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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04. 13. 월요일

퍼그맨








참고 기사('이 시대의 계백을 위하여' 연재)


1. 여자가 만들어낸 가장 위대한 발명품

2. 돈을 벌어도 보람이 없다

3. 가족을 빼니 갈 곳이 없다

4. 결혼과 성욕의 충돌 1

5. 결혼과 성욕의 충돌 2

6. 사랑과 멍에

7. 결혼해선 안 될 놈이 있다







역사를 통해 가족이라는 단위는 인류 활동의 기본 척도였다. 

- 토인비 (영국의 역사가)


논란 많았던 연재 <이 시대의 계백을 위하여(이하 '계백이 연재글')>가 끝났다. 역시 네가티브는 포지티브보다 강하다는 걸 실감하게 된 연재였다. 간헐적으로 반박글이 올라왔으나 하나 같이 '계백이'의 명성(?)에는 도달하지 못한 것을 보면 말이다. 심지어는 딴지가 반박글을 올렸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는 사람도 있다. 상마초 딴지는 절대로 그럴 집단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거다. 


오랜 기간동안 인터넷 매체에 글을 올리며 활동한 기고가들은 압도적으로 남자가 많았다. 커뮤니티에 소위 고정닉으로 활동하는 이들도 남자가 대다수다. 하다못해 포탈 검색어도 남성 취향의 것이 많이 오르내리지 않던가. 네트워크 문화 전반이 이러한 와중에 딴지일보에 남성의 입장을 대변하는 글이 많이 실린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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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진우 기자의 누나 팬들이 일치단결 한다해도 

안신애 양을 탐구하고자 하는 

일반인 남성들의 욕망은 이겨낼 수 없다...


하지만 아무리 편집자 취향이 반영되는 게 매체임을 감안하여도 독자 투고 위주의 딴지일보가 어떤 통일된 입장을 가지고 글을 올릴 거라는 인식은 오해다. (대표적인 예가 어떤 이들은 딴지일보가 문빠, 또 어떤 이들은 노빠라고 하는 현상이다. 실제로는 필자들마다 지지하는 사람 다 제각각일 걸?) 


때문에 김창규 부편집장이 가장 좋아하는 그림은 딴지일보가 특정 이슈에 대해 찬반 의견이 모두 올라오면서 반론에 재반론이 이어지는 공론의 장으로 기능하는 것이었다. 쉽지 않은 일이다. 아무리 중립적으로 올리려 해도 한 쪽의 주장이 더 이슈화가 되어버리면 반대 주장은 묻힌다. 하지만 잘 할 수 없다고 포기해버릴 수는 없는 일이다. 


편집부는 계속 고민하고 있다. 지금까지 올라온 반박글이 어딘가 부족한 건 아닌지. '계백이'의 가족들 입장을 충분히 대변했는지. 결론은 '아직 부족하다'이다. 단순히 글의 양이나 질을 놓고 하는 얘기가 아니다. '이 시대의 계백을 위하여'란 연재가 워낙 다양한 사례를 소개하며 걸쳐지는 부분도 많아지기 때문에 반박할 사람 입장에서도 이 글이 불편한 핵심을 콕 짚어내기가 어려웠다.


핵심을 벗어난 논란 거리 중 하나가 처자식을 죽인 서초동 가장을 왜 계백에 비유하는가이다. 살인범을 위인인 '계백'에 빗댐으로써 미화하려는 시도라는 비난. 그러나 이는 필자가 붙인 게 아니다. '계백이'라는 '은어'가 있었을 뿐이다. '은어'라는 게 계산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보니 다른 여러 정황 다 배제하고 오로지 처자식을 자기 손으로 죽였다는 사실 하나가 단순 연상된다는 이유만으로 쓰이기 시작했을 것이다. '어떻게 감히 계백에 비유하냐'는 비판은 그래서 본질에 한참 벗어나있다.


문제의 핵심은 이 글에서 원망을 돌리는 대상이 '여자'와 '아이들'이라는 것이다.




까야할 건 남자들 자신이다


'이 시대의 계백을 위하여'의 모든 연재분을 관통하는 이야기는 이거다. 


