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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03. 19. 목요일

타데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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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디미르 푸틴: 푸간지 이미지와 실제]






지난 시간 푸틴의 젊은 시절을 잠깐 들여다봤다. 당시의 뚱뚱하고, 술 좋아하고, 마초적인 오죽하면 마누라도 북어처럼 패대는 그와, 지금의 차갑고 무섭지만 만능 스포츠 맨 독재자의 이미지. 무엇이 진정한 푸틴의 모습인지 조금 더 깊이 들어가 보겠다.


KGB요원이 되기 전 그가 꿈꾸던 비밀 요원의 삶과 동독 시절 임무 사이의 간극은 컸다. 푸틴은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뚱뚱하고 게으르고 자신의 임무에 환멸을 느꼈던 푸틴은 우울했다. 영화 따위에서 보는 이미지와 달리 실제 정보기관 요원의 임무가 그렇게 스릴 넘치지 않는다는 것쯤은 누구나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정보기관의 장이 원하는 사람을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 댓글이나 달며 저질스러운 욕 따위나 게시판에 끄적이고 있다면 <조국과 나라의 무궁한 영광을 위해> 요원이 된 그들의 삶이 얼마나 한심하게 느껴지겠는가. (당시의 푸틴을 생각하면 현 한국 요원들의 고충도 쬐~끔은 이해가 간다만…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번에) 술 좋아하고, 여자 좋아하고, 제 일은 억지로 억지로 하는 사람. 그런 푸틴이 독일에 살던 시절의 푸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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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날고싶다… 푸화~




어린이 푸틴


많은 독재자, 아니 정치인은 자신의 삶이 힘들었다고 회상한다. 아니 꼭 정치인뿐일까? 푸틴도 다르지 않다. '내가 왕년에…'으로 시작하는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푸틴은 어린 시절부터 비밀요원의 삶을 꿈꿨다. 레닌그라드(Ленингра́дская о́бласть)에 살던 당시 15살짜리 꼬마 푸틴은 사회주의 선전 영화 <방패와 칼(Щит и меч)>을 너무도 감명 깊게 보고 미래의 청사진을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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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는 단 한 명의 요원이 소련을 나치로부터 구한다는 내용이 있다.



푸틴이 원하던 스파이로서의 삶은 그런 삶이었다. 마치 영화 속의 영웅처럼 비밀스럽게 눈에 띄지 않게 하지만 멋지게, 쿨하게...

이후 어린 푸틴의 책상 위엔 항상 KGB 창시자의 흉상이 놓여 있었다. 이 얼마나 어린 소년에게 어울리지 않는 짓인가. (만약 필자의 아들이 책상 위에 원세훈의 흉상을 올려놓는다면 우선 아들의 정신 상태부터 심각하게 고민해볼 것 같다. 물론 KGB 창시자와 원세훈을 그렇게 비교할 수는 없으므로 김종필 흉상으로 하자. 어느 흉상이든 아들의 정신 건강을 심각하게 걱정할 일이다.) 친구들과 모여 떡볶이나 먹으러 다닐 나이에 KGB 창시자의 흉상을 세워 놓았다는 것은 푸틴이 얼마나 정보기관의 요원이 되고 싶어 했는지를 증명한다. 냉전 시대 KGB는 최고의 실력과 능력을 겸비한 자를 위한 자리밖에 없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치열하면 치열할수록 KGB에 대한 푸틴의 사랑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 마침내 푸틴은 레닌그라드에 위치한 KGB 관사를 직접 찾아갔다. 그리고는 자신의 이력서를 내밀며 “꼭 가고 싶습니다”라는 패기를 뽐낸다. 


하지만 KGB가 동네 구멍가게도 아니고 그런 사람들을 뽑아줄 리 만무했다. KGB에서 돌아온 대답은 간단했다.


“애들은 가라.”


사실 푸틴은 트라우마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그에게는 원래 두 명의 형이 있었다. 하지만 푸틴은 형들의 얼굴을 거의 본 적이 없다. 한 명은 태어난 지 며칠 되지 않아 죽었고 또 다른 형은 나치가 레닌그라드를 공격했을 때 세상을 떠났다. 1941년부터 1944년까지 나치의 공격으로 레닌그라드에서만 약 100만 명의 시민이 죽었으니 어린 푸틴의 형이 죽은 것이 특별한 사건은 아니었다. 

