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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편에서 로마 제국과 한 제국 이야기를 하면서, 왜 인류의 고대 대제국들이 한정된 지역에만 영향을 끼친 ‘한정적인’ 강대국을 건설할 수 있었는지 근본적인 이유를 설명했다.


고대 국가권력의 범위는 교통과 운반능력, 통신체계가 실용적으로 연결될 수 있는 범위에 한정된다. 로마 제국과 한 제국은 국가권력의 범위를 당시의 기술과 정치시스템으로 최대한 확장시킨 케이스다. 아마 로마 제국이 중국을 점령했다면 본국 로마와는 단절되어 곧 별개의 제국으로 분열되었을 것이다.



식량의 운송이 중요하다


가장 중대한 문제는 식량의 효율적인 운송범위다. 중국도 강남 지역의 풍부한 식량을 북부 지역으로 운송하는데 애로가 있었고 이를 타개하기 위해 이미 진 제국 시절부터 운하라는 혁신적인 사업을 벌여왔다. (무려 2,000년간 운하를 팠다)


강남의 곡창지대에서 생산한 쌀을 북부로 운반한다고 치자. 고대의 운송수단이라고 해봤자 결국 말이나 소를 이용한 수레일 것이다. 하지만 말과 소의 운반능력은 한정되어 있고, 말과 소는 밥을 먹어야 한다. 거기다 운송을 하는 인부도 밥을 먹어야 한다. 중국 남부에서 북부로 쌀을 잔뜩 운반하려고 해도 중간에 말과 소의 식량과 인부들의 식량을 합치면 최대 운송거리에 제약이 있을 수밖에 없다. 운송거리가 멀어질수록 중간에 먹는 양도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할 테니 효율도 크게 낮아진다.


한 제국의 최첨단 기동군단은 서역의 천리마를 구해서 움직였다. 하루에 100km를 넘게 이동할 수 있어도 휴대한 식량으로는 넓은 초원지대에서 활동할 수 있는 기간에 한계가 있다. 그러한 기동군단이 과연 페르시아 지방까지 진출할 수 있었을까? 만약 페르시아까지 진출했어도 페르시아를 점령하고 얻은 재화와 식량 등을 다시 중국으로 옮길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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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거리를 옮기는 게 가능합니까!


로마 제국도 마찬가지다. 로마는 지중해의 해상통제권을 가졌기에 바다를 이용해서 각지의 재화와 물품을 로마로 운송했다. 로마의 최대 영토를 보면 확실히 알 수 있다. 육상으로는 확장할 수 있는 한계는 명확하다.


중국으로 돌아가 보자. 중국의 고대사에 대해서 많은 이들이 착각하는 게, 당시도 지금의 중국처럼 치밀하게 전 영토를 통제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고대 중국의 제국들은 중원을 떠나서 멀어질수록 철저하게 ‘거점’ 방식이다. 서촉지방이나 오나라의 강남지방은 영토는 넓지만 주요 거점 사이에 넓은 무주공산이 있다. 고대 중국은 변방에다가 그저 인력파견(병력이나 인재)의 형태만 취했고, 정작 중요한 물자의 운송은 거의 단절되었다.


거대한 제국을 유지하는데 문제가 많아서 나온 게 ‘제후국’이다. 중앙의 일부 인력만 지방으로 파견해서 그곳의 사정에 맞게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게 했다. 느슨한 국가연합의 형태다.


그래서 중국을 통일한 거대 제국의 황제들이 꼭 운하를 팠던 것이다. 특히 남부와 북부의 경제를 연결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고, 송나라, 원나라, 명나라 시대를 거치면서 겨우 완성이 되었다. 수양제가 고구려를 침략하기 위해 거대한 운하를 먼저 파야 했던 것도 남부의 풍부한 물자를 북부로 나를 운송망 없이는 백만이 넘는 대병력을 고구려로 보낼 수가 없어서였다.



징기스칸의 몽골 제국


징기스칸이 있었다. 수천 년 동안 중원과 오리엔트(서구 포함)가 경제적으로 단절되었던 문제를 단박에 해결한 첫 번째 인물이다. 그는 중국과 페르시아, 유럽의 일부까지 포함한 최초의 범세계적인 제국을 건설하였다.


고대 제국들의 팽창한도는 근본적으로 물자의 수송가능범위와 군사력의 투사범위가 겹치는 문제에 기인한다. 아무리 뛰어난 군대가 있어도 본거지에서 수천km 너머의 지역으로 파병하면 제대로 보급을 할 수가 없다. 파견군이 목표지역을 점령해도 그곳에서 얻은 수확물을 본국으로 보내는 것도 어렵다. 결국 파견군은 현지화되어 본국과 단절되고 독자적인 정치세력이 된다. 대표적으로 알렉산더 제국이 어떻게 끝장이 났는지 생각해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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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이게 다 몽골 제국의 땅입니다.


