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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05. 12. 화요일

SamuelSeong








남의 나라에서 일하던 사람들에게 지금과 같은 참사가 벌어지면 내가 일하는 업장은 그 지역은 괜찮은가를 챙기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외국인은 어느 누구와도 사이 좋게 지낼 수 있지만 동시에 외국인은 쉽게 떠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하고 있던 일을 접을 사람들이 아니라면 남아서 대부분 뭔가를 하고 있다.


1박에 5500원 꼴이라고 할 수 있는 네팔 루피 550NRs를 받는 네팔의 호텔 ‘짱’은 카트만두의 여행자 거리, 타멜(Thamel)에서도 상당히 외진 곳에 있다. 싼 숙식비를 유지하려면 부동산 비용을 최소화해야 하는 것은 전세계 어디든 같으니까. 반면 일하는 스텝들은 정말 많다. 왜냐면 네팔에선 자동화되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서 모든 것을 사람 손으로 해야 하니까. 그런데 이 스텝들, 모두 한 지역 출신이다. 이번 지진의 진앙지인 Gorkha주의 Marshal 마을 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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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진앙은 여기서도 좀 위쪽이다.


지진 피해를 입은 네팔인들을 위해 써달라는 돈을 받은 ‘짱 호텔’의 한선미 사장은 이 마을을 지원하기로 마음 먹고, 4월 30일 계좌번호를 공개했다. 그리고 첫 날 들어온 800여만 원으로 고르카 마셜 마을을 지원하고, 그 다음 마을을 어디로 할 것인지 고려하고 있었다. 그때 라디오 방송으로 마셜 인근의 '쭈릉'이라는 마을에 아직도 쌀이 공급되지 못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이곳을 지원하기로 했다. 네팔의 한국인 식당들의 상당수가 이런 지원을 하고 있다. 한 사장과는 2006년부터 친분이 있었던 까닭에 나는 이 팀을 쫓아가보기로 했다.


5월 6일 새벽 6시 30분. 낡디 낡은 도요타 렌드 크루져가 호텔로 들어왔다. 다섯 명이 타야 하는 이 차에 400kg이 넘는 쌀과 달(네팔 사람들의 국이라고 할 수 있는 달밧 만드는 콩)을 싣고 출발했다. 추가로 3.3톤 가량의 쌀은 남부 치트원 주에서 트렉터로 출발했다. 카트만두와 고르카 바자르 모두 쌀값이 꽤 올랐기 때문에 쌀이 많이 나오는 곳에서 실어오기로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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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트만두 분지를 나가는 길에서도 무너져 내린 집들을 꽤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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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지를 벗어나자 카트만두로 달려가는 수많은 구호차량을 만날 수 있었다. 대부분이 인도에서 온 차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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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트벵갈 주의 주지사 마마타 바네르지

(일전의 Orissa의 Posco에서 잠깐 언급했던 인도 정치인)도 한 수저 얹고 있다. 

어찌 보면 한 지역의 재앙은 인근지역의 많은 사람들에게 기회가 되는 것 같기도 하다.


평소 같았으면 다섯 시간은 족히 걸렸을 길을 네 시간도 안 돼서 주파했다고 좋아하는데, 경찰 체크포인트에서 경찰들이 대기하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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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날 구호품 배급에 불만을 품은 일군의 마을 주민들이 길을 막고 구호차량을 습격하려고 했다는 것. 그래서 열 대씩 무장 경찰 에스코트 하에 이동해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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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한 시간을 기다려서야 다시 출발할 수 있었고, 다시 약 한 시간을 달려 고르카 주 청사가 있는 고르카 바자르에 도착했다. 바자르로 들어가는 길에서 가장 먼저 만난 이들은 집을 잃고 받아주는 친척이 있는 마을로 가는 지진 이재민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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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르카 주의 마을들은 대부분 해발 1000m 언저리의 낮은(!) 산악지역이지만, 진앙에 가까운 관계로 피해가 무척 컸던 지역이다. 5월 11일 아침까지도 412구의 시신이 추가로 발견되었으며, 지진 이후 실종된 32명의 생사가 불분명하다. 지진 3주 차에 들어서고 있으니 살아 있을 가능성도 낮고, 이미 부패할 만큼 부패해서 가족들이 알아볼 수 있을 지 없을 지도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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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생겼다.


