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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03. 31. 화요일

정치불패 도비공







편집부 주


아래 글은 정치불패에서 납치되었습니다.

딴지일보는 삼진아웃 제도의 유구한 전통을 이어온 바,

독투불패(독자투고 게시판 및 딴지스 커뮤니티)에 쓴 필자의 글이

3번 마빡에 올라가면 필진으로 자동 등록됩니다.







19세기 말 프레데릭. W. 테일러는 기업 규모의 확대와 노사분규의 증대로 노동생산성 향상이 사회적 화두로 떠오르자, 혁신적인 과학적 관리기법을 고안해낸다. 바로 현대 자본주의 생산관리 기법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테일러 시스템’이다. 테일러 시스템을 쉽게 설명하자면, 성과가 우수한 노동자의 움직임을 꼼꼼히 분석해서 낭비하는 동작을 최소화하고 표준적인 움직임을 만들어서 모든 노동자에게 그것을 따르게 하는 시스템이다.


구소련에서도 이와 유사한 ‘스타하노프 방식’이라는 일종의 근로 관리 기법이 존재했다. 탄광 노동자 스타하노프가 다른 노동자들의 평균 채굴량의 무려 열네 배나 되는 석탄을 채굴하자, 소련은 그를 사회주의 노동영웅으로 치켜세우고 전국의 모든 노동자에게 그의 방식을 배울 것을 요구했다. 아무리 뛰어난 근육의 소유자라 할지라도 한 개인의 근력이 평균치보다 열네 배나 뛰어날 수는 없다. 스타하노프의 놀랄만한 채굴량은 새로 도입된 채굴 기계의 덕이지만, 소련 공산당은 그 사실에는 침묵했다. 아마 악질 자본가의 전형적인 케이스가 소련 공산당일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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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일러 시스템과 스타하노프 운동에서, 가장 우수한 노동자의 작업방식을 표준으로 만들어 전체 노동자에게서 똑같은 성과를 이끌어내고자 하는 효율성의 논리를 발견할 수 있다. 효율성의 논리는 현대 자본주의를 관통하는 하나의 축이라 할 수 있다. 자본주의는 경쟁에서 살아남아야만 도태되지 않는 시스템이기 때문에 끊임없는 혁신은 자본주의가 강요하는 정언명령이다. 누천년을 거치며 인간이 터득한 지혜는 혁신의 강요 아래 쓸모없는 것이 되고 오래된 것은 곧 ‘낡음’을 의미한다. 요셉 슘페터가 주창한 창조적 파괴라는 개념은 이를 가장 잘 설명하고 있다. 기존의 것을 파괴하고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이들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비정한 정글이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체제이다.


사실 창조적 파괴는 파괴당하는 쪽에 속하지만 않는다면 커다란 유용성을 제공한다. 오늘날 우리는 소수 부유층을 제외하고는 한 땀 한 땀 손으로 만들어낸 옷을 입지 않는다. 방적기가 처음 개발되었을 때 많은 이들에게 유용성을 제공했다. 수많은 소비자가 훨씬 싼값에 괜찮은 품질의 옷을 구매할 수 있었고, 생산자 역시 대량생산과 박리다매를 통해 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경제적 성취를 이루어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의 옹호자들은 이것을 일컬어 모두가 이익을 보는 ‘win-win 시스템’이며, 공리주의가 말하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구현하는 방법이라고 추켜세운다. 하지만 그런 win-win 시스템의 이면에는 평생을 갈고 닦은 기술이 한 순간에 쓸모없어져 실업자로 전락한 장인이 있다. 자본주의 예찬가들이 장인을 대하는 방식은 철저한 무시다. 그들이 관심을 보일 때는 실직한 장인들이 힘을 합쳐 공장의 방적기를 부술 때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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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 이론의 창시자 '제러미 벤담'

