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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우파의 노무현

2015-09-22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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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에 타계한 장기수 출신의 한학자 노촌 이구영 선생은 노무현을 두고 “보수를 표방해도 진보적 입장을 가질 사람이고 또 진보를 표방해도 보수적 색채를 완전히 버릴 사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면서 “386세대라 하는 젊은 정치인들이 국회에 들어갔지만 되레 물이 들어 할 일을 제대로 못 하고 보수로 떨어져 나간 것과는 비교가 되는 인물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관련기사: 오마이뉴스, <특별인터뷰> 박치음 교수-노촌 이구영 선생 '통일대담')


노촌이 평가한 노무현은 대통령 노무현이 아니었다. 아직은 대통령 후보 시절이었던 2002년 5월의 노무현이었다. 노무현은 당장 표를 얻는 데에 눈이 멀어 지키지 못할 약속을 왼쪽 성향과 오른쪽 성향의 유권자 모두에게 남발하지 않고 중심을 지키는 지도자임을 노한학자는 꿰뚫어보았다.


노무현도 자신의 운명을 꿰뚫어보았다. 민주당 대선 후보로 결정된 날 밤 당선자 노무현이 덕평 수련원에서 지지자들에게 앞으로 나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할 일이 많은데 여러분은 무엇을 할 것이냐고 물었다. 지지자들이 “감시, 감시”를 외치자 노무현은 “여러분 말고도 흔들 사람 꽉 있습니다. 뒤통수 칠 사람도 꽉 있습니다. 앞길을 막을 사람들도 꽉 있습니다” 하더니 “(저도) 감시도 하고 (저를) 흔드는 사람들도 감시 좀 해주세요.” 하며 빙긋 웃었다.


386 철새 김민석을 등에 업은 정몽준이 대선 전날 밤 노무현과의 결별을 선언한 것은 국정원장, 총리, 핵심 기관장을 비롯하여 권력의 절반을 내놓으라는 요구를 노 후보가 낙선할지언정 밀실 담합은 국민에 대한 배신이라며 여러 번 거부하여 불만이 쌓였던 차에, 선거 전날 저녁 종로 유세장에서 ‘차기 대통령은 정몽준’이라는 플래카드가 걸린 것을 보고 노 후보가 정동영, 추미애도 훌륭한 지도자라며 띄워주는 데에 반발했기 때문이었다는 분석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그날 밤 정몽준 쪽은 “북미 간에 핵 위기로 싸움이 나면 전쟁으로 번지지 않도록 막아내야 한다. 한국이 중심을 잡아야지 끌려다녀선 안 된다”는 노 후보의 종로 유세 발언을 공식적인 철회 이유로 들었다. 미국은 북한과 싸울 이유가 하나도 없으며 한국을 도와주는 우방인데 미국에 휘둘리지 말고 한국이 중심을 잡아야 한다는 노 후보의 발언이 양당의 정책 공조 정신에 위배된다는 것이었다.



"국민여러분 애석한 말씀을 드리겠다. 정몽준 대표는 노무현 후보에 대한 지지를 철회한다. 18일 명동합동유세에서 노무현 후보의 연설을 들었다. 노무현 후보가 미국과 북한이 싸우면 우리가 말린다고 했다. 이 발언은 매우 부적절한다. 민주당과 통합21의 정책공조 정신에도 어긋난다. 미국은 우리의 우방이다."


국민통합21 대변인 김현




국민의 안위를 중심에 놓고 사유하는 노무현이 국민을 배신하느니 낙선자가 되겠다며 떡고물을 던져줄 기미가 조금도 보이지 않자, 표면적으로 내세운 정몽준 쪽의 한미 동맹 훼손론이었을 것이다. 주변 국가들과의 관계에서 한국이 중심을 잡아야 한다는 것은 주권 국가의 대통령이 되겠다는 사람의 입에서는 당연히 나와야 할 발언이다. 더욱이 우파를 자처하는 사람이라면 정치인이건 유권자건 박수를 쳐주어야 마땅한 발언이다. 좌우는 여러 가지로 구분할 수 있겠지만 좌파는 인류애를 지향하고 우파는 조국애나 민족애를 지향한다는 분류 기준을 받아들이자면 말이다. 그러나 주권국이기를 거부하는 이런 논리를 지도자가 되겠다던 사람이 유권자 앞에서 정치적 결별의 이유로 당당히 내세워도 웃음거리가 안 될 만큼 한국은 중심부가 미국에게 철저히 접수된 나라다.