이 시대의 가장들이 너무 무거운 책임을 지고 있다. 그에 비해 그들이 누리는 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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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하기란 쉽지 않다. 사실이니까. 그런 면에서만 보면 삶의 무게를 외롭게 떠받치다 벼랑 끝에 몰려 가족을 죽이고 자기도 죽는, 그런 가장들 더러 '계백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냥 생각없이 갖다붙인 다음 굳어진 은어 정도가 아니라 졸라 적절한 비유였다고 칭송해야 할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우리가 위인으로 알고 있는 계백도 개새끼 중 한 명이라면 어떨까? 


나라가 패망할 시기, 그에게 지워진 책임은 분명 무거운 것이었다. 장수로서 가족만이 아닌 나라를 지켜야 하는 책무까지 진 입장이니 더욱 감당하기 힘겨웠을 거다. 그 책임의 댓가가 죽음에 이를 것이 뻔한 전쟁, 그러나 그는 끝까지 싸웠다. 칭찬 받을 만하다. 


그런데 사료를 보면 그가 그런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은 불과 몇 년 사이의 일임을 알 수 있다. 의자왕은 집권 초만 해도 해동의 증자로 불릴 정도의 성군이었으며 백제는 수많은 전쟁에서 승리하는 강국이었다고 한다. 그런 나라가 몇 년 사이 태자궁을 수리하며 나라 재정을 엄청나게 낭비하고 지도층이 주색에 빠져 시간을 보내는 막장으로 타락할 동안 신하들은, 계백은, 뭘 한 걸까?


패색이 짙은 전쟁에 병사들을 꼬나 박는 임무를 기꺼이 수행했던 것을 보면 그가 부패한 권력을 비호하는 입장이었을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삼국시대는 사료가 부족하기 때문에 이런 평가는 어디까지나 '생각'이겠다. 하지만 그 딴 거 다 제껴놓는다 하더라도 계백의 처자식이 죽기 엄한 사람들이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댓가를 지불할 이들은 계백의 처자식이 아니라 질 수밖에 없는 싸움을 하게끔 나라를 말아먹은 사람들이었던 거다. 계백은 그들을 향해 칼을 겨눠야 하지 않았을까? (그러기에 백제는 이미 너무 기운 상태였을 수도 있겠지만 동시대에는 연개소문도 있었다. 계백이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고 가족을 살릴 수 있는 길을 모색하지 않은 것을 더러 그가 고지식했다 손가락질하긴 충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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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일한 관점이 '계백이' 연재글도 적용된다. 


'여성은 인류의 존속을 위해 자신들의 정조를 희생해 남성들을 가정에 눌러 앉혔다.


그리고 '아버지'란 이름의 족쇄를 남자들에게 씌웠다.

(1편 중)

 

1편에 등장한 문장이다. 계백이 가족을 죽인 것은 '그래도' 인도적인 차원(여자와 어린애가 전쟁포로가 될 경우 겪을 수많은 비인도적 XX라든가, OO가 눈 앞에 아른거렸을지도 모른다.)의 행동으로 이해될 여지가 있는 반면, 남자가 가족을 책임지게 된 원인을 여자에게 돌리는 위 문장은 어떤 역사적 지식을 동원해도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다. 


결혼을 제도화할 필요가 있었던 것은 남자들이었기 때문이다. 


결혼을 남자의 친자 확인 욕구와 여자의 육아+식량 조달 욕구에 대한 필요로 이뤄진 계약이라 설명한 '계백이' 연재 1편. 그것은 어디까지나 원초적인 결혼의 얘기다. 제도로서의 결혼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생각해보자. 원시시대의 남녀가 친자확인-사냥의 계약 관계를 과연 죽을 때까지 유지할 필요가 있었을까? 


한 여자와 섹스를 하면 다른 남자의 접근을 막으면서 여자를 지킨다. 이 와중에 태어나는 아이는 남자의 친자임이 보장된다. 그리고 여자는 아이를 양육하는 동안 남자의 사냥에 의존한다. 하지만 아이가 걷는 것을 넘어 달릴 수 있게 된다면? 그래서 여자가 사냥을 나가고 없는 동안 스스로 위험을 피할 수 있게 된다면? 