하지만 당시 그곳의 사람들에게 이 시간은 너무나 힘든 시간이었음은 틀림없다. 꼭 형들의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어린이가 자라며 길에 널려있는 시체 더미를 매일 본다는 것은, 그의 삶에 여러 방향으로 큰 영향을 끼쳤다는 점을 부인하기 힘들 것이다. 전쟁으로 100만 명의 주민을 잃어버렸다는 것, 이러한 트라우마는 참호 속에, 방호벽 뒤에 자신의 모든 집기들을 옮겨놓고 살도록 만들었다. 

사춘기 시절 푸틴은 여학생들에게 외모는 귀엽지만, 부끄럼 많은 아이였다. 하지만 남자아이들에게 기억되는 푸틴은 사뭇 다른 이미지다. 레닌그라드의 뒷골목은 '큰 놈, 센 놈, 오래가는 놈'만 살아남는 정글이었다. 하지만 고작 170cm밖에 안되는 푸틴이 이러한 환경에서 살아남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170cm가 어때서? 참! 러시아지.) 그런 정글에서 살아남기 위해 푸틴은 유도를 배웠다. 상대의 힘을 역이용해 상대를 넘기는 기술이 아닌 예술을 배웠고, 유도의 이런 점이 어린 푸틴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약한 놈은 처맞는다”는 레닌그라드의 뒷골목에서 푸틴은 그렇게 살아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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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자란 푸틴은 강했다. 당시 푸틴에게 싸움을 걸었던 소년 중 십중팔구는 그의 유도 기술 앞에 맥을 못췄다고 한다. 어린 푸틴은 남달랐다. 보통 아이들 싸움에서 코피 나면 진거다. 울어도 진거다. 하지만 푸틴은 그렇지 않았다. 푸틴은 때리고 또 때렸다. 계속해서 때렸다. 푸틴에게 덤볐다간 누구도 살아남지 못했다.


레닌그라드의 뒷골목을 평정하고 유유히 떠난 푸틴은 공부에 매진했고 머리도 좋은지 법대에 진학했다. 하지만 그의 마음은 항상 KGB에 있었고, 다시 한 번 KGB에 지원한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꿈에 그리던 요원이 된다. 모스크바 루브양카 (Лубянка) KGB 본부에서 교육을 받은 그의 요원명(?)은 나방이었다. 회색빛에, 늘 그늘에 숨어있지만 닥치는 대로 먹어치우는 나방의 이미지. 항상 의심하고 주시하라는 그의 좌우명이 생긴 것도 이 시기라고 한다. 첩보기관에 있을 때도 훗날 정치에 진출해서도 그의 좌우명은 유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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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뭔가 영웅 이야기를 듣는 것도 아니고 뭔가 좀 TV(북)조선 같은 느낌이 난다.



맞다. 대부분의 이야기는 미디어를 통해 널리 알려진 푸틴의 이미지다. 그것도 완벽히 통제되어 있는 러시아 언론을 통해서 말이다. 결코 약점을 보이지 않는 싸나이. 전략적으로 항상 성공하고 또 모두에게 성공을 약속하는 퍼팩트 정치인. 그런 푸틴이 바로 푸틴이 원하는 푸간지의 모습인 것이다. 물론 모두가 이러한 푸틴의 이야기를 믿는 것은 아니다. 러시아 빨갱이 아니 파랭이들은 이러한 푸틴의 삶에 대해 딴지를 건다.

다른 각도에서 그의 삶을 보자. 푸틴은 나름 (상대적으로) 행복한 가정에서 자라났다. 그의 형들은 죽었지만 100만 명이 죽었던 전쟁에서 양 부모 모두 살아남았다. 레닌그라드 전쟁 당시 이러한 가정을 찾는 일이 쉽지 않을 정도로 사망자가 많았다고 한다. 늦둥이로 태어난 푸틴의 가족은 전쟁이 휩쓸고 지나간 지역임을 감안할 때 상대적으로 부유한 편에 속했다. 푸틴의 가족은 큰 방에서 살았으며 전화기도 가지고 있었고, 도시 주변에 별장도 소유하고 있었다. 그렇게 자란 그는 지역의 가장 좋은 대학 법학과에 진학했고, 결국 그가 꿈에도 그리던 KGB 요원도 되었다.

