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연재는 반 세기를 역사의 변두리에서 살아온 필자의 경험과 생각을 통해 뜻을 지닌 민초들이 지난 반 세기를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기획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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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평생 쓸 데 없는 짓을 많이 하면서 살았다. 여기서 '쓸 데 없다'의 뜻은 의미나 가치가 없기 때문에 쓸 데 없다는 것이 아니다. 의미나 가치는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이 높더라도 애써봤자 되는 게 별로 없는 일을 말한다. 내 주업인 빈민 운동도 바로 그런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세월을 정치공학적으로 표현해 보면 달라진다. 내 개인적인 있는 힘이 닌 내가 속한 집단의 대표성으로써 힘을 가졌던 시절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세상의 모든 권위처럼 '도덕적 권위'도 나름대로 힘이 있는 법이다. 그 힘은 세상에 어떤 힘 보다 깨어지기 쉽고 지키기도 어렵지만 때로는 의외로 강할 수도 있는 힘이다. 그런데 이 힘은 상대방이 부도덕할수록 즉 도둑적 권위가 높은 세력과 싸울수록 더욱 강해지는 법이다.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도덕적인 힘의 재미를 제법 보았다.
어떻게 재미를 보았냐고? 도덕적 권위란 옳고 바른 일을 하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무엇을 부탁해도 부끄럽지 않게 부탁할 수 있고 상대방도 이런 의미를 이해해서 기꺼이 도와주도록 나서게 만드는 힘이다. 비록 쓰기는 어려운 힘이었지만 덕분에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고 또 많은 사람을 도울 수 있었던 까닭이다.
빈민 운동을 하던 시절, 아이들과 이야기하고 있는 필자
나는 이런 권위를 여러모로 사용했다. 집회나 시위의 현장에서 앞장서는 일부터 시작해서 일이 없는 사람을 위해서 직장을 알아보는 문제, 병이 나거나 사고를 당했을 때 치료를 잘 해줄 수 있는 병원을 소개하는 문제, 몸이 아파서 보약을 먹기는 해야 하는데 돈이 없을 때, 동거 생활을 하다가 애를 갖게 되어서 제왕절개수술을 해야 하는데 돈이 없을 때, 갑자기 교통사고를 당했는데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라서 허둥댈 때, 가전제품을 샀는데 도둑을 맞고 돈을 못 갚아서 고소를 당했을 때, 경찰이나 검찰에 불려갔다 훈방이 되어야 하는데 신원보증을 해 줄 사람이 없을 때, 주민등록이 말소가 되었을 때 등등. 돈 없고 힘없는 이들이 부딪치는 억울하고 분한 일들, 답답한 일들을 해결하거나 돕는 일이었다.
해서 오늘은 내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었던 경험들을 소개하며 권위의 참 의미를 생각해보고자 한다.
화상환자 김 씨
어느 날 고등학교 동창생(알고 지냈던 사람은 아니지만 동창생이 맞았다)에게서 전화가 왔다. 내용은 자기와 같은 교회에 다니고 있는 사람의 동생이 부천에 살고 있는데 불행한 일을 당해서 어쩔 줄을 모르고 있으니 도와줄 길을 찾아 주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다음날 동창생이 전화로 알려준 병원으로 김 씨를 찾아갔다. 36살의 김 씨는 온몸에 화상을 입어 참혹한 모습을 하고 있어서 차마 얼굴을 쳐다보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다행히도 내가 처참한 환자의 모습을 보고 당혹해하는 눈치를 채고 간호를 하고 있던 김 씨의 누나가 밖에 나가서 이야기를 하자고 했다. 그래서 환자와는 말 한 마디 못해보고 황망히 병실을 나왔다.