남자는 떠날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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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 같은 자식이라고? 잘 됐네. 토끼는 잘 뛰니까!'


물론, 모든 원시적 남녀 관계가 이렇지는 않았을 거다. 어떤 남자는 자신의 아이를 낳아준 여자에게 계속해서 한 여자에게 다른 아이를 낳도록 하면서 정착하기도 했을 것이다. 임신이 안 될 확률을 생각해서 섹스 후 한 여자를 지키고 있지 않고 바로 다른 여자를 찾아 무조건 많이 씨를 뿌리는 데에만 집중한 남자도 있었을 것이다. 남자들에게 이런 다양성이 가능했으리라 볼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인간이 무리 생활을 선택한 종이기 때문이다. 


기록된 역사 안에서, 가족의 규모는 과거로 갈 수록 커진다. 뭉쳐야 내 종족을 더 잘 지킬 수 있음을, 동시에 남자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신의 친자를 확인할 때까지 한 여자에게 머무르며 양육을 돕는 것이 비효율적임을 자각한 인간들은 배타적인 집단을 만들고 집단 안의 여자와 집단 안의 아이를 보호했다. 이렇게 형성된 것이 바로 '씨'족 사회다. 


물론 이러한 집단 생활이 남자들의 친자 확인 욕심을 버린 결과는 아니었다. 그래서 힘 쎈 우두머리가 다수의 여자를 독점하는 형태의 사회가 나온다. 친자 생산의 확률을 높이는 가장 확실한 방법, 즉, 씨를 많이 뿌리는 동시에 나만 뿌릴 수 있게 하는 안전장치를 욕망한 결과였다. 그러기 위해 이 여자들은 내 소유임을 분명히 해두게 되었다. 다른 남자들이 넘보지 못 하도록 말이다. 이렇게 결혼은 남녀 한 쌍의 계약만으로 성립되는 일이 아닌, 사회적으로 공인받아야 하는 일이 되어버린다. '제도'로 변하게 된 것이다. 


일부다처제는 여자를 위한 제도다.

(4편 중)

 

우리가 위 진술에 공감할 수 없는 이유가 이것이다. 다수의 여자 입장을 헤아리겠다는 인류애 돋는 관점을 무리하게 갖다대지 말자. 여자 개인 입장에서만 따져 보자. 경제력 뛰어난 남자를 다른 여자와 공유하는 게 좋은 걸까? 


애써 능력 있는 남자와 결혼함으로써 얻는 혜택을 '나' 아닌 다른 여자와 그의 아이에게 분산시킬 이유가 없다. 인간은 남는 것을 걱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어떻게든 많이 확보해서 남는 건 비축하려 드는 게 본능이다. '나' 외에 더 많은 여자가 경제력 뛰어난 파트너를 얻을 수 있다고? 알 게 뭔가. 오히려 높은 서열 남자의 여자로 점찍히는 순간 더 우수한 아버지가 될 남자를 새로 물색하는 데에 애로사항이 많게 된다. (지금의 파트너가 우수한 아버지가 아니라는 판단이 들 경우, 여자들은 본능적으로 보다 우수한 아버지가 될 남자를 찾는다. 그렇다. 여자들도 바람을 피운다. 단순히 양육이나 경제적 안정만을 욕망한다면 여자들의 외도는 뭘로 설명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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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대로 남자는? 남자 개인 입장에서 여자를 많이 거느리기 위해 포기하는 부분은 없다. 기력? 다수의 여자와 계속 성적인 관계를 유지하려면 힘이야 들겠지만, 여러 여자를 내 것으로 해두는 행위가 그 여자들 모두에게 지속적인 관심을 쏟겠다는 의지의 표현은 아니었음을 기억하자. 방치되는 여자라도 일단 다른 남자가 못 건드리게 하고 보는 거였다. 무엇보다 여러 여자에게 씨를 뿌리는 것이 남자의 본능이고 욕망이라는 주장 앞에서는 '체력적인 희생이 따른다'는 둥의 쉴드는 어불성설이다. 


여자는 1개의 난자를 잘 만들어서 능력 있고, 성실한 남성을 만나 2세를 생산하는 번식전략이라면, 남자는 여기저기 씨를 뿌리는 전략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그렇게 설계된 것이다). 

