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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04. 07. 화요일

K리S








 

우리 모두는 한 사회의 구성요소로서 직접적이거나 간접적으로 경제에 참여 한다. 경제는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우리의 일상생활을 좌지우지할 정도로 중요한 것이지만 이해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전문가들에게 ‘행복한’ 경제를 빨리 만들어 달라고 투정하고 불평할 뿐 정작 경제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게 된다. 우리는 경제계 지도자들, 정치가들, 교수들이 우리보다는 잘 알고 해결하겠거니 하고 경제라는 소중한 과제를 소위 전문가들의 손에 떠넘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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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경제학은 정밀 과학이 아닌 인간적 문제들을 다루는 사회 과학이라서 완벽한 정답은 없다. 이론이 있다면 반론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1976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밀턴 프리드먼은 (Milton Friedman) 정부는 경제에 개입하면 안되며 시장에 모두 맡겨야 한다는 시장만능주의를 주장했다. 하지만 2001년 수상자인 조셉 스티글리츠는 (Joseph Stiglitz) 시장의 문제들을 부각시키면서 정부가 개입해야 경제가 잘 돌아갈 수 있다고 주장했다. 또는 신고전주의 학파의 경제학자들은 무역 자유화를 완전히 실천해야 경쟁력이 최대화될 거라고 단언하는 반면에 개발주의 학파의 경제학자들은 무분별한 무역 자유화 때문에 후진국들이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고 경고한다.


경제를 정밀 과학으로 여기는 사람들은 헷갈리겠다. 헷갈릴 만하지...


경제는 정밀 과학이 아니기 때문에 평생 연구해온 전문가들마저도 틀릴 수 있다. 경제는 전문가의 영역이 아니고 인간적인 선택과 가치 판단의 영역이다. 다시 말해서 정치적인 문제다. 단순히 경제안에서의 문제가 아닌 정치적인 문제라고 인정한다면 경제학자들이 왜 그렇게 논쟁에 열을 올리는지 이해할 수 있겠다. 무엇보다도 경제는 인간적인 선택의 영역이지만 국민들이 선택과 판단을 다 전문가들한테 맡겨버리면 우리 사회는 진정한 민주주의에서 멀어질 것이다.


우리의 소중한 경제를 형성하는 전문가들은 누군가? 시장을 지배하는 경제 지도자, 어떤 규제의 강화나 완화를 통해서 그 지도자를 도와주는 정치가, 그리고 명예나 영향력을 이용해서 그 정치가를 정당화해주는 교수, 즉 경제계, 정계와 학계를 지배하는 기득권 지도자들이다. 따라서 전문가들이 잘 알아서 행복한 경제를 만들어주겠지 라는 사고방식은 가진 놈이 마음대로 노는 것을 수동적으로 방관하는 것이나 다르지 않다.


그러지 말자. 조금이라도 신경 써서 경제가 무엇인지 이해하려고 나름대로 노력해보자. 내가 쓰는 이 허술한 글도 한번 읽어보고 친구들과 가벼운 토론도 좋다. 조금 더 심도 있는 경제책도 읽다 보면 점점 자신만의 경제관이 생겨 경제에 대한 판단이 가능해질 것이다. 결과적으로는 경제에 대한 관념이 생기면 소비나 일, 투자, 투표까지, 경제적인 행위를 할 때마다 경제에 순종하는 피해자나 수동적 방관자가 아닌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참여자로서 경제 활동을 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나서지 않는 한 원치 않은 경제 제도의 노예와 같은 상태에서 벗어나기는 힘들 것이다. 그런 의미로 나도 전문가는 아니지만 경제에 대한 관심이 있는 일반인으로서 그 관심을 전달해보려고 내 나름의 지식과 상식을 바탕으로 경제에 대해서 쓰기로 했다. 물론 반론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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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성장 이야기