복도의 벤치에서 김 씨의 누나가 들려준 이야기의 내용은 이랬다. 전라도 산골에서 올라온 김 씨는 부천에 와서 자취를 하면서 혼자 공장에 다니고 있었다. 배운 것도 없고 가진 것도 없이 오직 몸뚱이 하나로 살아가다 보니까 변변히 연애 한 번 못 해서 30살이 훨씬 넘도록 장가를 못 가다가 주위 사람의 소개로 33살이 되어서야 비로소 결혼을 하게 되었다고 했다.
비록 월세를 내는 단칸방이었지만 신혼살림을 차리고 사는 재미를 붙이려고 하는데 가끔씩 아내의 행동거지에 이상한 모습이 나타나곤 했단다.
예를 들면 혼잣말로 중얼거린다던가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고 멍하니 앉아 있다든지 하는 일들이었다. 이상하다는 생각은 되었지만 어떻게 해 볼 수가 없어서 차일피일하다가 몇 달을 지냈는데 그만 임신을 하게 되었다. 입덧이 심해지자 음식을 전혀 먹지 못하게 되었고 몸이 허약해져 있던 어느 날 정신을 완전히 잃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이런 상태로 아이를 낳았다가는 큰일 나겠다는 생각에서 건강해진 다음에 아이를 낳자고 하면서 이번에는 아이를 떼어내자고 했지만 아내는 한사코 아이를 낳아야겠다고 고집을 피웠다.
드디어 달이 차서 아이를 낳았지만 아내의 상태는 아이를 돌볼만한 처지가 못 됐다고 한다. 결국 산후 20일쯤 지나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되자 보따리를 싸서 집을 나가 버린 모양이다. 어느 날 직장에서 돌아와 보니까 갓난 아이만 혼자서 울고 있었다는 것이다. 놀라서 광주에 있는 처가로 전화를 하니까 아내가 그곳에 가 있었다. 장모가 아내를 설득해서 다시 부천으로 올라와서 한동안 아기를 돌보게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생후 90일째 되는 날, 아기는 싸늘한 주검으로 변해 있었단다. 아기가 계속 울어대자 순간적으로 실성한 엄마가 아이를 죽인 것이다. 김 씨는 아기가 죽어 버리자 이제는 그 여자와 더 이상 살 수가 없다고 생각해서 이혼을 하자고 했지만 처가에서 사람 하나 살리는 셈 치고 불쌍하게 생각해서 제발 같이 살아 달라고 애걸복걸을 했다. 인정에 얽혀 매정하게 뿌리칠 수가 없었던 김 씨는 아내와 헤어지지 못하고 다시 살게 되었다.
그의 아내는 여전히 살림을 전혀 하지 못하고서 병원에 들락날락하며 세월을 보냈다. 피임약을 먹으라고 해도 막무가내로 먹지 않던 아내가 또다시 임신을 하게 되었다. 다시 아이를 떼자고 했지만 아내는 이번에도 한사코 아이를 낳겠다고 했다. 지금과 같은 상태에서 아이를 낳아서는 더 이상 살 수가 없다고 생각되어서 아이를 낳으려면 이혼을 하자고 하자 처가에서는 위자료를 요구했다.
합의된 위자료의 내역인즉 그동안 아내 병원 치료비로 처가에서 빌린 돈 4백만 원에 기왕에 이혼 소송을 하려면 들어가야 된다는 돈 2백만 원에다가 방을 얻으라고 3백만 원을 보태주어서 합계 9백만 원을 지급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돈이 당장 김 씨에게 없었으니 일 년 안으로 주기로 하고 드디어 이혼을 했다.
하루도 편할 날이 없이 불안했던 3년의 결혼생활을 끝내고 다시 혼자가 된 김 씨는 몇 해 동안의 결혼 생활로 그나마 노동으로 벌어놓은 것은 다 까먹고 오히려 9백만 원의 빚만 진 상태에서 실의에 찬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가고 있었다.
