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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빙 피셔’라는 사람이 있었다. 경제학자로 가장 잘 알려져 있는 피셔는 피셔 방정식을 비롯해 부채-디플레이션 이론 등 복잡한 경제 현상을 직관적인 공식으로 표현했다. 20세기 이전에 경제학자들은 철학자나 사회학자에 가까웠는데, 그 중 피셔는 당대 수학자들에 필적할만한 수학 능력을 바탕으로 각종 경제현상들을 수식으로 표현하기 시작했다. 그는 신고전학파의 초석을 다진 중요한 경제학자중 하나로, 밀턴 프리드만 등에 의해 이론이 계승되었다.


그는 대학교에 틀어박혀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전형적인 학자와는 거리가 멀었다. 본인의 경제학적 지식을 끊임없이 자본시장에 적용해 개선시키고자 했다. 인플레이션의 의한 경기 변동을 제어하기위해 TIPS등의 금융상품 등을 도입할 것을 주장했고, 실제로 그의 아이디어는 성공적으로 시장에 정착되었다. 또한, 1950년대 후반 이전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투자자들은 안전자산인 채권에 투자를 했고 주식시장을 도박장정도로 취급했었는데, 이러한 대중들의 인식을 바꾸고 주식시장을 대중화하는 데 이론적 토대를 제공했다. 마침 돈 많은 집에 장가를 든 그는 처가에서 받은 막대한 자금을 바탕으로 ‘한때’ 성공적인 창업주이자 주식투자가가 되기도 했다. 


재밌는 건 이러한 공헌에도 불구하고 어빙 피셔가 자본시장에서는 가장 많이 조롱을 받는 인물 중 하나라는 점이다. 그가 1929년 대공황 직전에 한 희대의 망언 때문이다


“Stock prices have reached what looks like a permanently high plateau.”

“주식시장은 앞으로 꺼지지 않는 영원한 고점에 도달 했습니다.”


이 선언이 있고나서 미국주식시장은 아직도 갱신되지 않는 고점대비 폭락을 경험했다. 불행히도 그의 망언은 영원히 캡쳐되어 각종 경제위기가 있을 때마다 인용되었고, 주식 역시 깡통을 차서 살던 집까지 넘어간다. 예일대에서 최초의 경제학 박사학위를 수여받은 이후, 경제학에서 수많은 업적을 남긴 게 인정되어 그의 집을 사간 예일대로부터 집에서 거주할 것을 허락받았지만 그에겐 평생 씻을 수 없는 오명이 된다. (평소 투자자들에게 분산 투자를 강조했던 그가 정작 본인은 ‘몰빵’을 하다가 영혼까지 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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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황 시기, 은행이 도산하기 전에 예금을 받으려고 줄 서있다


오늘 본격적으로 하려는 얘기는 어빙 피셔의 명성에 흠이 간, 대공황 직후에 경제학에 대한 이야기이다. 중학교 사회책에도 실려 있는 경제 대공황으로 직격탄을 입은 학자는 어빙 피셔만이 아니었다.


‘시장제일주의’를 외치던 고전주의 학파 전체는 갑작스런 주식시장 폭락으로 주류 학계에서 밀려난다. 투자자들은 패닉했고 시장은 진전될 기미가 보이질 않았으니까. 주류였던 고전주의 학파 이론이 들어맞지 않자 학계에는 거대한 공백이 생겼다. 사람들은 기존 경제학의 대안을 논의하기 시작했고, 자본시장의 탐욕에 대한 대중의 반감은 극에 달했다. 주류경제학을 몰아내고 새로운 경제학파를 세울 절호의 기회였다.


