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이 체결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미국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당시 해군장관이었던 칼 빈슨(Carl Vinson)이 내놓은 빈슨계획(the Vinson Naval Plan)을 기반으로 해 계획을 하나 세웠다. 16인치급(함포) 전함 6척, 순양전함 6척 등을 건조해 1925년까지 전함 32척, 순양전함 16척, 중순양함 48척으로 구성한 대 함대를 건설한다는 것이었다. 세계 2위의 해군력을 자랑하던 미국이 이제 영국을 추월할 태세였다.
'빈슨계획'의 칼 빈슨
영국도 손 놓고 앉아 있을 수만은 없어 순양전함 후드, G3형 순양전함, 18인치 주포를 장비한 N3형 전함 등의 건조계획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일본도 나가토급 전함, 가가급 전함, 기이급 전함, 아마기급 순양전함, 13호급 순양전함 등 자신들의 건함계획을 가지고 해군력을 확충하려고 했다.
만약 이들이 정면으로 맞붙었다면 어땠을까? 세계인들은 이들의 건함경쟁이 제1차 세계대전의 건함경쟁처럼 종국에는 전쟁을 촉발시킬 것이라 생각했다. 각국의 건함스케줄과 국제정세 등을 고려해 1923년에 다시 한 번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 예측하고 있었다.
하지만 영국은 해가 지려하고 있었고, 일본은 미국과 ‘체급’부터가 달랐다. 무제한으로 건함경쟁을 벌였다면 미국을 이길 수 없었을 거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의 최대 수혜국은 ‘일본’이라는 소리다.
다이쇼 데모크라시(大正 デモクラシー)의 종막
워싱턴 해군 군축회담이 시작되기 직전, 일본 정국은 혼미해졌다. 일본의 19대 총리였던 하라 타카시가 칼에 맞아 숨졌던 것이다.
서슬 퍼런 군부가 내각을 노려보던 시절, 내각이 허수아비처럼 섰다 뽑혔다를 반복하던 그 시절, 무려 38개월 총리 자리에 앉아 있었던 ‘문민’ 총리 하라 타카시다. 다이쇼 데모크라시를 이끌며 의회 민주주의의 초석을 다지려 애썼던 인물로, 그가 있었기에 일본이 워싱턴 해군 군축회담에 참가할 수 있었다. 그는 유명무실해진 일본 행정부를 바로 세우고 정치에서 군부를 최대한 배제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렇다고 앞뒤 안 보고 무조건 돌격하는 투사형 정치인은 아니었다. 일본 군국주의의 아버지라 할 수 있는 야마카타 아리토모 같은 군 계열 인사들과도 폭넓은 관계를 유지하며, 내각에서 서서히 군인의 색을 빼나갔다. 내각과 정계에 정당 인사들을 포진시키며 서서히, 무리하지 않고 의회 민주주의의 기반을 닦아 나가기도 했다. 물론 그가 100% 만족할 만한 민주인사라고 볼 수는 없다. 보통 선거제에 대해 부정적이었으며 사회주의 계열에 대한 탄압도 지속적으로 행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이쇼 데모크라시를 이끌었다는 점, 혼란한 정국에서 38개월 동안 큰 무리 없이 내각을 이끈 점은 높이 평가받아야 한다.
그런 하라 타카시를 살해한 이는 군인이 아니라 ‘민간인’이었다. 당시 야마모토 아리토모는 히로히토 황태자의 결혼 문제로 심사가 뒤틀려 있었다. 황태자비로 뽑힌 구니노미야 나가코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야마모토는 뒤에서 나가코가 황태자비가 되는 것을 방해했는데, 이게 발각됐다. 야마모토와 친분이 있던 하라 총리가 중재에 나섰고, 이에 앙심을 품은 나카오카 곤이치가 도쿄역에서 그를 찔러 죽였다. 당시 일본의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준 사건이었다.
하라 타카시의 죽음은 일본의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종막을 불러왔다. 아울러 군부의 전횡을 막을 마지막 제동장치가 고장 난 사건이기도 했다. 그 와중에 그의 마지막 유산이라 할 수 있는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이 막 시작되고 있었다.