사고가 난 그날도 설렁탕 한 그릇을 사 먹고 집에 들어가 잠을 잤는데 새벽에 일어나 보니까 방 안의 공기가 어쩐지 메케했다. 하지만 평소의 습관대로 담배를 찾아 입에 물고 라이터 불을 켜는 순간 '펑'하는 소리와 함께 온몸이 화염에 휩싸이게 된 것이다. 사고가 나자 조사를 나온 경찰관은 당연히 모든 주변 정황으로 볼 때 자살 사건으로 조서를 작성했다고 한다. 김 씨는 확률 50%로 생사의 기로를 헤매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치료비였다.
김 씨가 살아난다고 하더라도 법률적으로는 환자가 자해를 한 것이기 때문에 의료보험의 혜택을 받을 수가 없고 그들로서는 도저히 부담할 수가 없는 엄청난 치료비를 물 수밖에 없는 형편이라 했다.
이것이 내가 첫 번째로 할 일이었다. 자살이 아닌 사고로 조서를 작성해주는 것. 나는 사건의 내용을 전부 파악한 후에 김 씨를 어떻게 도와줄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해 보았다.
제일 먼저 할 수 있는 일은 단골 거래처인 경찰서로 가는 것이었다. 거북한 사이도 자주 만나다 보면 정이 들게 마련이다. 나는 언제나 나와 신경전을 벌리고 살아 애증관계(?)가 얽혀 있는 정보과장을 찾아갔다. 상황 설명을 자세히 해주고 나쁜 짓만 하지 말고 '착한 일'도 가끔 해보라며 간곡하게 호소를 했다.
두 번째 할 일은 돈 생기지 않을 일에 경찰이 움직이지 않을 것을 대비해서 지역 신문기자에게 환자의 취재를 부탁을 하는 것이었다. 다행히 작전의 효과가 나타나서 김 씨는 보험으로 치료를 받을 수가 있었다.
노동조합의 젊은이들
어느 날, 아침에 막 집을 나서려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울산에서 온 사람인데요. 목사님 좀 만나 뵙고 싶습니다."
전화를 받고 약속 장소로 나갔더니 허름한 차림새의 두 청년이 기다리고 있었다. 27세의 변창기라는 청년은 리바트 가구를 만드는 현대목재노동조합의 교육홍보부장이고, 함께 온 청년은 현장에서 작업을 하다가 한 쪽 팔이 잘린 22살의 김 군이었다.
김 군은 2년 전 20살의 나이로 입사하여 22만 원씩 받고 일을 한지 두 달 만에 사고를 당했다고 했다. 사람은 먼저 앰뷸런스에 실려 가고 잘린 팔은 나중에 승용차에 실려 왔다. 접합 수술을 받았으나 팔을 쓰지는 못하고 건성으로 달고 다니게 되었다는 것이다.
현대그룹에서 운영하는 병원에서 치료가 다 끝났다고 하여 현장으로 돌아갔지만, 한 팔을 가지고는 일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회사에서 4,000만 원을 줄 터이니 회사를 나오지 말아달라는 제의를 해왔다는 것이다. 이 문제를 가지고 노조 대표들과 항의를 하다가 위원장은 구속되고 김 군과 변 군은 서울의 큰 병원에 마지막으로 더 정확한 진단을 받아보기 위하여 올라온 것이다.
두 사람이 나를 안 것은 내가 1989년 처음으로 출판한 '옛날 하나님과 요즘 하나님'을 읽은 덕이라 했다. 무엇인가 도움이 될 것 같아 서울에 온 김에 나를 찾아 부천에도 들른 것이다.
변 군이 김 군을 고아라고 소개하기에 몇 살부터 고아원에 있었느냐고 하니까 "눈 뜬께 있데요(눈을 뜨니까 고아원에 있데요, 즉 태어나자마자 고아원에 있었다는 의미)"라고 했다. 그렇게 말하는 김 군이 얼마나 어수룩해 보였는지 꼭 산에서 방금 동네로 내려와 아이들에게 잡힌 토끼 같아 보였다.
