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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의 국제정치에 명확한 방향이 생겼다.


‘대서양에서 태평양으로’


이제 세계를 움직이는 힘은 대서양의 유럽이 아니라 태평양의 미국과 일본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이미 미국과 일본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열강이 됐고, 이들은 세계 5대 강국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문제는 미국과 일본이 서로를 ‘가상적국’으로 상정해 놓고 서로를 노려보고 있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둘의 힘 차이는 엄청나다. 미국의 상대가 되지 못한 일본은 결국 미국의 초대에 응한다.



각자의 생각이 하나로 목적으로 뭉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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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딩(Warren Gamaliel Harding) 대통령의 순진한(?!) 생각.


“우리도 전함을 만들지 않고 다른 나라도 전함을 만들지 않는다면, 건함경쟁이 일어날 이유는 없을 것이다. 건함경쟁이 없다면 전쟁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고, 전 세계는 평화로워 질 것이다.”


놀라운 사실은 이 ‘망상’이 실제로 일어났다는 것이다. 국제정치에서 이런 순진한 생각은 망상에 가깝다. 국제정치의 절대적이며 유일한 논리는 ‘힘’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워싱턴 회의는 ‘힘’과 ‘균형’이 절묘하게 맞아 떨어진 성공적인 정치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시작은 어설픈 이상주의였지만 타이밍이 기가 막혔다.


미국과 영국, 일본에겐 각자의 셈법과 사정이 있었고, 이 사정이 절묘하게 맞아 떨어졌다. 미국은 ‘무리’를 하면 건함경쟁에서 주도권을 쥘 수 있는 힘과 능력이 있었지만, 건국 이래로 고수해 온 ‘고립주의’ 노선을 지켜야 한다는 명분이 있었다.


하딩 대통령이 대통령 선거 당시 내놓은 공약인 ‘정상정치로의 복귀’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 전쟁에 뛰어든 우드로 윌슨의 정치를 ‘비정상’으로 보고 한 말이었다. 하딩은 일시적인 비정상을 해소하고, 하루빨리 미국을 예전의 ‘정상적인 모습’으로 바꿔놓아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미국은 국제사회에 개입해서도, 전쟁에 뛰어들어서도 안 된다고 말이다.


영국의 경우를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울고 싶은데 뺨 때려준 경우’


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재정은 파탄 직전이었고, 기존의 함대를 유지하기에도 버거웠다. 이런 상황에서 건함경쟁에 뛰어드는 것은 무리였다. 패권을 포기하고 국제사회의 2선으로 물러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지만 대영제국의 자존심을 쉽게 포기할 수 없었다. 이때 날아온 미국의 제안은 복음과도 같았다. 지켜야 할 식민지는 그대로인데, 재정은 파탄 났고, 건함경쟁에 뛰어들 여력도 없는데, 대영제국의 자존심을 지켜줄 기회가 찾아 온 것이다.


미국과 영국이 각자의 계산과 생각으로 ‘워싱턴 체제’에 참여하려고 한 때, 일본은 이 둘과 달리 복잡한 셈을 하고 있었다.


만약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에 관한 제안을 1922년이 아니라 1925년 이후에 받았다면 어땠을까? 혹은 그 이전, 그러니까 다이쇼 데모크라시(大正 デモクラシー) 이전에 제안을 받았다면 일본은 거절하거나 거절은 아니더라도 강경하게 협상에 임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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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 조약에 찬성했던 당시 일본의 총리 하라 타카시


하지만 그 때는 다이쇼 데모크라시가 일어난 후였다. 일본인들은 민주주의의 훈풍을 받고 있었고, 일본 정부도 이전까지와는 달리 최대한 군부의 입김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했다. 이 때 ‘워싱턴 회의’ 제안은 가뭄의 단비와도 같았다.


“국가 재정의 32%를 차지하는 건함 예산을 줄일 수 있다!”


재정 건전화를 위한 희소식이었다. 단순한 돈의 문제가 아니었다. 메이지 유신 이후로 확대일로를 걸었던 일본 군부의 움직임에 제동을 걸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내각을 압박해 예산을 뽑아내고, 군비를 확충해 전쟁에 뛰어들고, 전쟁의 발발과 승리로 발언권을 높여 내각을 장악하거나 압박하는 이 빈곤의 악순환을 끊어낼 수 있는 기회였다.


군부의 생각과 내각의 생각에 미묘한 차이가 있는 상황에서 일본은 군축회담에 참가하기로 결정한다.



전제


미국은 일본은 싫어했다. 러일전쟁 직후 만주와 중국에 취한 일본의 행태에 미국은 예민하게 반응을 했고, 이후에도 계속 ‘불만’을 쌓아나갔다.