패전 뒤 7년 동안 미국의 점령 통치를 받은 일본도 미국을 추종하는 나라다. 그러나 일본은 중심이 완전히 미국에게 접수된 나라는 아니다. 이른바 적극적 평화주의를 내걸고 아베 정권이 추진하는 집단자위권을 우려하고 비판하는 목소리가 우파 쪽에서 거세게 나오고 있어서다. 그 대표적 인물이 한국의 국방부에 해당하는 방위성 출신인 야나기사와 교지다. 그는 2004년부터 2009년까지 아베를 포함하여 고이즈미 등 네 명의 일본 총리를 보좌하여 일본의 안전보장과 위기관리를 총괄해왔다. 자위대의 인도양 해상보급 활동과 이라크 재건 활동도 그가 입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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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방위성 고위 관리 야나기사와 교지(柳?協二)


야나기사와 교지는 2014년 초부터 방송 출연과 강연 외에도 <망국의 안보 정책: 아베 정권과 적극적 평화주의의 덫>, <내가 생각하는 집단자위권: 젊은이와 국가> 같은 책으로 집단자위권의 위험성을 일본 국민에게 알리고 있다. 집단자위권이란 일본의 ‘혈맹’인 미국이 타국의 공격을 받을 경우, 일본 자위대가 군사 대응하는 권리를 말한다. 2차 세계대전 이후 타국으로부터 침공받았을 때만 정당방위 차원에서 실력을 행사할 수 있는 일본 자위대에게 집단자위권은 적극적인 대응을 보장해 주는 방편인 것이다.


야나기사와는 풍부한 현장 경험을 바탕으로 아베 총리의 집단자위권 논리를 조목조목 반박한다. 가령 북한이 미국으로 쏘는 탄도미사일을 요격하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지적한다. 탄도미사일의 탄도가 계산될 무렵이면 탄두는 엄청난 고도와 속도에 도달한다. 이것을 탄두보다 느리고 도달 고도도 낮은 요격미사일로 맞추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은 삼척동자라도 아는 일이다.


또한 야나기사와는 미국 전함이 중국의 기습을 받았을 때 혈맹인 일본이 방관할 수 없다는 아베의 논리도 엉성하기 이를 데 없다고 꼬집는다. 서태평양까지의 거리를 생각하면 지금의 4개 호위함대로는 어림도 없고 최소 2개 호위함대를 늘려야 한다. 미사일과 탄약 비축도 몇 배로 증강해야 한다. 요격미사일 한 방만해도 수억 원이다. 그러나 아베는 집단자위권 행사만 용인되면 돈이 어디서 솟아나기라도 하는지 그 돈을 어디서 조달하겠다는 이야기는 없다.


야나기사와는 “자유, 민주주의, 법치를 공유하는 외교”를 표방하면서 일본과 체제가 다른 나라를 악으로 몰아가는 아베 외교의 위험성을 비판한다. 상대의 궤멸을 전제하는 억지 전략은 외교도 무력에 기댄다. 천문학적 국가 부채 상황에서도 국방비를 대폭 늘려야 한다. 국민의 삶은 더 고달파진다.


야나기사와는 <내가 생각하는 집단자위권: 젊은이와 국가>라는 책에서 ‘잘 살건 못살건 학력이 높건 낮건 개인이 목표를 갖고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 나라와 세계가 필요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생각이 다르고 피부색이 달라도 차이를 인정하고 적어도 자기식으로 바꾸라고 상대에게 강요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그 점에서 역시 안전보장의 핵심은 나도 남에게 강요받지 않고 나도 남을 강요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 세계를 어떻게 만들어갈까 하는 것이 안전보장의 본질’이라고 갈파한다.


야나기사와는 자신이 뒤늦게 일본의 위험한 군사 놀음에 경종을 울리려고 68세의 노구를 이끌고 동분서주하는 것은 일본의 안보정책을 총괄하는 자리에 있던 시절 세상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는지 그 본질을 정확히 몰라서 강대국의 위험한 군사주의에 호응했던 과거에 대한 속죄의식에서라고 고백한다.