일본 해군의 주장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은 해군으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회담이었다. 한 척이라도 더 많은 군함을 찍어내야 할 판국에 군함을 건조하지 말라고 말하니 화가 나지 않겠는가? 육군은 ‘머릿수’로 전력을 말하지만, 해군의 경우는 ‘배’였다. 배는 곧 해군의 권력이었고, 군인들의 ‘보직’을 담보하는 말이었다. 전함의 건조를 축소한다는 건 해군의 영향력이 줄어든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무턱대고 자신들의 주장을 내세울 순 없었다. 내각이 말하는 ‘재정악화’나 국제정치상의 ‘문제’를 무시할 수가 없었다. 결국 이들은 군축을 허용하되 하나의 가이드라인을 제시한다.
‘대미 7할론’
미국 함대 규모의 70% 수준까지 톤수를 확보하라는 것이다. 미국과의 일전을 예상할 때 ‘최소한의 전력’을 유지해야 하는데, 그 마지노선이 미 해군 전체전력의 70%라는 것이었다.
변수만 없다면 일본은 ‘대미 7할론’을 베이스로 미국과 협상에 들어갔을 테고, 어쩌면 7할을 얻어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도청’이라는 변수가 끼어든다. 미 국무부의 암호해독 부서에서 일본의 외교암호를 해독한 것이다.
“대미 7할을 관철하되 미국이 강경하게 고집할 경우 6할 유지 및 무츠(나가토급 2번함)의 완공함 인정을 받아낼 것.”
미국이 칼자루를 쥐었다. 미국은 일본의 협상카드를 확인 한 뒤 대미 7할을 거부하고 대미 6할을 고집한다. 결국 일본은 6할을 받아들여야 했는데, 이는 훗날 일본이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을 파기하는 빌미가 된다. 정보전에서의 패배로 일본은 시작부터 지고 들어갔다.
‘대미 7할론’에 대해서는 한 번 생각해 봐야 하는데,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을 전후로 일본 해군, 아니, 일본 군부는 민간 정부에 대해서 불신을 내비쳤다. 자신의 밥그릇을 빼앗겠다는 데 그 상대가 예뻐 보이겠는가?
“제국의 국체를 지켜내기 위한 최소한의 전력”
이라고 선언했던 ‘대미 7할론’을 부정당했다는 건 일본 제국의 미래를 팔아먹은 ‘매국행위’였다. 이런 구호가 아니더라도 일본 군부(해군)를 위축시키는 계기가 된다.
“전쟁을 일으키기에는 전력이 부족하다.”
그때까지 일본은 완벽한 전쟁국가였다. 청일전쟁, 러일전쟁,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지는 기간 동안 일본은 10년마다 전쟁을 일으키는 ‘전통’을 완성한 상태였다. 이 전통을 지키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는 전력을 확충해야 하는데, 일본은 전쟁을 치를 전력을 갖지 못하게 됐다. 물론 그럼에도 세계 3위의 해군력을 확보했다는 사실을 염두해야 한다.
인류 최대, 최고의 군축조약
<제1장>
제1조 조약국들은 그들 각국의 해군 군비를 본 조약이 제시하는 대로 제한할 것에 동의한다.
제4조 각 조인국의 주력함 교체분량은 기준배수량을 기준으로해서 다음의 양을 넘어서는 안 된다. 미합중국 525,000톤, 대영제국 525,000톤, 프랑스 175,000톤, 이탈리아 175,000톤, 일본제국 315,000톤.
제5조 기준배수량 35,000톤을 초과하는 어떠한 주력함도 조인국에 의해 획득되거나, 조인국에 의해, 조인국을 위해 혹은 조인국의 관리 하에서 건조 될 수 없다.
제6조 조인국의 어떠한 주력함도 16인치를 초과하는 구경의 함포를 탑재할 수 없다.
