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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04. 27. 월요일

퍼그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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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사과드린다. 본 기레기의 글 하나 읽으려고 지난 7편을 다 복습해야 되는 독자들의 불편을 고려하지 못했다. 이 글 자체만 따로 읽을 수 있도록, 가독력에 신경쓰도록 하겠다. 그런 의미에서 '계백이 연재글'을 요약함과 함께 지난 번 난해했던 글을 정돈해드리면서 시작하고 싶다. 



1. 여자가 만들어낸 가장 위대한 발명품


지인들과 서초동 모녀 살인 사건 얘길 하다 '계백이'란 은어를 알게 됨. 그러고보니 우리나라는 가족 살인이 많았다. 그 원인은 한국 여자들의 책임감에서 자유로운 반면 한국 남자들은 불쌍하다. 알고보면 '아버지'는 아이를 함께 키울 남자가 필요했던 여자들이 정조를 담보로 붙들어놓은 것인데 말이다. 과거엔 이 '아버지'란 이름이 의무와 권리를 모두 내포했으나 지금은 권리가 사라지고 의무와 책임만 남게 되었다. 



2. 돈을 벌어도 보람이 없다


회사가 전쟁터라면 회사 밖은 지옥. H형은 좌천되었던 과거를 노력으로 딛고 일어났지만 가족들은 그에게 돈 버는 것만을 바란다. 인간 ATM이 된 것. 심하게 말해 기생충의 숙주 같은 삶을 산다. H형이 일하는 동안 아내와 자식들은 쇼핑을 하고 문화생활을 즐긴다. (그러다보니 백화점도 여성 중심으로 돌아간다.) 결혼했으면 책임은 오롯이 남자 몫이 되는 게 우리 사회 통념이다. 우리나라도 점차 결혼을 기피하는 형태로 가겠지만 지금은 그 과도기적 상황에서 남자들 의무의 비중만 늘어나고 있다. 



3. 가족을 빼니 갈 곳이 없다


J는 완치 불가능한 병을 앓고 있다. 버는 돈을 모두 가족 앞으로 돌려놓고 있으며 어려운 일은 가족들 모르게 혼자 처리한다. 아내가 부추긴 건 아니고 자발적인 행동이다. 그렇게 바삐 살던 J가 어느 날 일이 비게 되자 자신이 집, 회사 외에는 갈 곳이 없다는 걸 깨달으며 회의를 느끼기 시작했다. 내 인생은 뭘까. TV에서는 생명 보험에 가입하는 게 가족 사랑이라는 뉘앙스의 광고가 나오기도 하고(이에 분노를 느끼고 뒈져도 돈 갖다 바치란 거냐고 소리친 선배, 술자리에서 박수 받았다.) 일본 드라마 [N을 위하여]에서는 가족들에게 돈만 바치다 남은 3년간 내가 하고 싶은 걸 하며 살겠다는 아버지가 '나쁜 놈'으로 그려진다. 



4. 결혼과 성욕의 충돌 1


46살에 설치미술을 하는 G형, 그는 미혼이다. 앞서 예로 든 지인들과 달리 결혼이 물질적 토대 위에 완성되는 것임을 잘 이해하고 있으며 인류 역사상 최악의 발명품, 폐지되어야 할 구습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끔 '살냄새'가 그리워진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성욕을 안정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결혼을 하려들지는 않는다. 성에 일찍 눈을 떴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환상이 없다. 여러 연구를 보면 남자들은 자주 밝히며 처녀에 집착하고 새로운 여자에 눈을 돌리게 만들어졌다. 그래서 결혼을 섹스와 등치(시키는 바보 같은 짓을 범)하기 쉽다.



