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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04. 21. 화요일

sydney






-그들과 우리, 어떻게 다른가?- 


이 글은 시드니에서 15년간 택시 운전을 하며 얻은

문화인류학적 느낌을 정리한 글입니다.






운전 중에 동포들을 만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제일 많이 볼 수 있는 사람들은 패키지 관광을 온 사람들이지만 그들은 단체로 몰려다니기 때문에 택시와는 상관이 없다. 그래서 그 다음으로 많이 볼 수 있는, 한국 회사에서 출장을 와 비교적 저가 호텔에서 묵는 젊은 사람들을 태우게 되는 편이다. 그 중에서 또 제일 자주 만날 수 사람들이라면 한국 제일의 기업답게 삼성에서 보낸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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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은 회식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 삼성 현지법인 직원을 태우게 되었다. 그 사람은 시드니에서 온 지가 2년이 넘었는데 집에서 식구들과 저녁을 먹어 본 적이 몇 번이 없다고 했다. 한국인 7명이 150명의 호주직원들을 관리해야 하기 때문에 잠시도 쉴 틈이 없다는 것이다. 내가 호주 직원들도 한국 사람처럼 열심히 일을 하느냐고 물으니까 물론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불평하진 않느냐니까 삼성에서 근무했다면 다른 회사에서도 모두 인정해 주기 때문에 회사를 옮길 때 유리한 경력이 되기 때문에 긍지를 가지고 일을 한다고 하는 것이다. 삼성은, '성공'이라는 든든한 배경을 바탕으로 그 가치와 욕망, 일하는 방식 등을 작게는 대한민국 전체로, 넓게는 전 세계적으로 확대시키고 있는 셈이다. 삼성은 해외에서 현지의 문화에 삼성이 적응하는 것이 아닌, 현지의 직원을 삼성화시키고 있다. 그 결과, 처음에는 현지 직원들의 이탈과 반발이 심하지만 날이 갈수록 삼성의 팽창과 더불어 삼성이 원하는 가치를 직원들이 따르게 된다고 한다. 전적으로 그의 말에 의하면 그렇다는 것이다.


또 한 번은 한국에서 온 삼성 전자 모바일폰 기술자들을 태운 일이 있었다. 3박 4일 일정으로 출장을 왔는데 하루도 쉴 틈 없이 왔다가 일만 하고 즉시 돌아가도록 스케줄이 잡혀 있었다. 


예를 들면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출장이면 쉬는 날인 일요일에 비행기를 타고 오게 하고 역시 쉬는 날인 토요일에 오게 해서 일요일을 집에서 쉬고 그 다음 월요일에 피로가 풀린 모습으로 다시 회사에 와서 일을 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다. 즉 야박하게 가는 날, 오는 날은 일하는 날로 쳐주지를 않는 것이다. 알고 보니 이런 출장 형태는 삼성뿐만이 한국의 젊은이들이 들어가지 못해서 안달인 대기업들의 공통적으로 행하고 있다 한다. 그러나 이런 방법은 호주 회사 같으면 있을 수가 없는 야만적 경영이다. 이 얘기를 듣고 나는 아들들이 취직을 하기 전에 호주로 왔던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에서는 대학에 진학하는 경우에서부터 바로 취업에 이르는 경우까지, 대부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난 다음에 어떤 일을 하게 될 것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할 기회도 없이 공부만 한다. 이렇게 되니까 졸업 후에 정작 노동자가 된 다음에 '내가 이 일을 하러 여기 온 것이 아니다''라거나 '내가 이런 일을 하게 될 줄 몰랐다'고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뭐가 제대로 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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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인가 귀엽게 생긴 젊은 여자애가 탔는데 분위기가 어쩐지 그 나이 또래의 보통 애들과 달라서 뭘 하느냐고 물었더니 군인이란다. 그것도 해군, 왜 하필 해군이냐니까 자기는 블루마운틴이라는 시드니 근교인 산동네에 살아서 해군을 지원했단다. 왜 군대를 갔냐니까 고등학교를 졸업을 할 때까지 무엇을 해야 할지 결정을 못해서 군대를 갔다 온 다음에 대학에 가야겠다는 생각에서 지원을 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천천히 여유 있게 쉬엄쉬엄 장래를 설계하는 아이들과 짐승 무리 쫓기듯이 쫓겨야 하는 아이들의 인생이 어찌 같겠는가?


