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03. 20. 금요일
산하
산하의 가전사 "가끔하는 전쟁 이야기 사랑이야기의 줄임말입니다. 왜 전쟁과 사랑이냐... 둘 다 목숨 걸고 해야 뭘 얻는 거라 그런지 인간사의 미추, 희비극이 극명하게 드러나고 얘깃거리가 많을 거 같아서요." from 산하 |
우리들 동심의 영원한 등불(?) <미래소년 코난>의 작가 '미아쟈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 하나가 논란이 된 적이 있어. <바람이 분다>라는 애니메이션인데, 그 주인공인 호리코시 지로가 '제로센'을 만든 사람이었기 때문이지. 호리코시는 하늘을 날고 싶은 마음이 충만한 사람이고, 그를 위해 '잇쇼겐메이(一所懸命. 하나의 목표에 목숨을 건다고 할지)'하는 순수한 이로 그려져. 하지만 ‘제로센’을 만든 호리코시를 코난이나 포비, 토토로처럼 천연덕스럽게 바라볼 수만은 없었지. 그 제로센이 뭐냐고?
이거랑 제로센이랑 같냐구
제로센은 공식명칭이 '영(零)식 함상전투기 A6M'인 전투기야. 일본 사람들은 일왕의 연호 또는 개국기원을 연호로 썼기 때문에 99식 소총이니 96식 전투기니 하는 무기가 많지. 즉, 2599년에 만들어진 소총 뭐 이런 식인데, 1940년이 자기들 말로 ‘황기’ 2600년이었고 그때 이 전투기가 본격 도입됐으니 '0식'이 된 거야. 0식 전투기, 일본 말로는 레이센(零戰) 또는 제로센이야. A는 전투기, 6은 여섯 번째 모델, 그리고 M은 미쓰비시.
이 전투기가 세상에 나온 게 1939년 3월 16일이었는데, 분명한 건 호리코시 지로가 하늘을 빨리, 그리고 높이 날고 싶은 순수한 마음에서 만든 전투기는 절대 아니라는 거야. 그는 일본 해군에게서 이 비행기를 발주 받아서 만들었어. 해군의 핵심 요구는 '속도'와 '항속거리'였지.
호리코시는 여기에 충실한 비행기를 만들어. '제로센'은 엄청나게 빨랐고, 세계 최고의 항속거리를 자랑했으며, 중일전쟁에서 허약한 중국 공군을 박살내는 데에 쓰였어. 나중엔 일본이 태평양 전역을 전화로 몰아넣었던 진주만 기습의 선봉장이 되지.
초기 연합군 공군들은 이 '제로센'을 무슨 유령 보듯 대했어. 기가 막히게 빠른데다 전투기들의 이른바 '개싸움 근접전'에서 뒤로 몰래 와서 기관총을 갈겨대니까. 그 기동성에 많은 연합군 파일럿들이 불덩이가 돼 죽어갔지. 미군들은 경탄을 금치 못했어. 어떻게 저렇게 빠른 비행기가 있을까. 저 엔진은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대단하다. 하지만 함정이 있었어. 일본군 스스로 판 함정이지.
이 제로센의 위력은 바로 비행기를 최대한 가볍게 한 데에서 나왔던 거야. 조금 과장하자면, 제로센의 기체가 공업용 가위로도 썰려 나갈 정도였다고 해. 그러니까 차로 치면 승용차 엔진에 양철판을 단 자동차라고나 할까. 가볍기야 무지 가볍고 빠르기는 무지 빨랐지만, 탑승자의 안전 따위는 별로 고려하지 않은 비행기였던 거야. 기실 일본의 기술력은 구미 열강에 비해 한 단계 뒤떨어져 있었고, 제로센의 프로펠러조차 사실은 미제였지. 반면 제로센에 놀란 미국은 제로센의 속도에 버금가는 비행기를 만들라며 개발에 박차를 가했어. 그리고 얼마 안가 제로센을 갖고 놀기에 충분한 비행기를 배치하지.
