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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05. 07. 목요일

챙타쿠








메이웨더와 파퀴아오의 경기가 있기 전날, 나는 체육관에서 운동을 했다. 복싱 체육관답게 사람들은 내일 있을 경기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 메이웨더가 낙승 할 거라느니, 파퀴아오가 KO를 시킬 거라느니, 끝나지 않는 대화를 들으며 나는 조용히 운동을 했다. ‘당연히 파퀴아오가 이기지’라는 생각을 하며, 혼자 웃음을 짓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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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나고야 말았습니다. 파퀴아오가 지고 메이웨더가 이기는,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나고야 말았다. 11시 시작이라고 하고는 1시 넘어서 시작해도, 그 경기를 기다리는 동안 내 한 마디도 안 했거늘, 파퀴아오가 졌다. 죽어라 파퀴아오만 응원한 건 아니지만, 전 기사의 마지막 부분에 당당하게 ‘파퀴아오가 이겼으면 좋겠다’라고 써놓은 게 떠올라 할 말은 많지만 하지 않고 싶어졌다. 이런, 나도 펠레가 되었구나.


하지만 어쩌겠는가. 본인이 뿌린 씨앗은 본인이 거두라고 배웠다. 펠레가 틀린 예측을 해도 계속 떠들듯 나 또한 계속 얘기해보기로 하겠다. 이런 망한 빅 이벤트가 또 언제 있을지 모르겠지만, 나의 복싱 관람기는 이러했다고 전하고 싶다. 날 믿고 파퀴아오에게 건 분들에겐 심심한 사과를 드리며...



콜과 나


한 라운드에 3분, 총 12라운드. 경기 시간만 36분으로, 한 번이라도 복싱을 해 본 분덜은 아실 거다. 생각보다 3분이 꽤 길다는 것을. 뛰는 사람은 물론 보는 사람도 그렇다. 경기가 재미가 없으면 보는 사람 또한 한 라운드인 3분이 길게 느껴진다. 이런 마의 능력을 가진 3분이지만, 메이웨더와 파퀴아오의 3분은 매우 짧았다. 긴장감 때문인지, 36분 전체가 정말 빠르게 지나갔다.


36분이 빠르게 지나갔는데 3라운드라고 별 수 있겠는가. 벌써 3라운드나 됐어? 할 정도로 시간이 빨리 갔다. 메이웨더는 평상시와 같이 아웃복서답게 치고 빠지기를 반복했고, 파퀴아오는 인파이터답게 자꾸 다가가려고 했는데, 그 행동은 밍밍했지만 긴장은 됐다. 이게 그 유명한 탐색전이라는 거구나. 그렇게 생각하니 긴장의 끈을 놓을 수가 없었다. 도망 다니는 메이웨더와 머뭇거리는 파퀴아오를 보면서 ‘이제 주먹이 오갈 때인가?!’ 하고 그 행동 하나하나에 눈길이 갔다.


3라운드까지 보고 있는데, 문득 2013년에 있던 UFC 경기가 하나 생각났다. 바로 UFC 페더급을 흔들었던 ‘정찬성VS조제 알도'의 경기다. 지금은 군대에 가 소식조차 알기 어렵지만, 당시 정찬성은 특유의 화끈한 경기력으로 (7초 KO와 같은) 페더급의 아이돌로 성장하는 중이었다. 진짜 아이돌이었던 게 대체로 아시아 출신을 홀대(?)하는 데이나 화이트(UFC 사장이라고 보면 됨)조차 정찬성을 높이 사, 화끈하게 챔피언이었던 조제 알도와 경기를 시켜줬다. 뭐, 조제 알도야 당시 페더급 최강자였고 정찬성은 뜨고 있지만 레벨은 그에 한참 못 미친다고 평가 받던 터라 당연히 사람들은 조제 알도의 낙승을 예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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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제 알도와 정찬성