이런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거친 환경에서 싸우고 이겨내고 지금의 위치까지 올라갔다던 푸틴의 삶이 사뭇 다르게 보인다. 친구들과 치고받고 싸운 이야기를 제외하면 그의 인생에서 치열하게 싸우고 도전해 이겨낸 것이 많지 않아 보인다. 금수저까지는 아니더라도 은수저 정도는 입에 물고 태어났다고 보이는 것이다. 부모님 두 분 모두 살아계셨던 어린 시절, 유복한 성장 환경, 그런 그의 인생에는 남들보다 좀 더 많은 기회가 있었고, 이를 잘 잡은 푸틴은 승승장구했다. 당시가 전쟁 직후였다는 것을 고려해보면 푸틴은 분명 다른 아이들보다 많은 것을 가지고 자란 것은 틀림없다.



정치 덕후가 된 푸틴 

80년대 말 푸틴의 믿고 지지하고 또 의지했던 세계는 무너져 버리고 만다. 그가 드레스덴에서 ‘자칭’ 사회주의를 지키기 위한 마지막 보루로서 자신의 임무를 다하고 있을 때, 모스크바의 고르바초프는 점점 더 우클릭 민주주의 행보를 하고 있었다. 글라스노스트*, 페레스트로이카**등을 통한 고르바초프식 일련의 개혁 정책은 사회주의 소련의 붕괴를 의미했다. 




*소비에트 연방의 리더인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1985년에 실시한 개방 정책이다. 종래에 반소적(反蘇的)이라고 금지된 문학작품이나 영화·연극 등이 공개되었다. 그러나, 모든 것을 공개한 것이 아니라 간부계급의 부패는 신랄하게 공개·비판하면서도 고르바초프 대통령 자신과 그 주변에 대한 비판은 금지되었다. 비록 제한적 공개이기는 하나 수동적인 국민을 활성화시키고 보수관리와 사회의 부패를 비판하여 소련의 민주화에 영향을 미쳤다.

**'재건', '재편'의 뜻을 가진 러시아어로,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1985년 3월 소련 공산당 서기장에 취임한 후 실시한 개혁정책을 가리킨다. 소련의 정치뿐 아니라 세계 정치의 흐름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

-출처 위키피디아-



독일 통일과 함께 설 당을 잃어버린 KGB는 독일에서 철수하게 된다. 푸틴과 그의 동료들도 짐을 쌌다. 당시의 경험은 푸틴뿐 아니라 다른 KGB 요원들에게도 엄청나게 큰 충격이었다고 한다. 불과 1년 전만 해도 사회주의의 몰락을 쉬이 예상할 수 없었는데 이렇게 쉽게 모든 게 물거품이 되어버린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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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점의 선반은 텅텅 비었다. 집에 쌀이 떨어져 마트를 갔는데 마트에도 쌀이 없다. 쌀 뿐이랴, 빵도 우유도 김치도 모든 것이 텅텅 비었다. 마트뿐 아니라 동네 슈퍼에도 상품이 없었다. 사람들은 당황했고 쉽게 흥분했다. 싸움은 여기저기서 일어난다. 쌀 한 봉지를 사기 위해 서로를 노려보고, 새치기하는 넘들에겐 가차 없이 주먹부터 날아갔다. 텅 빈 상점과 생필품을 위해 몸싸움을 하던 장면이 당시 소련의 모습으로 자주 등장했다.

시민들 입장에선 사회주의 국가에서 해주던 ‘보호’가 순식간에 사라진 것이다. 그렇게 소련이 100년 넘게 유지해오던 권위와 권력도 함께 무너져 내렸다. 발틱해부터 카자흐스탄까지 소비에트 연방의 시민들은 모스크바와 갈라섰고, 푸틴이 살아왔던 세계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그렇게 소련의 붕괴는 지난 세기 가장 큰 정치사의 카오스가 되었다. 

