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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04. 22. 수요일

귀부인










 

나는 친할아버지를 생전에 뵌 적이 없다. 어렸을 때는 막연히 돌아가신 건가보다 생각했었다. 중학생쯤 되었을 때 할머니에게 우린 왜 친할아버지가 없느냐고 물은 적이 있었는데 다시는 그 질문을 하지 말라고만 하셨다.

 

아버지는 사연을 알고 있는 삼촌이 돌아가시기 전 알려 준 정보를 가지고 친부의 정보를 찾아봤다고 한다. 그리고 경찰이셨던 친부의 정보를 서대문경찰서에서 찾을 수 있었다. 그렇게 어렵게 찾아 얻은 것은 작은 흑백 증명사진 한 장이 다였다. 서류상으로는 남남이기에 더 많은 정보공개가 불가능 하다고 했다. 아버지가 가져온 할아버지의 사진 속 얼굴은 30대 후반 즈음으로 보였는데 한 눈에 봐도 참 닮아 있었다. 아버지는 그 사진을 큼지막하게 그림으로 옮겨 안방에 소중하게 걸어두었다.

 

아버지의 젊은 시절, 군 입대를 얼마 남기지 않고 할머니 몰래 아버지의 고향에 내려가서 소식을 들으려 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고향에 남아있던 먼 친척으로부터 할아버지와 연락이 끊긴지 벌써 7년쯤 되었다며 어디에 계신지, 살아는 있는지 아는 것이 없다는 말을 듣고 오셨다고. 심지어 할아버지는 형제도 없고 자매도 없다. 나에게 증조모인 아버지의 외할머니는 돌아가셨고, 증조부는 할아버지가 태어나기도 전에 만주로 떠나 생사도 모른다고 한다. 참 손이 귀한 집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때 뵌 친척분은 얼굴만 봐도 누구 후손인지 알겠다며 친할아버지에게 자식이 없으니 호적정리를 해주는 것이 어떻겠느냐 권유했다고 한다.

 

친할아버지를 찾아보겠다는 아버지의 마음은 점점 포기로 바뀌어 갔다. 할머니가 입을 열지 않았고, 호적을 정리해 달라는 요구도 계속해서 거절당했다. 친부와 왜 인연이 끊어진 건지 어디서 어떻게 만난 건지 아버지의 어릴 적 기억과 조금씩 들은 정보로 추측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어느새 세월이 흘러 아버지는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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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살아계셨다면, 자신의 존재가 궁금했다면... 나를 찾으시지 않았겠나. 그러지 않은 것을 보니 나도 그만 미련을 버려야겠다.’


 

아버지는 자신의 아버지를 마음속에서 돌아가시게 하지도, 살아계시게 하지도 못했다. 또 아버지를 그리워하지도 전혀 그리워하지 않을 수도 없으셨다. 때로는 밉고 원망스러울 때도 있었을 거다. 그리고 네 할머니가 밉지만 내 자식들에게 할머니까지 빼앗을 수는 없다고 종종 말씀하셨다.

 

할아버지가 아버지의 친부인 것은 확실하지만, 이 부부는 혼인신고도 하지 않았다. 무슨 사연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버지의 출생신고도 제때 되어있지 않았고, 중간에 주민등록을 말소한 기록도 있다. 결국 할머니는 재혼을 하셨기 때문에 아버지와 나 그리고 내 동생 모두 새 할아버지의 호적에 들어가 있다. 재혼을 했어도 금세 갈라섰기 때문에 나는 새 할아버지를 호적초본에서만 뵈었다. 아이고 복잡하다. 가계도라도 그려야 할 판. 아무튼 현재 나의 성씨는 전혀 모르는 집의 것이다.

 

아버지가 가지고 있는 아버지에 대한 마지막 기억은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이라고 한다. 무슨 사연인지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아버지를 사이에 두고 뺏고 뺏기기를 두어 번 반복했다. 이제와 생각해보니 아버지와 할머니 모두 주민등록을 말소시키고 했던 것은 잠수를 타기 위한 것이었던 것 같다. 그 당시에는 대체 무슨 일들이 벌어졌던 걸까?


어쨌거나!!

 

제사에서 아이스크림을 당당히 요구하신 것이 바로 나의 친할아버지였다. 제사를 일요일 오전 10시에 하자 하시고, 숫자 3을 보여주신 뒤 이 세 분의 조상님들은 나의 제사를 돕고자 열심히 등장을 해 주셨다. 한 분은 외할아버지니 알아 볼 수 있었고, 한 분이 친할아버지(나머지 한 분은 모르겠다).