5. 결혼과 성욕의 충돌 2


이어지는 G형과의 대화. 안정적인 섹스를 위해 결혼한다면 목적을 이룰 수 없다. 섹스의 질은 업소의 그것에 미치지 못할 것이며 섹스리스가 되는 부부도 많기 때문. G형은 경제적 결합으로의 결혼을 하되 남자에게 애물단지인 성욕은 걷어내고 감정적 교류를 할 수 있는 말이 통하는 이성을 찾고 싶어한다. 그러나 '남자에게 여자는 엄마 아니면 창녀다'라는 자끄 라깡의 말처럼 남자들은 성욕을 해결하면서, 자신에게 요리 빨래 등을 하며 자신을 보살펴 줄 수 있는 존재를 원한다. G형은 결혼하지 않고도 만족하며 살지만 뭐가 정답인지는 모르겠다고 한다. 



6. 사랑과 멍에


사랑은 인간만 빠지는 것도 아니며 첫 눈에 반하는 것 또한 포유류 진화의 산물이다. 거기다 오르가즘이 남편의 수입에 비례한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C는 경제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가정을 꾸렸다. 자신은 물론 아내와 아이의 생계까지 책임지고 있다. 아내는 아이를 키우느라 남편의 벌이에만 의존한다. 아내가 돈을 안 버는 경우는 그러려니 하지만 남편이 돈을 안 벌면 이상해지는 사회에서 가족을 먹여살릴 책임은 C 혼자 짊어지고 있고 부부의 사랑도 급속히 식어가는 듯 하다.



7. 결혼해선 안 될 놈이 있다 


K형은 이혼을 한 뒤 사업을 하며 두 딸을 홀로 키운다. 아내와는 교육 문제로 이혼했다. 희생하지 않으면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아빠가 되는 분위기를 견디지 못한 것. K형은 서초동 모녀 살인 사건도 교육문제로 이해한다. 그 동네에서 나가면 끝이라 생각했을 거라고. 그리고 돈을 많이 버는 아버지가 가정의 중심이 되는 게 정상적인 것 아니냐 말한다. 결혼을 가볍게 선택하는 사람이 나쁜 건 아니지만 어쨌든 가장은 의무를 가진다. 이를 감당할 수 없는 남자라면 결혼을 안 하는 게 낫다. 이 무게를 줄일 수는 없을까?



효율적인 요약을 위해 워딩이 달라진 부분이 많다. (물론, 요약만 보고 펜더 님의 계백이 연재 글을 정독한 것처럼 생각하시진 않겠지만 조바심에 하는 말이다.) 이에 대한 1편의 반박은 이러 했다. 




'이 시대의 계백을 위하여'를 반박하는 글 많이 올라왔지만 묻힌다는 느낌에 이 글을 쓰게 됐다. 


글에서는 남자들이 ATM으로 전락하는 원인을 여자와 아이들에게 돌린다. 


그런데 결혼제도를 여자들이 만든 것으로 규정하는 전제부터 틀려먹었다. 남자들이 만들었다. 


역사는 남자들이 주도해왔으며 이 역사를 어떻게 만들어왔는가에 따라 가장의 무게는 달라졌다. 


대한민국의 근현대사는 한 마디로 '책임지지 않은 역사'다. 이럴 경우 미뤄온 책임은 후대가 독박 쓴다. 


여자들이 왜 남편에게 돈 벌어오라고 하던가? 대부분 애들 교육비 때문이다. 


교육비는 희생이 아닌 투자의 개념이다. 자식이 출세할 경우 돌아올 혜택을 기대하는 것. 


그러나 너도 나도 같은 투자책을 쓰다보니 경쟁이 치열해지고 실패할 가능성이 높아진 상태다. 


이런 고비용 저효율 사회를 만들어버린, 남자들 스스로가 가장의 무게를 더해 온 범인이었다.




지난 글이 불친절했던 탓에 길어지게된 서론은, 일단 여기까지다. 독자분들에게 도움이 되었기를 바라며 바로 이어가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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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우리의 아버지들이 까여야 할까


계백이 연재글이 '남자들 스스로 가장의 짐이 무거워지도록 했다'는 식의 지적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쓰여진 글은 아니다. 다음과 같은 문단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결혼 이후 남성들에게 부과되는 사회, 경제적인 ‘압박’은 상상을 초월한다. 이제까지 이어져 온 가부장제도의 '반동'이며, 남성들이 스스로 함정을 팠다고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지금의 경우는 남성들이 그 동안 졌던 '짐'을 여성들에게 넘기려는 과도기의 순간이다. 여성들에게 넘긴다는 표현보다는...아마 '나눠지려는' 순간이라는 표현이 적확할 거 같은데, 여성들이 그 '짐'을 나눠지려는 움직임을 보이냐는 것이다.

