 레너드는 챔피언의 자리에 올랐다.


그날 헤글러가 주인공일 수 없었던 두 번째 이유그 시합에서 헤글러는 시종일관 우세한 경기를 펼치고도 비토 안토페르모와 무승부를 기록하게 된다. 압도적으로 헤글러의 승리를 예상했던 도박사들의 지갑마저도 납득하기 힘든 판정이었다.


이후로도 오랫동안 논란이 되었던 이날의 무승부 판정으로 헤글러는 챔피언의 자리에 오르는 데 실패한다. 이날의 일로 헤글러는 굳은 결심을 한다.


'앞으로는 심판이 판정을 내릴 상황까지 가지 않겠다. 무조건 그 전에 상대를 KO로 눕히고 말겠다.'


헤글러는 이날 이후 약속을 성실하게 지켜나간다    


권토중래하며 묵묵히 훈련에 전념하던 여전한 세계 1위 헤글러에게 마침내 기회가 다시 찾아왔다. 안투페르모를 15회 판정으로 꺾고 챔피언이 된 영국의 알란 민터. 알란 민터는 곧이어 다시 벌어진 전 챔피언 안투페르모와의 방어전에서 상대를 8KO로 손쉽게 제압한 후 거칠 것 없는 당당한 자신감으로 다음 상대를 찾는다. 그 상대는 마빈 헤글러였다

  

19809, 4438(22KO) 6패의 챔피언 알란 민터는 헤글러가 대서양을 건너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영국의 역사적인 웸블리 구장에 지어진 특설 링 위에서 벌어질 일전을 위해서였다. 물론 그날 시합장에 모여 열광적이고 일방적으로 응원해줄 자신의 홈 팬들을 등에 업은 채였다. 자국 출신 백인 챔피언에 대한 영국 국민들의 자부심은 대단했고 몹시 요란했다. 자신만만했던 알란 민터는 '그 어떤 흑인도 나를 꺾을 수는 없다.' 는 말로 헤글러를 자극했고, 그에 헤글러는 대꾸 없이 묵묵히 알란 민터를 마주하고 링 위에 섰다.

 

그리고 경기는 시작되었다. 알린 민터를 응원하던 영국의 팬들은 안타깝게도 응원할 기회를 잡지 못했다. 1회부터 알란 민터를 몰아붙이기 시작한 헤글러가 2회에서는 이미 일방적인 경기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헤글러의 펀치에 의해 컷트가 된 양쪽 눈 옆에서 흘러내리는 피로, 알란 민터의 몸통 여기저기에도 핏빛이 낭자했고, 경기는 3회 만에 중단되었다. 더 이상의 경기는 무의미하다는 주심의 판단 때문이었다. 결과는 헤글러의 3TKO. 헤글러의 프로 데뷔 후 55번째 시합이었다. 헤글러는 마침내 챔피언의 자리에 올랐다. 마블러스 마빈 헤글러의 전설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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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경기를 아버지와 함께 보았다. 심야였는데 아마 <MBC 권투>의 녹화방송이 아니었나 싶다. 한보영 해설위원의 차분한 목소리가 떠오른다. 헤글러를 극찬하면서 정말 무서운 챔피언이 등장했다고 그의 시대가 짧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하며 헤글러의 앞날을 예측하던 그 기억이.

 

그 때의 헤글러는 무시무시했다.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는 알란 민터의 양쪽 눈가가 터졌고 그곳에서 흘러내리는 피가 무서웠다. 안면을 가격한 헤글러의 글러브에 묻은 피가 다시 알란 민터의 몸을 때리는 장면이 무서웠다. 백인 알란 민터의 새하얀 몸에 마치 도장이 찍히듯 시뻘건 주먹 자국이 새겨지고 있었다. 도장을 찍고 있는 도전자의 얼굴은 시종일관 놀랍도록 멀쩡한 무표정인데 반해.

 

이날 헤글러는 드디어 그토록 바라던 왕좌에 올랐지만 관중들의 축하는 받을 수 없었다. 3회 만에 TKO로 경기가 끝이 난 뒤 헤글러는 양손을 번쩍 치켜 올렸고, 자신이 챔피언이 되었음을 세상에 알렸다. 하지만 그에게 날아든 것은 관중들의 박수와 함성 대신 엄청난 양의 맥주 캔과 물병들이었다. 두 눈으로 보고도 믿기 힘든 자국 챔피언의 참담한 패배에 분노한 영국 관중들은 이성을 잃은 듯 보였다. 그 장면 역시 당시에 6학년이었던 나에게는 이해하기 힘든 무서운 광경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날 링 위에서부터 경찰과 경호원의 필사적인 보호를 받아야 했던 그는 곧바로 공항으로 가 부랴부랴 영국을 빠져나왔다고 한다. 이날의 상황을 헤글러의 트레이너였던 구디 페트로넬리는 훗날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우리는 겨우 타이틀을 획득했지, 그렇지만 마치 좀도둑처럼 도망쳐야 했어."