또 한 번은 초등학교 종업식에 참석을 해보았는데 무슨 상이 그렇게 많은지 전교생에게 주는 것 같았다. 별 별 명분을 다 갖다 붙여서 학생들을 불러내서 메달을 수여 하는데 한 시간이상 걸렸다. 아마도 교사들은 메달 이름 짓기도 힘들었겠지만 그 메달 하나하나를 받는 아이들 개인에겐 소중한 것일 것이다. 아이들을 달달 볶는 한국이 교육지옥이라면 여기는 교육천국인 셈이다.


교육을 떠올리니 장애인 대학생을 안내했던 경험이 떠오른다. 한 주 동안 호주의 장애인 시설을 돌아보기 위해서 한국에서 온 10명 정도의 학생이었다. 그들의 일정 중에 캔버라 한국 대사관을 방문하는 순서가 잡혀 있었다. 나는 장애인 문제와 대사관과는 아무 관계가 없기 때문에 대사관 방문은 피차에 시간낭비일 뿐이라고 조언을 했다. 그러나 그 동안 대사관을 통하여 섭외를 했고 대사관에서도 방문을 원하는 면이 있다고 해서 시간을 잡았다. 아마 대사관 사람들이 업무 보고 거리가 필요했던 것 같았다. 단순히 교섭만 해준 것 보다는 장애인 대학생들의 공관방문 그림이 그럴듯해 보이지 않는가?


11시에 대사관을 방문 했는데 총영사. 참사관, 직원이 나와서 일행을 따듯한 태도로 맞아 주었고 중간에 대사까지 잠시 짬을 내어 주어 인사말씀도 해주었다. 대사는 인사만 하고 자리를 뜨고 총영사와 대화 중에 국가의 큰 일(4대강을 암시하는) 때문에 예산은 삭감되고 환율을 높아져서 대사관의 운영이 어려워서 교민들에게 제공해야 할 서비스를 제대로 제공할 수 없음을 안타까워하는 마음을 충분히 읽을 수가 있었다. 그러면서 그는 일행에게 물 밖에 대접할 수 없음을 무척 미안해했다. 사실은 예산에 쪼들리는 학생들 측에서 혹시 점심시간이니 점심을 해결해 줄 수 없겠느냐는 뜻을 조심스럽게 표현했지만 유감스럽지만 예산 사정상 그럴 수가 없다는 답을 이미 들었었다. 아마도 대사관에서는 자기들 수준으로 생각해서 10명을 대접하자면 돈이 많이 들것이라고 생각했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 동안 학생들의 식사 중에 제일 많은 액수가 180불이었다. 


그날 대사관 측에서 학생들에게 제공된 20여 개의 생수 값도 40불은 되었을 것이다. 나올 때 나는 일부로 학생들에게 "얘들아! 이 생수도 세금으로 산 것이니까 하나도 남기지 말고 모두 챙겨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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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대사관 앞에서 직원들과 '김치~'하고 기념사진을 찍고 켄터키 치킨에 가서 80불을 내고 점심을 해결했다. 


한 해에 대사관에 오는 손님도 많을 것이다. 한국에서 국회의원이나 유명인사가 오기도 할 것이고 따라서 상대에 따라 예우를 하는 관행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관행에 대학생들은 생수 한 병으로 대접하라고 되어있기라도 한 것일까?


앞에서도 말했지만 대사관 운영에 예산이 부족해서 쩔쩔매는 것은 인정한다. 그러니 점심을 못 얻어먹었다고 투정을 부리고 싶진 않다. 그렇다해도 일생에 한 번, 수많은 경쟁을 뚫고(대사관은 그들이 어떤 경과를 통해서 호주에 오게 되었는지 이미 잘 알고 있었다) 호주까지 온 장애인 대학생들에게 200불을 쓸 수 있었다면 그 돈은 고국에서 오는 어느 고위 인사를 접대하는 것 보다 훨씬 가치가 있었을 것이다.


아들 딸 같은 장애인 대학생들이 점심시간이 임박해서 찾아왔는데 '예산 사정이 어렵다'고 했던 그 대사는 직업 외교관이 아닌 정치학 교수 출신으로 이명박 대통령 인수위에 들어갔다가 호주대사로 왔다고 했다. 그래서 그런지 참으로 명박스럽게 느껴졌다.


새벽에 눈 비비고 일어난 토끼는 깊은 산속 옹달샘에 가서 물만 먹고 왔지만 우리는 캔버라 한국 대사관에 가서 물만 먹고 왔다.


