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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03. 26. 목요일

김현진입니다









너나 할 것 없이 

우리는 모두 몸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간다.


나를 스쳐 간 당신의 몸, 

당신의 이마를 한때 어루만졌던 누군가의 손, 

아스팔트 위에서 사정없이 깎여나가던 누군가의 피와 살,

철탑에서 얼거나 타들어 가는 몸들, 

당신이 나를 낚아채 주길 바라면서 

숨죽여 뺨을 대 보았던 당신의 쇄골.


몸은 당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은밀한 삶을 알고 있다.

이것은 그 '몸'에 대한 이야기다.

 







 



남의 허리 아래 이야기는 언제나 재미있다. 그런데 허리 아래까지 가지도 않았는데 재미있던 적이 있는데, 내용의 선정성 때문이 아니라 소재의 참신성 때문에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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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 인사가 업무상 알고 지내던 여성과 오랫동안 원만하고 깍듯한 공적 관계를 유지해 오던 중, 환한 대낮에 회사 카페에서, 일 이야기를 마무리 짓고, 커피를 마저 마시면서, 어떠한 치근덕거리는 성적 뉘앙스나 조짐 없이, MOU 체결 계약서라도 내밀 것처럼 스마트한 태도로, 이렇게 말했다. 아주 젠틀하게.

 

"하실래요?"

 

전후좌우 없이! 구질구질한 서두도 없이! 우중충한 호프집도 아니고, 자외선이 통유리 너머 하얗게 쏟아져 들어오는 한낮의 카페에서! 그 인사는 이후 공적 항의를 받은 것 같은데 거기에도 순순히 '죄송하다 잘못했다'라고 한 모양이었다. 그토록 깔끔하게 본론만 제시해서 듣는 우리까지 당혹케 할 수가. '사람 뭘로 보고 이러세요?' 하면 죄송하다고 해버리면 그만인데다 '지금 뭐라고 하셨어요?' 하며 테이블 엎기도 좀 뭣하다. '토핑 올려 드릴까요?'라는 질문에 괜찮다며 사양하고 없던 일처럼 하기에는 속이 뒤집어질 것 같고, 여하튼 참신했다.

 

바들바들 떨며 지금 뭐라 그랬냐고 하면, 저쪽에서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홀짝이며 '실례했습니다' 뭐 이렇게 나갈 수도 있으니 너무나 세련된 것도 같고, 고도로 악질인 것도 같고.여하튼 알콜 기운 하나도 없이 대낮에 보송보송한 정신으로 그렇게 던질 수 있다는 것에 모두 경탄하던 중에 누군가 말했다.

 

", 이건 굉장하다. 성희롱. 섹슈얼 허래스먼트. 이건 너무 흔하단 말이야. 우리 사회에 너무 보편화가 됐잖아. 근데 이건 뭐 새로운 지평을 개척한 거 아니야. 이걸 뭐라 그래야 돼? 성제의? 섹슈얼 서제스천. 그래 성제안! 이건 완전 새로운 개념이야. 인물이네."

 

그랬다. 신인류의 탄생이었다. 세상이 발전할수록 남자들 단수 늘어나는 건 한이 없다. 그것도 예쁜 애들이 자꾸 예뻐지듯, 똑똑한 놈들이 더 똑똑해지는 것일 테니 남녀 불문 상위 5%이야기인 건 어쩔 수 없겠지만. 나머지 95%끼리는 저 상위 5%의 연놈들한테 울고 데이고 갖다 바치고 휘둘리면서 못 잊고, 또 우리끼리는 계산기 열나게 두드리며 니가 잘났네 내가 손해네, 서로 멸시하고 물고 뜯고 그런다. 마음속에는 저마다 저 5%의 연놈들의 무덤 한둘씩 파묻고 정기적으로 제사까지 지내고 그러면서, 근데 이것들은 백악기 정도 되는 마음의 지층에 깊이 파묻어놔도 내가 언제 죽었냐는 듯 상큼한 얼굴로 부활도 잘한다. 망할 것들. 어쨌거나 내 친구 하나는 '성제안'의 개념에 대해 내가 설명하자 한심하다는 얼굴로 물었다.

 

"그건 그렇게 복잡한 일이 아니야. 그래서 사과했다는 그 사람, 구리게 생겼지?"


"모가 엄청 멋지고 그렇지는 않지..."


"그게 문제였던 거야. 걔가 멋있었어 봐. 땡큐지. 대낮에 하자고 그러면 완전 고맙지. 나 같으면 두 손을 꼭 붙잡고, 아휴, 모텔비도 제가 낼게요, 그랬겠다. 걔가 안 멋있으니까 성적 수치심 느끼고 그러는 거야. 남자들이 의외로 이걸 되게 모르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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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우면 일케 생기시덩가...

(영화 '캡틴아메리카: 윈터솔저'의 한 장면)



친구 말로는 남자들하고 터놓고 이야기하다 보면 그들의 고민이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이게 성희롱의 범주에 들어갈까? 하는 생각을 일상적으로 하고 있더라는 것이다. 나는 남자에 대한 기대가 너무 없는지, 이런 고민도 하는 요즘 남자들이 착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친구는 억울해 죽으려고 했다. 그들은 친구에게 어떤 가이드라인을 원해서 이만큼 가면 너무 가는 거고, 요만큼 가면 적당한 거고, 이런 친절한 충고를 원했는데 친구는 그때마다 간명하게 설명해 주었다고 한다.

 

"네가 멋있잖아? 그럼 성희롱 아니야. 근데 대부분 안 멋있거든."