게임 시작 후, 챔피언 조제 알도라는 큰 상대를 적수로 맞아서 인지, 여태껏 ‘머뭇거림’일랑 없었던 그 정찬성이 1라운드(UFC에서는 한 라운드에 5분이고 보통 3라운드 경기를 하지만, 메인 경기나 챔피언 전에서는 5라운드를 뛴다)에서는 간을 보느라고 쭈뼛쭈뼛 했다. 역시 정찬성도 챔피언 레벨은 아닌가 보다 생각이 드려는데. 웬걸, 2라운드부터 정찬성이 바뀌기 시작했다. 1라운드 동안 간을 봤다 이건지 2라운드부터 달려들기 시작했다. 물론 여태까지 싸워왔던 선수들과 달리 조제 알도는 챔피언이었고, 정찬성의 공격에 쉽사리 무너지진 않았지만, 조제 알도가 당황하는 게 눈에 보일 정도로 정찬성은 달려들었다. 명백히 불리했던 정찬성과 조제 알도의 싸움이 ‘해볼만한 싸움’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당황한 조제 알도의 빈틈을 정찬성이 파고들었다. 정찬성은 파퀴아오가 전 경기들에서 그래왔던 것처럼 조제 알도를 공격했다.


결과야 다들 알다시피 경기를 잘 하고 있던 도중 정찬성의 어깨가 빠져서 급하게 마무리가 됐지만, 그 때의 파급력은 장난이 아니었다. 정찬성의 가치가 높아지는 것은 물론, 기억에 남을만한 말 그대로 '재미있는 경기'가 되어 여러 사람의 입에서 회자되었더랬다.


3라운드까지 파퀴아오의 모습을 보고 정찬성이 생각났다. 물론 메이웨더와 파퀴아오의 싸움은 ‘센 놈들의 승부’라는 느낌으로 정찬성과 조제 알도의 싸움과 입장 차이는 있지만, 어쨌든 2013년의 그 경기가 겹쳐 보였다. 그리고 3라운드가 끝나고, 또 한 번 ‘맥○’이 등장했을 때 나는 생각을 했다. 이 3라운드가 분기점이 될 거라고. 이제 2,700억 원을 들인 명경기가 펼쳐질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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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경기의 진정한 승리자로 불리는 맥



But he is...


하지만 그 이후가 어땠는가. 역시 어른들 말씀은 잘 들어야 한다. 설레발은 기분을 망친다. 분명 다를 거라고 생각했던 그 경기는 1라운드부터 12라운드까지 거의 비슷한 양상으로 흘러갔다. 5라운드를 틀어놓고 ‘이게 1라운드야’ 라고 말해도 아무도 눈치 못 챌 정도로 그게 그 라운드 같았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더 얼굴이 만신창이가 된다던가, 체력이 떨어져서 힘들어 한다던가 하는 게 없었다. 12라운드가 되도 전혀 지치지 않는, 처음과 같은 모습. 그게 내가 본 경기의 다였다.





물론 둘이 꽤 아플 것 같은 주먹을 주고받긴 했다. ‘너 한번 때렸으니까 이제 나 한번 때리는 거야?’ 초등학생 아이에게 등가교환을 가르치듯 서로 때렸다. 때릴 때만은 전투적인 주먹에 살짝 긴장이 됐지만, 그 주먹 또한 거기까지였다. 아이돌 가수가 팬서비스 용으로 ‘저 애인 없어요’라고 말하는 느낌 속에서 라운드 수만 허망하게 올라가고 있을 뿐이었다. 


뭐, 무패의 메이웨더는 이 경기를 계기로 허그 전도사로 거듭났다. 파퀴아오가 조금만 공격적으로 나오면 어찌나 파퀴아오를 끌어안는지 나는 메이웨더가 유니세프 홍보대사인 줄 알았다. 오드리 헵번보다 남을 사랑하는 마음. 그래, 그거 하나는 높이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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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나는 메이웨더야. 그리고 나는 따듯한 허그를 좋아해

(출처- 트위터 @Beababa)