푸틴이 사회주의라는 그 시스템을 신봉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의 내면을 알 수는 없으니까. 하지만 분명한 것은 푸틴은 그 시스템의 일부였다. 그가 속한 그 시스템이 하루아침에 셧다운 되고, KGB 역시 갈 곳을 잃어갔다.

생 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온 그는 곧 KGB에 가슴 깊이 숨겨둔 사직서를 제출한다. 실업급여를 받을 새도 없이 푸틴은 과거 자신의 지도 교수였던 아나톨리 좁착(Анатоли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Собчак)의 밑으로 들어간다. 좁착은 생 페테르부르크의 새로운 시장이 되었고 푸틴의 멘토가 되었다. 정치 초년병 시절부터 푸틴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1991년 겨울. 생필품이 거의 다 떨어진 시민들의 불만이 하늘을 찌르던 시기, 과거 전쟁 원수였던 독일이 러시아로 1000여 개의 생필품 박스를 보냈다. 이 물품들의 배급 담당이 푸틴이었다. 이 일을 계기로 그는 처음으로  사람들의 주목을 받게 된다. 그 후 ‘범죄와의 전쟁’이라는 주제로 한 회의에서의 그의 언행이 언론을 통해 소개되면서 그의 유명세는 더욱 높아져 갔다. 

“점점 더 많은 범죄자가 경찰을 공격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건에 대한 처벌을 강화해야만 합니다. 경찰이 좀 힘들겠지만, 이번 기회에 단호한 조치를 해야만 합니다. 그게 우리의 의무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범죄에 맞서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경찰 한 명의 희생마다 범죄자 10명의 목숨으로 되돌려 받아야 합니다. 가능한 법의 테두리 안에서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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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세다.  


사람은 역시 라인을 잘 타야 한다고, 좁착의 밑에서 푸틴은 승승장구한다. 그리고 좁착은 그를 대변인으로 전면에 내세운다. 이렇게 푸틴은 러시아에서 두 번째로 중요한 도시의 2인자 자리에 오르게 된다. 라인의 예술가 푸틴은 넓어진 영향력을 활용해 새로운 사람들과 교류를 쌓기 시작한다. 진짜 실력 있는 러시아의 정치 엘리트의 세계로 무혈입성하게 된 것이다. 구 KGB 라인과 신 정치 엘리트 라인은 푸틴에게 날개를 달아준다.

새로운 러시아는 종잡을 수 없었다. 뜻밖의 기회가 생겼고 동시에 예상치 못한 어려움도 있었다. 소련 시절의 일사불란함이나 통일된 분위기는 더이상 없었다. 불평등과 고삐 풀린 시장경제는 통제를 벗어나 버렸다. 그리고 이런 혼돈의 시대는 누군가에겐 큰 기회가 된다. 과거 사회주의 신봉자 푸틴은 발 빠르게 방향을 틀었다. 그리고 승자의 편에서 재빠르게 줄을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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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 백만장자 박람회 



소련의 붕괴 이후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자 대부분의 사람에게 소련이든 러시아든 경제적으로 그리 큰 변화는 없었다. 아니 오히려 물질적으로는 더욱 풍요로운 시대였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전보다 더 가난하다고 느꼈다. 원래 가난은 상대적인 것 아닌가. 어느새 도시엔 일반인들이 살 수도 없는 비싼 물건들이 상점들을 가득 채웠다. 옆집 개똥이 엄마는 순식간에 부자가 되었다. 그런데  우리 남편은 지지리 능력도 없다. 이런 러시아에서 1억 6천만의 인구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경제적 어려움이 닥치자 과거의 소련에 대한 향수는 강해졌다. 푸틴은 바로 이러한 점을 파고들었다. 

시작은 미약했다. 거대 권력의 싸움 속에서 푸틴은 약자였다. 1996년 그의 멘토 좁착은 권력 비리로 인해 권좌에서 물러나 파리로 도망을 갔고, 그즈음 푸틴의 성공기 역시 끝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라인의 예술가 푸틴이 그동안 쌓아 놓은 인맥들이 마침내 효과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푸틴이 집에서 실업급여나 받아야 할 그런 위기의 순간 그는 크렘린 궁에 자리를 제안받는다.