이렇게 태어나서 처음으로 친할아버지를 만났다. , 제사를 위해 오셨다면 이미 돌아가신 것이리라. 마음이 좋지 않았지만 다음날 나는 당장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빠, 우리도 친할아버지 제사 지냅시다.


살아계실지도 모르는 양반 제사를 어떻게 지내냐. 돌아가셨다 해도 기일도 모르고.”


생일에 하거나 명절 때 하면 되지 뭐.


돌아가셨는지 너가 봤어?”


응 내가 봤는데...”


봤어??”


할아버지가 넓게 편 고기산적 그거만 있으면 된다 하고, 기일을 모르면 생일에 하면 된다 하시대요


“?????”


 

내 이야기를 듣고 아버지는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멀쩡하게 키워놓은 딸래미가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봤다고?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 황당도 하셨을 거다.

 

친할아버지와 외할아버지 그리고 또 다른 조상님은 천도제 이후로도 몹시 바쁘셨을 거다. 내 꿈에 나와 머리도 감겨주셔야지, 빨래하라고 독촉해야지(세탁기 여러 대로 빨래를 했다), 깊은 물을 무서워하는 나를 씻겨야 한다고 물에 떠밀어야지(물에 열심히 씻어야 한다고 한다)때로는 다른 영가들 때문에 피곤해 할 때 구해줘야지, 귀도 막고 눈도 막아주셔야지. 그래서 나는 나도 내 편이 있다!’하고 철딱서니 없이 좋아했다.

 

친할아버지에 대한 첫인상은 참으로 꽃미남이라는 것이었다. 할아버지는 샤프한 얼굴에 하얀 셔츠를 입고 소년의 모습을 하고 나를 보러 오셨다. 원래 조상님이 꿈에 보일 때는 생전에 제일 멋진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한다고 한다. 미루어 짐작하건데 할아버지의 외모적 황금기는 아마도 소년기였나 보다. 할아버지와 나는 테이블에 마주앉아 대화를 나누었다. 잘 기억은 안 나지만 할아버지가 가장 많이 하셨던 말은 '찾아라'였다.

 

언젠가부터 꿈에 자주 가던 시골길이 있었다. 양쪽으로 나무가 늘어선 좁은 시골길. 그 길을 하도 많이 가봐서 그림으로 그려두기도 했었다. 당최 아무런 이정표가 보이지 않아서 대체 여기가 어디인지 헤매다 잠에서 깨곤 했다. 천도제를 마치고 나서는 더 자주 그 길이 보였다. 그 길이 할아버지가 계신 곳으로 가는 길인 줄 더 빨리 알았다면 좋았을까.

 

할아버지는 나한테 빨리 오라고 독촉을 하셨다. 마음이 급한 것이 틀림 없었다. 내가 거길 찾아갈 차비가 없어서 못가는 줄 알고 노란 봉투에 만 원짜리를 넣어서 내밀기도 하셨다. 그 동네에는 커다란 저수지가 있고 좁은 길을 굽이굽이 가야 한다. 그리고 커다란 산에 조상님들 묘가 줄줄이 있다. 하지만 이상한 건, 할아버지의 산소 자리는 볼 수 없었다는 것이다. 길의 끝에 잔디가 깔린 묘 자리가 있지만 땅이 군데군데 패여 있고 봉분은 없었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는 직접 그곳에 가서야 알 수 있었다.

 

아버지의 등을 떠밀어 군 입대를 앞두고 갔었던 바로 그 동네를 다시 찾았다. 아버지가 지명 이름을 기억 못하시기에 구글링의 힘을 빌었다. 역시 구글. 안 나오는 게 없었다. 우리 성씨의 사람들은 거제도에 절을 짓고 해안을 따라 자리를 잡아 나갔다고 한다. 위키디피아에 별게 다 나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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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도의 하늘은 이렇게 생겼더라…ㅎㅎ

 

할아버지께서 남동생을 보시면 아들이 있다는 사실에 얼마나 좋아하실까 싶어 남동생과 함께 움직였다. 할아버지에게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있다는 것을 보여드리고 싶었다. 거제도로 가던 날 날씨는 좋았고 이상하리만치 모든 게 순조로웠다. 창녕 조씨. 그것이 우리의 실제 성이었다. 마을 입구에 창녕 조씨라 떡 하니 씌어 있는 것을 보았는데 아버지가 많이 흥분했다는 것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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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어귀에 저렇게 떡하니

 

마침 동네에서 시내로 나가고 있는 두 분의 어르신을 붙잡아 말을 물었다.

 


이 동네에 창녕 조씨 족보를 관리하시는 분을 만나 뵐 수 있을까요? 한참 만에 아버지를 찾아왔습니다만

 

그게 나요. 어디서 오셨소?”

