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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04. 08. 수요일

아까이 소라









 

 

 

비가 쏟아지다 멎었다.


파리는 4월에 가장 아름답다는데, 그 말이 무색하게 2015년 4월의 파리는 아직 겨울의 회색빛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다. 며칠 전에는 대기오염이 심하다며 파리지역 대중교통을 무료로 운행했다. 원래는 주말에만 잠시 하려던 거였는데, 오염 정도가 생각보다 심했는지 무료 운행을 하루 더 연장했다. 이런 점은 한국이 배울 만 하다. 시스템으로 강제하는 것보다 유도하는 법. 단, 대부분의 파리 시민들은 대중교통 이용 시 정기권을 사용하기에 별 이득은 없었을 게다. 더욱이 아마 파리지하철공사(RATP)의 금전적 손실도 별로 크지 않았을 터. 그 시기에 파리에 놀러온 이들은 땡 잡았겠지만.


프랑스에 돌아온 지 거짓말처럼 두 달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집을 구하느라 발이 붓도록 돌아 다녔고, 친구들에게 각 집에서 안 쓰는 가구를 내게 버리도록 종용하였고, 전기와 인터넷을 내 이름으로 신청하고 각종 살림을 장만하였다. 다섯 평이 살짝 넘는 내 새로운 아지트는 그렇게 조금씩 사람 사는 집의 형태를 갖추어 나갔다. 손님을 초대해 요리를 해 주는 것에 재미가 들려 닭강정을 주무기로 삼았는데, 떡강정을 만들어 보겠다며 혼자 설레발을 치다가 떡폭탄 세례를 맞기도 했다. 이전에는 몰랐다, 기름에 떡을 튀기면 야들야들했던 가래떡이 무시무시한 폭탄이 된다는 사실을. 나중에 보니 포장지에 떡하니 "기름에 튀기려면 칼집을" 내라고 쓰여 있더라. 덕분에 부엌은 기름범벅이 되었고, 사건이 있은 지 며칠이 지난 지금까지도 기름 냄새만 맡아도 구역질이 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이어트는 그닥 원활하지 않으니 이건 나이탓인지 어쩐지.



 

내 상황이 정말 딱 이랬다. 무서웠다 ㅠ.ㅜ

그래도 나는 남은 기름을 다시 모아 재활용하는 알뜰한 유학생정신을 버리지 않았다.

 

 

그러고보니 두 달 동안 참 많은 일이 있었다. 그 중 으뜸은 벼룩시장 보물찾기였던 것 같다. 웬만한 사람은 다 알겠지만 프랑스 여행에서 빠트리면 서운한 코스가 바로 벼룩시장. 아마 여행책자에 벼룩시장에선 각별히 소매치기에 주의하라는 경고 문구가 박혀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물건도 많고 사람도 많으니 소매치기를 조심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터. 얼마 전 프랑스 TV에서 30년간 소매치기를 전문으로 해 온 한 무슈의 인터뷰를 본 기억이 난다. 자신에게는 신나는 놀이에 불과하다고 했던가?


한국에선 남이 쓰던 물건을 가져다 사용하면 탈이 난다는 속설이 있어 아직 그리 활발하지는 않지만 프랑스에서는 벼룩시장을 흔치 않게 볼 수 있다. 관광지로 완전히 자리매김한 생투앙(Saint-Ouen)의 마르쉐 오 퓌스(Marche aux Puces)부터 각 지방자치단체에서 정기적으로 개최하는 동네 벼룩시장까지 그 규모나 참가하는 사람도 다양하다. 보통은 그냥 헌 물건이지만 가끔 아는 사람에게만 보이는 보물도 발굴되는 경우가 있는데, 식민지 시기프랑스와 독일에서 활동한 우리나라 최초의 유럽 미술유학생이었던 한국인 화가 배운성(1900-1978)의 작품 48점이 2000년, 당시 불문학도였던 전창곤 교수의 눈에 띄어 발굴, 화려하게 귀향한 사례가 대표적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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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도>, 1931-35년경, 캔버스에 유채, 140 X 200㎝, 개인 소장

 

2000년 프랑스 벼룩시장에 먼지를 뒤집어 쓰고 있던 그 작품들 중 하나이자 

화가 배운성의 대표작 중 하나

 

 