야나기사와가 진보 진영 사람이었다면 자민당과 아베는 좌파의 상투적이고 굴욕적인 평화주의라고 매도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야나기사와는 우파다. 무엇보다도 일본 국민의 안위를 중심에 놓고 사유하고 앞으로 일본을 이끌 젊은 세대와 어린 세대에게 안전한 세상을 물려주려고 노력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아베는 우익을 표방하지만 사실은 극우다. 우익과 극우를 이민 정책 같은 국내 정책의 차이로 가르는 것은 절반만 옳다. 우익과 극우는 국내 정책보다는 대외 정책에서 확연히 갈린다. 진정한 우익은 내가 내 나라 내 국민을 아끼듯이, 남이 제 나라 제 국민을 아끼는 마음을 존중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아베는 일본과 북한, 일본과 중국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전쟁을 불사하겠다는 사람이다.


아베 정부의 위험한 대외 정책을 비판하는 것은 야나기사와 같은 국방 관료 출신만이 아니다. 외무성에서 정책 분석을 총괄하는 자리에 있었던 마고사키 우케루 같은 전직 외교관도 <전후사의 정체> 같은 책을 통해서 자국의 이익을 지키지 못하고 미국을 맹종해온 일본 전후 외교사의 비애를 후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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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외무성 고위 관리 마고사키 우케루(孫崎享)


그러나 마고사키는 일본의 국익만을 맹종하는 극우가 아니다. 중국과 한국의 영토 분쟁에서 일본의 호전적 극우 세력에게 찬물을 끼얹는 말을 했다고 매국노라고 공격당하는 사람이다. 그렇다고 좌파인 것도 아니다. 마고사키는 오키나와의 미군 기지를 이전하려다가 일본에서 좌우 언론의 맹공을 받고 총리직에서 물러난 하토야마 유키오 전 총리가 세운 동아시아공동체의 소장으로 있다. 마고사키가 동아시아의 평화를 염원하는 것은 일본의 안전과 번영을 위해서다. 일본의 안전과 번영을 염원하는 마음은 일본의 극우에게도 더 강렬하지만 마고사키와 야나기사와가 그들과 다른 점은 자신과 다른 체제를 가진 나라를 존중하는 것이 일본의 지속 가능한 번영과 지정학적 안전을 보장하는 유일한 길임을 아는 지성과 양식을 가진 우파라는 사실이다.


한국에도 일본에도 좌파적 시각에서 현실을 분석하고 정책을 추진하는 정치인이나 지식인은 많다. 그러나 한국과 일본의 차이는 우리에게는 야나기사와 고지, 마고사키 우케루처럼 양식과 안목을 갖춘 고위 관료가 드물다는 것이다. 이는 친일파가 다시 득세하는 세상을 거부했고 친일파의 행적을 똑똑히 기억했기에 친일파에게 공포와 증오의 대상이었던 양식 있는 인사들이 빨갱이로 몰려 이미 6.25 전쟁 이전부터 몰살당해온 역사 탓이다.


일본은 비록 전쟁에서는 졌지만 한때는 ‘귀축미영’을 상대로 싸움을 벌인 적이 있기에 국제 관계에서 타국을 맹종하지 않고 자기 눈으로 세상을 보는 눈을 가졌던 사람들의 후예가 살아남았지만, 한국에서는 그런 사람들이 멸종당했다. 진보를 자처하는 사람은 많지만 그들은 가령 리비아 침공과 시리아 개입을 두둔하고 동부 우크라이나에서 양민을 학살하는 우크라이나의 쿠데타 정부를 비호하는 가디언, 르몽드, 슈피겔 같은 유럽의 극우 진보지를 귀감으로 삼기에 그들의 눈으로 세상을 본다. 그래서 지금도 국제 극우 세력과 힘겹게 싸우는 시리아의 아사드를 비웃고 국제 극우 진보지가 조롱하는 러시아의 푸틴을 덩달아 조롱한다.


본인이 스스로를 어떻게 규정하느냐 와는 무관하게, 노무현 대통령의 의미는 진정한 우파의 정서를 가진 지도자가 한국 정치 지형도에서 등장했다는 데에 있었다. 덕평 수련원에서 노무현 후보에게 환호했던 사람 중에서도 노무현 대통령이 이라크에 파병하고 미국과 자유무역협정을 추진하는 것을 보면서 노무현이 진보의 가치를 짓밟았다며 반노로 돌아선 이가 꽤 있었을 것이다. 노무현은 그런 자신의 운명을 예견하면서 자신도 좀 지켜달라며 사람 좋게 웃었을지도 모른다.