경제성장이야말로 우리 모두가 무조건적으로 지향하는 개념이다. 성장률이 국민들의 행복의 척도가 됐고 경제성장만이 만병통치약이라고 생각하는 전문가와 정치가들이 대부분이다. 특히 요즘 한국에서 철도나 의료기관과 같은 공익사업의 민영화, 모든 서비스의 규제 완화, 노동 시장의 유연화와 비정규직화, 복지 후퇴, 부자 감세, 등등 거의 모든 경제 정책은 성장의 이름으로 정당화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경제성장이 사회 발전의 평가기준이 되면서부터 공익에 기여하는 발전을 위해 일부 국민들이 기꺼이 희생할 줄 알아야 한다는 사고방식이 흔하게 되었다. 이런 사고방식은 ‘밀물이 들어오면 모든 배가 다같이 떠오른다’는 성장지상주의자들의 슬로건으로 잘 대변돼있다. 경제성장률이 높을수록 사회도 더 나은 방향으로 간다는 뜻이다.


그러나 내게는 다른 슬로건이 있다. ‘밀물이 들어올 때 홍수를 조심하라’.


국가의 모든 정책과 경제 지도자들의 모든 행위를 정당화해주는 경제성장이라는 것은 대체 무엇인가? 과연 이러한 성장은 우리 사회의 궁극적인 목표가 맞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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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적으로 경제 성장이라는 것은 어떤 나라의 국내총생산(GDP)이 일정 기간 동안 얼마나 상승했는지 보여주는 지표다. 생산이 상승하는 만큼 소득도 오르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총생산의 성장률과 총소득의 성장률은 비슷하게 쓸 수 있다. 즉 뉴스에서 2013 경제 성장률이 3%이었다고 하면 추상적인 지표가 아니라 1년 동안 생산과 소득이 총체적으로 3%로 올랐다는 뜻이다.


우선 보기에 생산과 소득이 높을 수록 사회가 더 나은 방향으로 간다고 전제하겠다. 이상적인 메커니즘은 다음과 같다. 기업들은 제품을 생산하고 소비자가 구매를 하게 되면 이윤이 생긴다. 그 이윤을 이용해 일부는 주주들에게 배당금을 주고 일부는 재투자함으로써 사업을 확장하여 매출을 올릴 것이다. 사업을 확장하면 고용기회가 늘어나고 더 많은 국민들이 늘어난 소득으로 소비를 할 수 있게 된다. 국민들의 소비는 기업들의 생산과 이윤에 기여하게 되고 경제가 돌아가는 원동력이 된다. 수요가 공급을 창출하든 공급이 수요를 창출하든 경제가 성장하면 사회도 잘 돌아가기 때문에 경제 성장률은 무조건 최대화해야 한다. 이상적으로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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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스트 착각: 어떤 성장인가?


이상대로 작동하는 기업들도 있지만 실제로 경제성장의 범위는 이상보다 훨씬 넓다. 경제성장이 사과가 담긴 사과상자라면 상자 속에는 아주 맛있고 꿀맛 같은 사과, 그냥 먹을만한 밍밍한 사과, 몸에 해로운 썩은 사과도 있다. 상자 안에 사과가 가득히 있다 해도 먹을 사과는 많지만 그 사과들이 얼마나 맛있는지는 알 수가 없다는 뜻이다. 즉 경제성장은 양적 측면뿐만 아니라 질적 측면도 봐야 하지만 질적인 측면은 대부분 가려져있기 때문에 생산의 질적인 측면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것은 경제성장의 첫 착각이다.


예를 들어보자.


‘A’라는 제철소가 생산 과정에서 오염물질을 배출해 대기오염을 시킨다고 가정하자. 제철소는 더 깨끗한 기술을 쓸 수도 있지만 그에 따른 엄청난 투자가 필요하다. 친환경 기술에 투자하면 기업의 재정이 어려워지고 적자가 날지도 모른다. 결과적으로는 친환경 투자를 포기하고 오염물질을 계속 배출시키면서 이윤을 유지해서 경제성장에 기여하지만 이 오염물질을 흡입하면 사람들의 건강을 해치게 된다. 경제학자들은 이런 현상을 시장의 부정적 외부효과라고 한다.


