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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03. 25. 수요일

trexx







1. 선택적 결정, 기업 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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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적 결정

 

기업이 성공하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기업이 사용할 있는 자원은 유한하다. 경쟁이 치열 할수록 자원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아니 살아남기 위해 수많은 경우의 선택적 결정 해야한다. 시기적적할 선택적 결정은 기업(상품) 성공의 밑거름이 된다. 선택적 결정들이 성공적으로 계속되어 반복된다면 그것은 기업 전략이 된다. 이는 기업 철학과 맞물려 있기도 한다.


기업 전략은 선악하고는 무관하다.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방법이다. 우리가 쓰는 흔한 박리다매 또한 상품을 판매하는 전략이라 있다. 박리다매라는 용어에는 판매자인 , 경쟁자, 소비자 3자가 공존한다. 개별 상품에서 경쟁자보다 적게 이윤을 남기고 소비자에게 많이 판다. 결과 판매자(기업) 시장을 선점하여 이윤을 얻고 살아남는다.


1990년대 IT업계는 MS 독주였다. 다시 말해 MS 선택적 결정들이 계속 성공했다. MS(빌 게이츠) 1980년대 경쟁자를 시장에서 몰아내는 방법을 체득하게 된다. 그가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선택한 방법은 남의 기술을 차용하여 거대기업과 협업하는 것이었다. MS는 메인스트림 진출의 시작하면서 IBM PC MS-DOS 판매하게 된다. 이는 시애틀 동네 천재 게리 킬달의 기술을 IBM 재포장한 혐의를 받고 있다.(관련 기사상품가치전쟁 7) 빌 게이츠가 우연히 선택한 결정이 10년의 시간을 거쳐 MS 기업전략으로 굳어진다.

 

물론 1990년대 MS 독점기업이 있었던 경쟁자들의 무능함이 몫하기도 했다. 애플의 헛짓과 IBM 무능함이 MS 더욱 빛나게 하였다. 자신들이 시장에서 선도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던 애플과 IBM MS 어떻게 자신들을 파괴하고 있는지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애플 CEO 스컬리는 잡스가 만들어놓은 맥이 탁상출판에서 시장을 개척하자 성공에 심취한 나머지 고가전략에 집중하고 있었다. IBM 자신의 입지를 좁게 만든 원흉이 클론 PC라 오해, 그것과 차별하기 위해 PS/2 만들고 OS/2 개발한다. 결국 IBM의 무능함은 드러났고 여지없이 실패하고 만다.


두기업은 자신의 적이 누군지 전혀 깨닫지 못했다. 애플은 거대기업 IBM 싸구려 PC 적으로 생각하였고 IBM 컴팩 같은 바이오스를 도둑질한 클론 회사를 적으로 생각했다. MS 자신들에게 위협이 것을 90년대에 이르러서였고 이때는 이미 시장은 돌이킬 없는 상황이 다음이었다. MS 다른 경쟁기업보다 훨씬 영리했고 기민했다.




2. MS W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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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S 제국

 

90년대 중반까지 MS 자신의 정체성을 세워가고 있었다. 1980년대 MS-DOS 시장에서 CP/M 몰아냈고 인텔과 함께 클론 PC 암묵적으로 도와줘 결국 공룡 IBM 추락하게 하였다. MS IBM OS/2 함께 개발하는 자신의 프로젝트인 NT 완성이 보이자 IBM 결별을 선언 했다.


1984 애플이 만든 매킨토시에 MS Office 프로그램을 만들면서 자신의 GUI OS 윈도우즈를 차근차근 준비하였고 결국 90년대 중반에 이르러 윈도우즈용 오피스 프로그램으로 Lotus 1-2-3 워드퍼펙트 등을 시장에서 완전히 내보낸다. 윈도우즈로 PC에서 독점적인 지위에 올라서자 맥킨토시 지원을 중단한다. MS 성공적인 결정으로 윈텔세계가 완성된 것이다. (편집자 주 : 원텔(Wintel)이란  MS 윈도우와 인텔 칩의 결합을 뜻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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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tscape 죽음

 

그때 IT계는 개별 PC 시대에서 네트워크 PC 시대로 격변하고 있었다. 배경에는 GUI 확산 이후 HyperText 기반인 웹이 발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윈도우즈로 개별 PC시대의 최종 승자가 MS 웹이 떠오르자 다시 선택적 결정 하게 된다.