      


 

챔프 헤글러, 그의 시대

 

챔피언이 된 헤글러가 처음으로 맞이한 도전자는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푸르넨시오 오벨메이야스였다. 1차 방어전은 가장 강력한 도전자에게 주어지는 지명 도전권이었다. 30전 전승 (28KO)라는 거의 완벽에 가까운 전적을 갖고 있던 뛰어난 도전자였지만, 8TKO로 헤글러 앞에 무릎을 꿇는다. 판정까지 가는 일이 다시는 없게 만들겠다는 헤글러의 약속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있었다. 1차 지명방어를 성공한 것이다. 지난 경기에서 우리나라 선수를 쉽게 제압하던 오벨메이야스였지만, 헤글러에게 어린아이 팔 비틀 듯 손쉽게 제압 당해버렸다. 어쩌면 우리나라 복싱 선수들이 헤글러에게 도전할 기회를 잡지 못한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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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벨메이아스의 모습


헤글러는 이후로도 판정까지 끌고가지 않겠다는 약속을 꾸준히 지켜갔다.


* 19816, 비토 안투페르모와 재대결-4TKO (2차 방어, 1981년 6월)

* 무스타파 햄쇼-11TKO (3차 방어)

* 1982, 케이브맨 리-1KO (4차 방어, 1982년)

* 푸르넨시오 오벨메이야스(재대결)-5KO (5차 방어  

* 토니 심슨-6KO (6차 방어  

* IBF 챔피언 윌포드 사이피온-6KO (7차 방어)

* 로베르토 듀란-15회 판정승(8차 방어, 1983년 11월)

* 후안 도밍고 롤단-10KO (9차 방어)

* 무스타파 햄쇼(재대결)-3KO (10차 방어)

 

6차 방어전인 토니 심슨과의 경기는 1982년 망막 부상으로 은퇴를 선언한 슈가레이 레너드가 해설을 맡았다. 도전자와의 현격한 실력 차이를 보이며 챔피언의 진정한 위력을 뿜어내는 헤글러를 보며 레너드는 이런 말을 했다.

    

"여러분은 지금 제가 은퇴를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보고 있습니다."


6차 방어전이 끝난 직후 헤글러의 이름 앞에 그 유명한 수식어가 붙는다. 마블러스 마빈 헤글러.

 

19835월의 승리로 7차 방어와 미들급 3대 기구의 챔피언 밸트를 모두 차지한 헤글러. 링 위의 절대 강자로 우뚝 선 헤글러는 적어도 최고의 선수였지만, 가장 인기 있는 선수는 아니었다. 망막 부상을 이유로 1982년에 최고의 스타 레너드가 은퇴를 선언하기 전까지 팬들에게 가장 인기가 있었던 체급은 웰터급이었다. 때문에 천재 복서로 칭송받으며 뛰어난 실력과 함께 링 위와 링 밖을 가리지 않은 뛰어난 쇼맨십으로 세계 권투의 흥행을 주도했던 슈가레이 레너드, 라이트급에서 12차까지 방어를 한 뒤 단번에 두 체급을 올려 19806월 레너드에게 도전해 웰터급 챔피언의 자리를 빼앗았던 파나마의 영웅인 돌주먹 로베르토 듀란, 1981세기의 마지막 대결이라는 이름을 붙인 레너드와의 대결에서 명승부를 펼쳤던 디트로이트의 저격수 토마스 헌즈. 이들 세 명의 선수가 당시 세계 권투 팬들의 관심과 인기를 독차지하고 있었다.

 

헤글러에게는 이제 엇비슷한 체급의 이들과 함께 경쟁하며 승부를 겨루어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헤글러는 7차 방어전을 통해 당시에 존재하던 3개 권투기구의 미들급 타이틀을 모두 독차지했다. 1982년에 은퇴한 슈퍼스타 레너드 이래 방향을 잡지 못하던 세계 권투의 중심도 이제는 헤글러가 본격적으로 독재를 시작한 미들급으로 이동해 오고 있었다.

 

전 세계 권투의 최고 흥행 카드는 어느새 헤글러가 되어 가고 있었다. 이들 가운데 헤글러에게 가장 먼저 도전장을 내민 이는 돌주먹 로베르토 듀란이었다. 1968년에 16세의 나이로 프로에 데뷔해, 무려 31연승의 기록을 세웠으며, 불과 4년만인 19726월에 켄 뷰케넌을 꺾고 WBA 라이트급 세계챔피언에 오른 로베르토 듀란. 그는 이후 열두 차례의 방어전에 성공하고 챔피언 밸트를 반납했는데 무려 11연속 KO 방어의 기록이 포함되어 있고 이는 세계 2위의 기록이다.