(2편 중)

 

남자들에게 가해지는 압박이 '가부장제도의 반동' 탓이 아니라는 주장에는 동의한다. '남자들 스스로 판 함정' 탓이 아니라는 주장에도 마찬가지로 동의하는 바이다. 


앞서 남자들이 책임을 다하지 못했고 이것을 후에 독박쓰게 된 것이라 하지 않았냐고?


맞다. 그랬다. 심지어 '까야할 건 남자들이다'라는 소제목을 떡하니 뽑아놓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것이 까일 대상을 '전세대'만으로 한정하기 위한 사전작업이었다고 이해하시면 곤란하다. 1편에서 '어떤 남자들은 노르웨이를 만들었고 어떤 남자들은 대한민국을 만들었다'고 진술한 바 있는데 이걸 뒤집어 보자. 노르웨이의 남자들이라고 친자를 안전하게 얻을 수 있는 장치를 고민하지 않았을까? 개인의 욕심을 쫓으며 살아오지 않았을까? 그들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았을 거다. 


원인은 그들이 책임질 수 있었던 데에 반해 우리는 책임질 수 없었던, 이 차이를 만든 배경에 있다. 대한민국은 전세계에서 유래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빠른 사회 변화를 겪어야만 했다. 서양의 문물 개방 요구에 버티고 버티다 이제 받아서 적응 좀 해볼까 싶은 찰나 일본에 주권을 잃었고 또 적응했더니 이 놈들이 전쟁에 져서 다 버리고 떠났다. 나라 뺏기기 이전으로 돌아갈까 싶은 와중에 2차 대전 후 냉전체제의 중심에 놓였고 6.25가 일어났으며 반토막난 국가에서 기반을 바닥부터 다시 쌓아올려야 했다.


이 땅의 남자들이 책임을 지지 못한 것은 부도덕해서가 아니라 책임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던 탓이다. 보를 짓는 일 하나를 해도 그 필요성과 환경에 미칠 영향을 분석하며 건설을 계획하고 착수하도록 해야 한다. 이것은 일종의 책임이다. 하지만 그러려면 보다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게 된다. 쌓아올려야만 하는 것이 많았던 대한민국에선 당연히 빠른 길을 선호하게 되었다. 일단 목마르니 물부터 확보하고 문제는 나중에 생각하자는 식으로. '빨리빨리'는 그렇게 한국인을 상징하는 표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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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배경과 함께 그들이 아직 우리와 현시대를 함께 살고 있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 되겠다. 빠른 사회 변화가 역설적으로 우리 아버지 세대의 책임이 후대로 떠넘겨지지 않았음을 반증하고 있는 것이다. 6.25 직후 태어난 세대라 해도 아직 육십대 초반으로 평균 이십 년 내외의 삶을 더 살아야 하는 상황이다. 아버지, 아들, 손자 모두가 이 '고비용 저효율' 사회의 독박을 함께 쓰고 있다는 얘기다. 




불편하겠지만 까여야할 건 당신이다


자, 인정하자. 우리는 다 같이 좆됐다. 일을 벌려놓기만 하고 수습하는 사람은 없는 상태로 수십 년을 지내왔다. 대한민국 누구도 이 좆됨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재벌? 현재 사회 상류층에 '권리'가 몰빵된 상황인 건 사실이다. 그러나 정주영 아들들의 자살과 이건희가 건강 악화되었을 때 병동 한 층을 통제했던 일을 생각해보자. 사상 최대의 유보금을 쌓아놓고도 이렇게 여유를 부리지 못하는 그들을 보고 있노라면 어쩐지 그들 또한 좆되고 있음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가장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서는 지금이라도 이 좆됨의 대물림을 어떻게 끊어낼 수 있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늦었다고 아예 안 해버리면 이 난장판은 영영 정리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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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우리의 현주소는?