제7조 각 조인국들의 항공모함들의 총톤수는 기준배수량을 기준으로 하고, 다음의 양을 넘어서는 안 된다. 미합중국 135,000톤, 대영제국 135,000톤, 프랑스 60,000톤, 이탈리아 60,000톤, 일본제국 81,000톤.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 조약문 중 일부 발췌-
인류사의 어떤 해전(海戰)에서도 볼 수 없는 엄청난 전과를 단 한 장의 종이문서로 끝낸 ‘테이블 위의 해전’이 발발했다. 이로써 수십 척의 전함과 순양전함이 줄줄이 폐함됐고, 전함 용도로 건조 중이던 배들은 항공모함으로 설계변경에 들어갔다.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으로 폐함 된 사우스캐롤라이나
미국, 영국, 일본, 프랑스, 이탈리아는 각각 5:5:3:1.75:1.75의 비율로 전력비를 유지하기로 결정을 했다. 일본이 전함 ‘무츠’를 지켜내면서 5:5:3:1.67:1.67로 비율이 조정됐지만, 대세에는 지장이 없었다.
이 조약으로 각국은 1921년 11월 12일부터 모든 주력함의 신규 건조를 10년 동안 중단한다. 이른바 해군휴일(Naval Holiday. 군축조약이 발휘된 1922년 8월 17일부터 15년간의 기간)이 시작된 것이다.
세계 해군에게 10년 간 신규전함 건조를 중단한다는 건 커다란 타격이었다. 시간이 흐르면 신기술이 등장하고, 이 신기술을 적용한 새로운 전함이 등장해야 하는데, 이 모든 과정을 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정체’였다. 이제 전 세계의 전함은 배수량 35,000톤에 함포구경은 최대 16인치로 통일되었다.
소위 말하는 ‘조약형 전함’이 탄생했다. 여담이지만 이 ‘조약’에 가장 충실했던 국가는 영국이었다. 기기묘묘하게 생긴 전함 ‘넬슨급’과 시작부터 화력과 배수량에서 약점을 안고 건조된 ‘킹 조지 5세급’ 전함을 보면, 영국의 ‘어쩔 수 없는 상황’을 처절하게 확인할 수 있다. 낙조가 드리운 해가지지 않는 나라는 ‘조약’을 유지하고 지켜내는 것이 그나마 패권을 움켜쥘 수 있는 유일한 방도란 걸 인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영국은 조약을 지키기 위해 발버둥 쳤지만 ‘일본’이 조약을 탈퇴하면서 모든 노력이 무용지물이 됐다.
요즘이라면,
“그까짓 전함이 뭐 그리 대단할까?”
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당시는 거함거포주의가 해전의 기본으로 자리 잡았던 시절이었다.
“국가의 운명은 전쟁에 달렸고, 전쟁은 결국 해전에서 끝난다. 그리고 그 해전은 전함의 상호간의 공방으로 결정된다.”
쓰시마 해전에서 일본의 운명을 건져 올린 일본 해군은 누구보다 거함거포주의와 함대결전사상에 빠져 있었다. (그 시대 해군 관계자들의 기본 상식이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전함의 척수를 규제하고, 함포의 구경을 제한한다는 건 손발을 묶어버리는 것과 같았다.
그러나 시대의 흐름에 따른 ‘군축’이라, 전 세계 해군 관계자들은 ‘강제 휴가’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실수인가? 고집인가?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의 화두 중 하나가 전함 ‘무츠’였다. 일본이 건조 한(당시에도 건조 중인 상황) 나가토급의 2번함 무츠는 당시 일본 해군의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의 기본 조건은 ‘건조 중인 전함과 전함 신규건조계획의 전면적인 폐기’였다. 이때 걸린 게 전함 ‘무츠’였다. 이 부분은 상당히 민감한데, 그대로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이 체결된다면 전 세계에서 16인치 함포를 장착한 전함은 딱 2척만 남을 상황이었다. 바로 일본의 나가토와 미국의 메릴랜드(콜로라도급 2번함)였다.
그러나 당시 일본 해군의 생각은 달랐다.
“나가토를 실전에서 활용하려면, 전대를 꾸릴 동형함이 최소한 1척 이상 있어야 한다.”