라이트급 챔피언 밸트를 반납한 듀란은 19806월에 웰터급으로 한꺼번에 두 체급을 올려 레너드에게 첫 패배를 안기며 타이틀을 빼앗았으며(얼마 못 가 다시 돌려주어야 했지만), 19836월에는 데비 무어를 꺾고 WBA 라이트미들급 챔피언에 오른다. 네 번째의 챔피언 밸트였다. 그리고 같은 해인 198311월 듀란은 헤글러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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듀란과의 싸움

 

그러나 다섯 번째 챔피언 밸트를 갖기 위해 미들급으로 올라온 듀란은 사실상 전성기가 지난 선수였고, 헤글러의 적수가 되기에는 부족했다. 물론 썩어도 준치, 백전의 노장에게는 적어도 쉽게 쓰러지지 않을 정도의 노련미는 충분히 있었다. 당당하게 맞붙고 싶었던 헤글러와는 달리 듀란은 틈만 나면 클린치를 일삼으며 경기가 끝나기만을 기다리는 플레이로 일관했다. 이날 결국 헤글러는 KO 연승을 이어가지 못했다. 그의 열두 번의 방어전 가운데 유일한 판정승 기록이자 여덟 번째 방어전이었다. 이후 듀란은 한 체급을 내려 슈퍼웰터급 타이틀에 도전했고 토마스 헌즈로부터 처참한 패배를 얻었다.

   



토마스 헌즈와의 대결

   

모토시티(디트로이트)의 저격수 토마스 헌즈. 돌고 돌아 재기의 성공한 그가 화려한 스텝과 강렬한 펀치를 앞세우고 다가오던 그 때, 헤글러는 9차와 10차의 방어전을 역시 KO로 깔끔하게 정리해놓고 다음 상대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내 1985415일. 라스베가스 시저스 팰리스호텔 특설 링 위에서 두 사람이 마주보고 서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세상의 사람들은 이 경기를 앞두고 세기의 대결이라 불렀다. 헤글러의 열한 번째 방어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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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이들이 경이로운 챔피언 헤글러의 승리를 예상했지만, 헌즈의 우세를 점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그 판단의 가장 유력한 근거는 두 선수가 듀란을 맞아 싸운 상대 전적이었다. 즉 헤글러는 듀란과의 시합에서 특별한 화려함 없이 근근이(?) 판정승을 거두었지만 헌즈는 달랐다는 점이었다. 첫 회부터 다운을 당하며 불과 2회에 헌즈의 스트레이트를 정통으로 맞고 마치 나무가 쓰러지듯 앞으로 쿵 소리가 날만큼의 실신 상태로 뻗어버린 듀란. 그 경기의 KO 장면은 헌즈가 얼마나 강한 상대인지를 권투팬들에게 각인시키기에 충분했다.


링에 오르기 전, 양측의 입씨름도 적잖은 뉴스거리를 낳았다. 인터뷰와 같은 자리를 좋아하지 않고 가급적 말을 아끼던 헤글러. 그와 달리 헌즈는 매우 다변이자 달변이고 성격도 무척 쾌활한 스타일로 알려져 있다. 게임을 앞두고 CBS 방송국에서는 보스톤의 헤글러와 뉴욕의 헌즈를 이원으로 중계하며 인터뷰를 시도했다. 이때 헌즈는 헤글러에게 너의 대머리를 때려서 세계적으로 흔들어 주겠다(I’m gonna knock your bold head all over the world)’라는 식의 도발적인 발언으로 자극했다고 한다. 또한 자신의 목표는 미들급의 헤글러를 꺽은 후 라이트헤비급까지 챔피언에 올라 헤글러의 체급을 석권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무엇보다 듀란과의 상대 전적에서 자신이 월등히 앞섰기 때문에 이 경기는 자신이 당연히 이길 것이라며 상당한 자신감을 보였다.


헌즈의 도발적인 이야기를 들은 헤글러는, 자신이 진심으로 하고 싶었던 경기의 상대는 헌즈가 아닌 레너드였지만, 그가 은퇴해버려 무척 아쉽다는 말로 응대를 했다. 그리고 듀란을 실신시키는 헌즈의 경기 장면을 보고 굉장히 놀라웠으며 자신도 시합을 앞둔 지금 몹시 두렵고 떨린다는 말을 했다. 그러나 헤글러는 헌즈가 자신에게 막혀 결코 라이트헤비급까지 도달하지 못할 것이며 곧 벌어질 시합에서 헌즈의 모든 뼈를 다 부수어놓겠다는 발언을 한다. 그리고 이 말을 한다.