일본군에게 뼈아픈 사실은 공들여 기른 파일럿들을 미드웨이 해전 등에서 거의 잃었다는 점이야. 이후로 빠른 기체와 숙련된 조종술을 트레이드 마크로 하는 항공 전투력을 회복할 수가 없었어. 패색이 짙어가던 1944년 가을, 일본 군부는 이 '제로센'들을 가미가제 자살 특공 작전에 동원해. 인류 전쟁사에서 우발적이고 개인적인 자살 공격은 많이 있지만, 한 나라 군부가 공식적으로 '자살 공격'을 지시한 예는 드물 거야.
"장갑은 얇아도 좋다. 더 빨리, 더 높이, 더 멀리만 날게 해다오."
를 부르짖던, 성능 앞에서는 인명 따위는 어떻게 해도 좋았던 '제로센'에 숨은 광기가 대규모로 발현됐다고 할까.
"나 같은 에이스를 자살 공격을 시켜? 일본은 망했다. 제기랄."
첫 특공대원이었던 세키 유키오가 남긴 말이야. 지금 일본 천황으로 있는 아키히토는 가미가제 특공대 소식을 듣고 이렇게 반문했다지.
"그건 그냥 우리 병력을 줄이는 거 아닌가?"
화장실에 앉아서 일분만 생각하면 그 일이 얼마나 멍청한 일인지 알았겠지만, 일본제국주의의 광기는 그 생때같은 젊음들을 얇디얇은 제로센에 태워 미국 군함으로 보내버렸지. 미당 서정주가 참 천재다 싶으면서도 저주스러운 건, 그의 아름다운 글짓기 실력으로 이런 시를 읊었기 때문이겠지.
(전략)
우리의 동포들이 밤과 낮으로
정성껏 만들어 보낸 비행기 한 채에
그대, 몸을 실어 날았다간 내리는 곳
소리 있이 벌이는 고흔 꽃처럼
오히려 기쁜 몸짓 하며 내리는 곳
쪼각쪼각 부서지는 산더미 같은 미국 군함!
수백 척의 비행기와
대포와 폭발탄과
머리털이 샛노란 벌레 같은 병정을 싣고
우리의 땅과 목숨을 뺏으러 온
원수 영미의 항공모함을
그대
몸뚱이로 내려쳐서 깨었는가?
깨뜨리며 깨뜨리며 자네도 깨졌는가
장하도다
(후략)
물론 일제가 천년만년 갈 줄 알았다지만, 그래도 이건 민족적 차원을 넘어서 인간의 존엄에 대한 기본 상식이 없었던 사람이라고밖에 할 수 없어. 하긴 그러니까 광주의 피바람을 겪고도 전두환에게 '단군 이래 최대의 미소'라는 해괴망측한 아부를 했겠지만.
사람의 생명을 하찮게 치부하는 자들, 승리 앞에서, 명예 앞에서, 돈 앞에서, 이윤 앞에서 사람의 생명을 길가에 구르는 돌멩이 따위로 치부하는 이들은 일본 제국주의자들 뿐 만이 아니었겠지. 속도와 성능을 위해 사람에 대한 배려를 생략한 전투기 제로센은 그 상징일 거다. 그 광기가 현재진행 중일 수도 있고. 당장 우리나라에서도 그런 발상을 발견하는 게 어려운 일이 아니잖아. 한 사람의 건강이나 생존권 같은 건 제로센보다도 얇은 셀로판 안에 담겨 있는 사회잖아.
그젠가 네가 "나도 반동이 된 건가"라고 물었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해. 정치적 입장이 무엇이든, 좌든 우든 사람 귀한 것에 찬성하고 사람의 자유와 권리를 권력이나 다른 힘으로 누르는 것에 맘으로라도 반대하는 한 누구도 반동은 아니라고. 너도 열심히 아이들 길러내고 있잖아. 아이들의 미래에 네가 어떤 영향을 미칠까 노심초사하고 있잖아. 그럼 반동(?)이 아니지, 될 수가 없겠지. 제로센을 만든 호리코시 지로는 이렇게 말했어.
"우수한 무기를 가질수록 그를 통제하는 도덕심과 과학정신이 필요할 것이다."
아이러니지. 애초에 그도 자신의 비행기에 담긴 '정신'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모르지는 않았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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