(1편 중)

 

여러 여자를 데리고 있는 게 힘들다해도 그것은 남자 자신의 욕망을 철저히 추구한 결과이지 포기나 희생의 차원이 아니다. 남자는 그저 씨를 많이 뿌리겠다는, 그렇게 뿌려서 거둔 자식들이 정말 내 친자인지 분명히 해도고 싶다는 욕망만을 추구했다. 그렇게 능력이 닿는 한 많은 여자를 내 소유로 찍어두고, 가능한 오래도록 빼앗기지 않는 안전장치를 고민했다. 그것이 훗날 남자들에게 어떤 책임으로 돌아올지는 예상도 못한 채.




역사의 주체였던 남자, 스스로 책임을 키우다


'책임'은 '권리'를 가질 수록 커진다. 하지만 후자는 달콤하고 전자는 쓰다. '권리'를 누리면서 책임만 미룰 수 있다면 누구나 그렇게 할 것이다. 그런데 이 때에 미뤄지는 책임은 결국 누가 지게 될 것인가? 


앞서 인용한 '계백이' 연재 1편의 두 줄에 이어지는 문장이 있다. 


'여성은 인류의 존속을 위해 자신들의 정조를 희생해 남성들을 가정에 눌러 앉혔다.

그리고 '아버지'란 이름의 족쇄를 남자들에게 씌웠다.


이렇게 250만년의 시간이 흘렀다.

(1편 중)

 

맞다. 250만 년이 흘렀다. 


여자들이 양육을 위해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남자를 가정에 눌러 앉힌 것이 오늘날 대한민국 가장들이 과중한 책임을 지게 된 원인일까? 그렇다면 '아버지'가 있는 지구 상 모든 나라가 우리나라 같아야 하지 않을까? 


250만 년은 강산이 25만 번 변할 정도로 긴 시간이다. 그 사이 일어난 일을 우리는 '역사'라 부른다. 


미드와 영드, 그리고 복지국가인 북유럽 국가들의 ‘남성들의 가정생활’을 한국에 기계적으로 대입하는 것은 ‘개소리’다. 한국인의 경우 연평균 2천163시간을 일한다. 여기에 더해 통계에 잡히지 않는 야근과 회식을 포함하면 얼마를 일하는지 모른다. 우리가 꿈에 그리는 노르웨이 남성들의 경우 연평균 1천408시간을 일한다. 노르웨이 남자들은 집에 퇴근하면, 아이를 돌보고 청소나 설거지를 한다. 재미난 것은 그들의 가사노동시간과 직장에서 근로시간을 합친 시간은 정확하게 한국남성의 연평균 근로시간과 일치한다는 것이다. 

(2편 중)

 

그 역사를 어떻게 만들어오느냐에 따라 어떤 사회는 노르웨이가 되었고 어떤 사회는 대한민국이 되었다. 이 역사를 만들어온 주체가 누구였던가? 바로 남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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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 걸쳐 여성은 익명의 존재였다 

-버지니아 울프 (영국의 소설가)


역사는 제국을 중심으로 하고 제국은 군대의 힘을 중심으로 하며 군대의 힘은 '효율'에서 나온다. 그리고 이 효율을 따지다보면 여자들은 배척될 수밖에 없었다. (효율이란 단어를 여러 측면에서 쓸 수 있겠으나 군대에서 요구하는 효율은 분명 여자들을 위한 것은 아니다.)


이렇게 역사를 쥐고 흔들 '권리'를 거머쥔 남자들은 결혼의 제도화를 통해 또다른 '권리'를 창출해냈다. 단순히 여러 여자를 독점해 친자를 확실하게 생산해내는 걸 넘어 다른 '씨'족과의 결합으로 상호간의 불가침을 보장받는다든가, 피지배층으로 편입된 남녀를 결혼케 해 안정적인 노동력 생산을 도모하는 등으로 말이다. 이렇게 결혼은 모두가 하는 것이 되고, 평생을 통해 유지해야 하는 것이 된다. 