 

"나는 쿠에바스나 듀란이 아니다.

바다에서 놀던 물고기와 개천에서 노는 물고기의 차이를 증명해 보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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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글러 vs 헌즈


많은 전문가들은 둘의 경기를 이렇게 예상했다. '체력과 맷집은 헤글러 우세, 펀치력과 스피드는 헌즈 우세. 그러므로 헌즈는 초반부터 적극적으로 경기에 임할 것이며, 슬로우 스타터인 헤글러는 적당히 거리를 유지하며 착실하게 점수를 쌓다가 헌즈의 예봉이 꺾인 중반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공격에 나서게 될 것.'이라고. 정도의 차이는 있을망정 거의 모든 전문가들과 권투 팬들의 예상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1985415. 마침내 세기의 대결이 시작되었고 헤글러는 용수철이 튀듯 순식간에 헌즈에게로 달려들었다. 모두의 예상을 뒤엎은 과감하고 용맹스러운 필살의 공격이었다. 하지만 당황한 기색도 잠시, 헌즈는 오히려 바라던 상황이라는 듯 달려드는 헤글러를 향해 카운트 펀치로 응수하며 맞불을 놓았다. 경기가 시작된 지 불과 몇 초만에 링은 두 선수의 격렬한 난타전과 2만 명에 가까운 관중들이 쏟아내는 함성으로 순식간에 엄청난 열기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선제 공격을 하며 달려들기는 했어도 1회 초반 경기를 유리하게 이끈 건 오히려 헌즈였다. 맹렬하게 밀고 들어오는 헤글러를 헌즈는 두려워하지 않고 맞받아쳐 몇 번의 유효타를 성공시켰으며 이는 분명 헤글러를 주춤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에 굴할 헤글러와 그의 맷집이 아니었다. 순간적으로 주춤하는 모습을 보고 헌즈가 특유의 험악한 인상과 거친 주먹으로 거세게 달려들었지만 여전히 헤글러의 스텝은 전진과 전진을 거듭할 뿐이었다.

 

힘과 힘, 주먹과 주먹의 정면 대결이었다. 일찍이 본 적이 없는 마치 터져 나오는 용암과도 같은 뜨거운 합이었다. 공이 울리고 1회가 종료되자 많은 권투 팬들은 불과 3분 전에 비해 자신의 심장이 몇 배나 더 뜨거워져 있음을 느꼈다. 이 경기의 1회는 1985년 권투 잡지 <>지의 올해의 라운드로 뽑히기도 했다.

    

1회에 헌즈의 주무기인 트리플 잽과 스트레이트를 맞아가면서도 집중적으로 복부를 공략한 헤글러의 작전이 주효했을까? 2회를 맞아 다시 격돌한 헌즈는 예상대로 1회와 같은 빠른 스피드를 보여주지 못했다. 한층 자신감을 얻은 헤글러는 이전 회와 다를 바 없이 맹렬한 기세로 헌스를 향해 밀고 들어갔고 헌즈 역시 여전히 파괴력 강한 스트레이트를 내뻗으며 맞받아치는 모습이 연출되었다. 그러던 중 헌즈의 오른쪽 스트레이트가 헤글러의 안면에 정확히 들어가며 눈가가 찢어졌다. 송곳 같은 펀치였다. 왼눈 옆의 상처에서는 곧바로 피가 흘러내렸다.

    

권투에서 눈가에 입는 상처는 대단히 치명적이다. 더구나 부어오르며 피까지 흐르는 경우 상대의 동작을 제대로 보기 힘들기 때문에 힘겨운 상황에 처했다고 보면 된다. 그만큼 시야도 좁아지고 원근감도 떨어지며 상대의 주먹이 잘 안 보이는 상황에 조급해지고 나아가 두려워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걱정과 두려움은 구경꾼들의 것이었을 뿐, 피를 본 헤글러는 오히려 투지가 끓어오르는 듯 더욱 세차게 헌즈를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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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했던 헌즈는 뜻밖에 더 강해진 헤글러의 공격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고, 거리를 두기 위해 조금씩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결코 거리를 내줄 헤글러가 아니었다. 그는 계속해서 헌즈에게 머리를 맞댄 채 힘으로 밀어붙이며 끊임없이 펀치를 내밀었다. 적의 진영을 밀어붙이는 탱크와도 같았다. 2회의 종료공이 울렸다. 순식간에 동작을 멈추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무표정한 얼굴로 뚜벅뚜벅 거침없이 자신의 코너로 돌아가는 헤글러. 그와는 달리 헌즈의 다리와 표정은 이미 많이 지치고 풀린 듯 보였다.