하지만 행복을 얻는 자가 누구일 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위해 소수가 희생되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공리주의 논리의 아킬레스건이다. 네로 황제 치하에서 기독교인들을 콜로세움에 세우고 사자와 사투를 벌이게 하는 상황을 가정해보자. (실제 네로가 그 정도의 폭군은 아니었고, 반대파들이 그를 몰아내기 위해 내세운 조작된 소문에 불과하다는 설도 있지만, 이야기의 진행을 위해 무시하도록 하자) 네로 황제는 기독교인들의 살점이 사자의 어금니에 찢겨나가는 모습을 보고 최고의 엑스터시를 느꼈을 것이고, 그 자리에 모인 관중들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공리주의 식으로 말한다면 이것이야말로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 실현된 상태가 아니겠는가. 물론 공리주의 내부에도 ‘J.S. 밀’과 같은 이는 ‘양적 쾌락’과 ‘질적 쾌락’을 구분하며, 저속한 쾌락은 진정한 쾌락이 아니라고 변호하지만, 양자를 구분하는 기준도 명확하지 않을 뿐더러 오늘날 자본주의는 일차적인 의미의 공리주의 논리를 채택하고 있다.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위해서는 소수의 희생은 눈감아라.’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정글 자본주의가 암암리에 대중들에게 주입시키는 자본의 논리이다. 한미 FTA가 우리나라 제조업에 기회라지만, 확신하기 힘든 미래의 일이고 농민들은 당장 값싼 미국산 농산물과 경쟁해야 한다. 그러나 정부는, 당연하게도 그것이 자본주의의 논리이기 때문에, 소수 농민의 피해 따위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오직 그들이 죽창을 들고 트랙터를 몰며 길을 점거할 때만 날쌔게 반응한다.


창조적 파괴가 의류 산업과 같은 한 영역에서만 발생한다면, 어쩌면 소수 장인들의 희생은 눈감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문제는 자본주의의 창조적 혁신이 모든 영역에서 발생한다는 점이다. 개별적인 분야에서 발생하는 희생자는 비록 소수일지 모르지만 그것이 전 영역으로 확장되면 결국 극소수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희생자가 될 수밖에 없다. 전자 출판은 식자공을 몰아냈고 활자 인쇄술과 관련된 것을 쓸모없게 만들었다. 공장에 도입된 조립 로봇은 컨베이어 벨트에 늘어섰던 수많은 노동자들에게 실업 급여를 지불했다. 기계화의 진행으로 오늘날 육체노동의 거의 전 영역에서 노동자들의 지위는 장인에서 단순 조립공으로 끝없는 추락을 거듭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을 전문가들은 ‘고용 없는 성장’이라는 순화된 용어로 표현한다. 경제 성장이 고용을 늘려 국가를 부유하게 만들 것이라는 아담 스미스의 순박한 견해는 벌써 유통기한이 지났다.


오늘날 청년 실업 문제의 근원에는 이와 같은 자본주의의 자기 파괴적인 속성이 자리 잡고 있다. 기계로 대체할 수 없는 소수의 창조적인 작업이나 관리직을 제외한 나머지 대부분은 부품이나 다름없는 단순 작업에 종사하는 비정규직이다. 사회 지도층 인사들은 스티브 잡스를 본받으라고 청년들을 다그치지만 애플의 수만 명 직원 가운데 스티브 잡스는 오직 한 사람에 불과하다는 것에는 침묵한다. 잡스를 제외한 애플 직원들은 다른 회사 직원과 별다를 게 없다.


물론 애플의 프로그래밍과 디자인은 ‘아직까지는’ 기계로 대체할 수 없는 영역이기 때문에 일반적인 기업 종사자에 비해 상대적으로 후한 대접을 받지만, 제조 영역으로 가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애플 역시 제조 단가를 낮추기 위해 중국에 공장을 건설하고 값싼 인건비로 노동자를 부려먹는 지극히 평범한 자본주의 체제 하의 기업이다. 전국의 모든 고등학교 일진들을 모아놓으면 그 안에서도 빵셔틀이 생길 수밖에 없는 것이 승자 독식 게임의 원리이다. 이런 승자독식 게임 체제는 그대로 내버려두면서 청년들에게 스티브 잡스가 되라는 말은 무책임하다. 그런 이들에게는 이렇게 대꾸하는 것이 옳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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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청와대)


“네가 한 번 대통령이 돼보지 그래?”



얼마 전 만화가 윤서인이 조선일보에 연재하는 <朝이라이드>라고 하는, 기도 안 차는 웹툰을 보았다. 나름 청년 실업 문제에 해법을 제시하겠다고 팔뚝을 걷어붙인 모양인데, 그것을 보고 나는 ‘도를 넘어서는 저열함’은 실어증을 유발할 수도 있다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대략 삼십 분 동안 머릿속이 백지처럼 하얗게 변했고, 아무런 단어도 입 밖으로 낼 수 없었다. 하고 싶은 말 다했다가는 고소한다고 날뛸지 모르니 더 이상은 말하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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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윤서인의 <朝이라이드> 42화 중)



이 웹툰의 제목은 무려 ‘인간의 의지를 믿는다’다. 대문에는


인간은 가만히 누워 주는거나 받으면서 징징거리는 존재가 아니다.