일본 해군은 ‘무츠’가 너무 아까웠던 것이다. 그동안의 노력과 비용도 아까웠고, 나가토와 함께 전대를 꾸린다면 강력한 16인치 함포로 적을 제압할 수 있을 것 같은 환상도 있었다. ‘무츠’를 그대로 완성시키고픈 일본 해군은 의장 공사를 뒤로 미룬 상태에서 바로 공사를 서둘러 1921년 10월에 준공, 인도까지 했다. 영국 시찰단을 속이기 위해 해군병원에 있던 입원환자를 함내 의무실에 이송하는 ‘쇼’까지 했다. 덕분에 일본은 40센치급 함포를 장착한 전함을 2척 보유할 수 있었다. 하지만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일본만 16인치급 함포를 장착한 전함 2척을 보유하는 건 불공평하다. 우리도 동형의 전함을 건조하겠다.”
미국과 영국이 들고 일어난 것이다. 당연한 주장이었던 터라 일본도 선선히 동의한다. 하지만 그 결과는 참담(!)했다.
미국은 메릴랜드 외에 콜로라도급을 2척 더 건조했고, 영국은 넬슨급 2척을 건조했다. 일본의 나가토급 2척을 포함해 16인치급 함포를 장착한 7척의 전함을 ‘빅 세븐(big 7)’이라고 부른다.
‘빅 세븐(big 7)’의 하나인 미국의 ‘웨스트버지니아’
여기서 생각해 볼 것이 당시 일본이 ‘무츠’를 고집한 게 전략적으로 옳았냐는 것이다. 당시 일본 해군은 나가토와 무츠를 가지고 충분히 미국의 메릴랜드급을 제압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척수로 따지자면 미국이 3척으로 늘어나 미국에게 수적인 우위에서 밀렸다. 거기다 신기술을 적용한 영국의 넬슨급에게 ‘기술적인 우위’에서도 밀렸다.
즉, ‘무츠’를 포기했다면 미국의 콜로라도급 2척과 영국의 넬슨급 2척을 막을 수 있었다. 물론 단기적으로 봤을 때는 일본의 승리였다. 미국의 콜로라도급은 비록 16인치급 함포를 장착했으나 속도 면에서 느렸고, 건조가 중단된 상태였기에 전함이 완성될 때까지는 일본이 2대1로 미국을 압도할 수 있었다. 영국의 넬슨급은 아직 설계도도 나와 있지 않은 상태였고, 그때까지 영국은 16인치 함포를 제작하고 장착해 본 경험이 없었다. 미국과 영국의 전함이 완공되고 바다에 나올 때까지는 일본 해군이 전략적 우위에 있다는 건 사실이었다.
단기적인 우위를 점하기 위해 장래의 위험을 허용했다고 해야 할까? 일본 해군이 어떤 계산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무츠’를 지킨 선택은 결과적으로 일본 해군에 도움이 되지 못했다.
무츠는 건조 이후 변변한 실전 한 번 치르지 않고 있다가 태평양 전쟁이 한참이던 1943년 6월 8일 ‘원인 모를’ 폭발에 의해 가라앉는다. (이 부분은 기회가 되면 설명하겠는데, 일본 해군의 ‘전통’인 구타와 가혹행위에 질린 수병이 탄약고를 폭발시켰다는 가설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후에 건져낸 무츠의 잔해
메이지 유신 이후 확대일로를 걸었던 일본군의 군축은 그렇게 마무리 되고 있었다.
* 참고자료
1. 전쟁국가 일본/ 살림출판사/ 이성환
2. 호호당 선생의 ‘프리스타일’
3. 세계전쟁사/ 육군사관학교 전사학과/ 황금알
4. 러일전쟁과 을사보호조약/ 이북스펍/ 이윤섭
5. 조선역사 바로잡기/ 가람기획/ 이상태
6. 다시 쓰는 한국근대사/ 평단문화사/ 이윤섭
7. 대본영의 참모들/ 나남/ 위텐런 지음, 박윤식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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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딴지일보 챙타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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