파병과 자유무역협정을 진보의 훼손으로 평가하는 왼쪽 유권자의 권리는 존중받아야 한다. 그러나 주한 미군이 주둔하는 현실에서 아직은 세계 유일의 패권국인 미국의 압력을 무시하기 어렵다는 사정과 영토 소국 자원 빈국 한국이 번영과 풍요를 누리려면 통상과 안정된 시장 확보를 고려해야 한다는 사정을 고민하는 오른쪽 유권자의 권리도 존중받아야 한다.


남해안과 서해안의 바다 밑바닥에서 나는 키조개는 8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고가로 전량 일본으로 수출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한국에서도 많이 소비된다. 키조개를 사 먹을 수 있는 소비력은 부가 가치가 높은 공산품의 수출로 확보한 것이다. 수출로 벌어들인 돈을 어떻게 분배하느냐는 또 다른 차원의 문제다. 통상과 분배를 혼동하면 안 된다.


지난해 말 집권한 스웨덴의 사민당 정부는 유럽연합이 미국과 추진하는 자유무역협정을 지지한다. 한국처럼 자원이 적고 땅은 넓지만 추위로 농산물 수출을 기대하기 어려운 스웨덴이 번영과 풍요를 누리려면 전 세계에서 안정된 시장 확보가 중요하다고 주류 좌파도 깨달아서다.


나라마다 번영과 풍요의 조건은 다를 수밖에 없다. 풍요를 거부하는 환경주의자가 통상 중심주의에 반기를 드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국내 시장의 열 배가 넘는 공산품을 외국으로 수출하는 제조업체의 노조가 자유무역협정 추진이 진보의 가치를 훼손하는 것이라며 들고 일어나는 것은 자가당착이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그런 자가당착이 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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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10월 노무현 대통령은 4.3 사건의 유족들에게 사과하러 제주도에 갔다. 대통령이 나타나자 유족 대표의 일원으로 온 여든이 넘은 한 할머니가 대통령을 끌어안고 몇 분 동안 엉엉 울었다. 스무 살 때 남편을 잃고 홀몸으로 자식들을 키워온 임복순 할머니였다. 경호원들은 당황했지만 노 대통령은 할머니의 등을 연신 토닥여주었다. 대통령의 사과가 끝난 뒤 유족들은 통곡했다.


한 공동체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남 못지않게 잘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남한테 괄시받지 않고 억울한 대접을 받지 않고 사는 것도 중요하다. 물질과 정의가 별개의 것은 아니지만 사익을 공익으로 위장한 사이비 좌파와 사이비 우파를 제외하고 진정한 좌파는 물질에 더 무게를 두고 진정한 우파는 정의에 더 무게를 둔다. 사람은 먹고는 살아야 하니까 사이비 우파 정부도 어느 정도 먹고는 살게 해줄 수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 사이비 우파 세력이 자국민에게 저지른 만행을 피해자들이 털어놓을 수 있는 용기를 갖게 된 것은 해방 이후 반세기가 지난 1997년 국민의 정부가 출범하면서였다. 국가 부도라는 어려움도 있었지만 국민의 정부도 한국의 기득권을 장악한 사이비 우익 세력으로부터 빨갱이 정권 소리를 들었기에 살얼음판을 걷듯이 조심하다, 집권 중반 이후에야 과거사에 눈길을 주었다. 4.3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특별법이 제정된 것은 2000년 1월이었다. 그러나 대통령이 직접 사과까지 한 것은 참여정부에 들어와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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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 분향소에서 통곡하는 제주도 4.3 유가족 할머니

출처 - <제주의 소리>


노무현은 구세대의 막차가 아니라 신세대의 첫차였다. 그러나 그것은 좌파만 차지할 권리가 있는 차가 아니라 우파가 진정으로 고대한 첫차였다. 늘 자국민을 중심에 놓고 생각하면서 무한 경쟁의 자본주의 체제에서 외롭게 떠 있는 한국호의 무사 항해를 고민하면서도 자국민에게 한없는 자유를 안겨주려고 했던 노무현은 눈에 보였던 일본의 점령과 눈에 보이지 않는 미국의 점령을 거치면서 진정한 우파가 멸종된 나라에서는 천연기념물이었다.





 

편집부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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