라고 하지만 사실 메이웨더는 자신의 방식대로 싸움에 임했다. 상대가 파퀴아오라 그런지 클린치(상대편의 공격을 피하기 위하여 껴안는 것)로 지나치게 공격을 차단하긴 했지만, 메이웨더는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다만 그간 싸워 온 상대가 클린치를 남발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강하지 않았을 뿐이지, ‘나는 때려도 너는 안 돼’ 자체는 메이웨더의 방식이 맞다. 언제는 그렇지 않았는가. 항상 치고 빠지고, 맞기보단 때리기 위주다. 거기다 메이웨더는 원래 점수 위주로 경기를 하는 타입이다. 그렇게 재미없고 얄밉게 경기를 했음에도 메이웨더가 판정승으로 이긴 것은 그만큼 치고 빠지면서 유효타를 많이 쳤기 때문이다. 재미보단 점수. 메이웨더는 이번 경기에서도 내내 점수 하나는 잘 땄다.


다만 궁금한 것은 이 클린치 전술이 처음부터 계획된 것이었냐는 건데, 처음부터 계획한 것이었다면 확실히 지탄할 만하다. 파퀴아오의 전력을 분석하면서 ‘공격을 차단하기 위해선 클린치가 필수’라고 생각했다는 것인데, 복싱이 무슨 운동이던가? 치고 박는 격투기 아니던가? 치고 빠지는 본인의 특기를 잘 살리기 위해서 그랬는지, 파퀴아오의 주먹이 무서워서 그랬는지 알 수는 없지만 그 놈의 클린치는 확실히 최악의 전술이다. 무패 신화를 깨기 싫은 건 알겠는데, 보는 눈이 얼만데 말이야. 역시 뭐든지 적당히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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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겨왔던 나의...



그럼 파퀴아오는 어땠는가. 메이웨더의 얄미움이 빛을 발해서 그렇지 파퀴아오도 썩 잘 싸웠다고 보기가 어렵다. 내가 보기엔 메이웨더에게 완전히 말렸다. 전에도 말했지만 메이웨더는 상대편을 자신에게 말리게 하는 게 특기다. 파퀴아오 정도 되는 선수는 메이웨더에게 굳건할 것 같았지만, 어째 경기를 보니 파퀴아오조차 메이웨더에게 말린 것 같다.


우선 자신의 기량을 다 펼치지 못했다. 파고든 다음 정신 못 차릴 정도로 때려주지도 못했고, 유효타도 전혀 생산적이지 못한 수준에서 그쳤다. 물론 메이웨더가 자꾸 껴안고 도망치니까 할 수 없겠다만, 애초에 ‘저 놈이 도망쳐서 못 때렸어요’라고 하는 건 선수로서의 기량이 그 정도 밖에 안 된다는 것이다. 거기다 링에 메이웨더를 가둔 상황에서도 파퀴아오는 만족스러우리만큼 유효타를 날리지 못했다.


물론 메이웨더 정도 되는 선수에게 뒤도 안 보고 덤벼들었다간 KO를 당하거나 KO에 버금가는 공격을 당할 것이다. 필리핀을 등에 업고 있는 파퀴아오로선 대번에 승부가 나는 모습을 보여주기 싫었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메이웨더가 허락을 하지 않았는지, 아니면 파퀴아오가 일부러 접근을 덜 한 건지는 몰라도, 소극적인 행동을 이런 큰 경기에서 보고 싶은 않은 건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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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파퀴아오에게 사정이 있긴 하다. 경기 일주일 전 오른쪽 어깨에 부상을 입었단다. 체크리스트에는 ‘이상이 없다’고 적었지만, 경기 후 부상이 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잘하면 위증죄로 처벌을 받을 수도 있다고 한다. 숨기려고 숨긴 게 아니라고 하지만 숨긴 꼴이 됐다) 뭐, 어떻건 간에 나는 어깨부상을 이유로 파퀴아오의 ‘소극적임’과 ‘패배’를 두둔하고 싶진 않다. 애초에 어깨부상이 있었으면 경기를 연기하더라도 부상 사실을 밝히는 게 맞고, 숨기고 경기에 임했다면 거기서 끝이어야 한다. (이후 위증으로 처벌받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고)


