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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05. 08. 금요일

편집부 홀짝









'잔혹 동시' 논란


초등학교 3학년, 열 살 소녀가 낸 시집 <솔로 강아지>가 '잔혹 동시' 논란에 휩싸였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시집 <솔로 강아지>에 수록되어 있는 '학원가기 싫은 날'이라는 동시 때문이다. 먼저 해당 작품의 내용을 살펴보자.


학원가기 싫은 날

학원에 가고 싶지 않을 땐
이렇게

엄마를 씹어 먹어 
삶아 먹고 구워 먹어
눈깔을 파먹어
이빨을 다 뽑아 버려
머리채를 쥐어뜯어
살코기로 만들어 떠먹어
눈물을 흘리면 핥아 먹어
심장은 맨 마지막에 먹어

가장 고통스럽게



열 살 아이의 것이라고 생각하기에는 표현이 매우 과격한데다가 그 대상이 엄마라는 점에서 다소 충격적인 위 동시로 인하여 '잔혹 동시' 논란은 SNS와 매체 보도를 통해 일파만파로 번졌고 출판사에는 항의가 빗발쳤다. 결국 출판사는 시중에 유통되고 있는 해당 도서의 전량을 회수하는 한편 가지고 있던 도서까지 전량 폐기하기로 결정했으며, 홈페이지 게시판에는 현재 사과문이 게재된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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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 강아지>를 출간한 출판사 홈페이지 게시판의 사과문



전량 회수, 전량 폐기 결정, 정말 표현의 자유 허용 수위를 넘어섰기 때문일까?


대부분의 경우, 어떤 사안이 사회적으로 논란이 된다는 것 그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서로 다른 의견의 충돌과 갈등은 한 사회가 가진 포용과 이해의 범주를 확장시키는 역할을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당연하게도, 모든 논란이 긍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도 아니다. 논란이 어떤 방향과 내용으로 흐르느냐, 그리고 어떤 결과를 도출시키느냐에 따라 오히려 사회가 안고 있는 모순과 문제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기도 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지금 벌어지고 있는 '잔혹 동시' 논란의 주요 쟁점과 결과는 명백히 후자에 가깝다.


'잔혹 동시' 논란의 내용과 결과가 불편한 첫 번째 이유는 논란이 되고 있는 시집 <솔로 강아지>의 유통을 중지하라는 거센 요구가 있었다는 점과 출판사가 이를 너무 성급하게 받아들여 '전량 회수, 전량 폐기'를 결정해버렸다는 데에 있다. 


논란의 시 '학원가기 싫은 날'과 그것이 수록된 시집 <솔로 강아지>는 엄연한 창작물이다. 이것에 대한 유통 중지 요구와 전량 폐기 결정은 사실상 창작물에 대한 사형 선고다. '너의 창작물은 현재 우리 사회에서 전혀 받아들여질 수 없을 뿐아니라 더 나아가 사회 질서와 근간을 뒤흔들 수 있을 정도의 유해성을 내포하고 있으며 그것 외에는 어떠한 의미도 찾을 수 없다'는 정도의 판단이 섰을 때 가능한 일이라는 말이다.


너무 오바스러운 해석 아니냐고? 그렇지 않다. 적어도 내가 아는 바로는 '표현의 자유', 그 중에서도 문학을 포함한 예술 장르에서의 표현의 자유는 그 정도 판단이 사회적 합의를 통해 도출되지 않는 한 존중받아야 하는 것이 맞다. 우리가 따르고 싶어 안달이 나 있는 '선진국 수준'이 실제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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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원가기 싫은 날'이 논란이 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하다. 학생인 것으로 충분히 짐작되는 시적 화자가 다른 대상도 아닌 엄마를 그토록 잔인하게 죽이는 것을 묘사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것이 창작물에 대한 사형 선고를 내릴 정도의 작품인지, 심지어 논란의 시가 수록된 시집 자체를 폐기해야할 정도인지는 다시 생각해봐야 할 문제다. 해당 작품이 비슷한 연령대의 아이들에게 끼칠 수 있는 해악을 우려하는 목소리에 대해서는 충분히 공감하는 바이지만, 그런 우려라면 사회적으로 마련해 놓은 장치인 심의 규정을 통해 해당 작품에 연령 제한을 두는 것으로도 충분히 해소할 수 있다.


그렇다면, '학원가기 싫은 날'과 <솔로 강아지>는 연령 제한만으로는 감당이 안되는, 우리 사회가 감당할 수 있는 표현의 자유 한계를 넘어선 작품이란 말인가? 그에 대한 내 대답은 역시나 '그렇지 않다'이다. '<솔로 강아지>의 일부 내용이 표현 자유의 허용 수위를 넘어섰다'는 출판사의 입장 표명은 그래서 더욱 실망스럽다.