하지만 이렇게 레이디 가카의 창조 경제 마냥 '권리'를 창조해대면서 당연히 따라 오는 부작용이 있었다. 지켜야 할 것이 많아진 만큼 남자들에게 커다란 '책임'이 따르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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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내가 힘으로 차지한 여자들만 다른 남자들이나 맹수들이 못 건드리게 지켰으면 됐지만 후에는 이 가정의 규모가 점점 커지다보니 다른 씨족과 충돌하게 되었다. 이 충돌에서 이기기 위해 세력을 키울 필요가 있었으며 내실을 다질 필요가 있었다. 결혼을 통해 혈맹을 맺거나 정복을 통해 힘으로 눌러야 했다. 내 욕망을 지켜줄 안전장치에 구멍이 생길 때마다 땜질을 거듭하면서. 그렇게 덕지덕지 커져간 집단이 국가라는 거대한 힘이 되었다. 남자의 책임은 작은 씨족을 유지하고 보호하는 것에서 사회를 유지하는 것으로 커져갔다. 


이제 앞서 했던 질문으로 돌아가보겠다. 힘을 가진 이들이 책임을 지지 않는다면? 누구에게 미뤄지게 될까? 


백제의 쇠락에 기여(?)한 바가 없는, 그래서 역사에서 익명으로 남은, 계백의 처와 자식이 죽어야했던 역사가 그 답이 될 것이다. 책임진 남자들의 국가는 성장했고 책임지지 않늠 남자들의 국가는 자신은 물론, 처자식까지 그 독박을 씌우며 패망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대한민국은, 책임을 지는 남자들의 나라였을까? 




책임지지 않은 남자들의 대한민국


최근 개봉해서 천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한 영화, '국제시장'은 대한민국 근현대사를 다룬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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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만듦새는 둘째치고 일단 그 향수를 자극한 것과 다른 영화에 비해 넓은 세대를 포용할 수 있었던 주제가 있었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이 영화를 보며 즐길 수 있었던 거 같다. 그러나 이런 장점들에도 불구하고 개봉 초 논란이 끊이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본 기레기는 그 논란이 영화가 공감할 수 없는 두 가지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라 분석한다. 


비공감 포인트 하나는 격동의 시대에는 나오기 힘든, 바보 같이 착한 성격의 주인공이다. 전쟁 트라우마도 없고 법보다 주먹이 가까운 사회를 살아온 얼룩도 거의 안 보이는 이런 캐릭터가 가능할지 모르겠다. (주인공을 아예 바보로 설정한 '포레스트 검프'와 그래서 여러 모로 비교된다.)


비공감 포인트 둘은 바로 논란이 되었던 '이 고생을 우리 자식이 아니라 우리가 겪은 게 참 다행'이라는 대사다. 


사람은 경험에 기반해 모든 걸 판단하는 동물이다. 추운 지역에 태어나 일평생을 오들오들 떨며 산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아, 내가 많이 떨었으니 내 자식은 안 추워도 되겠네'하고 생각할까? 아니다. '이 녀석도 졸라 떨며 살겠네'라고 생각하는 게 정상이다. 그래서 자기 자식에게 '얼어 뒤지지 않으려면 따뜻한 곳으로 가기 위해 부지런히 걸어야 한다'고 계속해서 주지시키게 된다. 이게 우리나라 교육열의 정체다. 


① 나는 고생하며 살아서 세상이 고통스러운 곳임을 잘 안다.


② 내 자식도 고생할 게 뻔한 반면 상류층에 있는 사람들은 고생 안 하며 살더라


③ 그러므로 내 자식은 고생 안 하기 위해 졸라 열심히 공부해 상류층으로 들어가야 한다. 


현실이 이렇기에 '자식을 고생시키지 않기 위해 자기가 모든 고생을 혼자서 다 해버리는 아버지'는 공감할 수 없는 판타지다. 이쯤에서 반문하실 분이 있겠다. 예전에는 첫째 아들 공부시키기 위해 온 가족이 돈 벌어 뒷바라지하는 가정이 흔지 않았냐고. 