1994 마크엔드르센의 네스케이프로 (World Wide Web) 부흥하자 MS 브라우저 원천기술을 가지고 있는 SpyGlass 모자이크 코드를 라이센스하여 인터넷 익스플로어를 윈도우즈에 끼어팔았다. MS 자신은 윈도우즈로만 돈을 벌었고 인터넷 익스플로러로는 전혀 수익이 나지 않았다고 뻔뻔하게 말하며 SpyGlass 아주 적은 돈만 지불한다.(결국 1997년에 이르러 8백만불에 합의한다.)


또한, 1990년대 후반 웹의 부흥으로 떠오르는 개발환경이 있었는데 SUN Java 독보적이었다. MS SUN 협력하여 인터넷 익스플로어에 MS 조리한 JAVA 머신을 만들어 넣는다. 하지만 MS 손본 JAVA SUN JAVA 호환성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결국 Java 윈도우즈 익스플로어에서 절름발이가 된다.


10년이 넘는 기간동안 선택적 결정을 MS에게 관련 협력사들은 MS 의해 철저히 망가졌고 MS 성공을 위한 밑거름이 되었다. 전략은 너무 완벽해 보였기에 MS 스스로도, IT 업계에서도 원칙은 무너질 같지 않았다. MS 어느 누구도 건들 없는 거대 기업이 되었다.




3. 멀티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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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ndows 3.1 Media Player

 

OS, 등에서 완벽한 승리한 MS 윈도우즈로 자신이 표방한 멀티미디어 기술 움직임을 지켜보고 있었다. 1990년대 이제 GUI OS 사용자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던 시절, 아직 GUI에서 승리를 하지 못한 MS에게 멀티미디어는 우선순위가 아니었다. 윈도우즈는 아직까지 DOS 어플리케이션이었지 독립적인 OS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1991 애플은 퀵타임을 갑자기 선보인다. MS 퀵타임으로 멀티미디어에 대한 소홀했던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이에 맞서 MS 1992 졸속히 Video for Windows(VfW) 세상에 내놓는다. MS 퀵타임 컨테이너 파일인 MOV 모방하여 독자적인 AVI 컨테이너 파일 규격을 선보인다. 하지만 AVI 컨테이너 역할, 콘텐츠를 생산하는 기능 보다는 그저 동영상을 재생하는 역할만 수행할 있었다. AVI MOV 비해 타임라인이 형편없었다. 음성과 영상이 싱크(동기화) 문제가 있었다. 퀵타임에 비하여 낙후 되어 있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컨텐츠 제작을 하는 것은 아니었기에 큰 차이점을 없었다. MS 또한 지점을 노려 AVI MOV 비슷한 파일이라 느끼게끔 하였다.


애플은 1992 퀵타임을 윈도우즈 3.0 포팅하게 된다. 이는 단순히 퀵타임 프로그램을 포팅하는 수준이 아닌 윈텔 환경에서 동영상을 원활하게 재생하기 위하여 매킨토시 고유 기술을 포함하였는데 이로써 MS VfW 성능을 완전히 능가하였다. 마이크로소프트와 인텔은 포팅하여 만든 프로그램인 퀵타임이 윈도우즈 종속 프로그램인 VfW 보다 훨씬 뛰어남에 놀라게 된다. MS VfW 퀵타임 기술을 넣고 확산시키기 위해(결국 퀵타임을 죽이기 위해) 애플에게 1993 윈도우즈 퀵타임에 대하여 무료 라이센스를 요구했지만 애플은 거절한다. 애플의 선택적 결정을 반복하게 되고 미디어 역사에서, 아니 IT 전체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분기점이 된다.

 



4. 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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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S 반독점 재판 증인이 애플의 에이비 티베이니언() MS 에릭 엥스트롬()

 

애플 덕에 자존심이 상한 또하나의 기업은 인텔이었다. 인텔은 자신이 구축한 하드웨어 기술을 완전히 우회한 포팅 프로그램인 퀵타임이 동영상 재생에서 뛰어난 성능을 보여준 것에 대해 놀랐다. 인텔은 윈도우즈 환경에서 동영상을 퀵타임 처럼 원활하게 구현하길 원했다. 하지만 MS VfW 성능은 한참 미쳤기에 MS 기술보다 훌륭한 퀵타임 기술에 의지하고 싶었다.