(여기서부터는 본인이 수강한 학부 대안경제학 수업과, Justin Fox를 비롯한 경제 역사학자들의 관련 기록을 참고했다. 전공자 분들께서는 잘못된 부분을 지적해주시길 바란다)


미국학계에서 고전주의 학파와 대립각을 세우던 학파로는 제도주의 경제학파(Institutional Economics)가 있었다. 고전주의 학파에서는 인간은 합리적이라고 가정하고 시장논리와 이익 극대화로 경제 현상을 설명하는데, 제도주의 경제학파는 경제현상이 이렇게 시계장치처럼 돌아간다는 접근을 거부했다. 제도주의는 경제활동을 복합적인 유기체로 인식했기 때문에 경제활동을 제대로 분석하기 위해서는 경제활동이 어떠한 역사와 제도를 토대로 발생 했는지 총체적으로 연구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말이 졸라 복잡해졌는데, 고전주의 학파의 핵심주장이


“모든 거래는 아덤 스미스가 말한 대로 보이지 않는 손을 통해 이루어진다.”


라면, 제도주의의 핵심주장은


“모든 제도엔 다 그 기원이 있다.”


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제도주의를 겉만 대충 다뤘는데도, 마르크스를 떠올린다면 당신은 졸라 센스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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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마르크스가 유물론적 시각에 입각해서, 자본주의의 역사를 ‘생산 수단의 소유를 둘러싼 계층 간의 갈등’으로 풀어내었듯이(이 말들이 어렵다면 그건 내가 자본론을 부분부분 읽어서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미안), 제도주의자들은 각자 다양한 방식으로 경제 제도의 근원을 분석해나갔다. 베벌린, 커먼스 등과 같은 스타를 배출해냈을 만큼 20세기 초 미국에서 제도주의는 번성했었다. 대공황은 고전주의의 후퇴를 의미했으며, 제도주의는 새로운 경제 질서를 세울 듯 보였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마르크스의 저서들이 미국 경제학 수업시간에 진지하게 읽혔던 것도 이즈음이다.


그러나 고전주의를 완전히 갈아엎고자 했던 제도주의의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정확히는 ‘시도조차 못 해봤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콜럼비아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National Bureau of Economic Research를 설립하는 등 제도주의자들의 거두 역할을 하던 웨슬리 미첼이 영국으로 유학을 떠났기 때문이다. 구심점을 잃은 나머지 제도주의자들은 대공황 이후 정국의 주도권을 쥐지 못했다.


왜 미첼이 현실개선에 참여하지 않고 유학을 떠났고 제도주의자들이 단결하지 못했는지에 대해 살펴보면 제도주의의 근본적인 문제점을 찾아볼 수 있다. 제도주의라는 학문 자체가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을 중심으로 발달한 나머지 이를 완전히 대체할 만큼의 이론적 토대를 갖추지 못했다. 각각의 이론이 부분적으로 자본주의에 모순과 문제점을 지적했으되 이런 이론들을 아우르고 총괄하는 핵심적인 코어 이론이나 사상가가 없었다. 일찍이 고전주의 학파 이론이 마샬 등에 의해 정립되고, 피셔 등의 수학적 재능을 갖춘 경제학자들의 손에 의해 발전된 것과는 대조적이다.


또한, 고전주의 학파가 세운 불합리적인 가정(인간은 항상 합리적이고 이익 극대화를 추구한다)에 대한 비판은 고전주의가 물러가자 스스로에게 더욱 엄격하게 적용이 되어 ‘모두까기’식의 가혹한 검증이 이어졌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미첼에 대한 훗날 고전주의 학파를 다시 지금의 반열에 올려놓은 일등공신인 밀턴 프리드만의 평가에서 잘 드러난다.


“Mitchell is generally considered primarily an empirical scientist rather than a theorist”

“미첼은 경험주의적 과학자이지 이론가가 아니었습니다.”


제도주의자들의 엄격한 경험주의적인 검증이 제도주의 이론 형성에 악영향을 끼쳤다는 지적이다. 반면에 밀턴 프리드만을 비롯한 고전주의 학파는 불완전한 가정이라도 일단 이론을 세우면, 졸라 쿨하게 그 이론의 장점만을 남기고 추후에 개선시키는 방법을 선택했다. 개선이 충분히 되는지, 이런 이론이 정당한지에 대한 논란이 있을 수는 있다. 하지만 제도주의자들은 완벽주의 때문에 제대로 된 이론을 제시하지 못했고 대공황 정국을 신속히 돌파해야했던 루즈벨트 행정부는 결국 제도주의자가 아닌 케인즈의 정책을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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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즈벨트 행정부와 케인즈의 정책이 만나 이루어진 뉴딜정책.