그렇게 모스크바에 진출한 푸틴은 새로운 멘토를 찾게 된다. 보리스 베레좁스키(Борис Абрамович Березовский)는 당시 러시아의 가장 부자 중 한 명이었다. 더불어 과두 정치(寡頭政治, oligarchy)의 표상으로 정계에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던 인물이었다. 푸틴은 그를 지렛대 삼아 드디어 가장 높은 권력의 중심부 근처로 다가갈 수 있었다. 물론 베레좁스키가 더는 필요 없게 되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딱 그때까지 푸틴은 그에게 충성했다. 베레좁스키는 훗날 옐친의 후계자가 되도록 지원했던 푸틴에게 숙청(푸틴이 재벌개혁을 진행하면서 관계가 냉각)당해 영국으로 도망갔고 그곳에서 원인을 알 수 없는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베레좁스키는 푸틴이 자신의 수호천사라 믿었다. 그리고 정치적으로 그 누구도 자신을 건드리지 못할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푸틴이 과연 마리오네트에 만족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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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스 베레좁스키(Борис Абрамович Березовский)


드디어 옐친 대통령 근처까지 다가간 푸틴은 점점 강해졌고, 90년대 말 보리스 옐친의 권력은 점점 더 약해져 갔다. 옐친은 자주 아팠고 시민들로부터 사랑받지 못했다. 옐친 주위의 인물들은 툭하면 비리를 저지르고 족벌주의 정치를 유지했다. 지긋지긋한 비리에 검사와 판사들 그리고 정보부까지 옐친으로부터 멀어져 갔다. 베레좁스키는 이에 적당한 인물을 추천한다. 바로 푸틴. 그렇게 푸틴은 KGB 이후 러시아의 공식 정보기관이 된 FSB의 수장이 된다. 옐친가의 사람들은 원래 정치적 술수가 뛰어나진 못했다. 그들은 그저 고귀한 귀족의 삶이나 누리던 사람들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영리하지만 고집불통인 푸틴은 잘 어울릴 리 없었다. 누군가 푸틴을 힘으로 짓누르려 하면 푸틴은 항상 반대로 삐뚤어져 나갔다. 

어느 날이었다. 옐친가 중 한 명이자 검찰 총장을 비리혐의로 수사하고 있을 때, 밑도 끝도 없이 국영 방송에서비디오 한편이 방송된다. 흑백 화면으로 뿌연 방송에서 웬 나이 많은 남자가 두 명의 직업여성과 침대에서 발가벗고 뒹구르르하는 모습이 그대로 전파를 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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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론은 순식간에 소용돌이치고 수세에 몰린 검찰 총장은 당황했다. 그는 수척하고 똥 씹은 표정으로 카메라 앞에서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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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절대로 내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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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 걔 맞는데요!” 푸틴의 인터뷰장면.



진실과 상관없이 여론이 어느 쪽으로 흘러갔을지는 쉽게 짐작이 간다. 검찰총장은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고, 덕분에 옐친 가문의 나머지는 모가지를 보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추락하는 옐친가를 막을 수는 없었다. 이 일로 푸틴은 신뢰와 지지를 받았고, 한 계단 더 올라서게 된다. 


1999년 푸틴은 총리의 자리를 꿰차고 들어간다. 러시아나 한국이나 총리 자리는 회전문이다. 많은 이들은 이 국정원장 출신의 인물 역시 곧 물러나서 잊혀질 것으로 생각했다. 벗뜨 항상 위기의 순간은 기회가 되어 돌아오듯, 러시아는 큰 위기를 겪게 된다. 연속된 테러 공격으로 건물들이 폭파되고 300명이 넘는 사망자가 나오게 된다. 범인이 누구냐고? “아마도 이른바 체첸 반군이겠지 뭐~”라고 모두가 생각했다. 수사고 뭐고 필요도 없었다. 푸틴은 전면에 나서 강경파 입장을 표명했다. 그리고 공개적으로 복수를 다짐했다. 