조금 더 높은 곳에서 보면 마을 풍광들이 이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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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조금 더 접근하면 이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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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악지역이라 지진과 함께 찾아왔던 것은 바로 산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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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산사태가 마을 위에서 발생하면 이렇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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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International Medical Corps)


사람들은 저개발 국가라고, 사람들이 가난하다고, 모든 물가가 한국보다 쌀 것이라 생각하지만 어떤 것들은 한국보다 훨씬 비싸다. 대표적인 것이 시멘트. 2014년 4월 2일, Kathmandu Post는 시멘트 가격이 너무 오르고 있다는 기사에서 50kg 시멘트 한 포대의 공장 출고가가 648.78NRs로 올라 카트만두 지역의 소비자 가격은 840NRs가 될 것이라 보도했다. 사실 요즘 카트만두 시멘트의 소비자 가격은 거의 900NRs로 한화로 9000원이 넘는다. 한국 소비자 가격의 두 배가 넘는 셈.


시멘트 값이 비싼데 가난한 네팔의 농민들이 시멘트로 집을 지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시골에 가면 대부분 흙과 돌로 집을 만들고 소똥을 잘 개서 바닥을 마무리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집들은 구조적으로 진동에 취약하다. 그 결과가 이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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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트만두에선 성해 보이는 주택들이 많았지만, 이쪽으로 오니 성한 집이 없었다.


여하튼 경찰의 에스코트를 받아 계속 달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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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시를 살짝 넘겨 고르카 바자르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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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우리가 찾아야 했던 곳은 주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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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자마자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인도에서 들어온 식수 박스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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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청사 안은 복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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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호차량을 끌고 각 지역으로 들어간다고 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 사람들이 가는 지역에 얼마만큼의 구호물자가 배포되었는지 확인하는 관리들로 주청사 안은 복작복작했다. 일부 지역은 이미 수 차례에 걸쳐 물자가 배포되었다고, 주 정부가 다른 지역으로 보낼 테니 구호물자를 내려놓으라고 다투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사실, 이게 문제들 중 하나다.


네팔의 행정 시스템은 원래 느리다. 내가 혼인 신고하는 데만 다섯 달이 걸렸다면 이해하실까? 그러니 평소에 이렇게 느려터진 시스템을 잘 알고 있는, 현지에서의 경험이 많은 국제단체가 이 시스템을 믿고 구호식량을 배포할 리 없다. 국제적인 구호단체들은 UN과의 협조로 자신들이 가는 지역들을 체크하면서 움직였지만 대부분의 종교 단체와 개인들과 이런 협조가 될 리 만무하다. 그래서 초기부터 구호식량이 어느 지역에는 많이 들어가고 어느 지역에는 적게 들어가기 시작했다.


또 한 가지. 이 양반들이 예민할 수 밖에 없는 게 오랜 시간을 끌어왔던 새 헌법에 대한 기초적인 합의를 본 게 4월 초, 대략 9월 즈음에 이 새 헌법을 국민투표에 부치고 정식 공화국 정부를 구성할 선거에 들어갈 예정이었다. 각 정당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지역구 분할 하느라 머리 끄댕이 잡고 몇 달을 싸운 다음에. 


그런데 지진이 나서 사람들이 죽고 다쳤고, 도로가 끊기고 뭐 그래서 쌀이 없어 굶고 있는 유권자들에게 가장 먼저 달려간 이들은 자신들이 아닌 국제 구호단체인 거다. 거기다 어디에는 많이 들어가서 쌀이 시장으로 나오고, 어디는 쌀이 모자라서 어린 옥수수를 삶아먹고 있는 상태이니 지역구를 기반으로 하는 정치가들에게 악몽도 이런 악몽이 있을 수 없다.


거기다 지금 임시정부도 연정이다. '네팔 국민회의'와 '마르크스-레닌주의 공산당'의 연정. 민감한 정치적 사안이 생기면 각 부처의 장관들이 내각에서 그 문제를 논의할까, 아니면 정당의 입장을 먼저 정리한 다음에 내각에서 논의하고, 그걸 다시 정당에서 논의하고, 그 논의된 내용을 가지고 내각에서 입장 조율하는 핑퐁질을 할까?


구호물자에 관세를 때리겠다, 자기들이 잘 할 수 있으니 국제기구와 다른 나라들은 다들 나가라는 등의 이야기들은 사실 이런 배경에서 나온 거다. 물론 안 밖으로 욕 오지게 퍼먹고 철회했다. 그리고 나서 자신들에게 필요한 리스트를 5월 3일 공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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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트 전문

자세히 읽어보면 아직도 피해상황 집계가 안됐다는 걸 알 수 있다. 

계속 업데이트가 되고 있는 것도 아니고.


어쨌든 우리는 '마스 네팔'이라는 네팔 NGO는 물론 고르카 주정부와도 이미 이야기가 되었던 상태라 비교적 빨리 이동 승인을 받고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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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르카 주청사를 나와 1km도 지나지 않아 흙길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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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지나치던 마을 버스.