여기서 본 기레기도 아는 사람 얘기 좀 해봐야 되겠다.


A는 2000년대 중반에 대학에 입학했다. 그러나 이듬해 동생도 대학을 가게 되자 A는 1학년만 마친 시점에서 군입대를 해야만 했다. 가계에 학비 부담이 배가 되었기 때문이다. 두 자녀의 대학생 신분을 유지시키려면 A의 집은 1년에 2000만 원 안팎의 돈을 지불해야만 한다. 확실히 부담되는 액수였다. 물론 많은 학생들이 1학년만 마치고 군대를 가기에 여기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2년 뒤, A가 제대를 하고 학교로 돌아오자 상황은 더욱 악화되어 있었다. 일 년마다 9% 인상되어 20% 가까운 돈을 더 부담해야 했던 것이다. 대학 내에 이런 높은 등록금에 대한 반감은 캠퍼스 전체에 퍼져있었다. 학내에는 심심치 않게 등록금 인상에 반대하거나 동결, 인하를 요구하는 현수막이 나붙었으며 곧 이것은 '반값 등록금'이란 이름으로 사회적으로 공론화되었으며 2007년 대선에까지 영향을 줬다.


학교를 조금 더 쉬며 기다려보기로 한 A의 입장에서 대선의 결과를 주목할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A는 집값을 올려줄 사람을 뽑아야 한다(정확한 워딩은 '경제를 살려줄 사람을 뽑아야 한다'였다고)며 이명박을 찍겠다고 밝힌 아버지와 많이 싸워야 했다. 거의 모든 후보가 반값등록금 공약을 걸긴 했지만 A는 가능하면 자신이 학교를 다니고 있는 와중에 반값 등록금이 실현되길 바랐을 뿐이다. 이명박이 그렇게 해줄 후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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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와 그의 아버지 사이 갈등이 어떤 엔딩으로 이어졌는지는 모두가 아는 대로다. A는 몇 년 뒤 학자금 대출이라는 이름으로 난생 처음 빚을 지게 되었다. 물론, A가 빚을 지게 된 탓을 전적으로 그의 아버지에게 돌릴 수 있는 건 아니다. A의 아버지로서는 등록금 문제에 소극적일 후보에게 한 표만을 더해줬을 뿐, 당선에 결정적 공헌을 한 것이 아니기에. 오히려 A의 아버지는 부동산을 사고 팔기만 하면 돈을 벌던 시대와 부동산 거품이 꺼지기 시작한 시대에 끼어있는 존재다. 그가 현 여당을 지지한 이유는 어디까지나 빚을 내 산 집의 가치가 떨어져 버렸을 때 빚을 갚을 도리가 없음을 걱정했기 때문이다. (A 역시, 집에서 대학 등록금을 다 대지 못해 나중에 자신이 직접 벌어내야 하는 상황임을 미리 인지하지 않았더라면 다른 또래들처럼 정치에 무관심했을 것이다. 집에서 등록금을 내줄 수 있는 다음에야 그게 내 문제라고 생각하고 싸울 이유가 어딨겠는가?)


그러나 A가 겪었던 갈등은 대한민국 남자들, 그 삶의 양상을 잘 보여주는 예이다. 지난 연재에서 글을 시작하며 '가족이라는 단위는 인류 활동의 기본 척도'라는 토인비의 말을 인용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대한민국의 가정들을 보자. 구성원 하나하나가 나만 돌보는 일도 벅차한다. 그러다보니 자신에게 득이 되는 일을 위해 가족끼리도 대립한다. '투자'라고 지적했던 교육 문제만 봐도 그렇다. 아이들이 부모에게 '제발 돈 좀 벌어와서 나 하루 종일 학원 다니게 해달라'고 요구했던가? 대부분의 아이들 교육에 대한 '투자'는 부모의 일방적 결정이다. 