그런데 이런 보이지 않는 차별이 대사관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가끔 아이들을 데리고 가족 동반을 한 식구들을 태워 보면 부모들의 태도 또한 보통 외국인들처럼 자연스럽지 않고 뻣뻣했다. 해외에서 예상치 않게 한국 운전사를 만나면 반가울 만도 한데 그렇지가 않고 오히려 경계하는 듯한 반응을 보이는 것은 왜 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처음에는 '그 사람들의 개성이 그렇겠지'하고 생각도 해보았지만 자주 겪다 보니 그런 것이 아니고 의식문제가 아닐까 하는 쪽으로 생각이 기울었다. 아마 한국에서 택시 기사를 대하던 태도대로 해외에 나와서도 택시 운전사를 얕잡아 보는 시선이 되는 것이라 짐작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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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적으로 양반 상놈의 신분으로 나뉘어졌던 한반도의 남부에 자본주의가 들어오면서 남한 사회가 보이지는 않지만 돈으로 계급이 뚜렷하게 나뉜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북한도 보이지 않는 계급이 존재하지 않는가. 물론 처음 그 계급이 나뉘어진 것은 양반 상놈이나 돈에 의해서가 아닌 새로운 출신성분에 의해서다. 즉 식민지 통치시절과 한국전에서 행한 조상의 행적에 의해 계급이 정해졌던 것이다. 30년대 만주에서 유격대로 활동한 조상의 후손들, 한국전에서 전사한 조상의 후예들을 포함한 고위급 관료들의 자녀들은 적잖은 특혜를 누렸다. 반대로 일본식민통치시절 간부, 기독교인, 한국 전쟁 시 남으로 도주한 이들과 관련된 후손들은 불리한 차별대우를 받았다. 그러나 1990년대부터 시장경제가 성장하기 시작하면서 고위급 출신성분 자녀들은 이제 더 이상 삶의 출셋길을 보장받지 못하는 추세가 되었다. 이제 남과 북이 똑같이 돈이 주인이 되는 세상이 되었다는 의미에서는 체제의 동질성(?)이 유지되었다고 보아야 할 판이다.


그런데 남한 사람도 북한 사람도 아닌 사람이 호주에서 곤란을 당하는 일도 있었다. 대한민국의 헌법은 뱃심 좋게 실제로는 다른 나라인 북한까지도 영토로, 북한 주민까지도 국민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대부분의 남북한 주민들은 그러려니 하면서 살 수 있지만 목숨을 걸고 북한을 탈출해서 제 3국으로 간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보통 문제가 아닌 자신들의 생명을 얽어매는 오랏줄로 작용을 한다.


탈북자 정씨는 중국에서 호주에 가면 용접공으로 돈을 벌며 평화롭게 살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을 듣고 위조 여권을 가지고 호주로 행하는 단체관광팀에 끼어서 왔다. 정씨는 시드니에 도착하자마자 관광객 일행에서 떨어져서 이민국으로 찾아가 안내 데스크에서 중국에서 시킨 대로 "노스 코리아!"를 연발하며 울었다. 이민부 직원들이 브리징 비자를 내주었고 그는 용접공으로 일을 했다.


그러나 2011년 11월 그는 난민보호비자 신청이 거절되었다. 이유는 호주의 연방대법원은 난민신청자가 제3국에서 보호받을 자격이 있을 경우 호주에 잔류할 수 없다고 판결했기 때문이다. 즉 탈북자는 한국인으로 한국에서 보호 받을 자격이 있기 때문에 난민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정 씨는 중국에서 태어났지만 북한에서 살았다는 식으로 본의 아니게 억지스런 거짓말을 지어내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어찌되었던 한국인으로 인정 되는 것만은 모면해야 되기 때문이다.


정 씨 입장에서는 그런 국민이 존재하는지도 알지도 못할 한국 정부 때문에 운명이 달라질 뻔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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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본 주제로 돌아와서 백인 사회와 우리나라의 차이를 실감나게 한 사례 하나를 더 소개하겠다. 시내의 한 호텔에서 쇼핑을 하러 가는 비교적 깨끗하게 생긴 젊은 한국 여성 3명을 태웠다. 백인들은 보통 타는 순간 서로 가볍게 인사를 하는데 서로 다툰 사람들끼리 택시를 타는 것처럼 처음부터 썰렁했다.


한국 사람들이기에 반가워서 내가 먼저 한국 사람임을 밝히고 말을 걸었는데도 예상외로 반응이 냉담했다. 반가워하기는커녕 웃음기 전혀 없는 찬바람이 도는 분위기였다. 무색해진 나는 도대체 무엇을 하는 사람들인지 궁금했는데 알고 보니 시드니에 도착하면 일박을 하고 다음날 임무교대를 위해서 쉬고 있는 아시아나 비행기 승무원들이었다.