애플은 맥킨토시용 퀵타임을 윈도우즈로 포팅하면서 Canyon이라는 회사와 협력하였다. 퀵타임의 많은 코드가 Canyon 있음을 인텔은 알게되고 회사에 접근하여 퀵타임에 근접한 성능의 드라이버를 요구한다. Canyon사는 인텔에 협조하여 애플이 작성한 퀵타임 코드를 그대로 가져왔고 이를 MS에게 라이센스한다. 1994 VfW 성능은 급격하게 좋아진다. 배경을 알게 애플은 소송을 제기하게 되어 훔쳐낸 코드를 일시적으로 사용하지 못하도록 조치했다.

 

애플은 1990년대 잘못된 결정으로 OS 결정적인 프로젝트는 죄다 실패하게 된다. 우수한 엔지니어였던 퀵타임을 만든 브루스 또한 망가져가는 애플에서 1995 떠나게 되고 WebTV 설립하였다. MS 이를 유심히 보다가 1997 WebTV 기업을 인수하게 된다. MS WebTV Video for Windows to ActiveMovie 변경하고 Active라는 병신같은 이름을 사용한 웹기반 프로젝트를 시작한다. 한국에 재앙을 ActiveX, 웹으로 TV 구현하려다 실패한 Active Channel, 데스크탑을 웹으로 떡칠하려다 역시 실패한 Active DeskTop 등이 이때 시작되었다.


MS 퀵타임을 잠재우고 싶어 아직 구현하지 않는 기술에 대한 공수표를 날리기 시작한다. ( 또한 90년대 통용된 MS 선택적 결정이다.) 맥용 ActiveMovie 나올 것으로 선전했지만 결코 나오지 않았다. 또한 QuickTime 기술 하나인 QuickTime Virtual Reality(QTVR, 인터넷 박물관에서 전시물을 여러각도에서 수있게 하는 기술) 모사한 Surround Video 발표만 하고 세상에 선보이지 않았다.

 



5. 힘의 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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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 절대 권력자 MS 기력이 쇠약해진 애플에게 퀵타임을 포기하도록 종용하였다. 1997 2 잡스는 애플로 들어온 그해 7 MS 인터넷 익스플로러, 오피스 등을 협상하였다. 그러나 MS 목표로 삼은 퀵타임 이었다. 협의 이전 MS(Christopher Phillips) 퀵타임 관리자 피터 호디(Peter Hoddie)에게 우리는 니그들이 자식을 찔러 죽이기 바란다.(We want you to knife the baby.)”라 했다고. ( 말은 추후 MS 반독점 재판에서 밝혀진 내용이다.) 애플은 MS 제안을 다시 거절한다.


1998 MS 반독점 재판에서 MS 퀵타임을 죽이기 위한 계략이 일부 드러난다. MS 애플의 핵심 직원(에이비 티베이니언(Avie Tevanian), 실러(Phil Schiller),  샤프(Tim Schaaff)) 끊임없이 접근하여 회유와 협박을 반복했다. 애플이 미디어 시장에서 벗어나 윈도우용 퀵타임을 지원히지 말라고 회유하고 만약 그렇지 않을 경우 퀵타임의 강점인 미디어 생성 기능을 대적할 오쏘링 툴을 MS 직접 만들겠다고 협박했다. 당시 애플 퀵타임 직원은 100 남짓했는데 MS 오쏘링 툴을 제작하기 위하여 150명을 투입하겠다고 위협했다. 사실 미디어를 제작하는 오쏘링 시장은 크지 않기 때문에 돈을 밝히는 빌게이츠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MS 애플이 미디어 시장에서 애플을 꺼져주길 바랬다. (MS 멀티미디어 기술부 관리자 에릭 엥스트롬 증언) 애플은 다시 거절한다.


돌아온 잡스는 너무 바빴다. 쇠약해진 애플에 새로운 OS 반드시 성공시켜야 했다. 한동안 업데이트가 없었던 1998 퀵타임은 무려 4년만에 완전히 새로와진 버전 3.0 세상에 나왔다. 퀵타임은 잡스의 중요 자산으로 떠올랐다. 하지만 애플의 노력과는 별개로 미디어 시장에서 퀵타임은 3위로 추락하였다.