3회가 시작되었다. 눈의 상처를 임시로 조치하고 나온 헤글러에게 심판은 반갑지 않은 이야기를 했다. 닥터의 진단에 따라 눈에 상처가 깊어 3회까지만 경기를 진행할 것이라는 말이었다. 그 말을 들은 헤글러는 계속 된 경기에서 성난 황소와 같이 헌즈에게 펀치를 내뻗었다. 끊임없이 날아드는 주먹 가운데 좌우 연타와 예의 그 점프하듯 날아 들어오는 오른쪽 휘어치기가 헌즈의 안면을 강타하자 그토록 강했던 디트로이트의 코브라는 그 자리에 허물어지고 말았다. 링에 쓰러진 채 눈동자마저 하얗게 돌아가버린 실신 직전의 헌즈는 헤글러 앞에서 몹시 무기력하고 나약한 모습이었다. 헤글러의 11번째 방어전은 권투 역사에 굵은 한 획을 긋게 될 경기였다. 전 세계 권투 팬들의 폭발적인 관심을 모았던 이 경기는 짧았지만 숨 가쁘게 전개된 한 편의 드라마와도 같았다.

 

권투가 무엇인지를 어떤 스포츠인지를 가장 잘 보여준 경기였기에 지금도 많은 이들의 입에 회자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이날 벌어진 헤글러와 헌즈의 대전은 남자 대 남자의 진짜 권투 경기였다. 3회도 끝마치지 못한 경기였지만 일찍이 볼 수 없었던 멋진 경기였다. 대표적인 권투 잡지인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는 이날의 경기를 올해의 경기로 선정했다.

 



'The Fight'

    

짧았으나 굵었고 또한 강렬했던 두 선수의 대결에 다른 화려한 수식어는 필요치 않았다. 권투계의 흥행사들은 이날의 경기를 이렇게 단 하나의 단어로 이름 붙였다. 지금까지도 수많은 권투 팬들이 최고의 경기로 꼽을 만큼 강렬한 인상을 남겨주었던 이날 두 선수의 경기 'The Fight', 이제 세계 권투 1인자의 자리에 마블러스 마빈 헤글러가 올랐음을 공표하는 이른바 대관식이었다. 헌즈와 벌였던 불꽃같은 경기와 KO 승은 미들급의 독재자 헤글러를 전설의 중량급 복서인 카를로스 몬존이나 슈거레이 로빈슨의 위치에까지 끌어올리기에 이른다. 드디어 경이로운 챔피언 마빈 헤글러의 시대였다.

    

이 날의 경기 뒤, 헌즈는 전화를 걸어 헤글러에게


"아쉽게도 내가 지기는 했지만 그날 우리의 경기는 정말 멋지지 않았느냐?

앞으로 미들급은 나에게 맡기고 너는 체급을 올리는 게 어때?"


라며 농담을 건넸고 이에 대해 헤글러는


"그래, 나쁘지 않은 경기였지. 하지만 체급은 네가 올려."


하고 맞장구를 쳐주었다고 한다.

 

또, 훗날 TV 특집 프로그램에 출연해 헤글러는 그날의 경기를 회상하며


"나에게는 가장 인상적인 기억으로 남아 있는 전성기 시절의 경기"

"헌즈의 거친 입담에 처음에는 그를 싫어했지만 나중에는 그를 진심으로 좋아하게 되었다."


라고 고백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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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즈와의 일전이 끝난 후 헤글러에게는 더 이상 도전해 오는 선수가 없었다. 도저히 넘을 수 없는 벽이라는 생각에 도전 자격이 주어지는 상위 랭킹의 선수들조차도 이제는 그에게 도전권을 내밀지 않았다. 그리고 이미 더는 그럴만한 상대조차 그의 체급에 남아 있지 않았다. 무엇인가 새로운 이벤트를 찾아 고민하던 링 주변의 흥행사들은 여러 가지 조합의 카드를 뒤적거리다 기가 막힌 한 장의 카드를 뽑아낸다. 그것은 아프리카의 우간다에서 온 야수 존 무가비였다. 당시 둘의 일전이 정해지고나자 하루가 멀다 하고 스포츠 신문과 방송에서 호들갑스럽게 관련 뉴스를 쏟아내던 기억이 난다.