두 사람을 데리고 이양원이라는 변호사를 찾아갔다. 내가 법 문제로 자문을 구할 때마다 언제나 성실하게 답변을 해주던 사람이었다. 이 변호사의 말에 의하면 현행법으로는 쓰지 못하는 팔이라도 일단 붙어 있으면 50퍼센트밖에 노동력 상실을 인정받지 못하기 때문에 회사가 제안한 그 이상의 보상을 받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모든 일을 끝내고 허망한 심정으로 울산으로 떠나는 김 군에게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냐고 물으니까 보상금을 받아서 비디오 가게나 할 생각이라고 했다. 나는 염려가 되어서 간곡하게 당부를 했다.
"세상은 무서운 곳이다. 팔 잘리고 받은 돈이라고 다른 돈과 다르지 않다. 너는 아직 나이나 경험으로 볼 때 혼자 무엇을 하기에는 너무 위험하다. 돈으로 무엇을 할 생각을 절대로 하지 말고 그 돈은 안전하게 두면서 수익성 있는 기술을 배워라. 22살의 네 인생을 4.000만 원에 걸었다가는 너는 분명히 돈도 잃고 절망에 빠져 다시 한 번 죽을 지경이 될지도 모른다."
김 군은 무뚝뚝한 경상도 사람답게 "전화할게요"라는 한 마디만 남기고 울산으로 내려갔다.
얼마 후에 변 군으로부터 서울에 있는 본사에서 사무직 노조가 결성되려고 하니 내가 도와주었으면 좋겠다는 연락이 왔다, 본사 직원들을 몇 번 만났더니 사무직원들은 노조를 만드는 일에 대하여 두려워했고 나는 그들을 격려해야만 했다. 이런 경우 경찰이 정보를 입수하면 '제삼자 개입 금지' 조항에 의해서 엮여 들어갈 수가 있기 때문에 비공개적으로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드디어 성공적으로 노조가 결성되고 1990년 12월 7일에 노조결성보고대회를 하니 격려사를 해달라고 연락이 와서 압구정동에 있는 본사를 찾아갔다. 대회장인 현대목재 지하 강당에는 울산공장과 용인공장에서 올라온 생산직 노동자들과 서울지사의 사무직 노동자들이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여사무원들이 노래를 부르는 것이나 구호를 외치는 모습은 생산직 노동자들과 비교해 볼 때 아주 어색해 보이고 꼭 자기가 앉아 있을 자리가 아닌 것처럼 느끼는 것같이 보였다. 불안해하는 표정의 사무직 조합원들에게 아무쪼록 앞으로 그들에게 닥쳐올 온갖 시련들을 잘 극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축사를 했다. 사실 두렵기는 그들이나 나나 마찬가지이었다. 오직 용기로서 극복할 수 있을 뿐이었다.
나에게 그것은 십자가가 주는 의미였다.
딸을 먼저 보낸 아버지
이 인연 또한 갑자기 걸려온 지인의 전화로 시작되었다. 어려운 일이 생겼는데 한강성심병원 영안실로 같이 가주었으면 좋겠다는 내용이었다.
차를 타고 병원으로 가면서 이야기를 들으니 같은 고향 사람의 딸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 올라와 직장을 다니고 있었는데 간밤에 연탄가스로 죽었다는 것이다. 사고가 났다는 연락을 받고 상경한 이 양의 아버지는 경상도 청도라는 시골에서 농사를 짓던 시커먼 농투성이였기 때문에 낯선 객지에서 어떻게 해야 할 바를 몰라 애를 먹고 있었다. 영등포 경찰서로 갔지만 담당 형사가 사람대접도 제대로 안 해주는 상황이었다. 답답해하다 못해 고향 사람들을 찾다보니 어렸을 때 고향을 떠나 별 소식도 없이 지내는 자기에게까지 연락이 오게 되었고, 그는 또 이런 일은 처음 당하는 일이라 어떻게 해야 될지를 몰라서 나에게 연락을 한 것이다.