그들에겐 '개라지garage' 문화가 있다. 미드를 많이 보신 분은 알 것이다. 남자들이 차고에 들어가 자신의 시간을 가지면, 여자들은 군말 없이 그 시간을 보장한다. 그 안에서 자신의 취미활동을 하던가, 멍을 때리던가. 그건 자유다. 이 사실은 정말 중요한데, 남자들이 나이를 먹을수록 자신의 공간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여성들에게는 '부엌'이란 공간이 있지만, 한국 남성들에게는 그런 공간이 없다.

(2편 중)

 

"내 상식. 아마 그런 거 같다. 내 상식으로는 가정에서 중심은 아버지야."


"의외로 가부장적인데?"


"(웃음) 그게 아니지. 세상 어디를 가봐. 돈 내는 놈이 대장이잖아? 돈은 내가 냈잖아. 그럼 내가 중심이 돼야지. 안 그래? 그 상식에서 벗어났어. 돈은 내가 내는데, 왜 구석자리에서 눈치 보며 술을 홀짝여야 하는데?"

(7편 중)

 

계백이 글에서는 가장의 힘겨움만을 이야기한다. 이렇게만 보면 아버지는 힘들고 다른 가족의 구성원들은 행복한 삶을 누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과연 그럴까? 오늘날 대한민국의 가정에서 누가 행복하단 말인가? '부엌'이라는 이름으로 집에서도 노동의 공간을 부여 받고 돈을 쓸 때마다 통장 잔고와 물가 상승을 저울질해야 하는 아내가? 아니면 부모의 강요에 따라 원치 않는 입시 경쟁을 해야 하는 자녀들이? 


지금 가족의 구성원 중 행복에 가장 손쉽게 느낄 수 있는 존재들은 아버지들이다. 졸라 간단하다. 그냥 가족들을 위해 쓴다'고 생각'했던 자기 수입을 자신을 위해 쓰기만 하면 된다. 그저 '나쁜 가장'이란 비난만 감수하면 된다. 반면 아내나 자녀들은 그저 영화나 보며 2시간 남짓 현실을 잊어버리는 정도? 그도 안 되면 자녀들은 컴퓨터 게임을 하거나 아내는 홈쇼핑에서 충동구매를 하고 남편이 알까봐 죄책감에 시달리는 정도가 행복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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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을 위하여]에서 노조미의 아버지가 나쁜 놈으로 그려질 수 있었던 이유는 뭘까?

그가 했던 아내와 자식들을 쫓아내는 행동을

역으로 아내와 자식들이 할 수는 없다는 힘의 불균형 때문은 아닐까?


문제는 개라지가 없는 것도 돈 내면서 왕대접 못 받아서도 아니다. 남자인 당신 하나하나가 남자들이 원래 해오던 일을 외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원시시대 때부터 남자들이 가족들을 위해 가장 자신의 몸을 투신해온 것. 


그것은 바로 '보호'다. 




돈 내는 놈이 아니라 믿음을 주는 놈이 왕이다


혹시 가장이라면, 자신의 여자와 아이들이 보호 받고 있는지 진지하게 성찰해보길 바란다. 혹시 여자를 위한다는 명목 하에 일터에만 매달려 여자를 더 외롭게 하고 있지는 않은가? 아이를 위한다는 명목 하에 전쟁터로 밀어넣은 것은 아닌가? 이런 세상에서 대체 어떻게 야근을 안 하고 사교육에 돈을 안 쓰냐는말은 하지 마시라. 내 여자와 아이를 위협하는 존재는 언제나 강한 존재였다. 전쟁, 기근, 제국주의, 독재, 이 중 만만한 상대가 하나라도 있는가?


적어도 내 가족을 위협하는 괴물을 물어 뜯고 늘어져서 작은 상처라도 입혀야 된다. 그래야 자신에게도 피해가 온다는 걸 깨닫고 섣불리 공격을 안 해온다. 목적은 상대를 이기는 게 아니라 상대로부터 지키는 거다. 빚을 권해서라도 소비를 짜내는 거품 경제의 함정으로부터, 고비용 저효율 사회가 부추기는 불필요한 무한 경쟁의 살벌함으로부터. 