    

당시에 발표된 무가비의 통산 전적은 2626(26KO)이었다. 전승도 대단하지만 모든 승리를 KO로 거두었다는 사실은 더욱 경악스러웠다. 비록 적잖은 전문가들이 후일담을 통해 당시의 무가비가 지나치게 포장된 선수였으며 최고 수준의 선수는 아니었다는 의견을 내놓기도 했지만 이미 전 세계의 권투 팬들은 후끈 달아오른 상태였다. 언론의 엄청난 호들갑에도 불구하고 도박사들의 예상은 압도적이었다. 그들이 예상한 헤글러의 승률은 90% 이상이었다.

 

1986310, 헤글러와 무가비의 대결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공이 울렸다. 의도된 작전이었을까? 무가비는 그렇잖아도 곱지 않은 인상을 더욱 험악하게 만들며 헤글러에게 돌진해왔다. 수많은 권투 팬들은 이번에는 무가비를 맞아 과연 어떤 모습을 헤글러가 보여줄 것인지 기대하며 TV 화면 속으로 빠져들었다.

 

무가비는 1년여 전에 벌어졌던 헤글러와 헌즈의 경기를 보면서 많은 연구를 했고, 그 결과 몇 가지 대비책을 갖고 시합에 임해왔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결코 헤글러와 정면 승부를 펼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어쩌면 헌즈전처럼, 피가 튀고 손에 땀을 쥐는 이른바 모든 팬들이 좋아할만한 익사이팅한 경기를 하게 될지는 모르지만, 결코 승리를 가져다 줄 수는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상황을 살피며 전면적인 공격을 자제한 채 변칙적인 스타일로 경기를 풀어가는 무가비. 상대가 그러거나 말거나 자신이 준비한 방식대로 묵묵히 앞으로 나아가며 부지런히 주먹을 내뻗는 헤글러. 경기 초반 헤글러는 의외로 고전한다. 무가비의 변칙 스타일이 아직은 통하고 있기도 했고 아무래도 KO 100%를 뽐내는 무가비의 주먹을 의식하지 않을 수는 없잖은가? 천하의 맷집과 내구력을 가진 헤글러라 해도 무가비의 강펀치는 커다란 경계의 대상이었다.

 

그렇게 인내하고 참으며 조심스레 풀어가던 경기가 중반으로 접어들어 6회가 되고 7회가 되자 마침내 헤글러는 상대에 대한 모든 파악이 완료되었다는 듯 무가비를 몰아붙이기 시작한다. 7회 이후부터는 일방적으로 경기가 흘러간다. 변칙이든 뭐든 링 위에서 계속해 도망을 다니지 않는 이상 헤글러의 공격을 감당할 수는 없었다. 가드를 피해 파고드는 묵직한 주먹에 다리가 풀려가던 무가비는 결국 11회에 연이은 카운터 펀치를 안면에 허용하며 링 바닥에 쓰러지고 만다. 아프리카의 야수 사냥에 성공하는 순간이었다. 그의 열두 번째 방어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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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주먹에 맞고 성한 자 누구인가

 

결국 헤글러의 KO 승으로 끝이 나긴 했지만 일방적일 거라는 도박사와 전문가들의 예상과는 달리 초반에 의외로 고전을 했던 경기였다. 두 선수 모두 경기 후 혈뇨를 볼 정도로 힘든 경기를 했는데, 그만큼 무가비가 강적이었다는 평가도 있었지만, 한편에서는 어느새 서른한 살이 된 헤글러의 나이에 주목하며, 그도 이제 다된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들도 본격적으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실제로 열두 번째 방어전이었던 무가비와의 경기를 마친 이후 헤글러에게는 더 이상 이루고 싶은 목표가 남아 있지 않았다.

 



헤글러의 마지막 경기-슈가레이 레너드와의 대결

 

미들급 지존의 자리에 오른 지도 어느새 8. 절대 독재자 헤글러에게도 어느새 떠나야 할 때가 가까워오고 있었다. 이런 저런 이유로 지명 방어전의 시한을 넘기며 WBAIBF의 챔피언 밸트마저 박탈당한 헤글러. 카를로스 몬존이 세운 14차 방어 기록을 깨고 신기록을 작성하고 또한 체급을 올려 새로운 챔피언의 자리에 올라보라는 주변의 권유도 많았지만 그로서는 큰 의미를 갖기 힘들었다. 흥행사와 팬들은 앞으로도 계속 그의 경이적인 경기를 보고 싶어 했지만 더 이상 자신을 자극하는 도전자를 찾지 못한 헤글러는 조금씩 은퇴를 고려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직 그에게는 꼭 해야 할 일 한 가지가 남아 있었다

    

자신이 누리던 엄청난 인기와 모든 권투 팬들의 관심을 새로운 1인자 헤글러가 가져가는 것에 자극을 받아서였을까? 1982년에 망막 부상을 이유로 은퇴를 선언했던 슈가레이 레너드는 2년 뒤인 1984년에 링으로 복귀한다. 헤글러에게 쏟아지는 스포트라이트를 다시 자신에게 돌려보고자 선택한 선수로의 복귀는 그러나 그리 신통한 결과를 가져다주지 못했다.