영안실에 가보니 죽은 사람이 하나가 아니라 둘이었다. 전라도 시골에서 올라온 같은 직장 처녀 오 양과 함께 변을 당한 것이었다. 두 처녀는 근처의 중국집에서 함께 일을 했다고 한다.
오 양이 먼저 돌아와 방 안쪽에서 잠을 잤던 모양이고 이 양은 12시가 넘어 들어온 것으로 보이는데 발견되었을 때는 옷도 벗지 않은 채 한 발은 구두를 신고 한 발은 맨발로 문지방에 걸 터 누운 채 죽어 있더라는 것이다. 평소에 술도 잘 먹지 못했다는데 사고가 난 날 저녁에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술을 먹은 모양이었다.
농촌에서 어렵게 자라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 올라온 그녀들은 공장보다는 서비스업종이 더 편하다는 생각에서 중국집에 들어가 밤늦게까지 일을 했기 때문에 간혹 술을 먹고 자는 일이 있었을지도 몰랐다. 추리를 해본 결과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연탄을 갈고서 뚜껑을 제대로 덮지 않았고, 나중에 들어온 이 양이 술을 먹고 들어와서 방바닥에 몸을 걸치자마자 나가떨어져 잠이 들어 변을 당했다고 보는 쪽이 가장 합리적이었다.
20살의 젊은 나이에 너무나 허망한 죽음을 당한 처녀애들의 애처로운 죽음이건만 그대로 보내줄 도리 밖에 없었다. 영안실에는 이런 사정, 저런 사정으로 이끌려온 사람들이 적지 않았지만 냉정하게 생각하면 모두가 제삼자일 뿐이었다. 오 양은 아버지, 어머니도 없이 늙은 할머니만 있고 이 양은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아버지밖에 없었다. 그런 형편이다 보니 어느 누구 하나 책임성 있게 일의 결말을 보도록 추진해 볼 사람도 없었다.
이런 경우 내가 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 그저 딸을 먼저 보낸 아버지가 혼자라는 느낌을 덜 받도록 같이 왔다 갔다 해주는 수밖에.
남편을 잃은 여인
1992년 6월 어느 날 큰 교회에 전도사로 있는 후배로부터 전화가 왔다. 자기 교회의 신자 한 사람이 억울한 일을 당해서 어쩔 줄을 모르고 있는데 좀 도와달라고 하는 것이었다. 내 주변 사람의 일도 제대로 돌아보지 못하고 있는 처지에 남의 교회 교인의 문제까지 끼어들고 싶지가 않았지만 하도 간곡히 부탁을 해서 일단 만나 보기나 하기로 했다.
나를 찾아온 사람은 첫눈에 보기에도 가련해 보이는 아주 왜소한 모습의 30대 중반의 주부였다. 중소기업체의 과장으로서 성실하게 일하면서 오랫동안 학생회 지도를 맡고 있던 남편이 횡단보도를 건너다가 그만 차에 치여 사망했다는 것이다.
가해자는 무면허에 음주에 과속운전을 하고 있었는데 남편을 병원에 실어다 놓고 도망을 가버렸다고 한다. 다행히 목격자가 있어서 가해자가 누군지 알아내기는 했지만 경찰이 사고를 낸 사람은 잡을 생각도 안 하고 오히려 가해자를 싸고도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든다는 것이다.
그럴만한 개연성이 있는 것이 가해자가 여러 번의 전과가 있는데다 큰 호프집을 운영하고 있었기 때문에 평소에 관내 경찰과는 상당히 유착이 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었다. 설상가상으로 담당 형사는 합의를 해주지 않으니까 가해자가 자수를 하지 않는다며 오히려 빨리 합의를 하라고 종용하고 있기까지 했다.
30대 주부는 남편을 갑자기 잃어버린 것만 해도 하늘이 무너질 판에 공정할 것으로 생각했던 경찰이 오히려 가해자 편에 서서 일을 처리하는 꼴을 보니 기가 막히고 분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 하고 있었다.