‘B’라는 전자제품 기업은 튼튼한 텔레비전을 만들기에 충분한 기술을 가지고 있지만 의도적으로 쉽게 고장 나도록 제품을 만들었다. 너무 튼튼한 전자제품을 만들면 소비자들이 신제품을 잘 안 사려고 하기 때문에 ‘B’는 ‘계획적 진부화’라는 판매 전략을 짠 것이다. 이 사례에 의하면 질이 낮은 전자제품들이 튼튼한 제품보다 경제 성장에 더 좋을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C’라는 의류업체는 아웃도어 시장을 점유하기 위해 여러 가지 매체를 통해 엄청나게 광고를 한다. 광고 비용 때문에 제품들의 가격은 점점 올라가고 광고의 심리적 효과덕분에 똑같은 품질에 비싼 가격이어도 매상은 늘어난다. 광고를 통해서 소비자들의 심리적인 틈을 타는 ‘C’는 과소비를 부추김으로써 경제성장에 이바지한다.


‘D’라는 상장 유통기업은 경쟁사와의 경쟁력에서 떨어져 부도를 막기 위해 구조조정에 들어갔다. 그 결과 5000명의 정규직 근로자 중에 1000명을 해고시키고 1000명을 비정규직으로 전환하겠다고 결정했다. 덕분에 주가도 상승하고 경쟁력도 회복돼서 이윤을 남길 수 있다. ‘D’의 결정은 시장 논리에 부합하고 주주들한테나 경제 성장에나 유익한 결정이지만 많은 가정의 형편을 약화시킬 것이다.


 

‘A, B, C, D’ 기업들은 단순한 허구적인 사례지만 세계 경제 뉴스를 보면 매일 볼 수 있는 현상을 대표하는 사례들이라고 할 수 있다. 환경 파괴, 신기술의 악용, 과소비, 노동 착취, 등등, 시장 논리에 부합하고 양적으로 보면 경제 성장에 기여하지만 질적으로 보면 바람직하지 않은 효과를 낳는 것이다. 결국 경제와 사회의 이분법으로 귀결된다. 경제성장이 높을수록 사회가 잘 돌아간다는 것은 첫 착각이다.


그래서 모든 지도자들이 이구동성으로 경제성장을 위해서 열심히 살자고 하면 ‘어떤 성장’을 위해서 피땀을 흘려야 되는지 물어봐야 한다.




세컨드 착각: 누구를 위한 성장인가?


경제 성장에 대한 두 번 째 착각은 소득의 편중에 있다. 앞서 말한 대로2013년도 경제 성장률이 3%이었다고 하면 1년 동안 생산과 소득이 총체적으로 3%로 올랐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해서 일반 국민들이 노동으로 버는 근로소득이 3%로 인상됐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만약 고소득자들의 근로소득이 10% 넘게 증가한 반면에 저소득자들의 근로소득의 증가는 거의 없었다고 해도 평균적으로는 3%로 인상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반적인 근로소득자들이 체감하는 소득의 증가는 여전히 부진했을 것이다. 이것을 바로 근로소득의 양극화라고 한다.


게다가 소득이라는 것은 근로소득뿐만 아니라 이자소득, 배당소득, 금융소득, 부동산임대소득, 사업소득, 등등, 자본을 가짐으로써 생기는 자본소득도 있다. 자본소득은 총소득의 큰 비중을 차지하지만 자본을 가질 수록 상승하기 때문에 일반 국민들한테는 환상의 대상일 뿐이다.