작품을 감상하는 사람에 따라 다소 의견이 엇갈릴 수 있겠으나 '학원가기 싫은 날'에 나타난 잔혹한 표현은 엄마를 어떻게 살해하겠다는 구체적 의지의 표명이라기보다는 부모에 의해 억지로 다녀야만 하는 학원에 가기 싫어하는 시적 화자-아마도 시인 자신이겠지만-가 자신의 의지를 보다 강하게 드러내기 위해 사용한 수단이라고 봐야한다. 다시 한 번 상기해보자. '학원가기 싫은 날'은 개인 일기장에 쓰여진 일기가 아니라 시집에 수록된 '시'이다.


이를 두고 '아무리 시로 표현했다 할지라도 그저 학원에 가기 싫어서 하는 투정을 이렇게 극단적으로 과격한 표현을 동원해가며 써야 했느냐'며 따지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보건복지부가 발표한 '2013년 한국아동종합실태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아동의 삶 만족도는 60.3%로 OECD 국가 중 꼴찌이며, 추측컨대, 한국 아동 삶의 만족도를 저하시키는 가장 큰 요인은 과중한 학업 스트레스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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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2013년 한국아동종합실태조사


어른들이 쉽게 '복에 겨운 아이들의 투정'으로 치부하기에는 이미 커다란 사회적 문제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런데도 이 시가, 표현의 자유 허용 수위를 넘어선, 그래서 '반사회성과 유해성말고는 그 어떤 의미도 찾을 수 없는 창작물'인가? 헌법에도 명시된, 우리 사회가 존중하는 표현의 자유가 가진 한계가 고작 이정도 수준이란 말인가?


아닐 것이다.



'잔혹 동시' 논란에서 드러난 잔혹한 어른들의 세상


개인적으로 추측하건대, 출판사가 <솔로 강아지>에 전량 회수, 폐기 결정을 내린 이유가 정말로 해당 작품이 표현의 자유 허용 수위를 넘어섰기 때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만약 그랬다면 애초에 출간을 결정하지도 않았을 것이며, 그렇게 자극적인 삽화를 넣지도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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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내용보다 더 섬뜩한 삽화


SNS 상에서 촉발되어 언론 매체의 보도를 타면서 번진 논란의 불길을 보면서, 출판사 또한 적지 않게 당황했을 것이다. 논란이 커지자, 다른 매체들의 '우라까이'가 줄을 이었다. 매체 입장에서야 이런 논란은 말 그대로 '땡큐'였을 터. 논란의 중심이 되고 있는 시의 내용이 워낙 자극적이다보니 더 자극적인 보도 내용과 기사 제목을 뽑기도 수월했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앞뒤 맥락을 다 자른 내용이 광범위하게 퍼지면서, 소식을 접한 학부모들은 즉각적으로 출판사에 항의를 쏟아냈기 시작했고, 출판사는 얼마 지나지 않아 백기를 들고 전량 폐기를 결정했다. 과연, 표현의 자유 허용 수위가 그 이유였을까? 어린이 도서를 판매하는 출판사가 실질적 소비자라 할 수 있는 학부모들이 등돌리는 것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은 아닐까? 어느 쪽이 더 신빙성 있는 추론인지는 독자제위의 판단에 맡긴다.


이 모든 과정. 논란의 불씨가 당겨지고 불씨가 큰 불길로 번지면서 끝내 <솔로 강아지>라는 창작물을 불태워 없애기까지의 과정에서 들여다보면 우리는 잔혹 동시라 낙인 찍힌 '가기싫은 학원'보다 더 잔혹한 어른들의 세상을 마주할 수 있다.


자극적인 기사 내용에 다분히 자극적인 제목을 붙여 우라까이를 남발하며 '클릭 수 장사'를 한 언론 매체에게 <솔로 강아지>는 어떤 의미였을까? '학원가기 싫은 날'이라는 시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의미는 고작 '잔혹 동시'라는 단어 뿐이었을까?


(어디까지나 추측일뿐이지만)주요 소비자들이 등을 돌리는 사태보다는 그냥 논란이 되고 있는 시집을 '묻어버리는' 편을 택한 출판사의 경제 논리도 예외일 수는 없다. 그래놓고는 '표현의 자유 허용 수위'를 운운하며 자신들이 출간한 시집에 낙인을 찍어버리는 회피 스킬은 또 어떤가.


그에 못지 않게 잔혹한 또다른 어른들이 있다. 엄연히 시를 창작한 저자임에도 그저 '열 살 어린애'로 치부하면서 한편으로는 그 열 살 어린애를 정신병자 취급하며 매도하는 익명의 탈을 쓴 다수 말이다.  