 


세상에나, 한방에 찾았다! 이 동네에는 족보를 관리하시는 두 명의 어르신이 계셨다. 두 분 중 한 분이 바삐 관공서에 일을 보러 가시던 것을 붙잡은 것이었다. 아, 이분을 찾으면 된다 하신 것이었구나. 조금만 늦었으면 엇갈릴 뻔 했다. 어르신은 관공서에 나가는 길이었으므로 다른 한 분이 마을에 대해 아주 자세히 설명해 주셨다. 마을 어귀로 부터 그 어르신이 살고 계신 마을까지는 차를 타고 한참 더 들어가야 한다고 했다.

 

어르신의 설명대로 차를 끌고 들어가 보니 영락없이 내가 꿈에서 보던 그 길이었다. 이정표를 보지 못한 것이 정상이었다. 이 시골길에는 실제로 이정표가 거의 없었다. 없으니 못 볼 수밖에. 몇 개 있는 것도 최근에 만들어진 것이다. 꿈에서 본 그대로 좁은 시골길을 굽이굽이 돌아가자 저수지가 등장했다. 내 꿈에서 할아버지는 나를 씻긴다며 그 저수지에 나를 밀어 넣으시기도 했었다. 창녕 조씨의 선산에는 꿈에서 본 것처럼 계단식으로 묘가 줄줄이 이어져 있다. 이게 다 내가 보던 것이라며 반가워하자 동생이 뭔 소리 하느냐하는 얼굴로 쳐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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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의 장좌길

장좌길을 장자길로 알아들어 한참 빙빙 돌았다는

 

족보를 관리하시는 어르신은 우리를 반갑게 맞아 주셨다. 이렇게 다 큰 아이들을 데리고 왔느냐며 전쟁 통에는 그렇게 사연이 많았다고 자리를 내어 주셨다. 할아버지의 함자를 알려드리고 족보를 뒤적이자 정말 그대로 할아버지와 증조할머니와 증조할아버지의 성함이 나왔다. 나는 태어나서 그렇게 기뻐하는 아버지의 얼굴을 본적이 없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안타까운 것은 할아버지는 돌아가신지 9년 정도 된 것이 확실했다. 실제로 아버지 이외에 자녀는 없었다. 할아버지는 경찰로 계속해서 근무하셨고 서울에서도 계셨다. 고향에는 돌아가신 어머니 이외에 직계가족이 없고 고향에 왕래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어르신의 집에서 나와 아버지는 눈물을 글썽였다. 조금 더 일찍 찾아봤다면 생전에 만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더 황당했던 것은 진작 화장을 해서 할아버지의 묘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렇게 길을 보여주셨지만 묘를 볼 수 없었나보다. 머리 속에 얼핏 할머니의 이야기가 지나갔다



할아버지는 화장을 해서 뿌려버렸다.



나는 그 이야기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호적 문제도 남아 있고 재산도 있었다 하고 또 할아버지가 자꾸만 찾으라하시니, 난 아버지만 원한다면 얼마든지 적극적으로 움직일 의향이 있었다하지만 마음 아파하는 아버지를 보고, 나도 동생도 더 이상 밀어붙이지 않기로 했다. 다른 것은 중요하지 않다. 나의 아버지도 아버지가 있고, 그 인연을 다시 이었으면 그것으로 족하다. 할아버지는 내 아들은 하나뿐이다 하고 애타게 아버지를 찾으셨다. 그 외에 자식은 없었다. 많은 사연들이 있지만 할머니를 만난 이후 다신 여자를 믿지 못하신 것 같다.

 

거제도에서 돌아와 꿈에 아버지가 나왔다. 아버지는 소리도 내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인 채 꺽꺽대며 울고 계셨다. 나는 아버지에게 해줄 말이 없어 손수건과 커피를 내밀었다. 그게 아마 아버지의 마음인가보다.

 

귀신보기를 해결해준 그녀와 나를 연결해 주려 애쓰고 등을 떠민 것은 아마도 할아버지였을 것이다. 나는 농담처럼 그녀에게 손녀딸 살려보시려 한 것 같다고 했다. 심지어 거기서 시작된 인연으로 나는 그녀와 함께 살고 있다. 할아버지는 내가 그녀의 집으로 이사 오던 날 친절하게 나를 깨우고 내가 가니 문을 열어주라며 그녀도 깨우는 치밀함을 보이셨다.

 

아무튼 이렇게 일을 어느 정도 마무리 짓고 나와 그녀의 기묘한 동거가 시작되었다.












귀부인


편집 : 딴지일보 coco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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