 

5월에 치른 복귀전에서 무명의 상대에게 다운을 빼앗기는 등 예전만 못한 자신을 확인한 그는 다시 은퇴 상태로 들어간다. 하지만 링을 떠난 레너드는 좀처럼 마음을 잡지 못한 채 도박과 주색잡기에 빠져 삶을 낭비하며 살아간다. 거기에 마약 중독까지.

 

그러던 중 레너드는 무가비를 상대로 싸우는 헤글러를 지켜보며, 그가 어쩌면 자신에게 새로운 인생을 다시 시작하게 만들어줄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한다. 그것은 바로 헤글러와 자신의 대결이었다. 그리고 레너드는 헤글러가 이미 예전과 같이 강하지 않음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나이가 들고 더 이상 상대할 적수가 없자 이제 더는 발톱도 이빨도 전성기의 그것에 못 미치는 헤글러의 상태를 눈치 챈 것이었다. 그는 헤글러와의 대결을 준비하며 서서히 몸을 만들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듬해 레너드는 헤글러와의 대결을 조건으로 은퇴를 철회한다고 발표했다.(무슨 서태지냐?) 전 세계의 권투 팬들은 오랜만에 다시 한 번 후끈 달아오르고 있었다. 그들 모두는 누가 진정한 최고인지를 어서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어 했다.  

 

레너드는 여러 가지 면에서 철저하게 준비한다. 3년이라는 길고도 지루한 양측의 협상 과정에서 레너드측은, 평균보다 넓은 링의 면적(24피트×4), 체급 평균보다 두꺼운 글러브(12온스, 미들급 평균은 8~10온스), 15회가 아닌 12회 경기 등의 조건을 따냈다. 모두가 레너드에게 유리한 조건들이었다. 대신 레너드는 헤글러의 1,200만 달러보다 적은 1,100만 달러를 받기로 했다. 헤글러로서는 위의 모든 것을 다 양보한다고 해도 자신이 경기에서 이기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을 거라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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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의 대결 헤글러vs레너드

 

198746. 라스베가스의 시저스 펠리스호텔 특설 링에서 경기가 벌어졌다. 헤글러가 WBAIBF의 타이틀을 박탈당한 탓에 WBC 미들급 타이틀만을 놓고 벌어지는 경기였다. 전 세계 75개 나라에 생중계가 되었고 약 만 오천 명의 관중이 현장에서 경기를 지켜봤으며 입장 수입이 800만 달러에 달했다. 대전료나 입장 수입에서 모두 역대 최고 금액인 것은 물론이요, 헤글러와 헌즈의 뜨거웠던 대결 'The Fight' 에서 이름을 다와 이번 대결을‘The Super Fight’라고 불렀다.


미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뜨거운 관심을 받았던 이 경기에 대해서는 그다지 할 말이 많지 않다. 물론 그것은 헤글러의 패배로 경기가 끝난 탓도 있지만 납득하기 쉽지 않은 다른 여러 가지 이유들 때문이기도 하다. 결과부터 말하자면, 이날 헤글러는 레너드에게 2-1로 판정패 했다. 이날의 시합은 <>지에 의해 1987최고의 시합에 선정되기도 했고 또한 최고의 이변에 선정되기도 했다.


다음은 세 명의 부심이 양 선수에게 부여한 점수와 그 이유이다.


"레너드가 더 많은 펀치를 적중시켰고, 더 영리했다. 그는 정말 대단했다.

레너드는 헤글러의 수많은 펀치를 빗나가게 만들었고 카운터를 성공시켰다.

레너드가 주먹 싸움에서 이겼고, 사람들은 그를 마블러스 슈가레이 레너드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복싱은 호신(자기 방어)의 예술이다. 레너드가 주도권을 행사했으며 매우 빨랐고 지능적이었다.

그는 헤글러가 자신을 쫓아다니게 만들었으며 경기를 지배했다." (조조 구에라-레너드 승)

"헤글러가 공격적이었던 것은 확실한데, 효율적이지는 않았다.

그는 레너드를 추격하다가 얻어맞고 추격하다 얻어맞았다.

게다가 경기에서 가장 강한 펀치는 레너드의 손에서 나왔다." (데이브 모레티-레너드 승) 

"경기에서 제대로 싸운 쪽은 헤글러다.

주심이었던 리처드 스틸은 레너드에게 거의 매 라운드 당 한 번씩 홀딩에 대한 주의를 주었다.