계백이 연재 글에서는 '여자들이 짐을 나눠지려고 하는가?'라고 수차례 물어왔지만, 이러한 싸움을 하는 남자들에게 여자들은 놀랍도록 책임을 나누는 데 적극적이었다. 암사자는 숫사자 대신 사냥을 도맡는데 이 때의 수확을 제일 먼저 취하는 것은 새끼들이 아닌, 가장 숫사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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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것이 사자 무리에서만 보이는 모습은 아니라는 얘기다. 과거 시험 준비하는 선비의 아내들은 생계를 도맡았고 독립운동가나 지식인들의 아내는 아내는 '빈처'가 되어 남편을 먹여살렸다. 남편이 룸펜의 처지에 있더라도 말이다. 그들이 그렇게 했던 이유가 뭐겠는가? 지금보다 남자들에 순종적이라서? 그보단 남편이 나와 아이가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뭔가 한다는 믿음이 있기에 그런 희생을 도맡은 것으로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이런 믿음이 사라지는 순간, 허생전에 등장하는 아내처럼 뭐라도 해서 밥벌이 하라고 불평을 하는 거다. 옛날도 똑같았나보다.)  


그런 믿음을 주는 것은 남자들의 돈이 아닌, 비전이다. 역사적으로 왕은 1선에서 생산과 소비를 담당하는 존재가 아닌, 보다 멀리보고 큰 그림을 그리고 방향을 제시해야 되는 존재였다. 남자들 모두가 쩌는 리더십을 갖출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보호'라는 역할에는 충실하려면 적이 코앞까지 왔을 때 대응해서는 어려울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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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혜영이 우리나라 다른 여자보다 주위 엄마들 행동에 영향을 안 받는 성격이라 

션의 교육관에 동의할 수 있었던 걸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방송을 보면 그녀 또한 흔들렸다고 고백하고 있다. 

션이 제시해준 자녀 교육의 방향이 그걸 다잡을 수 있었을 뿐. 


대한민국에는 남자들이 미리 감지했어야 할 수많은 위협이 있다. 저임금과 고용 불안, 높은 부동산 가격은 자녀들의 미래를 불안하게 만들며 나아가 그 불안한 자녀의 독립을 늦추고 더 나아가 노인 부양 가능성도 떨어뜨릴 것이기에 가족들만 아니라 남자들 자신에게도 만만하게 볼 상대가 아니다. (요즘은 노후를 자녀에게 의존하지 않으려는 추세이긴 하지만 그래도 가능성은 늘 생각하는 게 사람이다. 자녀가 돈 잘 벌면 일단 내가 아프거나 할 때 안심이 될 거 아닌가.) 


결혼이란 게 원래 그런 것이라면, 이걸 명확하게 고지한 다음에 선택하게 해주면 안 될까? 하긴, 명확하게 고지한다고 해도 결혼을 하지 않고는 알 수 없는 것이기에 의미가 없을 것이다.

(7편 중)

 

무책임한 시스템 못지 않게 무지한 상태에서 인생의 고비들을 경험하게 하는 것도 다음 세대에겐 적지 않은 위협이다. 위에 글에서 의미 없다고 했지만 고지하는 사람조차 없는 게 우리 현실이다. 경험해보지 못 하고는 알 수 없는 게 결혼이라는 데에는 (동거 실패를 경험한 입장에서) 동의한다. 그러나 공감 여부와 별개로 사전 정보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다. 그런데 이 사회에서는 결혼이 어떤 것이라 고지하고 있는가? 경제력을 따져야 한다, 상대의 직업과 집안을 봐야 한다, 속궁합이 좋아야 한다, 따위로 그 결혼의 성공 여부를 가늠하도록 하고 있다. 실제로는 삶을 대하는 자세나 지향하는 바가 비슷한 이를 만나야 하는 것인데. 결혼 생활은 '우리 결혼했어요'가 알려주며 육아는 '슈퍼맨이 돌아왔다'가, 사회 생활은 '미생(그나마 이건 현실에 가까워 다행)'이 알려준다. 대한민국의 가장들의 인생 멘토링은 이러한 환상적 껍데기만 잔뜩 둘러친 예능 프로들의 그것만 못하다. 