 

친구 말로는 리트머스 시험지처럼 너무 간단한데 모두 화를 낸다는 거였다. 이게 친구가 억울하다는 포인트였다. 진실을 원해서 진실을 줬는데 왜 화를 내냐는 것이다. 나도 대답해 줄 수밖에 없었다. 그건 진실을 줬기 때문이지. 사람들은 진실을 주길 원하지 않아. 더욱이 남자들은 여자들에게 진실을 듣고 싶지 않지. 특히 본인에 대한 진실이라면. 그 반대도 마찬가지고. 친구는 담배를 아주 아껴 피우면서 열변을 토했다.

 

"성희롱인지 뭔지 헷갈린다고요? 네가 멋있으면 다 괜찮아요! 성희롱으로 걸리기 싫어요? 네가 멋있으면 돼요!"

 

친구가 하도 기세등등해서 나도 왠지 같이 대가리 박고 반성해야 될 것 같았다. 나도 누구 집적거리고 싶을 때 마음에 굳게 새겨야지. 넌 쟤한테 저럴 만큼 괜찮지 않다고. 성희롱 가해자가 되는 것을 피해 가는 확실한 방법은 아마 이거 성희롱인가? 그냥 질러 볼까? 아이 성희롱인가? 싶을 때 속으로 열 번 외우는 거지 싶다.

 

당신은 당신이 생각하는 만큼 괜찮지 않습니다.

 

지난 댓글들을 보던 중 '왜 딴지일보 같은 마초 소굴에 글을 쓰고 앉았냐'는 질문이 있어서 멍하니 생각해 보았다. 일단 나는 조중동이 아닌 한 글을 달라는 걸 사양하지 않는데다, 딴지가 특별히 마초같다고 느끼지 못했다. 처음에는 아니 민족정론지 딴지일보가 어디가 어때서, 하고 생각했으나 이게 너무 낡은 유머인 걸 깨닫고 반성했다. 물론 내 글에 댓글을 달아 주는 분들이 딴지스 중에서도 아주 덜 마초적인 분들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긴 하다. 하나같이 다정한 사람들 같으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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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한 딴지일보의 이미지

(영화 '슈퍼배드 2'의 한 장면)



딴지가 마초스럽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어떤 자들의 소굴에 비해 '특별히' 더 악질적으로 마초스러운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훨씬 더 점잖고 지성적인 소굴에서 칼날에 더 깊이 찔린 적이 오히려 많은 것 같다. 게다가 그런 데는 남모르게 푹 찌른다. 수가 얕은 마초들은 피하기 쉬워서 귀엽기나 하지, 정치적으로 올바르고 젠더에 있어 중립적(혹은 그렇다고 스스로 굳게 믿어 마지않는)인 분들이 푹푹 찔러대면 이건 뭐, 아이언메이든이려니 하면서 푹푹 찔릴 수밖에 없다.


이왕 마초 프렌들리로 보일 바에야 누이 같은 마음으로 성희롱의 길을 잘못 들려 하는 딴지스들을 말려야겠다.

 

안돼, 하지 마. 우린 그래도 될 만큼 괜찮지 않아. 지금 섹드립 치면 쟤가 화낼까봐 걱정돼? 안돼, 하지 마. 우린 안 멋있잖아. 원빈은 해도 괜찮아. 근데 아니잖아. 섹드립 치지 마. 하자고 막 그러지 마. 쟤가 나보고 성희롱이라고 화내는 게 이해가 안 돼? 우린 안 멋있잖아. 그래서 걔들이 화내는 거야. 걔도 그렇게 안 예쁘다고?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야. 어쨌든 새봄엔 멋있어지자. 그러면 돼. 그러면 언제든 하자고 해도 되냐고? 이건 약간의 업계비밀인데, 여자들은 저렇게 한번 달라는 놈들한테 상당히 지쳐 있어.

 

근데 그것보다 더 화가 나는 거는 한번 달라고 지를 용기도 없으면서 이거 성희롱인가 섹드립인가 고민하는 척 살짝 찔러보고는 아뜨뜨 이러면서 튈 태세를 갖춘 놈들이야. 이렇게 간보는 애들이 진짜 피곤하거든. 내 친구가 그러는데 그냥 멋있게 있으래. 중간에 찔러보고 이러면 김 팍 새서 그 때부터 절대 멋짐의 길로 돌아갈 수가 없대.


<하이눈>에 나왔던 영화배우 게리 쿠퍼는 말이야, 여자를 만날 때 딱 세 마디만 썼대.

 

1), 2)그렇군, 3)그래서 어떻게 됐는지 말해줘.

 

그녀에게 말을 하게 둬. 그러다 보면 잘 될거야. 그건 게리 쿠퍼니까 된 거라고? 그럼 당연하지. 멋진 놈이 한 걸 따라해야지. 내가 추가하고 싶은 대사 4)는 개인적으로 좀 치트키라고 생각해.

 

4)그때 기분이 어땠어? OR 어떤 느낌이었어?

 

야한 얘기 아니니까 그리로 가지 마, 워워. 근데 사실 우리도 다 이런 말 듣고 싶잖아. 내가 왜 갑자기 딴지체로 바뀌었지? 어쨌거나 봄이니까 핑크빛으루 살자. 그러려면 일단 마음을 순백으로 비워야 돼. 나는 내가 생각하는 것만큼 괜찮지 않다. 이게 마음을 비우는 주문이여. 리셋의 주문을 외우고 봄의 핑크색 물감을 붓자. 일단 나부터 어떻게 좀 해야겠어.


누군가가 성희롱으로 안 걸리려면? 멋있으면 돼, 멋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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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진입니다


편집: 딴지일보 챙타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