이제 세계 패권은 대서양을 떠나 태평양으로 향하고 있었고, 태평양에서 패권을 쥐고 있는 열강은 미국과 일본이었다. 한 우리에 맹수 두 마리가 들어가 있다면 서열 정리를 해야 하지 않을까? 아시아의 새로운 질서를 미국과 일본이 결정짓는 상황이 도래했다. 물론 미국이 일본보다 위에 있다는 건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사실’이었지만, 미국이 일본을 불편해 하고 있다면 상황 정리가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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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 해군 군축회담의 대전제가 이때 등장한다. 당시 미국은 일본에 대해 몇 가지 전제조건을 달았다. 크게 두 가지로 압축할 수 있는데, 하나는 일본이 1차 세계대전 중에 획득한 ‘영토’에 대한 조정이었다.


“만주에서 일본의 기득권은 어느 정도 인정한다. 그러나 21개조 요구로 획득한 산동성의 철도와 구독일령 조차지는 중국에 반환해야 한다.”


일본으로서는 억울한 이야기지만, 현실적으로 ‘힘의 논리’를 부정할 수 없었다.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영국의 손에 있던 세계의 패권이 이제 미국으로 넘어가려고 하는 상황이었고, 일본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두 번째 전제조건은 미국의 ‘안보’와 직결된 문제였다.


영일동맹의 파기


였다. 어쩌면 워싱턴 해군 군축 조약의 성립조건일지도 모르는 사안이었다. 아니, 핵심이었다. 미국은 영국과 일본이 손을 잡고 대서양과 태평양에서 동시에 쳐들어오는 최악의 상황을 걱정하고 있었다. 지금의 시각으로는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당시엔 ‘꽤’ 현실적이고 심각했다.


미국의 압박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강했다. 미국의 이런 태도를 예민하다고만 볼 수는 없다. 2차 영일동맹 때까지만 하더라도 미국이 어느 정도 수긍할 수 있는 협약이었다. 러시아를 견제해야 하는 영국과 러시아를 넘어야지만 조선과 만주로 향할 수 있는 일본의 ‘서로간의 필요’에 의해 한 동맹이었기 때문에. 제2차 영일동맹 성립 시기도 러일전쟁이 거의 끝나가던 1905년 8월 12일이었기에 형식상, 외교상으로 봐도 무난했다. 문제는 제3차 영일동맹이었다.


시대가 바뀌었다. 제2차 영일동맹 까지만 하더라도 ‘극동에서의 對 러시아 방어책’이라는 생각으로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던 미국이지만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의 행보가 미국의 심사를 뒤틀리게 했다. 만주에 대한 미국의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일본은 본격적으로 만주를 점령할 태세를 보였고, 일본은 어느새 ‘제국주의의 막차를 탄 열강’이 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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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인 줄 알았던 일본이 호랑이 흉내를 내기 시작했다. 일본은 하루가 다르게 군비를 확충했고, 어느새 미국을 ‘가상적국’으로 상정해 해군을 증강해 나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영일동맹에 나와 있는 문구가 신경 쓰인 거다.


“타방이 제3국과 교전한 경우에는 즉시 참전의 의무를 진다.”


여기서 제3국은 누구일까? 2차 영일동맹까지 제3국은 러시아였지만 이게 미국이 되지 말란 법은 없다. 1911년 7월 13일에 성립된 제3차 영일동맹을 보며 미국은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영국이 미국에 대한 배려를 잊은 건 아니었다. 예의 ‘제3국’에서 미국을 사실상 제외시켰고, 동맹의 목표를 러시아에서 ‘독일’로 바꿔버린다(이 때문에 제1차 세계대전 때 일본이 참전한 것이다).


영국의 입장에선 영일동맹의 국제정치적인 효용이 다 됐다고 할 수 있었다. 1, 2차 영일동맹 당시 영국의 적이었던 러시아는 러일전쟁과 러시아 혁명으로 인해 이제 더 이상 국제사회로 나오기 힘들어 보였고, 3차 영일동맹 당시 영국의 적이었던 독일은 이미 무릎을 꿇은 상황이었다.


만약 1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이 ‘동맹국답게’ 영국을 도왔다면 ‘의리’란 걸 생각해 볼 수 있겠지만, 일본은 유럽 본토로의 참전은 회피한 채 아시아에서 자신의 이권을 확보하기에 급급했다. 남의 불행을 자신의 이익으로 생각하는 사람 앞에서 ‘의리’를 말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게다가 이미 재정파탄 일보직전까지 몰린 영국이 전쟁국가 일본의 애꿎은 전쟁에 휘말릴 요소는 하루빨리 제거하는 게 좋았다.