그녀가 몰랐던 사실이 있었다. 교통사고에서 경찰이 돈이 나올 일이 없는 피해자보다 돈이 나올 만한 가해자 위주로 사건을 처리하는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라는 걸.
가해자는 계속해서 숨어 다니면서 형을 내세워 합의해주기를 요구하는데 그나마 현금으로 주는 것이 아니고 어음을 끊어주겠다고 한단다.
그녀에게 더욱 어렵고 이해하기 힘든 일은 그의 가족이 십여 년을 다닌 교회의 목회자들 태도였다. 장관도 있고 국회의원도 있는 큰 교회이지만 담임 목사는 가난한 신자가 당한 불운을 알 리가 없고 부역자들만 처음에는 관심을 좀 가지다가 일이 계속 어렵게 꼬이자 '은혜롭지 못한' 문제에 더 이상 개입하기를 꺼려한다는 것이다.
그런 현상을 보다 못해 신학생 전도사가 나에게 부탁을 한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처지와는 어울리지 않는 교회를 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가 나가는 교회는 별일이 없고 잘 나갈 때는 아무렇지 않게 잘 다닐 수 있어도 뒤처질 때 붙잡아달라 손 내밀 수 있는 교회는 아니었다.
이런 배경이 있다 보니 내게는 여인이 빽 없고 돈 없고 아는 것 없는 민초들이 당하는 재난과 소외를 몽땅 당하고 있는 것과 같은 처지라고 여겨졌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대로 경찰 측에도 연락을 해보고 변호사와도 의논을 해보았다. 결론은 가해자가 끝까지 피해 다닐 수는 없을 테니, 피해자 측에서 조급하게 합의하려고 애를 쓸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뿐이었다. 또 한 가지는 경찰서 앞에 피켓을 들고 시위를 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안타깝게도 그 밖에는 내가 도와줄 수 있는 일이 없어 그저 함께 아파할 뿐이었다.
가시가 박힌 손가락으로 물건을 만질 때면 조금만 닿아도 아파서 모든 것을 조심조심하면서 만질 수밖에 없다. 이렇듯 마음에 상처가 있으면 모든 일에 예민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내가 입은 예민한 상처가 때로는 남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몇 달 후에 그 여인이 다시 나를 찾아왔는데 다행히도 합의를 하고 가해자가 자수를 해서 재판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사건이 해결되도록 도와준 것에 감사한다면서 봉투를 내밀었다. 그러나 누구를 도와주고 돈을 받아 본 일도 없기도 하거니와 더욱이 불행한 일을 당한 일로 사례를 받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내가 완강하게 거절을 하니까 그 여인은 사실은 "목사님! 사실은 이 돈은 사례비가 아니라 십일조입니다."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그 말을 듣고 나는 더더욱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남편의 죽음에 대한 보상금, 그것도 사람을 잘못 만나서 정당하게 받지도 못하고 헐값의 보상을 받은 돈으로 십일조를 하겠다는 그 여인의 생각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당사자의 노력으로 번 돈도 아니고 남편의 목숨 값으로 받은 돈은 헌금을 할 수 있는 돈이 아니라고 설명을 해도 일단 돈이 들어오면 십일조를 해야 한다는 그녀의 단순한 믿음을 이길 수가 없었다.
십일조를 받을 수 없다는 나의 태도에 대해서 난감해하는 그녀에게 나는 타협안을 내놓았다.
"이 돈을 우선 내가 보관하는 걸로 하자, 그러나 생각이 달라지거나 더 좋은 곳에 쓸 곳이 생기면 언제든지 찾아가라."