하지만 징기스칸은 유목민의 장점을 최대한 활용하면서 유목민들에게 근대적인 국가체계를 적용하는 방법까지 확립했다. 부족, 씨족 중심의 유목민을 하나로 통합하면서 국가 시스템의 단위가 되도록 하는 등 여러 정치적 조치를 취했다. 또한 각 병단을 완벽한 자급형 기동군단으로 재편하여, 스스로 생산하면서 이동하고 소비하면서 정복활동을 할 수 있도록 유목민의 장점을 최대화했다.


1만 명인 군단 하나가 몽골 초원에서 아랍지방으로 파견을 간다고 치자. 그러면 1만 명의 병사들과 함께 수만 필의 말, 양, 일부 부역자들이 따라간다. 가면서 양도 방목하고 잡아먹고, 털을 깎아 옷을 만들고, 우유도 짜다보면, 목적지에 도착할 무렵에는 말조차도 상당수 잡아먹힌 상태다. 그래도 병력은 거의 온전하고 전투력도 유지한 상태로 목표지역을 점령할 수 있다. 전투로 인한 병력 손실조차도 점령지에서 착출한 신규 병력으로 채우고 때론 더욱 확장한다.


하지만 몽골군의 특징은 고대 제국들처럼 병력숫자 위주의 대병력 구성이 아니라, 최대한 효율적인 숫자에서 엘리트 위주로 구성된 기동군이다. 동양에서 서양까지, 너무 많은 병력을 온전히 이동시킬 수 없어 본국과 단절되어도 스스로 생존할 수 있는 이상적인 군대를 만들었다. 몽골군은 오로지 전투를 위해 양성된 엘리트 군대다. 100만이 넘는 고대의 대규모 병력을 대륙 건너편으로 파견하는 것에 비해 비록 몇 만이라도 최정예 기동군을 파견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었다.


또 거리상의 문제로 본국(몽골 초원)과 점령지(폴란드, 팔레스타인, 페르시아, 중국 남부) 사이에 생기는 단절을 막기 위해 초고속 통신망도 갖추고 있었다. 비록 원거리에서 물자의 효율적인 이동은 여전히 불가능했어도 인력의 파견과 통신체계의 유지는 가능했기에 느슨한 제후국 형태를 여전히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몽골은 육상이동이라는 한계로 인해서 200년을 넘기지 못하고 각 지역별로 분할되어 차례차례 무너진다. 어찌됐든 육상이동으로는 물자의 이동과 교류가 규모면에서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중세 유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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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브로조 로렌체티의 <도시에서 좋은 정부의 효과>


중세 유럽으로 가보자. 이 무렵은 이슬람과 기독교의 대립, 르네상스 시대 등을 거치면서 과학기술이 크게 진보하던 시기다. 하지만 여전히 지리학적 이유로 서구와 아랍의 인류가 힘을 투사할 수 있는 범위는 한정적이었다. 로마 제국과 마찬가지로 효율성이 높은 지중해 해상운송로를 중심으로 문화경제의 중심이 밀집해 있었다.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 이전에 유럽 각국과 아랍 각국의 세력범위는 확고하게 선이 그어졌었다. 서로의 범위에서 얻어낼 수 있는 물자와 인력의 한계는 명확했다. 유럽은 아랍을 완전히 굴복시킬 경제력과 군사력을 확보하지 못했고, 아랍도 마찬가지였다. 유럽의 나라들도 좁은(?) 유럽 대륙에서 서로 치밀하게 모여서 엎치락뒤치락 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신대륙이 떡~하니 나타났고, 일부 유럽 국가들이 신대륙을 점령했다. 그러면서 무역풍이라는 신의 저주를 이용해서 식민지와 물자와 인력을 유럽으로 운반하기 시작했다. 대서양을 가로질러서 식량을 운송하는 건 여전히 비효율적이었지만, 황금이나 광물, 고가의 물자를 맘껏 유럽으로 운반했다. 육상으로는 운반하기 힘든 양이 유럽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그 결과 유럽은 그 어떤 고대 제국들도 해내지 못한 힘을 얻었다. 부강해진 국력을 다시금 확장해서 대서양 넘어서 태평양까지 진출하였다. 지구 곳곳을 식민화하기 시작해 인도 제국도 무너졌고 중국도 무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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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징기스칸도 육상 교통로에만 의존했기에 한정적인 범지구 제국을 유지하는데 그쳤다. 그에 반해서 유럽 열강들은 해상 교통로를 이용해서 본격적인 범지구 제국을 구축하는데 성공한다. 혹자는 유럽은 과학기술의 발전 덕분에 전 세계를 정복한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필자 생각은 반대다. 유럽이 아메리카 대륙을 얻었기에 과학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것이다.