그런데 요즘은 난 주는거나 받겠다고 당당하게 선언하는 사람들이 몇몇씩 눈에 띈다...

그것도 엄청 젊은 사람들이 창피하게도 그런다 ㅠㅠ


라는 문구를 적어놓았다.


이 아둔한 내용에 그림체마저 유치한 웹툰 하나 씹자고 서두에서 길게 자본주의 체제를 논한 게 아니다. 이것이 윤서인이라는 개인의 아둔한 아이디어가 아니라 소위 말하는 보수 우파들에게 보편적으로 퍼져 있는 일종의 정서이기 때문이다. ‘우리 젊었을 때는 중동 나가고 월남전 나가고 갖은 고생 하면서 살았는데 요즘 젊은이들은 나약해. 청년 실업 그게 뭐 대수야? 자기만 노력하면 되지’ 뭐, 이런 정서.


사실 나의 외삼촌도 중동에 몇 년 다녀왔고, 그 때 기반을 잡았다. 지금은 빌라도 소유하고 있고 먹고 사는 걱정은 하지 않는 분이라 옛날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지는 대강 알고 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분들에게 ‘각주구검’이라는 고사를 아는가 물어보고 싶다.


서독에 광부 파견하고 중동에 건설 근로자 보내던 6,70년대는 우리 경제 규모가 워낙 보잘 것 없었기 때문에 그런 것들이 국가적으로나 개인적으로 큰 의미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전 세계적인 자본주의 퇴조기이다. 이것이 일시적인지 영구적인지 판단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이제 더 이상 매력적인 해외 진출이 가능한 곳은 얼마 없다. 웬만한 선진국에서는 이주노동자 문제가 어느 나라나 심각한 사회 문제이기 때문에 레이디 가카에게 ‘소중한 아버지의 추억’으로 남아 있는 ‘독일 광부 파견’은 지금 시대에서는 이루어지기 힘들다. 게다가 지나간 과거는 대체로 미화된 기억으로 남는 법이다. 여담이지만 중동에 노동자들이 돈 벌러 나가서 ‘나라가 텅텅 비었던’ 7~80년대에, 남편이 해외에서 부쳐주는 돈으로 생활하는 전업주부만 노리던 제비족들이 기승을 부려 사회 문제가 되기도 했다. 어떤 일이 좋은 결과만을 가져오는 경우는 없고 항상 반대급부라는 것이 생기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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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블로그 '딴따라 스피릿&리뷰')



‘100만 원 주는 사람에게는 150만 원어치 일을 해주어 미안하게 만들자’라는 발상은 작가가 제대로 된 직장생활을 해본 적이 있는지 의심케 만드는 대목이다. 서두에서 테일러 시스템과 스타하노프 운동을 공연히 인용한 것이 아니다. 가장 우수한 노동자의 능력을 모든 노동자에게 강요하는 것이 자본주의를 관통하는 논리라는 것을 명확하게 밝히기 위해서였다. 100만 원을 받는 사람이 150만 원어치 일을 하면, 대부분의 고용주는 그 사람의 업무 방식을 매뉴얼로 만들어 다른 이들에게 배우도록 강요한다. (미안함을 느끼는 고용주가 있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지는 않겠다만) 나이도 그리 많이 먹지 않은 사람이 무슨 80년대 영등포 마찌꼬바에서나 통할 법할 이야기를 들먹거리며 청년들에게 꼰대질 하는 걸 보자니 참으로 민망할 따름이다.


나의 개인적인 경험도 마찬가지이다. 예전에 내가 다니던 회사가 어려워서 사람들이 하나씩 자의반 타의반으로 나가게 되었다. 그들이 맡았던 업무는 내게 주어졌는데, 나중에는 네 사람이 담당했던 업무를 나 혼자 담당하는 상황이 되었다. 당시의 나는 내가 생각해도 놀랄 정도로 업무를 쪼개고 시간 배분을 해서 그 모든 것을 아슬아슬하지만 차질 없게 수행했다. 하지만 월급이 오르거나 보너스를 받는 일은 없었다. 혹시 그 점에 대해 예전 고용주가 지금도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게다가 나중에 진행하던 프로젝트가 끝나자 고용주는, 물론 대단히 미안해하는 기색으로 나에게 권고사직을 종용했다. 그 사람이 미안하게 생각하든 어쩌든 나로서는 鳥빠지게 착취당하고 팽 당한 사건에 불과하다.
 