그렇다. 모든 자녀에게 교육의 혜택이 돌아갈 수 없는, 넉넉하지 못한 가정에서는 주로 첫째 아들만 학교를 보내고 부모와 다른 형제들은 막일을 하며 돈을 벌었다. 그러나 이렇게 한 것은 희생이 아니라 '투자'였다. 


"두 딸네미들 교육문제 때문에 좀 티격태격했어. 우리 딸들이니까 최고로 좋은 교육을 받아야 한다. 요즘 세상에서는 부모의 교육수준과 경제력 수준이 자식의 미래를 결정한다라고..."


"맞는 말이잖아."


"맞는 말이지. 그런데, 아이 엄마가 좀 심했어. 뭐...심하다고 하긴 그렇고, 그 동네 아줌마들의 상식...아니, 대한민국 엄마들의 상식이지."


"어떤 상식?"


"내가 좀 무리하더라도 자식들에게 투자를 해야 한다. 안 하면 아이들이 뒤처진다...뭐 그런 논리들 있잖아."


"...아"

(7편 중)

 

연재에서 예로 든 대화 역시, 자식 교육에 돈 쓰는 걸 '투자'라고 표현하고 있다. 너무도 자연스럽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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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자는 리턴을 바라고 하는 행위지, 일방적인 희생이 아니다. 자녀 모두를 교육시킬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 할 경우, 우리의 부모 세대는 한 명을 골라 '올 인'을 했다. 그리고 다른 가족들은 베팅 결과가 나오길 기다리는 동안 필요한 것들을 조달하거나 성공할 확률을 높이기 (보다 고등교육을 장기간 받는 데 필요한 돈을 마련하기) 위해 생업에 뛰어들었다. 그렇게 투자를 거듭하다가 마침내 '올 인'한 가족 구성원이 한 자리 맡아서 결과물을 갖고 오면 온 가족이 나눠 먹었던 거다. 


물론 그 '올 인'의 패로 꼽힌 형제가 성공하고도 가족들을 나몰라라하는 막장 케이스도 있었지만 우리는 대한민국 고위공직자들의 측근 비리를 통해 투자금 회수가 많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봐왔다. 다시 말해 가시적인 수확물을 거둔 사례가 많았던 투자이기에 망설일 이유가 없다는 거다. 이를 '내 자식 대신 고생'한 것이라 미화해주기는 어려울 수밖에 없다. 그 고생은 철저히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 새마을 운동 노래 가사를 떠올려보자. '우리'도 한 번 잘 살아보세였지. '내 새끼 한 번 잘 살게 해보세'가 아니었다. 


따라서 국제시장의 대사를 현실에 맞게 고친다면 이렇게 된다. 


이 고생을 우리가 겪고 보니 좆같드만, 우리 애들도 참 좆 같겠다. 


예나 지금이나 대한민국의 남자들은 고생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 고생의 정도가 오히려 더욱 심해지고 있다. 이러한 현상의 원인을 계백이 연재글에서는 이렇게 진단하고 있다. 


분명 예전에는 아버지의 권위와 권리가 보장됐다. 그러나 지금은 과도기적 상황에서 의무의 비중만이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다. 

(2편 중)

 

과연 그럴까? 의무의 비중이 늘었다고 할 수 있으려면 의무가 늘거나 권리가 줄거나, 이 둘 중 하나는 반드시 일어나야 한다. 그러나 의무가 늘었다고 하기엔 부양할 가족의 수가 눈에 띄게 줄었다. 거기다 오늘날의 가장들은 세대를 막론하고 노인 부양에 소극적이게 되었다. 


그렇다면 권리는? 만약 내가 번 돈을 나를 위해 쓰는 게 권리라고 한다면 이것을 줄었다고 말하기란 어려울 것이다. 광복 이후 가장들 또한 대부분 버는 돈을 스스로에게 쓰며 살지 못했다. 자식 교육을 위해 썼다. 미래의 영달을 위해서. 다만 이 투자가 너무 일반화되다 보니 너도 나도 하게 되었기 때문에 경쟁이 치열해진 것이며 그만큼 회수하기도 어려워진 것이다.