아마도 평소에 힘든 일을 하면서도 결코 웃음을 잃지 않는 승무원들의 이미지에만 익숙하다가 보니 더 그렇게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직업상 시드니에 자주 온다니 특별히 관심을 보일 일이 없기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 중에 제일 나이가 들어 보이는 축이 대표로 나에게 이것저것 필요로 하는 것을 물어 보기는 했어도 잠시 동안이었지만 결코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다. 


아무리 먹고 살기 위한 직업과 일상생활의 모습이 다른 것이라고 해도 비행기 안의 여승무원과 비행기 밖에서의 그들의 모습 사이의 차이에 그렇게 너무 심한 것을 보고 '감정노동'이란 책이 생각났다. 델타 항공의 승무원을 대상으로 연구해서 쓴 이 책에서 "승무원은 어떠한 상황에서든 승객을 미소로 맞이해야 한다. 승무원 자신의 감정은 중요치 않다. 승객이 이유 없이 화를 내고, 무리한 요구를 해도 절대로 불쾌감이나 공포를 내비쳐선 안 된다. 아니, 속으로 불쾌감을 느껴도 승객이 알아채서는 안 된다."고 되어 있다. 결국 내가 만난 그 승무원들은 감정노동자였고 내가 만났을 때 그들은 노동에서 해방된 상태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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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승무원들을 보고 30년 전 처음으로 미국에 갈 때 완전히 할머니 승무원이 머리에 관을 쓰고 꽃을 달고 서비스를 하고 있던 것이 생각났다. 나는 양로원에서 실습을 나왔나 하고 생각했더니 기내 방송에서 이번 비행이 그 할머니 승무원의 마지막 비행이라고 소개를 했다. 우리나라라면 고참이라고 폼 잡고 앉아 있을 터인데 마지막까지 젊은 사람들과 똑같이 최선을 다하는 할머니 승무원의 모습에 존경스러움을 느꼈다. 아마 그 동안의 감정노동이 생활화되었는지도 모르겠지만 아주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이렇듯 우리나라와 대조적인 서구 사회의 일면이 보이기도 하지만 백인 사회라고 언제나 우리나라보다 좋은 면만 있는 건 아니다. 


우선 앞서 언급한 교육 문제. 호주 TV는 미국 방송 보다는 큰 집인 영국 BBC가 제작한 드라마를 많이 방영한다. 한국인의 시각으로 볼 때 드라마에서 나오는 영국 공립학교의 분위기를 보면 대체로 살벌하다. 물론 요즘은 한국도 내가 옛날에 학교를 다닐 때와 많이 달라져서 학교에서 교권을 찾아 볼 수가 없고 심지어는 수업이 안 될 지경이라고는 하는 말도 들리기는 하지만 영국의 공립학교의 분위기를 보면 저런 곳에서 어떻게 공부가 될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실제로 한국에서 교사를 하다가 호주에서 교사가 된 사람(영어가 잘 안 돼도 가능한 수학 교사이었기 때문에)이 학생들의 태도 때문에 받은 충격으로 정신적인 장애를 얻은 경우도 보았다. 도대체 영국의 공립학교의 분위기가 왜 그런 것일까?


집이나 옷은 물론이고 쓰는 말이나 발음에서까지 세밀하게 신분이 나눠지는 영국에서는 주로 노동자 계급의 자식들에게도 당연히 그들만의 문화가 형성되어 있다. 그들은 학교와 학교가 제공하는 지식을 거부하고 '사나이 문화'라는 하위문화를 형성하며 다시 노동자 계급으로 재생산되고 있다. 간단하게 말하면 노동자 계급의 아이들은 교육을 통해서 신분 상승이 가능하다는 학교의 선전을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 이론으로 가르치는 학교의 지식은 현실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교사의 권위에 반항하는 것을 과시하는 '반학교 문화'를 형성한다.


자신들도 부모를 이어서 노동자가 될 것이라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으면서 결국은 노동자가 되고야 마는 한국과는 달리 영국의 경우에는 자신이 노동 계급이 될 것을 알고 그들의 문화를 미리 당겨서 십대 때부터 경험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노동자 문화가 학교에서부터 부분적으로 실현되기 때문에 얼핏 보면 거칠어 보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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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 서구 선진국들은 우리가 막연하게 '우리보다 평등하겠지'하고 생각하는 것처럼 평등하지 않다. 단적인 예로 서구 선진국에서는 죽었다 깨어나도 노무현 같은 상고 출신이 대통령이 될 수 없는 나라이다. (우리나라는 그렇게 될 수 있는게 문제라고 크게 탄식하는 사람들도 있는 듯 하지만)


서구사회는 사회가 정체되어 돈이 많이 드는 사립학교와 명문대학을 통하지 않으면(부시처럼 비록 옆문으로 들어가더라도) 사회지도층으로 진출할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완벽하게 차단되어 있는 형편이다. 대한민국과 북한처럼 계급 사회인 것이다.