그러나 그 여인은 그 후 한 번도 연락이 없었다. 그래서 이 돈을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그동안 지역사회를 위해 일하는 분들과 모일 때마다 마땅한 장소가 없어 모두가 불편해하던 일이 생각이 났다. 식구들이 몇 명 안 될 때에는 조용한 카페나 우리 집을 모임 장소로 해도 불편함이 없었지만 점점 하는 일이 많아지면서 그럴 수가 없게 된 것이다. 하지만 건물을 얻는 일에는 신중해야 하겠기에 생각만 수없이 하고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뜻을 그녀에게 전했더니 돈이 그쪽으로 쓰인다면 더 이상 기쁠 일이 없겠다고 했다. 교통사고로 비명에 간 고인도 자기의 죽음을 밑거름 삼아 교회가 세워진다면 기뻐할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물론 이 돈만으로 건물을 얻을 수는 없었다. 그때까지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어도 누구에게 돈에 대한 부탁을 하지 않았었으나 이번에는 모금을 하기로 하고 후원자들 가운데 부담이 크게 되지 않을 분들에게 부탁을 해서 조금씩 돈을 모아 나갔다. 드디어 가난한 과부의 십일조 450만 원을 종잣돈으로 해서 3,000 만 원이 만들어졌고 역곡에 있는 건물 지하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국회의원이었지만 역시 가난한 안동선 의원이 외상으로 250만 원을 들여 교회 책상과 의자들을 마련해 주었다.
안동선 의원
교인들은 포장마차 CEO, 헌책방 CEO, 노동자, 3수생, 대학 강사. 현직, 해직 교사, 등등의 2, 30대 젊은이들이었다. 예배가 끝나면 밥은 못 먹어도 맥주는 빠지지 않아서 헌금 대신 맥주병은 많이 모였다. 비록 예배 시간에 헌금 순서는 없어도 가끔 해직교사 처지에 목사의 생활을 위해서 십일조를 내놓는 눈물겨운 믿음을 보인 이들도 있었고 형편 되는대로 내 생활을 열심히 챙겨주는 고마운 노총각도 있었다. 모인 이들은 어느 정도 의식 수준이 비슷한 사람들이었다. 물론 그중에는 몇 년을 같이 지내도 생각이 전혀 바뀌지 않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7, 8년을 줄기차게 입만 가지고 왔다 갔다 하는, 어디 가나 하나쯤 있게 마련인, 참기름 통에 빠졌다 나온 것 같은 뺀돌이도 있긴 했다.
권위에 기대는 사람들
도덕적 권위는 '의식이 깨어 있는 사람'에게만 영향을 미치는 법이다. 대한민국 헌법에 '대한민국의 주권은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에 영향을 미친다'라고 뻥을 쳐놓았지만 실제로는 155마일 휴전선 아래에서만 작동을 하듯이 말이다. 오늘의 마지막 사례는 엉뚱하게 권위를 찾은 사람들의 이야기다.
중동의 주민들이 철거대책위원회의 활동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주말에 부천 약대 사거리에서 포장마차를 했다. 그러나 동직원들이 나와서 노점상 단속을 한다는 구실로 리어카와 기구들을 몽땅 압수해 갔다.
이튿날 화가 난 주민들이 동장의 징계를 요구하며 구청으로 몰려갔다. 힘없는 사람들은 떼거리로 몰려가서 시끄럽게 하는 방법 밖에 없기 때문이다. 갑자기 주민들이 몰려오자 구청에서는 젊은 직원들을 동원해 힘으로 밖으로 밀어냈다. 내가 소식을 듣고 달려가 보니 숫자에 밀려난 주민들은 길가에 주저앉아 농성을 하고 있었다.
나를 놀라게 한 일은 어제까지만 해도 소극적이고 겁 많던 부녀자들이 갑자기 싸움꾼이 되어 버린 것이다. 흥분해서 차가운 날씨 속에서도 추운 줄도 모르고 거리에서 악을 쓰고 노래를 부르고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그동안 그토록 미온적이던 주민들이 어떻게 이렇게 하루 사이에 변했는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람은 누구나 빼앗기고 맞아보면 독이 오르는 법이었다.