 



6. 퀵타임의 위기 그리고 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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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운의 real player

 

1997 당시 웹의 부흥으로 스트리밍 재생이 떠오르고 있었다. 오쏘링 툴에서 퀵타임은 여전히 독보적이었지만 웹에서는 스트리밍 재생이 사용자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스트리밍 재생에서 RealNetworks 85%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었다. MS 퀵타임이 자기 뜻대로 되지 않자 당장 인기있는 real player 집중한다. 인터넷 익스플로러 처럼 Windows Media Players 윈도우즈에 끼어넣기 한다.


MS 퀵타임에 대한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MS 퀵타임이 윈도우즈에서 잘못돌아가도록 윈도우즈를 손봤다. 법정에서 MS 극구 부인했지만 애플은 정황자료를 보여준다. 퀵타임 설치 특정 파일을 재생 시킬 없을지도 모르니 MS 플레이어를 기본 프로그램으로 다시 설치하라는 경고였다. 또한 IE4에서 퀵타임 MOV 파일 재생을 액티브 무비로 설정해 버렸다. 티베이니언은 게이츠에 원상태로 돌려놓을 것을 메일로 요청한다. 빌은 회사 내부직원에게 에이비가 보낸 메일을 공유하면서 애플을 궁지에 계략을 알려달라고 언급한다. 그리고 모든 책임을 애플에 전가 시킨다. IE에서 퀵타임 플러그인이 버그가 많아서 재생이 안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네스케이프에서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윈도우즈와 IE 버전이 올라갈 수록 퀵타임 파일을 에러를 뿝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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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퀵타임 파일은 네스케이프에서는 전혀 문제가 없다.

 

 

그리고 애플과는 대화가 안되어 문제해결이 안된다고 언론플레이를 하였다. 그리고 컴팩, AVID 퀵타임에 우호적이었던 퀵타임 협력사들을 겁박하여 협력관계를 끊도록 종용했다.


또한 MS 자신의 미디어 파일을 표준화를 시도한다. 기존의 낡은 AVI 컨테이너 파일을 대체할 ASF(Advanced Streaming Format)이었다. AVI 기술적으로 형편없었기에 MS에서도 기술에 기대가 없었다. 형편없는 퍼포먼스로 병신같은 Active라는 이름을 버리고 ActiveMovie DirectShow 변경한다. 당시 MS 게임시장에서 선전하고 있었기에 관련 기술 DirectX, Direct3D에서 Direct라는 이름을 가져와 후진 기술을 세탁하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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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S 퀵타임을 없애기 위해 ASF 포멧을 MPEG-4사양의 ISO 표준으로 추진한다ASF 코덱은 WMV(Windows Medio Video) WMA(Windows Meida Audio)였다 파일 포맷은 기능적으로 훌륭하지도 않고 호환성이 없었다하지만MS에게는 독점적 지위가 있었다.


애플은 MS 맞서기 위해 SUN, IBM, Oracle, Silicon Graphics, Netscape 연대하여 퀵타임파일 포맷을 ISO 제출하였고 1998 2 ISO MPEG-4 표준으로 퀵타임을 선택하였다기술로서는 당연한 수순이었다.



 

7. 최후 공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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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AF 로고

 

MS 빡칠때로 빡쳤다처음에는 공허한 협박에머물렀던 오쏘링 툴에 MS 집적 뛰어들 것을천명했다이름하야 AAF(Advanced Authoring Format)애플 퀵타임이 가진 진정한 아니 마지막 남아있는 가치에 대한 공격이었다하지만 이번에도 기술로써가 아니라 적인 애플과 업계 협력사에 협박으로써였다.


1998 6 MS 애플에게 퀵타임 기술에 포기하라고 직접적으로 제안(강요)하였다애플은 코덱 개발에 있어 MS 협력크로스 라이센스하여야 하고윈도우즈에서 퀵타임 대신 MS DirectX -타임 플랫폼 채택MS 독점적 스트리밍 기술 채택AAF 오쏘링 포맷 채택  그냥애플보고 퀵타임을 스스로 자결하라 하였다관련 업계는 껍데기만 남은 애플보다는 공룡 MS말을 따를  밖에 없었다.