지금 하고 있는 건설 현장 일도 마찬가지이다. 비계공은 6m 강관 파이프를 두 개 나르는 것이 암묵적인 표준 노동량이다. 나이 드신 분들은 두 개도 무겁다고 못 드는 사람도 많지만, 내 경우에 그럭저럭 들고 다닐 만하다. 시험 삼아 들어보니 네 개까지는 들 수 있었고, 다섯 개부터는 사람 할 짓이 아닌 것 같아 포기했다. 물론 다섯 개 들고 나르는 사람도 있고 어쩌다 여섯 개까지 드는 사람도 있다지만, 직접 보지는 못했다. 누가 그 정도 들고 다니면 두고두고 화젯거리가 되니까.


아무튼 평소에는 두 개씩 들고 다니지만, 간혹 바쁠 때는 세 개를 짊어지기도 했는데 그러면 주변 동료들이 반드시 한 마디씩 한다. ‘어이, 이 친구야 자네 힘자랑 때문에 나까지 세 개씩 들어야 하잖아.’ 지금은 나도 어지간한 일 아닌 이상 파이프는 두 개 이상 나르지 않는다. 그렇게 날라봐야 일당이 올라가는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들에게 민폐만 끼치기 때문이다. 정당한 노동에 정당한 대우가 보장된다면 정말 구제불능이 아닌 이상 인간은 누구나 노력한다. 재벌 총수들이 부지런히 외국 돌아다니고 여기 저기 시찰하면서 자신의 열정을 과시하지만, 그렇게 하고도 손에 쥐는 돈이 최저임금 수준에 불과하다면 제 아무리 열정적인 사람도 그만 두거나 게으름을 피우게 되어 있다.


앞의 만화는 그렇다 치고 최저임금과 관련된 이 만화에 이르러서는 급기야 어디 조용한 산사에 들어가 한 삼 년 묵언수행을 하는 것도 가능하겠다는 생각이 들만큼 말문이 막혔다. 가히 ‘mouth breaker’라 불러도 손색이 없는 내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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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윤서인의 <朝이라이드> 40화 중)



도대체 빅맥지수가 뭔지 알고나 하는 말인지. 이 어처구니없는 논리를 이토록 당당하게 말하는 용기는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명량해전을 앞둔 이순신 장군도 두려움을 극복하려 고생하셨다는데, 이 콘크리트처럼 단단한 간담은 타고난 것인지 모르겠다. 그냥 이 웹툰에 대해서는 뭐라고 비평하는 게 우스운 일이 돼버리니까 포기한다. 이건 뭐, 엥겔 계수를 두고 입 짧은 사람은 선진국 라이프스타일이라고 말할 기세니 원….


예전에는 보수 우파가 나쁘다고 생각했는데, 여러 분들 덕분에 요즘엔 인식이 많이 바뀌었다. 서울대 경제학과 이준구 교수의 글을 종종 읽는데, 그분의 기본 노선은 보수 우파라 할 수 있다. 분명 그 분은 시장경제 옹호자이기 때문에 좌파로는 엮을 수가 없는 사람이다. 하지만 MB시절에 4대강 사업에 반대하자, 그를 일컬어 강남 좌파라 부르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4대강 사업은 좌파, 우파를 떠나서 그냥 미친 짓이었고, 따라서 보수 우파가 비판해도 하등 이상할 일이 없었지만, 진영논리에 따라 이준구 교수는 졸지에 맑스를 신봉하는 좌파로 낙인찍혔다.


본질적인 문제는 보수 이데올로기에 있다기보다, 그냥 무식한 인간들이 뻘소리하는 것을 보수라고 착각하는 우리 사회의 통념에 있는 것 같다. 무식한 게 죄는 아니지만, 무식한 주제에 분에 넘치는 일을 하려고 하고 자리를 탐낼 때부터는 범죄의 영역에 발을 디딘다. 접골이나 몇 번 해본 실력으로 외과 병원을 개업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기본도 아닌 기초적인 소양도 없는 주제에 사회적인 이슈에 감 놔라 배 놔라 떠드는 인간들이 너무 많아 탈이다. 물론 시정잡배가 술자리에서 떠드는 소리라면 웃고 넘길 수 있지만, 적어도 언론매체에서, 그것도 구독률 1위라는 신문에서 이런 수준의 개똥철학을 전파하는 것은 범죄나 다름없는 일이다.










정치불패 도비공


편집: 딴지일보 챙타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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