“우리는 테러리스트들을 사냥할 것이고 죽여버릴 것입니다. 필요하다면 화장실에서라도 암살해야죠.” 

그의 인기는 끝없이 치솟았고 마침내 푸틴은 러시아의 지도자가 된다. 누군가는 이것을 정치력이라 할 테고, 누군가는 우매한 민중을 탓하겠지만 어쨌든 이 테러로 가장 이득을 본 것은 푸틴임은 분명하다. 

많은 빨갱이 아니 야권에서는 이 일련의 사건에 대해서 러시아 정보국 FSB의 배후설을 강하게 주장했다. 그리고 푸틴이 그들의 뒤에 버티고 있음은 자명했다. 따라서 야권과 언론들(중 몇몇 극소수)은 푸틴에 대해 의심의 눈초리를 날렸다. 그 이후 당연한 결과지만, 그들은 비 오는 날 먼지나게 털렸다. 경찰에 의해 방송국은 폐쇄되고, 국정조사는 총 든 군인들이 시작도 못 하게 막아섰다. 



푸틴의 위기 

푸틴이 이러한 무소불위의 권력을 처음부터 쉽게 누린 것은 아니다. CIA 등 정보기관들에 따르면 총리 시절 푸틴은 나름의 고충(?)이 있었다. 




1999년 9월. 테러로 시민들이 죽어 나가던 당시 총리였던 푸틴과 크렘린 궁의 직통 핫라인이 순간적으로 끊어지는 일이 발생한다. <총리실 핫라인을 끊고 푸틴을 제거한다.> 바로 쿠데타다. 그리고 그 뒤에는 통신 업무를 담당하는 FAPSI가 있었다. FAPSI는 러시아의 NSA다. 즉 러시아의 정보국 대 정보국의 대결. 푸틴의 FSB vs. FAPSI. 이에 대해 자세한 이야기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호사가들 사이에선 이런 이야기가 전해진다. 

정부에 의해 꾸며진 테러. 그리고 그를 이용해 자신의 인기를 올리는 푸틴. 애국 FAPSI들은 이 상황을 도저히 묵과할 수 없었다. 때마침 그들의 통신망에 푸틴의 테러 자작극이 포착되었다. FAPSI는 총리실의 통신을 차단했고 푸틴을 처단하려 했다. 하지만 푸틴의 FSB가 그런 FAPSI를 막았다. 

푸틴을 향한 살해 위협이 단지 한 번으로 끝난 것은 아니었다. CIA에 의하면 푸틴은 지금까지 최소 5번의 암살 계획을 성공적(?)으로 막았다고 한다. 모스크바, 생 페테르부르크, 바쿠, 테헤란, 그리고 런던에서 런던 경찰국(Schotland Yard)은 공항에서 푸틴 암살 계획을 세운 전직 정보국 출신 요원을 체포했다.



러시아의 치열했던 권력 투쟁만큼, 이 (최소) 5번의 테러는 푸틴에게 깊은 트라우마를 남겼다. 그리고 그가 별로 경험해 보지 못했던 공포를 느끼게 하였다. 그러한 공포는 더욱더 자신을 가두었고, 통치 방식은 강력해졌다. 현재의 통치방식. 즉 상대를 끝까지 짓밟아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게 만드는 것은 그의 트라우마에서 나온 스타일이며, 사람들을 믿지 못하는 것 역시 여기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라는 의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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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한 마리의 외로운 늑대가 된 푸틴. 그는 자신을 그렇게 보이도록 만들었고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다. 




사람을 믿지 않는 푸틴 


푸틴의 이야기가 나오면 종종 듣는 이야기가 있다. 그는 여행을 갈 때 독극물을 먹게 될까 봐 개인 요리사를 데리고 다닌다는 것인데, 이 외로운 늑대도 누군가에게 조언은 들어야 할 것 아니냐. 