기존에 알려진 세계에서는 얻을 수 없었던 막대한 물자(금을 포함한)가 새롭게 유입되었기에 유럽의 경제력은 급팽창했고, 이어서 군사력도 팽창한다. 더 넓어진 세상을 다루기 위해 기술의 발전이 수반되었다. 과학기술의 발전은 항상 필요에 의해서 촉진된다. 당장 먹고사는데 급하고 경쟁이 없으면 수만 년이 흘러도 별반 발전하지 못하는 게 과학과 기술이다.


유럽에서 독립한 신대륙의 미국 역시 해상을 이용해서 아프리카의 수많은 노동력을 노예라는 형태로 수입(?)했으며, 유럽 본토의 혼란을 피해서 대서양이라는 자연적 방벽 아래에서 독자적인 국가경제정치 시스템을 차차 키워나간다. 이건 다음 편에서 주로 다룰 거다.



바다를 지배하는 자가 지구를 지배한다


고대 로마 제국과 한 제국에 비해 징기스칸의 몽골 제국과 중세의 유럽(영제국 등)이 뭐가 달랐는지 핵심만 따져봤다. 공통점은 ‘물류시스템’이다. 교통망, 물자의 보급가능범위, 그리고 이러한 것을 통 틀어서 ‘경제력의 범위’라고 한다. 군사력은 경제력의 범위 하에서만 장기간 운용이 가능하다. 일시적인 파병은 가능해도 본국의 정치경제시스템에 점령지를 완벽히 예속시키는 것은 경제망의 통합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징기스칸은 육상 교통로에 의존했기에 미완의 혁명을 이뤘고, 유럽의 열강들은 해상 교통로를 이용해서 범지구적인 완벽한 세계 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다. 특히 수세기 동안 지구에서 가장 강력했던 영제국은 막강한 해군력을 건설했다. 지구를 지배하는 가장 효과적이고 유일한 방법이 대서양과 태평양 바다를 이용한 선박의 물자운송시스템을 확보하는 것이었던 시절에는 해군력이 필수였다. 영제국은 막강한 해군력을 이용해서 영국의 바다에 도전하려는 모든 경쟁자들을 침몰시켰다. 그리고 혼자 짱먹고, 19세기 말에는 전 세계 경제력의 30%가량을 독식한다.


이 룰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미국이 웬만한 국가의 전체 군사력에 맘먹는 핵항모전단을 10개씩이나 유지하고, 미해군의 함정 총톤수가 나머지 전 세계 국가 해군의 함정 총톤수를 웃도는 데는 이유가 있다. 암만 비행기, 철도가 있어도 바다는 가장 경제적인 운송로다.


20세기에 이를 무렵에 미국은 태평양과 대서양을 잇는 대륙횡단철도를 가지고 신대륙을 산업화할 기반을 마련한다. 이게 없었으면 캘리포니아의 신선한 ‘어륀지’를 뉴욕에서 맛볼 수 없었을 것이다.


신생 강국인 독일은 철도망을 이용해서 유럽의 여러 나라와 연결하고, 터키-아랍권까지도 연결하여 이들을 독일의 경제망에 흡수하려고 했다. 하지만 20세기 중반에 이르기까지 ‘바다를 지배하는 자가 지구를 지배한다’는 공식은 유효했다. 그래서 일본이 진주만을 공습했다가 망한 거고, 독일이 유보트 수백 척이 격침되면서도 영국을 해상봉쇄하려다가 망한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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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게 공습당한 진주만


우리는 1, 2차 대전을 볼 때 지상에서 벌어진 수많은 격전들과 영웅담에만 관심을 기울인다. 하지만 실제로 주요했던 전장은 육지가 아니라 바다였다. 바다에서 이뤄진 세력 갈등과 물자의 흐름, 그리고 경제력의 범위와 이동이 실제 전쟁의 결과에 더 큰 영향을 끼친다.


1차 대전에서 독일군이 프랑스를 단기간에 점령하지 못했을 때, 2차 대전에서 독일의 유보트들이 영국을 완벽히 봉쇄하지 못했을 때,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 연합함대가 미국 항모들을 모두 격침시키지 못했을 때 이미 전쟁의 승패는 났다.


소규모 지역적 전투가 아닌 이상, 대규모 국가집단간의 전쟁이나 세력 갈등에서는 결국 경제적으로 우위를 갖고, 그걸 활용해서 군사적 우위를 확보한 측이 대부분 유리하다. 이러한 열세를 오로지 군사적으로 극복하는 건 매우 힘들다. 히틀러나 일본 군부도 불가능에 도전했다가 다 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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