이번에 내가 벼룩시장에서 찾은 보물은 이 정도 역대급 규모는 아니지만 그래도 나름 소소한 재미가 있는 것이라 하겠다. 본래 진짜 인연은 우연과 함께 오는 것이 아니던가? 꼭 사고 싶은 물건이 있어 벼룩시장 정보를 체크해서 벼르고 별러 간 곳에서는 별 수확 없이 돌아오는 반면, 이렇게 우연히 마주친 곳에서는 뜻밖의 횡재를 하는 경우가 많으니. 그 날은 도서관에 가서 조용히 공부나 하려다가 도서관 앞에까지 가서 너무나 긴 줄에 질려 포기하고 한국 슈퍼에 가서 커피 로스팅 용 가스 버너나 살 요량으로, 우울하게 냄새나는 파리 지하철에 몸을 맡긴 토요일이었다. 어쩐지 그날따라 지하가 답답해 바람이나 쐴 겸 한 정거장 먼저 내렸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지상으로 올라온 순간, 바로 앞 광장에 벼룩시장이 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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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21일 파리 부르스 광장(Place de la Bourse)에서 열린 벼룩시장

 

 

맨 처음 내 눈을 사로잡은 것은 노랗게 바랜 만화책이었다. 지금으로부터 110년 전, 1905년 2월 처음 나온 이 만화 캐릭터의 이름은 베카신(Becassine). 지금까지도 프랑스인에게 사랑받고 있는 브르타뉴 아가씨. 당시 소녀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이 만화책은 1913년에서 1939년 사이에 120만 부 이상 팔릴 정도였다고. 파리 3구에 있는 인형박물관(Musee de la poupee Paris)에서는 올 2월부터 9월까지 베카신에 대한 오마쥬로 전시회를 진행하고 있으니, 프랑스 여행을 기획하고 있는 딴지스들은 잠시 들러 프랑스 문화 및 소녀 감성에 빠져 보는 것도 좋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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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래 보여도 올해 110살 먹은 아가씨

 

 

여튼 만화책 가격을 물어볼까 말까 군침을 흘리고 있던 중, 급 등장한 손님이 선수를 쳤다. 좌판을 담당하는 마담은 1920년대에 나온 책이며 보존상태도 너무 좋다며 설레발을 치며 59유로를 부른다.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지금 내 주머니 사정으로는 요원한 가격. 솔직히 말하면 그렇게 비싸게 부른 가격도 아니긴 하다만 이사에 가구 및 살림 장만에 이미 내 재정은 반토막 난 상태. 그냥 포기하자며 발길을 돌리려던 차, 옆에 수북이 쌓인 잡지 더미가 눈에 들어 온다. 그림이 너무 예쁘다! 어찌 보면 슬기로운 생활에 나올 법한 그림이기는 하지만 개인적으로 벨 에포크(Belle epoque) 그림체를 좋아하기에 그 감성을 담고 있는 듯 한 잡지 표지를 그냥 지나치기에는 그 유혹이 너무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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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지나가려던 순간 내 눈에 들어온 잡지더미. 바람에 날려가지 않게 구두로 눌러 놓았다. 

옆에는 처음 나를 유혹했던 만화책 <베카신의 100가지 직업>이 고이 놓여져 있다.

 

 

가만 보니 1920-30년대 나온 잡지들이라 이것도 비싸겠다 싶어 가난한 나의 삶을 원망하며 그냥 구경이나 하고 말자며 체념하려던 순간, 좌판 마담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내게 다가와 궁금한 게 있으면 무엇이든 물어 보란다. 소심한 나지만 급 용기가 솟아 이게 어떤 잡지인지 물어보았다. 백발에 빨간 뿔테 안경을 쓰고 회색빛 파리에 어울리지 않게 형형색색의 옷을 갖추어 입은 마담은 자신도 이 잡지를 어릴 적 구독해서 보았었다며 상품 소개에 들어 간다. 마담의 말에 의하면 <La Semaine de Suzette(라 스멘 드 쉬제뜨, 번역하면 쉬제뜨의 일주일)>라는 이 주간지는 20세기 초중반에 나오던 것으로, 당시 '돈 좀 있고 교양 있는' 집안의 소녀들이 주로 구독하던 잡지라고. 그러면서 잠시 자신의 어린시절 회상. 언니가 그렇게 공부를 잘 했었단다. 자기 빼고는 집안 식구들이 모두 교수 혹은 교사라며 이런 저런 자랑을 늘어 놓는다. 어딜 가든 아주머니들의 수다는 똑같은 것도 같다.


곧 가격 흥정에 들어 간다. 마담은 이 잡지 더미를 어떻게 해서든 빨리 처분하고 싶은 눈치다. 모두 150유로에 가져 가란다. 이 정도면 거저란다. 한국 유수 언론의 특파원이자 역사학도로서 이 잡지에 흥미가 가는 것은 맞지만 그렇게 많이는 필요 없으며, 막 이사를 한 상태라 돈도 없다고 솔직히 이야기를 했더니 가격은 맞춰 주겠다며 한 번 보기나 하란다. 이번에는 일 년 치를 모두 가져가는 것이 어떻겠냐며 30유로에 해 주겠단다. 그것도 필요 없고 그냥 표지 그림이 예쁜 잡지 한 두 개만 고르겠다고 했더니 1년치 10유로를 부른다. 솔직히 솔깃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번에는 나도 흥정에 들어간다. 다음 달 집세 낼 돈도 없다고 그냥 몇 개만 사겠다고 버틴다. 이제 마담은 1년치 5유로를 부른다. 이렇게 급 내리막을 걷는 가격 흥정이라니! 마담이 팔고 싶긴 정말 팔고 싶었나 보다. 아니면 내가 예뻐 보였나?