영국에게 ‘영일동맹’은 더 이상 효용가치가 없었다. 그럼 일본은 어떠했을까?



제국주의로 갈 수 있었던 열쇠 ‘영일동맹’


영일동맹이 없었다면 일본은 제국주의의 막차를 탈 수 있었을까? 불가능했을 것이다. 세계의 패권 국가인 영국의 ‘뒷배’ 덕분에 일본은 러시아와의 싸움에서 이길 수 있었고, 조선을 점령하고 만주로 진출하는 동안 세계열강들의 ‘시비’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 거기다 일본은 세계 3위 해군력으로 발돋움 할 수 있는 토대도 마련했다.


일본 해군의 체제와 전술전략, 전력 모두 세계 최강을 자랑했던 영국 해군의 것을 따랐다. 러일전쟁 당시 최신예 영국 군함을 수입했고, 최신예 순양전함인 라이언을 기반으로 한 공고급 순양전함을 살 수 있었다(오늘날로 치면 미국의 F-22를 산 것이다). 태평양 전쟁의 핵심 요소가 되는 항공모함의 기술을 얻은 것도 영일동맹 덕분이었다. 이 부분이 무서운 것이 영국이 단순히 일본에게 ‘군함’을 판 게 아니라 기술과 운용 노하우까지 함께 넘겼다는 점이다. 이때 넘어간 기술은 이후 일본 해군이 찍어낸 수많은 전함과 항공모함 등의 모태가 됐다.


한마디로 말해, 일본은 영일동맹을 통해 일본 해군의 모든 것을 얻었고, 이를 통해 태평양 전쟁까지 치를 수 있었다. 메이지 유신 이후 불과 60여년 만에 세계 3위의 해군력을 구축한 일본 해군의 뒤에는 영국이 있었다. 이런 영일동맹을 두고 미국이 인상을 찌푸리는 건 너무도 당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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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정치적으로 봤을 때, 1905년 러일전쟁이 끝나고 나서 1923년 워싱턴 체제가 본격적으로 가동될 때까지 일본은 몇 번의 고비를 넘어야 했다. 그 고비마다 일본은 영국의 뒷배로 버텨냈다. 만주로의 진출과 21개조 요구와 같이 ‘무리한 상황’이 계속 벌어질 때 미국은 몇 번이나 입술을 깨물어야 했는데, 이때마다 영일동맹이 미국을 제어했다. 동맹 자체만으로 미국을 견제할 수 있었고, 그 덕분에 일본은 제국주의를 완성할 수 있었다. 


이제 일본은 인큐베이터에서 나와 본격적인 홀로서기를 강요받는다. 이렇게 말하면 일본에게 가혹한 처사라 생각할 수 있겠지만, 이미 이때의 일본은 다 자란 청년과도 같았다. 영일동맹을 통해 제국주의로 성장할 수 있는 시간을 벌었고, 그 사이에 패권을 위한 해군력을 완성할 수 있었다. 덤으로 국제정세 속에서 길을 잃지 않는 ‘감각’도 얻었다. 그 대가로 일본이 영국에게 제공한 건 ‘충성’ 뿐이었다.


영일동맹을 심하게 표현하자면,


‘일본이 영국의 등에 칼을 꽂지 않는 한 영국이 일본의 후원자가 돼 주는 조약’


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영국과 전쟁을 결심할 수 있는 나라가 몇이나 될까? 그나마도 일본과는 아주 먼, 지구 반 바퀴 거리에 있는 유럽대륙에 속해 있는 나라들이다.


일본의 경우는 달랐다. 식민지 쟁탈을 위한 바람막이로 영국을 활용했다. 그나마 영국을 도와야 했던 제1차 세계대전 당시에도 일본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만 독일을 공격했다. 이제 시대는 바뀌었고, 영일동맹은 그 가치가 사라졌다.


일본은 진정한 홀로서기를 해야만 했다.





참고자료


1. 전쟁국가 일본/ 살림출판사/ 이성환
2. 호호당 선생의 ‘프리스타일’
3. 세계전쟁사/ 육군사관학교 전사학과/ 황금알
4. 러일전쟁과 을사보호조약/ 이북스펍/ 이윤섭
5. 조선역사 바로잡기/ 가람기획/ 이상태
6. 다시 쓰는 한국근대사/ 평단문화사/ 이윤섭
7. 대본영의 참모들/ 나남/ 위텐런 지음, 박윤식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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