극단적으로 말해 불에 데여본 놈이 저거 뜨겁다고 말해주지 않는 사회는 불에 타 죽는 사람이 줄어들 가능성이 희박한 사회이다. 데여본 놈으로서 우리 사회 가장들은 적극적으로 가족들의 화상 예방책을 궁리해야 한다. 


왜 이렇게 해야 되냐고? 


하지 않으면 그렇게 외면받은 책임은 돌고돌아 가장들, 남자들에게 되돌아올 것이기 때문이다. 


강한 남자가 되어야 한다. 당장 내 집에 관리 상태가 부실하면 (반상회 아줌마들만 들끓게 하지 말고) 아파트 관리소를 조지며 내 지역에 불리한 정책 찬성표 던진 의원은 갈아치워 버리는 등 내 처자식 엿 먹이는 놈들은 아주 주옥 된다는 걸 보여줄 필요가 있다. 이렇게 하는데 돈 못 벌어온다고 뭐라 그러는 처자식 있다면 그 때 가서 섭섭함을 얘기하시라. 그 처자식이 정말 잘못 하고 있다는 거에 누구도 토를 달지 못할 거다. 


이미 부상병에 가까운 가장들에게 싸워야 할 필요성을 역설하자니, 참... 김유신이 계백한테 관창 보낼 때 이런 마음이었을까 싶다. 하지만 어쩌겠나. 까야할 대상이 남자들이기도 하다만, 이 상황을 어떻게 해볼 수 있는 것도 남자들인데. 


그런 의미에서 이 글을 이렇게 맺어볼까 한다. 




여성 혐오를 원하는 남성은 없다


이 모든 글의 발단이 된 '서초동 세 모녀 살인 사건'으로 돌아가보자. 중년 남성들은 그를 '계백이'란 은어로 불렀지만 내겐 어쩐지 다른 인물이 떠올랐다. 


바로 임병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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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원문 - 한겨레


그래서 자연스레 여성이나 아이들에게는 윤일병이 투영되어 보이게 되었다. 


군대는 내리갈굼 사회이다. 선임이 내게 스트레스를 준다고 그의 행동을 수정하거나 존재 자체를 갈아치울 수 있으리란 기대를 품을 수는 없는 시스템이다. 하지만 사람은 어떤 식으로든 스트레스를 해소하려 한다. 이 때 군대에서 발견할 수 있는 스트레스 해소 거리는? 후임병이다. (선진 군부대에서는 오락 거리가 많지만 우리나라 전방에는 그렇지가 않다.)


간단히 말해 내게 직접적으로 스트레스를 주는 존재가 거의 신성불가침의 존재면 사람은 자신보다 약자를 찾아 이를 해소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사회 전체로 확대되면 당연히 이등병, 일병의 위치에는 여자, 동성애자, 낙후된 지역 주민이 오게 된다. 어디서 많이 본 코드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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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서 여성 비하가 가장 많은 커뮤니티라면 역시 일베를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흔히 약자들을 비하한다고 알려진 그들에겐 약자를 비하한다는 의식을 찾아보기 힘들다. 오히려 약자는 자신들이며 그래서 '김치년' 등을 외치는 자신들은 다수의 횡포에 맞서 할 얘기를 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저들은 커뮤니티를 벗어나면 실제로 약자들이다. (대부분은 왕따나 반에서 존재감 없는 애들일 것으로 보인다. 본지 독자투고 게시판에 올라왔던 10시20분 님의 글을 참고해보자.) 아마 그들에게 직접적으로 스트레스를 주는 존재는 학교의 일진이나 이 나라의 입시 제도 등일 거다. 불가침의 존재로 느껴지는.