구청장을 만나자니 출타 중이라면서 내 나이 또래의 총무과장이 나왔다. 사태의 해결을 위해 총무과장과 사무실에서 대화를 시작했다. 한참 이야기를 하는데 구내 스피커로 "직원들은 현관으로 급히 집합하라"는 방송이 나왔다. 이건 또 무슨 일인가 하고 뛰어나와 보았더니, 공무원들과 주민들이 또 한판 붙었는지 울고불고 난리가 벌어졌다. 흔히 양편이 살벌하게 대치된 경우에는 누가 흥분해서 한 마디 툭 던진 말이 불씨가 되어 순식간에 뒤엉켜 치고받기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때린 사람은 없고 맞은 사람만 나오기 마련이다. 왜냐하면 누가 누구를 때렸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맞는 편은 언제나 힘없는 주민들, 그중에서도 노약자나 부녀자들이다. 나는 직원에게서 핸드 마이크를 뺏어 들고 우선 주민들을 진정시켰다. 그 다음 공무원들을 향해서 "때린 사람은 나와서 사과를 하라"고 했다. 한참 양쪽의 흥분을 가라앉히고 이해를 시키면서 사태를 원만하게 해결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경찰 복장을 한 청년이 달려와서 나를 꼼짝 못하게 끌어안더니 흥분한 목소리로 "목사님이라면서요? 저는 신학생입니다. 목사님이 이렇게 선동을 하면 됩니까? 이럴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두렵지 않습니까?" 하고 막무가내로 매달리는 것이었다. 나는 어안이 벙벙해서 '무슨 이따위 경찰이 다 있나?' 싶어 자세히 보니까 경찰이 아니고 구청의 청원경찰이었다.
덕분에 아까보다 더 복잡한 상황이 벌어졌다. 갑작스러운 일이라서 어떻게 해야 하나 하고 잠깐 생각한 끝에 "그래, 당신 믿음 훌륭하오. 그러나 당신과 내 믿음은 다르니 이거 놔요." 했더니 "이럴 수는 없습니다. 이럴 수는 없습니다."하고 불도그같이 달라붙어서 도무지 떨어지지를 않는 것이다.
분위기가 이렇게 변하니까 그동안 가만히 눈치만 보고 있던 늙수그레한 구청의 과장 한 사람이 "당신 목사라며? 나도 장로인데 목사가 사람들을 선동하고 이럴 수 있어?"하고 눈에 쌍심지를 켜고 나섰다. 억울하게 당한 자의 편에 서면 무조건 선동이고 힘을 가진 자 편에서 침묵을 하면 은혜로운 것인가?
그래도 내 입장에서는 그때까지 그런 소리 한두 번 들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못 들은 척하려고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난데없이 주민들 중에서 한 여자가 뛰어나와 "야, 나도 집사다. 우리 목사님이 뭐를 잘못했어? 하나님을 믿으려면 똑바로 믿어!" 하고 달려들었다. 순식간에 청원경찰과 과장과 나와 아주머니가 엉겨 붙어 밀고 당기는 실랑이가 벌어졌다. 그냥 자기 심경이 하는 것이 아니라 저마다 '하나님 어쩌고' 하면서. 참 쪽팔리는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사태가 이렇게 되니까 주민들이나 공무원들도 끼어들지도 못하고 신기하게 구경하는 것이다. 순간적으로 하나님을 놓고 싸우는 꼴이 되었으니. 아마도 그때 하나님이 낮잠을 주무시든지 바쁘지 않으셨으면 "이놈들아! 나 좀 가만히 냅둬!"라고 했을 것이다.
나에게 도와달라 부탁을 해오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고향을 떠나 객지 생활을 하는 노동자나, 민주화 운동을 하느라고 정상적으로 생업을 가지기 어려운 사람들이었다. 내가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앞에서 말한 '의식이 깨어 있는 분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분들은 오직 내가 가진 '뜻'을 보고 나를 도와줬었다. 부디 많은 사람들이 의식을 깨워 도'둑'적 권위보다 도덕적 권위로 할 수 있는 일이 많은 대한민국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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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dney
편집 : 딴지일보 퍼그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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