분명 푸틴은 강한 지도자(A.K.A. 독재자)임은 틀림없다. 정치적으로도 예측이 불가능한 지도자다. 예측이 불가능하다는 말은 그가 전략가는 아니라는 뜻이다. 그는 책략가다. 매 순간 자신의 판단과 기분으로 그리고 아주 비밀스럽게 일을 한다. 즉 푸틴에게 일 년 뒤 혹은 십 년 뒤의 계획을 물어보는 것은 부질없다. 그는 일주일 뒤에 뭘 할지도 계획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알려져 있다. 게다가 폐쇄적이다. 오죽하면 측근에게도 자신의 업무와 관련해서도 종종 다르게 알려준다고 한다. 자기의 계획을 비밀로 놔두기 위해서 공적 업무에까지 차질을 빚는다는 것은 한마디로 나라 개판 만들겠다는 이야기와 진배없다그렇다면 그가 마음을 터놓는 사람들은 없을까? 

서방 정보기관들은 이렇게 추측한다. 

- 정부의 주요 인물들은 소위 <페테르부르크 클럽>에 속한 인물들이다. 그리고 지도층의 절반가량은 과거 정보국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다. 
- 그런 푸틴 측근은 전부 남자다. 그리고 오래된 관계 만을 믿는다. 새로운 사람이 그의 곁에 간다 해도 푸틴이 그를 믿거나 자신의 이야기를 할 일이 전혀 없다는 말이다. 
- 푸틴의 측근 즉 사업가들, 친구들 그리고 유도 파트너들, 페테르부르크 클럽의 동지들은 순식간에 슈퍼 갑부가 되었다. 그리고 러시아 정제계에 끝없는 영향력을 행사한다. 하지만 이들의 숫자는 고작 10명 내외라고 알려졌다.

하지만 이런 막역한 사이의 소수의 지인 역시 푸틴의 생각을 알지는 못한다고 한다. 크렘린의 결정은 말 그대로 푸틴의 푸틴에 의한, 푸틴을 위한 단독 결정이다. 

이러한 강한 지도자라는 것이 내부적으로 러시아인의 결속에 도움이 되는지는 모르겠으나, 국제 관계에서는 최악의 결과를 나타내곤 한다. 그런데도 그는 생각보다 러시아 국민에게 사랑받는 지도자로 살고 있다. 물론 푸틴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도 그만큼 많지만, 언론을 통제한 러시아에서 그들의 목소리가 밖으로 나오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런 푸틴의 권력은 내부적으로 위협이 될만한 요소가 없다. 러시아는 단지 서방 세계로부터 위협을 받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러한 위협은 내부적으로 푸틴의 엄청난 응원의 목소리가 되어 다시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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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국의 대통령(바샤르 알아사드/시리아)이 문자, 전화를 하등가 말등가.



따라서 그런 러시아는 국제 시스템의 일부가 되지 못한다. 최근 우크라이나 사태를 거치며 이러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게다가 보리스 넴초프(Борис Немцов)암살 사건으로 많은 러시아인도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물론 그렇다고 그들의 목소리가 감히 푸틴을 어찌하는 수준은 아니다.  


지금까지 쭉 살펴본바 푸틴이라는 대통령은 아니 푸틴이라는 사람은 단 하나의 목표를 가지고 일을 한다. 바로 '권.력.유.지.'

그것을 위해 매일 같은 레퍼토리를 읊는다. 우리는 위험하고, 러시아는 위기고, 뭐 이런 자질구레한 이야기들... 또한, 푸틴은 자신의 권력을 잃는 것에 대한 공포가 크다. 그의 약점이 노출되는 순간, 통제력을 잃을까 두려워한다. 누군가에게 암살되거나 혹은 감옥에 갇히게 될 것이라는 불안함도 있겠고...

그래서 그는 계속해서 아슬아슬하고 위험한 게임을 하고 있다. 러시아의 성공은 인간 푸틴의 성공이다. 고로 인간 푸틴의 실패는 러시아의 실패가 될지도 모른다. 그런 권력자가 버티고 있는 러시아의 미래는 머 우리 각자 생각해보자.

그런데 왜 푸틴에 대한 이 모든 게 자꾸 러시아만의 얘기 같지가 않냐.
 





타데우스


트위터 : @tadeusinde


편집 : 딴지일보 너클볼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