여튼 1938-1939년에 출판된 잡지 총 22권을 5유로에 샀다. 당시 가격으로 60상팀(프랑스와 스위스, 벨기에의 화폐 단위. 1상팀은 1프랑의 100분의 1이다)이었으니, 사실 지금 가격으로 보아도 정말 싸게 산 것,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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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구입한 <라 스멘 드 쉬제뜨> 잡지들

해가 좋은 날 밝은 곳에서 예쁘게 찍고 싶었는데, 요즘 파리 날씨는 우울 그 자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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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권 표지 중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바로 이것

1938년 4월 21일자 <라 스멘 드 쉬제뜨>


도시의 고아원에서만 지내던 두 소녀가 처음으로 한적한 시골 농장에서 자연의 아름다움을 발견한 기쁨을

그려내고 있다. 이야기 속 세계는 정말이지 따뜻하고 행복한 지상낙원이다. 곧 요정도 등장할 기세.

 

 

이 잡지에 대해서 간단히 조사해 보니, <라 스멘 드 쉬제뜨>는 1905년 2월부터 1960년 8월까지 매주 목요일에 발간되었던 소녀 대상의 주간지. 제2차 세계대전 기간 6년 동안은 출판이 중단됐었다. 프랑스 전역 혹은 프랑스가 점령하고 있던 지역에서 수 천 명이 구독을 했으며, 이 잡지를 구독하던 소녀들은 잡지의 이름을 따서 '쉬제뜨'라 불리기도 했단다. 이들은 보통 8세에서 16세까지의 여자아이들. 보통은 10살에서 14살까지로, 벼룩시장에서 만난 마담의 말대로 가정에서 개인교습을 받던 카톨릭 부르주아 집안의 여자아이들이었다고. 보통은 의사나 엔지니어, 변호사 및 학자 집안의 영애들이었다. 프랑스 밖의 영토에서 살던 아이들은 프랑스어 학습을 위하여 이 잡지를 구독하기도 했다고 한다. 당시 '쉬제뜨'였던 이들은 아직도 이 잡지를 보관하는 경우가 많으며, 어린 시절 가지고 놀던 인형과 더불어 자신의 추억에 대한 좋은 이야깃거리로 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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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라 스멘 드 쉬제뜨> 잡지에는 봄맞이 인형옷 만들기 도안이 그러져 있기도...

 

 

조금 더 시간이 생기면 이번에 구입한 22권 잡지를 읽고, 과연 1930년대 말 프랑스 사회가 부르주아 집안의 소녀들에게 바라던 덕목이 어떤 것이었는지에 대해 알아 보고 싶은 욕망이 샘솟는다. 단, 이번 <프랑스라는 이름의 파라다이스 14>는 분량조절 실패로 여기까지만 쓰도록 하겠다. 그냥 끝내기에는 아쉬우니까 도서관행에 실패한 그날의 벼룩시장 전경을 자랑질 겸 올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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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직 부르주아 집안의 '쉬제뜨'였던 것으로 추측되는 마담의 벼룩시장 좌판.

사진을 찍어도 되냐고 물어 보니 흔쾌히 허락하고서는 자리를 비켜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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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룩시장에는 정말 별 거를 다 판다.

 

가끔씩 길에서 가구를 주워오기도 하는 나이지만 그래도 차마 살 수 없는 것은 그릇이나 접시, 숟가락, 포크, 나이프 등 식기도구인데... 집에 가서 끓는 물에 소독을 해도 실제로 사용은 못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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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함께 해 준 격하게 아끼는 동생이 가장 마음에 들어했던 목각인형.

귀엽다고 몇 번을 들었다 놨다 했지만 결국 사진 않았다.

유학생의 주머니 사정이야 거기서 거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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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벼룩시장 구경 중 가장 충격적이었던 물품...

디스플레이가 참으로 의도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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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가 하면 이쪽은 인형의 집.

기웃거리는 손님들은 많지만 실제로 뭘 사는 사람들은 별로 없었다.

상인들도 그저 잡담을 하며 하루를 보낼 뿐이다.


파리에 오면 이런 여유가 참 좋은데, 다른 도시 사람들은 파리는 모든 것이 너무 빨리 흘러가서 싫다고 한다.

그럴 때면 나는 서울을 떠올리며 한 번 씩하고 웃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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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를 상당히 유심히 보고 있는 아가씨

 

 

 












아까이 소라

트위터 : @candy4sora


편집 : 딴지일보 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