2014년에 한국에서 잠깐 열풍이었던 토마 피케티는, <21세기 자본론>이라는 책을 쓴 프랑스 경제학자다. 전 세계적으로 경제 경향을 장기 분석함으로써 근로소득의 양극화와 자본소득의 지배 현상으로 빈부격차를 설명하는 것이다. 특히 미국에서는 이런 메카니즘으로 1977년부터 2007년까지 30년 동안 단지 1%의 부자가 경제 성장의 60%를 독차지했다고 언급한다. 경제 성장이 아무리 생산의 활기를 의미한다 해도 생산에 따른 소득들이 어떻게 분배돼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는다는 것은 두 번째 착각이다.


그래서 모든 지도자들이 만장일치로 경제성장을 무조건 최대화해야 된다고 하면 ‘누구를 위한 성장’을 그렇게 열심히 키워야 되는지 물어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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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각에서 집착까지


경제성장은 아직도 필요하다. 특히 저개발국의 경우에 생산과 소득이 증가하면 사람들의 생활 수준이 올라갈 게 확실하다. 아무리 경제계나 정치계의 지도자들이 성장의 이익을 독차지하려고 한다 해도 경제 활동, 생산력, 일자리 창출, 소득 인상, 등등 서민의 식량, 식수, 주거, 의료, 교육과 같은 기본적 필요를 충족하는 데에 도움이 되고 일상생활이 크게 향상할 거라고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나라가 발전하면 할수록 경제성장의 이로운 효과가 서서히 줄어들고 결함들이 비교적 큰 비중을 차지할 것이다. 도를 넘으면 과잉 발전이라고 할 수 있고 그 때부터는 경제 성장이 높아져도 국민들이 더 행복하게 산다는 보장이 없어진다. 이 때 지도자들이 성장을 위해서 열심히 살자고 하는 것은 집착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도, 유럽도, 대한민국도 그렇고, OECD 국가들은 모두 다 그 도를 넘었다.


경제성장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성장에 대한 집착은 건강하지 않다. 환경 파괴, 기술 악용, 소비중독, 노동 착취와 같은 후유증을 일으키는 무분별적 성장은 누구에게 좋은 것 일까? 비정규직만 창출하는 저질 성장을 왜 바라야 되나? 또는 1%의 기득권층 부자들만 누릴 수 있는 성장 때문에 왜 모든 국민들이 힘들게 살아야 되나?


그리고 좀 더 보편적으로 생각해보자면 유한한 생태계 안에서 언제까지 무한 경제 성장을 키울 수 있을 것 같은가?


선진국들은 성찰할 때가 다 됐다. 이제는 사과를 무조건 많이 재배하는 것보다 질이 높은 사과를 만드는 데에 치중해야 된다. 그리고 수확의 분배가 어떻게 되고 있는지에 대해 좀 더 생각해봐야 될 것 같다. 성장이 높을 수록 좋다는 사고 방식을 버리고 질도 높고 소득의 분배도 공평할 수록 좋다는 것을 깨달을 때가 됐다. 소위 말하는 선진국이니까...


경제 지도자들, 정치가들, 교수들,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착각과 집착을 하고 있는 것 같다. 무조건 경제 성장을 최대화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시간을 낭비하는 것보다 성장률이 높지는 않아도 어떻게 하면 경제성장을 민생과 결합할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찾기 위해 시간을 투자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싶다.


국민의 소리에 귀를 막아버린 지도자들은 들어주지 않겠지만 모든 국민들은 자신에게 맞는 방법으로 항쟁할 힘은 있다. 앞서 말한 대로 우리 모두가 소비자나, 노동자, 직장인, 유권자, 한 사회의 구성요소로서 직접적이거나 간접적으로라도 경제에 참여 하는 것이다. 우리의 권력은 바로 이 참여에서 기인한다. 그 권력을 이용해서 능동적인 경제 시민이 되면 경제 구조가 바뀌기엔 좀 무리겠지만 경제의 노예에서는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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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와의 전쟁은 개인의 항쟁으로부터.




TO BE CONTINUED...











K리S (교정 : 김아)


편집 : 딴지일보 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