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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03. 19. 목요일

K리S









 

난 복지제도가 잘 돼 있는 벨기에에서 태어난 데다가 부자는 아니었지만 중상위층 가정에서 자랐다. 한마디로 가난을 모르고 걱정 없이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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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기에의 흔한 중상위층 가정



25살 때는 내 가난에 대해 눈을 뜨기 시작했다. 가족, 친구, 애인, 일, 돈, 자동차, 게임기, 맛있는 벨기에 맥주로 가득 찬 냉장고, 등등 행복하게 살기 위한 모든 조건이 충족돼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허전했었다. 뭔가가 있어야 됐는데 없었다. 몇 개월 동안 사색한 끝에 깨달았다. 사회로부터 나온 조건을 충족하는 데에 별 생각 없이 고분고분 몰두하고 있었다는 깨달음. 난 25년 동안 내 스스로 생각해본 적도 없고 사회가 하라는 대로 살았을 뿐 모든 것을 순수하게 받아들이면서 내 인생을 노예처럼 살고 있었음을 자각했다. 물질적으로 보면 다 가지고 있었지만 마음속은 가난했었다. 그 허무함을 해소하기 위해 내가 당연한 것처럼 여기던 그 물질적인 편의를 떠나기로 했다. 늦은 사춘기였나?


중국으로 가서 자발적으로 가난하게 살기 시작했다. 돈은 딱 필요한 만큼만 벌었다. 한 달에 고작 50만원. 그러나 벨기에에서 한 달에 3백만 원 벌기 위해 다람쥐 쳇바퀴 돌 듯 했던 생활보다 중국에서의 삶이 백배 행복했다. 바닥에서부터 시작한 새로운 삶이었지만 내가 원하는 대로 살고 있었기 때문에 물질적인 불편과 같은 것에 하나도 신경쓰지 않고 순간마다 그냥 있는 그대로를 즐겼다. 그제서야 내 인생의 노예 상태에서 해방되어 주인으로서 살기 시작했다. 직장도 돈도 없었지만 내 인생의 주인으로 살았다는 말은 역설적일지 몰라도 사실이었다. 물론 사춘기가 지나가듯 무욕의 상태는 내 인생의 과도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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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한국 여자한테 반했고 그녀와 함께하기 위해 한국에 왔다. 문제는 그 당시 내 전 재산은 50만 원밖에 안 됐었다. 고로 몇 년 전에 버렸던 쳇바퀴 돌 듯 하던 생활을 다시 추구하게 됐다. 대학교에서 프랑스어를 가르치며 돈을 모았고 덕분에 결혼도 하고 꿈꾸던 가정도 이루었다. 그리고 다시 소비를 즐겼다. 라면에서 삼겹살로. 소주에서 양주로. 자전거에서 자동차로. 8평에서 28평으로. 벨기에에서 즐겼던 편의를 되찾았지만 그 때와 달리 돈만 있으면 된다는 사고방식을 버렸기 때문에 정신적으로는 뿌듯했었다.


그러나 5년 동안 누렸던 여유는 날아가버리고 인생은 또 다시 뒤집혔다. 대학교에서 본 업무를 충실히 하고 학생들을 가르쳤는데도 불구하고 학교의 구조조정 때문에 비정규직 시간강사로 좌천됐다. 소비도 내 상태에 따라 뚝 떨어졌다. 삼겹살에서 기본 반찬으로. 양주에서 맥주로. 자동차에서 스쿠터로. 2명에서 4명으로 늘었지만 여전히 28평이다. 요새 우리 가족은 긴축정책이라 분위기가 좀 바뀌었다.


"또봇 음료수 같은 소리 하지 말고 목마르면 물이나 마셔!" 몇 개월 더 버티기 위해 애들의 적금통장까지 깨기도 했다. '고맙다 얘야! 나중에 꼭 갚아줄게! 뭐? 또봇 음료수? 생각도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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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몇 년 전에 추구했던 가난과 지금의 상황은 완전 다르다. 가난의 다양성에 대해서 피부로 느끼게 됐다. 혼자서 자발적으로 추구하는 가난은 안빈낙도의 힘을 느끼게 해주는 경험일 수도 있지만 가장으로서 강제적으로 당하는 가난은 괴롭다. 돈이 없어도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은 여전히 가슴속에 깊숙이 새겨져 있지만 소비사회에서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돈이 없으면 쪽 팔리고 무책임함을 온몸으로 느끼게 된다. 제일 괴로운 것은 물질적인 불편함보다 정신적인 불안정이다. 지금은 정신적으로는 아직 부자지만 물질적 어려움이 오래 지속된다면 자존심이 서서히 무너질 것이다. 그러다가 물질적 가난은 정신까지 침투해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양쪽모두 허무함을 느끼게 된다면 진정한 가난이라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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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겪고 싶진 않다. 가난을 피하기 위해 최선을 다 하겠지만 단지 개인적 노력에만 달려있는 문제가 아니다. 대한민국의 복지제도가 잘 돼 있었으면 그리 걱정을 하지 않았겠지만 현 정부가 복지공약을 하나씩 파기하고 있는 모양이라 앞으로 3년 동안은 기대를 접어야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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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들아, 3년만 버티면 또봇 음료수를 마실 수 있을지도 몰라..."














K리S


편집 : 딴지일보 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