좃밥인 애플은 어도비  퀵타임 기반으로 오쏘링 툴을 만든만들 능력이 있는 기업들에게 기댈 수만도 없었다당시 어도비는 웹에서 뜨고있는 플래시 기술을 가지고 있는 매크로미디어를 인수한다하지만 최초의 미디어 오쏘링 ,프리미어를 만든 천재 개발자 랜디 유블리스의팀은 인수에서 제외 되었다 이유는 기존에어도비에 합병한 엘더스가 만든 퀵타임 기반 오쏘링 툴인 AfterEffects 때문이었다어도비는 미디어보다는 출판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엘더스 인수도 출판 편집 프로그램 페이지메이커 때문이었다.) 잡스는 퀵타임을 살리기 위해관련업계에 기댈  없자 어도비한테 팽당한 랜디 유블리스 팀을 애플로 친히 모셔 온다매크로미디어에서 일했던 애플 마케팅 책임자  실러의 역할이 컸다애플은 발빠르게 움직였고 그래서 나온 오쏘링  프로그램이 바로 Final Cut Pro이다. (추후 상품가치전쟁에서 다룰 예정이다.)


잡스는 MS 제안을 단칼에 거절하였다애플과잡스는 퀵타임 기술을 지켰다지킨   아니라  기술로 애플 르네상스를 이끌어   있었다.

 



8. 무너진 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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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해적판 Windows 업그레이드 대상이다.

 

MS VfW 멀티미디어 기술을 지배하려고 하였다MS 경쟁자를 죽이기 위해 관련 기술을도용하고 독점적인 지위를 사용하여 경쟁자를시장에서 내몰았다CP/M, Macintosh, Lotus, Wordperfect, Netscape   무너트림으로써MS 절대자가 되었다그리고 IT 업계는 좋든싫든 MS 절대자임을 인정하였다MS 전략은 어느 누구도 뛰어넘을  없었다. 80년대 MS 선택적 결정은 90년대까지 유효했다.


MS 애플은 1 GUI 전쟁에서 MS 완승이었다전쟁이라기 보다는 시장 강자였던 애플이 10년간의 무능함으로 빚어진 결과였다하지만 6년에 걸친 2 전쟁에서 애플은 어렵게 승리하였다의미있는 승리였다 결과 애플은 MS 넘어서는 기반을 구축할  있었다.


한번 무너지기 시작하자 MS 전략은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90년대까지 통용된 전략이 애플 퀵타임에 먹히지 않자 이후 구글에게도 먹히지 않았다그러자 MS 협력적인 회사들이 하나둘씩멀어지기 시작했다특히 하드웨어 회사들은 이제 더이상 MS 친화적이지 않게 되었다모바일에서는 MS 입지는 더욱 좁아졌다.


애플과 구글에 의해 MS 독점적인 지위에서 내려왔고 90년대까지 완벽했던 MS 전략은 폐기하게 된다이제 MS 경쟁자를 기존 전략으로는절대 이길  없게 되었다.


Video for Windows MS 멀티미디어  아니라 IT 산업 전반에 걸쳐 위상이 떨어진 것이다물론 지금도 MS OS Office에서 최강자 이다하지만 Windows 10 무료 업그레이드iOS Office 무료 배포가 90년대였다면 가능했을까?







지난 기사


[1편 : 90년대 MS Windows와 1984년 Apple Macintosh System Software ]

[2편 : 1979년 Sony Walkman과 2001년 Apple iPod]

[3편(上) : 1977년 Apple II와 1981년 IBM PC]

[3편(下) : 1977년 Apple II와 1981년 IBM PC]

[4편 : 2004년 Facebook과 2006년 Twitter]

[5편 : 90년대 MS Excel과 1983년도 Lotus 123]

[6편(上) : 90년대 MS Word와 1989년도 한/글]

[6편(下) : 90년대 MS Word와 1989년도 한/글]

[7편(上) : 1981년 MS-DOS와 1974년 CP/M]

[7편() : 1981년 MS-DOS와 1974년 CP/M]

[8편 : 2001년 Apple Store와 성공 못한 경쟁자들]

[9(上) : 2001년 iTunes와 Windows Media Center]

[9편(下) : 2001년 iTunes와 Windows Media Center]

[10편() : 애플의 QuickTime VS MS의 Video for Windo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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