레너드는 도망가고, 붙잡고, 늘어지는 운영을 보였다.

그것이 그가 해야 할 일이었겠지만, 그것으로 점수를 딸 수는 없다." (루 필리포-헤글러 승)


그리고 다음은 경기 후 판정에 불만을 갖고 이것은 헤글러가 이긴 경기라고 주장했던, 영국의 복싱 해설자이며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의 칼럼니스트였던 휴 메클베니의 의견이다.


"레너드는 경기 전 헤글러의 시각을 왜곡할 만한 스피드를 보여주겠다고 장담했지만,

그가 왜곡한 것은 부심단의 판단이었다.

그는 신중하게 계산 된 콤비네이션과 몇 개의 눈부신 속공으로 라운드를 훔쳤다.

그는 자신의 속도를 과장해서 보여주는 연속기를 구사했지만,

상당수가 헤글러의 팔과 글러브에 걸렸다."


휴 메클베니의 의견에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의 상당 부분을 기대고 싶다. 나 역시 그날의 경기에서 헤글러가 이겼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레너드는 헤글러에게 이길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았고, 경기에서 자신의 능력 대부분을 달리기에 쏟았으므로. 하지만 헤글러가 졌다는 판정은 나로서는 더욱 받아들이기 힘들다.

 

레너드는 그날 진정한 의미의 권투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 변하지 않는 나의 생각이다. 나의 판단으로는 그 경기는 무승부가 되었어야 옳다. 어쩌면 그렇게만 되었어도 흥행사들과 쇼비즈니스의 상술이 계획한 대로 두 선수의 재대결이 성사되었을지도 모른다




아듀, 헤글러

 

실제 헤글러는 어이없는 판정 결과에 불만을 품고 당장이라도 재대결을 갖자고 이번에야말로 결코 판정으로 가지 못하게 만들어주겠다고 울분을 터뜨렸다. 그러나 영악한 레너드는 딴청을 하며 곧바로 다시 은퇴를 선언하고 만다. 결국 레너드와의 시합을 마지막으로 헤글러는 깨끗하게 사각의 링을 떠났다. 쇼비즈니스의 비열한 상술과 흥행사들의 지저분한 술책에 더이상 놀아나고 싶지는 않다는 마지막 말과 함께였다은퇴를 발표하는 헤글러의 양 옆에는 그가 권투를 시작할 때부터 선수 시절 내내 함께 해 왔던 페트로넬리 체육관의 패트와 구디 형제 그리고 늙은 프로모터 립 바렌치가 함께 서 있었다.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이후로도 그의 컴백을 원하는 수많은 러브콜이 줄을 이었고 구체적인 금액까지 제시되며 레너드나 헌즈와의 재대결이 타진되기도 했으나 그는 끝내 자신과의 약속을 지켰다. 물러나야 할 때를 알고 떠나는 진정한 남자의 모습은 그런 것이 아닐까?

 

링 위에서 가장 정직했고 링 위에 있을 때 가장 돋보였던 선수. 진정한 강함은 링 위에서 두 주먹으로 겨루는 것이라는 걸 몸으로 보여준 선수. 오랜 시절 강호를 떠돌며 고배를 마시다 마침내 챔피언이 되었고, 8년의 철권통치 기간을 통해서 세계 미들급의 최강자임을 입증해 보인 강한 남자. 그는 순수하고 정직하게 강했던 선수였다권투라는 스포츠가 왜 존재하는지 권투를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를 팬들에게 알려주었다. 그리고 그는 미련 없이 떠나갔다

 

1993년 세계복싱기구에 의해 마블러스 마빈 헤글러의 이름은 복싱 명에의 전당에 올랐다. 6762(52KO) 23, 이것이 카를로스 몬존과 함께 세계 미들급의 역사를 양분한 강한 남자 마블러스 마빈 헤글러가 남긴 진짜 권투의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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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듀, 헤글러

 





아직은투아웃


편집: 딴지일보 챙타쿠



 

참고자료

http://sports.media.daum.net/sports/general/newsview?newsId=20120713091908703

http://c.hani.co.kr/hantoma/1102066

http://blog.daum.net/blockmachine/13333992

http://www.geojesimin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245

http://www.ilbe.com/2161295014

http://lomangce.tistory.com/m/post/399

http://news.tf.co.kr/read/sports/1364886.htm

http://blog.naver.com/hobbyplace/220172191982

http://www.mijusearch.com/forum/column.php?t_id=6&point=1&w_id=276&from=af

http://blog.donga.com/aschuram/archives/567

http://syba.tistory.com/160

http://lomangce.tistory.com/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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