케인즈의 주장은 중학교 교과서나 참고서에 대충,


“단, 시장이 실패할 수도 있다. 이 경우 정부가 개입하는 것이 더 효율적일 수 있다”


라는 식으로 실려 있다. 너무 단순화된 나머지 케인즈 본인이 들으면 억울해서 땅을 칠 수도 있겠지만 뒤집어서 말하면 그의 이론이 ‘졸라 직관적이고 강력하다’는 말이다. 고전주의 학파가 사용하던 기존의 언어와 도구를 재조합해서 정부가 개입하는 데 정당성을 부여했고, 여러 가지 사회정책과 대안을 제시했으며, 이를 연결해서 ‘거시경제학’이라는 하나의 학문을 만들었다. 비록 고전주의의 불안정한 가정 같은 약점을 근본적으로 뒤엎지는 못했지만, 케인즈 학파는 2차 세계대전 직후까지 현실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하며 고전주의 학파의 대안역할을 수행했다.


일부 제도주의자들은 케인즈 학파를 고전주의 학파의 분파라고 비판했다. 비록 케인즈 학파가 각종 정책에 있어 시장만능주의자들과 오랫동안 대립해왔지만 결코 좁힐 수 없는 정도의 차이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후 제도주의자를 포함한 대안경제 학파(Political Economy)는 오랜 쇠퇴기를 맞는다. 현재 미국서 배출되는 경제학 박사 중 90% 이상이 고전주의 학파에 해당될 정도로 대안경제학은 주류에서 밀려났고, 대부분에 대학교에서 필수가 아닌 교양과목으로 배우고 있다. 그 이유로 2차 세계대전 이후 금융을 통해 세계를 통치하려는 미국의 패권주의를 꼽는 사람이 있고, 고전주의 학파가 자본가들의 입장을 대변해주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오늘 내가 이야기하고자했던 부분은 자본주의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미국 본토에서도 1950년 이전까지는 기존 고전주의 학파에 반기를 드는 제도주의자들이 득세했다는 점이다. 그들의 실패에서 배울 점이 있다면 고전주의 학파를 무너뜨리기 위해 필요한건 혁명, 즉, 새로운 사상과 패러다임을 통해 고전주의를 다 갈아엎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기존의 시장 만능주의가 제대로 설명해주지 못하는 작은 부분을 개선시키려는 노력이 먼저 필요하다. 그렇지 않다면 대공황 직후 같이 기존 경제체제가 흔들리는 일이 발생해도 그것을 대체할만한 힘이 없으리라.


서론에 언급했던 피셔의 얘기를 마저 해보겠다. 살던 집까지 홀랑 까먹은 불운한 피셔는, 엎친데 덮친 격으로 지병인 폐결핵이 악화된다. (부친 역시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건강까지 잃은 그는 폐결핵환자들이 자주 찾던 콜로라도에 한 요양원으로 이사를 간다. 이곳에서 끝난 것만 같았던 그와 고전주의 학파는 반전의 계기를 마련한다. 시카고 트리뷴지의 상속자이자 투자가인 Cowles는 어빙 피셔에게 영감을 받아 자신의 이름을 딴 ‘Cowles Commission’을 만들었고, 피셔의 지도 하에 미국 전역에서 수학적 재능이 있는 경제학자들을 모아 최초의 계량경제학(Econometric) 저널을 창간한다. 이후 Cowles Commission은 Stiglitz와 Markovitz를 비롯해 11명의 노벨 경제학 수상자를 배출하는 등 고전주의적 수학모델이 금융 전반으로 퍼져나가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다. 피셔 개인은 망언으로 죽을 때까지 고통 받았지만, 그의 이론과 고전주의 학파는 이들에 의해 다시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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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딴지일보 챙타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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