물론 새로 침범한 땅을 개척하기 위하여 죄수들로 인력 송출을 해서 시작된 호주는 이런 면에서 조금은 나은 편이라 할 수 있다. 전 수상의 5대조 할아버지가 영국에서 '말 도둑이었다나', '소도둑이었다나' 말이 나왔지만 당사자가 조금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긍지를 느낀다는 나라이니 말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서구사회는 이미 어려서부터 자신이 살아갈 배경이 결정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이렇게 계급적 대물림이 몇 대를 계속되다보면 하층민들은 점점 교양과 지성이 결여된 밑바닥 인생으로 고착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서구사회에 말이 통하지 않고 토론도 설득도 되지 않으며 오직 자신들의 동물적 욕망과 생존을 위해서만 움직이는 부류가 상당히 많은 것이다. 즉, 약간의 조건만 주어지면 언제든 범죄자로 변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인간들이 많아 보인다. 그에 비해서 격차가 많이 나기는 하지만 그래도 전체적으로 인간의 질은 대강 비슷한 한국이 아직은 희망이 있지 않나 싶다.


우리는 흔히 자기가 부당하게 느끼면 "인간 차별하는 거냐?"하고 따지는 정서가 있다. 그러나 백인 사회에서는 입으로는 "내가? 그럴 리가 있나?"라고 하지만 속으로는 '그럼 너하고 나하고 같은 인간이란 말이냐?'하는 정서가 깔려 있다고 보아야 실망할 일이 적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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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역사를 보면 아일랜드의 대기근과 1848년의 유럽 혁명 이후 수백만의 아일랜드인, 독일인들이 신대륙으로 향했다. 어느 정도의 재산과 기술을 가지고 건너간 독일계는 수공업자나 자영농으로 살아가면서 백인 사회에 좀 더 수월하게 적응했지만, 오랜 세월 영국의 억압을 받던, 가난한 농민 출신의 아일랜드계는 영어를 사용한다는 것 이외에는 정말로 가진 것이 없던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이들은 '하얀 흑인'으로 취급받으며 대다수가 막노동과 하녀 일 등으로 생계를 꾸려야 했다. 


그래도 아일랜드인들은 유럽인이었고, 1870년대가 지나면서 서서히 백인의 일원으로 인정받게 된다. 하지만 비슷한 시기에 신대륙에 들어온 중국인들은 그렇지 않았다. 중국인들이 본격적으로 신대륙에 오게 된 것은 캘리포니아에서 금이 발견되고 나서였다. 광산이나 철도 공사장 등 힘든 일에 종사했기 때문에 중국인들은 처음에 환영받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낮은 임금도 마다않고 일했기 때문에 백인 노동자들이 보기에 이들은 자신들의 일자리를 빼앗아 가는 사람들이었다. 이런 현상은 호주에서 똑같이 일어나서 1967년부터 백호주의에 대한 논쟁들이 지속되다가 1978년에 공식적으로 '다문화'를 국가 정책으로 채택했다. 다문화(multiculture)라는 용어를 공식적으로 1950년에 제일 먼저 사용한 나라는 놀랍게도 인도였다. 영국이 징그럽게 크고 말이 많은 인간들로 구성된 나라를 경영하려니 필요한 정책이었던 것이다. 1971년에 캐나다에서 '다문화'라는 용어를 차용했는데 영어를 사용하는 구역과 불어를 사용하는 구역이 구별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호주의 경우는 캐나다와는 전혀 다른 의미로 처음에 사용되었다. 


한국에서도 외국 선교사들이 올 때, 백인 흑인을 막론하고 미국인들과 서구사회에서 들어올 때에는 다문화라는 말이 없었는데 동남아시아나 중국 사람들이 한국에 결혼이나 취업을 통해 들어오면서 다문화가 의제로 떠오른 것을 보면 그 의도를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여러 색깔로 구성된 무지개는 아름답다. 다양한 색깔들로 구성되어 있는 색종이의 조화는 환상적이다. 그러나 인간들이 오랫동안 갈등과 모순의 반복 속에서 형성된 문화들 간의 만남을 결코 아름답지만은 않아서 때로는 피비린내를 부른다. 인간은 역시 죄 많은 동물인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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