우리 사회가 아이들을 대하는 방식


한 사회가 얼마나 건강한 사회인지를 판단하는 척도 가운데 하나는 그 사회가 사회적 약자, 특히나 아이들을 대하는 태도와 방식이 어떠한가를 살피는 것이라고들 한다. 적어도 어른들이 아이들의 생각과 의견은 '아직 뭘 몰라서'. '애들이 뭘 안다고', '애들인데 뭐'라고 쉬이 무시하는 것은 좋은 태도가 아니다. 아무리 어린 아이라 할지라도 어른들과 같은 인격체임을 인지하는 것, 때문에 '하지마', '이렇게 해'라고 다그치는 것보다는 '왜 그렇게 생각했니?'라고 묻는 태도가 필요한 것이다. 


한 가지 더, 사회가 아이들을 보호하는 방식이다. 아이들의 인격과 생각은 어른이 가진 그것처럼 존중하되, 아이들이 아직 어리기 때문에 작은 충격과 상처에도 취약하다는 것을 인지하는 태도다. 그러나 정작 우리 사회는 아이들에게 어른들과 같은 수준의 경쟁을 강요한다. 아예 초등학교 때부터 성적으로 줄을 세우고 등수 경쟁에 몰아 넣어 아이들의 세계마저 약육강식의 정글로 만들어버린다. 심지어 어른들의 세계에 아이들을 끌어들이기도 한다. 아이들에게 '아이다울 것'을 요구하면서 한편으로는 '아직은 니가 모르는 세상의 이치'를 내세우면서 행동을 강요하는 모순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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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소설 <어른아이>


<솔로 강아지>를 쓴 열 살 소녀는 시인으로서 성인 작가들과 같은 존중을 받아야했다. 응당 창작물인 <솔로 강아지>도 같은 선상에서 존중받아야했다. 또한 열 살 아이로서 보호 받을 권리도 있었다. 우리는 '열 살 짜리 애가 쓴 <솔로 강아지>'라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솔로 강아지>를 쓴 시인은 열 살 어린이'라고 생각했어야 한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었다면, '학원가기 싫은 날'로 촉발된 또다른 논쟁이 있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어쩌다 이토록 잔혹한 시가 나왔을까' 하는. '우리가 아이들을 너무 궁지로 몰하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학원가기 싫은 날'을 본 저자의 어머니 김바다 시인은 "'엄마한테 이럴 수 있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여러가지 감정이 동시에 생겨났다. 우리 딸이 학원에 가기를 이렇게까지 싫어하는 줄 전혀 몰랐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 영어학원을 그만두게 했다. 아이의 표현이 거칠기는 하지만 발상이 재밌어서 웃음이 나왔다"고 한 매체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이를 두고 혹자는 '문제 있는 아이의 문제 있는 엄마'라 비판하기도 하지만. 글쎄다. 어느 쪽이 더 아이를 위한 어른일까? 역시나 판단은 독자제위들 몫이다.


김 시인은 '책을 회수하는 것은 맞다고 보지만 전량 폐기는 받아들일 수 없다. 어리지만 작가로서 딸의 자긍심을 키워주고 싶다'고 말했다.



첨언 - 나는 <솔로 강아지>를 만나고 싶다.


솔로 강아지


우리 강아지는 솔로다


약혼 신청을 해 온 수캐들은 많은데

엄마가 허락을 안한다


솔로의 슬픔을 모르는 여자

인형을 사랑하게 되어버린 우리 강아지


할아버지는 침이 묻은 인형을 버리려한다

정든다는 것을 모른다


강아지가 바닥에 납작하게 엎드려있다

외로움이 납작하다



내가 시를 잘 쓰는 이유


상처딱지가 떨어진 자리

피가 맺힌다


붉은 색을 보니 먹고 싶다

살짝 혀를 댄다


상큼한 쇠맛

이래서 모기가 좋아하나?


나는 모기도 아닌데

순간 왜 피를 먹었을까


몸속에 숨어 사는 피의 정체를 

알아보려면

상처딱지를 뜯고 피를 맛보아야 한다


모기처럼 열심히 피를 찾아야 한다

모든 시에서는 피 냄새가 난다



현재 내게는 <솔로 강아지>가 없다. 시집의 전량 회수 및 폐기 처분이 그대로 진행된다면 앞으로도 구하기가 매우 어려울 것이다.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솔로 강아지>에 수록된 다른 시들을 보면서 내가 느낀 것은, 그 시집에 수록된, 내가 아직 보지 못한 다른 시들도 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열 살 소녀의 시가 맞나 싶을 정도의 놀라움이 내게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다는 아니다. 혹자들처럼 '열 살 소녀가 이정도 시를 쓸 정도면 천재가 분명하니 억누르지 말고 잘 키워내야'한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는다. 내게는 누군가의 시적 천재성을 알아볼 정도의 안목은 없으니. 


다만, 나는 <솔로 강아지>의 모든 시들이 궁금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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