요는, 지금 이 시대의 가장들이 힘든 건 일종의 '투자 실패'를 예감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얘기다. 아이들에게 쏟아부어도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것. 얘들이 미래에 노인이 된 나를 부양해주기는 커녕 현재의 능력 있는 아버지인 나와도 멀어지고만 있는 현실을 보고 지금 하고 있는 노력이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목표가 한정적인 사회는 경쟁을 위해 들여야 하는 노력이 과해지는 만큼 비효율적이 된다. 그래서 대한민국은 '고비용 저효율'이란 말로 요약되는 사회이다. 효율성을 극단적으로 추구한 나머지 목표한 하나를 위해 그 외에 것들을 비용으로 지불해버리게 되는 것이다. 좁은 공간에 최대한 많은 케이지를 쌓은 뒤 거기에 닭들을 앉혀놓고 알만 낳게 하는 양계장처럼. 이런 양계장의 닭들은 아플 새도 없다. 항생제를 맞아가며 오로지 하나의 목표-계란 생산을 위해 투신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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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형태의 사회를 만드는 데에 남자들은 미치도록 열심이었다. 어렸을 때는 좋은 학벌을 갖기 위해, 젊어서는 좋은 직장을 갖기 위해 나이 들어서는 성공한 자식이라는 노후 보장책을 갖기 위해. 오로지 '갖기 위해' 살아왔다. 주위 사람 누군가가 성취하는 것을 눈으로 보았기에, 그래서 이뤄질 것이라 희망하기 충분한 '욕망'을 위해 투신해온 것이다. (이렇게 다른 사람의 추구하는 것에 민감해진 것은 물론 대한민국 근현대사가 전쟁과 독재 등 재난의 연속이었던 탓도 있다. 난리 통에는 사람들 뛰는 쪽으로 같이 뛰어야 생존 확률이 높아지니까.)


모두가 같은 방향으로 달리며 한정된 권익을 욕망하기 때문에 베팅액수는 커지고 이것은 생존이 걸린 경쟁이 된다. 이런 상황이 사람을 끊임없는 긴장 상태에 있게 하고 우리가 의무의 범주에 두는 일들(이를테면 계획된 행동의 결과를 예측해 이를 보완한다거나 닥치지 않은 위험을 내다보고 미리 대비해둔다거나 등등)은, 하다가 경쟁에서 뒤쳐질 위험 때문에 기회 비용으로 치고 포기해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대한민국 남자들은 창의적으로 키워야할 두뇌들을 죄다 법조계로 몰아넣었으며 고생해 올라간 이들의 수단방법 가리지 않는 투자금 회수를 당연하게 여겨줬고 결혼 또한 일종의 투자 회수 개념인, 집안 간 돈잔치로 부풀렸으며 부동산을 팔고 사며 남겨먹기를 거듭해 거품덩어리 시장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거품이 꺼지는 걸 두려워해 계속해서 부패한 정치집단의 기득권을 유지시켜주었다. 


덕분에 지금의 대한민국 남자들은 법보다 주먹이 가까운 사회에서 빚지지 않으면 교육도 결혼도 주거도 해결할 수 없는 지경에 놓이게 되었다. 손톱만큼의 효율과 가치를 얻기을 위해 상상할 수 없는 비용을 지불하고 있다. 대한민국 역사 전반에 걸쳐 미뤄져왔던 책임을 독박 쓰고 있는 것이다.



오늘 반박은 일단 여기까지다. 쓰다 보니 글이 길어져서 좀 끊어가야 되겠다. 애초에 일곱 편이나 되는 글을 한 편의 글로 반박하다니, 될 턱이 없었다. 


다음 편에서는 이 독박의 사슬을 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를 쓸까 했는데 씨바... 장동민의 여성 혐오 발언이 도마 위에 올라버렸다. 워낙 일찌감치 쓰기 시작한 반박글이라 쓰는 도중 이런 이슈가 다시 불거진 데에 지금 기분 참 신묘한 상태다. (뭐, 이 비슷한 사건이 앞으로도 계속 터지겠지.) 그래서 대한민국 남자들이 왜, 뭐 땜에 여자를 원망의 대상으로 삼는지 그 원인에 대해서도 함 써볼까 한다. 


정말 쓸 게 많다. 







퍼그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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딴지그룹 마켓팀원. 편집부 일도 하고 왔다갔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