펜더 님이 일베를 하시는 건 아니겠지만 나는 그의 글에 담겨 있는 아내, 자식에 대한 원망도 이러한 현상과 궤를 같이 한다고 본다. 자녀 교육에 수입의 대부분을 쓰고 폭발적인 물가상승에 임금 수준은 따라 오르지 않는 이 기형적 성장으로 맞벌이가 아니면 집안 살림을 제대로 지탱할 수 없게 된 현실은 개인이 맞서기엔 너무나 거대한 상대이다. 그렇기에 이 땅의 가장들은 약자가 맞고 힘들다. 이 때 내 스트레스를 덜어주는 데에 적극적이리라 기대했던 사람들이 오히려 내게 스트레스를 가중시킨다? 당연히 원망할 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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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그렇게 원망하다 일베로 흘러가는 중년도 있을 것이다.


이 내리갈굼의 매카니즘이 무서운 것은 남-녀 관계에서만 일어나는 게 아니라 여-남, 여-여, 모-자 어떤 관계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는 거다. 그동안 뉴스화 되었던 수많은 갑질 사례들을 떠올려 보자. 대체 땅콩을 매뉴얼 대로 서비스했는지를 따지다가 아이패드 잠금이 안 풀렸다고 비행기를 돌릴 필요가 어디 있으며, 주차요원이 불친절했기로 서니 무릎을 꿇릴 이유는 뭐가 있단 말인가. 모든 건 스트레스, 스트레스, 스트레스다. 사회는 스트레스를 주는 데 해소구는 없다. 그래서 틈만 나면 해소하려 들고 이 때 좋은 대상이 '을', 자기보다 약한 자일 뿐인 것이다. 


이 시점에서 나는 이 사회에 만연하는 여성 혐오가 과연 실제로 있는 것인지 의문을 던지게 된다. 여성 비하라면 몰라도 여성 혐오라니... 대한민국의 어떤 남자가 여성은 남성보다 못한 존재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을 수 있고, 업신 여기고 있을 순 있다. 그런데 이것이 과연 혐오까지 가는 감정인가? 밟아주고 싶고 사정없이 폭력을 가하고 싶어지는 쪽으로 연결되고야 마는 인식인가? 다수의 집단과 소수의 집단이 아닌, 갑과 을만 있는 건 아닐까?


반박을 위해 눈에 불을 켜고 본 이 7편의 연재글은 그런 의미에서 밉지가 않다. (공감을 못 하는 건 다른 문제다.) 


남자는, 자기가 하고 싶은 걸 그대로 받아주고, 이해해 주는 사람을 좋아해. 


쉽게 말하면, 애라는 소리다. 이제 확실해진 것 같다. '남자에게 여자는 엄마 아니면 창녀다'라는 말의 이면에는 남자의 무시무시한(?) '본성'이 숨겨져 있었던 것이다. 

(5편 중)

 

엄마가 됐으면 싶은 존재를 혐오하고 싶은 사람은 없다. 남자들은 자신에게 지속적으로 스트레스를 주는 저 괴물을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지금 상황에 주눅이 들었고 사기가 떨어져 아이가 되었다. 


거듭 강조하자면 여자나 아이들 만큼은 아닐지라도, 그들은 분명 약자다. 


"씨팔, 뒈져도 애새끼들이랑 마누라한테 돈 갖다 바치라는 거야?"


마포의 허름한 고기집이었을 것이다. 괄괄한 목소리로 TV를 향해 삿대질 하는 선배는 잠시 후 그 고기집의 영웅이 됐다. 이리저리 고기를 뒤집던 넥타이 부대들이 일제히 박수를 쳤고, 고기집 사장은 얼른 TV 채널을 돌려야 했다.

(3편 중)

 

저 박수는 실제로 일어난 일이다. 상대할 가치가 없다고 넘겨버릴 일은 아닐 것이다. 엄마의 손길이 많이 필요한 아이를 그냥 내버려두면 삐뚤어진다. 


싸울 엄두를 못 내고 있는 남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사기 진작이다. 외면하지 말자. 손을 내밀고 격려하자. 그렇게 약한 남자, 약한 여자는 서로를 다시 믿고 의지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여성 혐오를 극복할 수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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딴지그룹 마켓팀원. 편집부 일도 하고 왔다갔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