거기다 몸 관리도 시합의 일부다. 파퀴아오는 그 부분을 제대로 못했다. 경기 도중 입은 부상이 아니라면 부상을 이유로 패배를 논하기는 힘들다. 어깨부상으로 전력을 다 하지 못했을지라도, 애초에 어깨부상을 밝히지 않았던 순간부터 감내했어야 하는 부분이다. 앞서 언급했던 정찬성은 경기 도중 어깨가 빠졌음에도 링 위에서 어깨를 직접 껴서라도 경기를 계속하려는, 무모하지만 선수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의 태도를 취했다. 하지만 파퀴아오는? 이래도 어깨부상이 패배의 이유라고 생각하는가. 그게 아니고, 파퀴아오는 그냥 말린 거다.



이게 최선입니까?


시합이 이 모양인데 야유가 안 나오고 베기겠는가. 당연하다는 듯 경기가 끝나자 객석에서 야유가 흘러나왔다. 아무도 이렇게 12라운드를 끌어갈 거라고는 생각을 안 했기 때문이겠지. 나도, 이 재미없는 속에서도 설마 9라운드 쯤에는 시동을 걸겠지 생각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설레발은 기분을 망친다. 복싱계의 정상 둘이 붙는데 어째서 ‘설레발’을 걱정해야 하는지는 모르겠으나, 재미있을 경기에 대한 기대감은 모두 설레발이 되어 무너졌다.

 



나는 또 이렇게 싸울 줄 알았지...
(24초부터 보는 센스)



좀 속물이지만, 공짜로 보는 나야 그렇다 쳐도 많게는 억대 돈을 주고 이 경기를 본 사람들은 억울해서 어떡하나 싶다. 물론 현장에서 보면 그 긴장감이 느껴지기 때문에 확실히 느낌은 다르다. 그렇다고 해도 재미없는 경기 내용이 어디 가나? 아무리 현장 프리미엄을 더한다고 해도 낸 돈에 비해 납득할 수 없는 내용의 경기였다. 빈 링 위에 대전료와 티켓 값만 남은 경기,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던 것 같다.


나도 너도 모두 걱정하는 게 있다. 이대로 복싱 산업이 죽어가는 것이다. 사실 이 경기는 이미 UFC와 같은 MMA 시장에 밀려 사양길에 접어든 지 오래 된 복싱 산업에 단비와 같은 존재였다. 선수들, 대전료, 티켓, 장소, 화제성, 어떤 것 하나 부족한 게 없는 경기로, 두 선수가 기대만큼이나 박진감 넘치는 경기를 치렀다면 복싱 산업을 부흥시킬 수 있었을 거다. 두 선수 모두 거물이라는 이유로 ‘너네 때문에 복싱이 다시 죽었어’라고 말하는 건 아니지만, 큰 기회를 놓친 것만큼은 확실하다. 재대결을 한다고 해도 이 정도의 효과는 누릴 수 없을 것 같다.


재대결 논의가 경기가 끝나자마자 나왔다. 애초에 처음부터 재대결을 노리고 경기에 임한 것 아니냐는 말이 나올 정도로 경기가 별로였던 탓이다. 실제로 파퀴아오가 본인의 어깨부상을 치료하고 재대결을 하자고 말했다. 아직 은퇴까지 계약한 경기가 남아있는 메이웨더가 이 제안을 받을지는 미지수지만, 확실한 건 하나 있다. 재대결에서도 이런 식으로 경기하면 정말 재미없을 거라는 사실 말이다. 그래도 재대결이 성사 된다면 이번처럼 호들갑을 떨어줄 의향은 있으니 내킨다면 하시라. 경기 자체는 언제나 환영하는 바이다.



p.s: 이대로 끝나면 우리 모두 섭해 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나름대로 승패를 재정리해보았다. 독자제위덜에게 심심한 위로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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딴지일보 챙타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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