다른 팀에서 식량 배급하는 것도 곳곳에서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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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안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폐허가 된 집들도 많이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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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눈에 띄던 것은 무슬림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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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팔에서 무슬림 인구는 얼마 안 된다. 80%가 힌두교 10% 정도가 불교니까. 그리고 이 무슬림들이 여기 있다는 이야기는 사실 이곳이 살기 좋은 곳은 아니라는 뜻이다. 워낙 척박해서 힌두교도들이 자신들을 배척하지 않는 곳이 이곳이라는 의미라서.


그 무슬림 마을을 뒤로 하고 계속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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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허가 된 마을들, 아이들이 많이 있어서 그래도 생기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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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을 잃어버린 어른들의 상실감과 아무래도 대비될 수 밖에 없는 게 아이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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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르카 주청사에서 우리의 목적지였던 쭐릉 마을까지는 20km 밖에 안된다고 했다. 문제는 길이 이 모양이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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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20km를 장장 6시간 동안 달려야 했고, 도착하니까 바로 해가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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쭐릉 마을의 경도 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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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글 지도로는 대충 여기쯤 된다.


마을 주민들이 먹을 것을 준다고 오라고 했는데도 텐트를 치자 마자 피곤이 몰려들어 바로 잤다. 자는 와중에 여진이 한 번 있어서 인근에 산사태가 나는 소리를 들었고, 비가 들이쳐서 몇 번 깼다. 카트만두와 고르카 지역 모두 쌀값이 대거 올라서 쌀을 사러 치트원까지 갔던 스텝 한 명이 새벽 2시경에 도착했으니, 제대로 잔 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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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깨어서 보니 우리가 텐트를 쳤던 곳이 동네 멍멍이들 화장실이었다...


다음 날인 5월 7일 아침. 해가 뜨자마자 일어나 쭐릉 마을의 피해 상태를 살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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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들은 산을 개간해서 옥수수 밭으로 만들고 있는 화전민들, 강한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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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 다녀야 할 아이들이 집안 일과 농사를 돕는 게 일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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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그런지 벌써 재건하고 있는 집들이 곳곳에 눈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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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저씨, 복구에 빨리 나서셨네요? 안 힘드세요?”라고 물었더니 웃었다.


한 번 둘러보고 나서 우리를 도와준 이들의 플랜카드를 꺼내 영수증용 사진을 찍은 다음, 바로 쌀 배포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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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과 달의 양을 확인한 후, 이장 회의에서 가장 먼저 한 것은 어느 집에 얼마씩을 나눠야 하는가를 계산하는 것이다. 피해 정도와 가족의 숫자에 따라 가변적이다.


쌀을 배급한다는 소식을 듣고 계속 사람들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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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들은 쌀을 받아 집으로 돌아갔다. 쌀을 받았으니 아마 복구 속도는 조금 더 나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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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중 유달리 표정이 어두웠던 꼬마 아가씨가 한 명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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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끝의 꼬마 아가씨


동네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지진으로 부모님이 모두 다쳐 병원에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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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만 다행히 이 지역 병원은 철근과 벽돌로 지어진 건물이라 피해가 없었다.


하지만 병원비는 두고두고 빚으로 남아 이 집을 괴롭힐 것이라고... 이렇게 우리는 약 3.8톤의 쌀과 200kg의 달, 소금과 응급의약품을 전달했다. 재난을 입었음에도 우리가 왔다고 찌아(인도로 치면 짜이, 우유에 설탕 잔뜩 넣고 끓인 차)까지 줬던 마을 주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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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 받았다고 액을 쫓는 티카와 꽃다발까지 전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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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그렇게 전달하고 돌아가는데... 이름을 많이 듣던 한국의 교회에서도 구호물자들을 나눠주고 있는 것을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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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트럭이 너무 커서 비포장 도로를 얼마 달리지도 못하고 바로 나눠주고 있어서 좀 안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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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ve to Love International이라는 단체의 스님들은 그래서 SUV 여러 대로 실어 나른다. 대부분의 지역들이 우리가 들어갔던 쭐릉 마을처럼 길이 엉망이라 트랙터나 SUV가 아니면 거의 못 들어간다. 모쪼록 큰 목사님들의 큰 은혜도 잘 배달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흙길을 오고 가는데 10시간 이상 달려서 엄청나게 지저분해졌기 때문에 카트만두 타멜에 돌아오자 마자 가장 먼저 했던 것은 샤워였다. 먼저 씻고 나서 집으로 돌아왔는데... 타멜, 카트만두 여행자 거리에선 밤마다 이런 촛불들이 밝혀지고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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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진 이후의 공공활동은 대략 여기서 접어야 할 것 같다. 원래 여기서 하고 있던 일들 수습에 나서야 하니까.






국제부 Samuel Seong

트위터: @ravenclaw69


편집: 딴지일보 챙타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