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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하는 박준성 선생님이 쓰신 <슬라이드로 보는 노동운동사>(전국금속노동조합 간)라는 책이 있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일단 얇다!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다는 뜻. 일독을 권한다. 이 책에 등장하는 사건과 인물들이 꾸려 가는 역사의 실타래 속에서, 우리는 몰랐던 사실은 아프게 만나고, 뻔히 알던 일이라 해도 마치 딴 사람처럼 치장하고 나온 동료를 대하듯 얼떨떨한 새로움에 젖게 된다. 그리고 달이 가고 해가 가고 세기가 가도 '그날이 다시 오면' 엷어질지언정 지워지지 않는 느낌의 지배를 받게 된다. 아래 사진으로 역사에 남은 사건과 사람들처럼 말이다.


1978년 2월 21일. 그러니까 34년 전 새벽, 동일방직 똥물 사건이 일어난다. 박준성 선생님의 강의를 빌려 온다.



1972년 전국 섬유노조 동일방직 지부 조합원은 1천383명이었다. 그 가운데 1천204명이 여성이었다. 그런데도 조합 간부는 회사 말 잘 듣는 기술직 남자들이 독차지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부녀부장이던 주길자가 한국에서 처음으로 민주적인 여성 지부장으로 선출되었다. 사건이었다. 노동조합은 자주적이고 민주적으로 바뀌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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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KBS>


여자들에 비해 남자의 못남이 극적으로 대비되는 역사라면 온 인류사를 통틀어 우리나라가 첫째 아니면 둘째, 때려죽여도 셋째 이하로는 내려가지 않을 것이다. 제 못나서 오랑캐에게 빼앗긴 주제에 몸 더럽힌 여자와는 살 수 없다고 으르대던 맹추들의 아이러니가 그랬고, 요즘 툭하면 등장하는 XX녀에 대한 광적인 돌팔매질이 그렇다.


동일방직의 남성 노동자들 역시 단군의 자손인 데다가 그 가운데 특출하게 찌질한 존재였던 것 같다. '뭣도 안 달린' 여자들한테 밀린 것이 싸나이 명예에 똥칠이라도 했다고 봤던지, 그들은 회사와 아삼육의 콤비를 이루며 눈에 불을 켜고 노조 파괴 공작에 나섰다. 마침내 1978년 2월 21일. 노조 대의원 선거가 있던 날의 새벽이 밝았다.


투표를 하러 사무실에 모여들던 여성 노동자들 앞에 버티고 선 것은 회사 측에 매수된 남자조합원 행동대원들이었다. 그들은 가죽 장갑을 끼고 뭔가를 움켜쥐고 있었다. 비위도 좋지, 그건 똥물이었다. 이 똥물에 튀겨 죽일 찌질한 남자 새끼들은 여성 조합원들에게 달려들어 똥물을 뿌릴 뿐만 아니라 옷을 들추어 그 속에 집어넣고 강제로 입을 벌리고 쏟아붓기도 했다. 부모를 죽인 원수도 아니고, 재산을 통째로 들어먹은 사기꾼도 아닌 직장 동료들에게 그렇게 한 것이다. 그때 가죽 장갑 끼고 똥 손에 쥐고 있었던 인간들의 오늘에 저주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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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동일방직 해고노동자 복직추진위원회


인간이 인간에게 가할 수 있는 가장 큰 모욕이 벌어지는 동안, 현장에 있었던 경찰 둘은 구경만 하고 있었다. 하기야 구경도 그런 구경이 있었겠는가. "가난하게 살았지만 똥을 먹고는 살 수 없다."는 울부짖음은 아랑곳없이 유신 정권은 동일방직 노동조합을 박살내겠다는 심사를 그렇게 여지없이 발휘하고 있었다.


사진 속 여공의 표정을 들어다본다. 여덟 팔자로 다물린 입은 금새라도 흐느낌으로 미어터질 것 같고, 똑바로 앞을 응시하지 않는 눈은 부끄러움과 분노가 범벅이 된 빛을 쏘아 낸다. 부르쥔 주먹이 덜덜 떨리고 있음은 누가 봐도 짐작할 수 있는 일, 저들의 푸른 작업복에 뭉터기로 박힌 저 똥물들은 1978년 대한민국 역사에 들이부어 진 오물로서 오늘도 싯누렇게 빛난다. 입에 똥물을 머금고 양치질을 하는 듯한 욕지기로 양심을 건드린다.


이 사진을 찍은 사람은 동일방직 근처 사진관 주인 이기복 씨였다. 이 사진관은 원래 동일방직 여성 노동자들의 단골로서 '영원한 추억과 우정'을 남기기 위해 즐겨 찾던 곳이었다. 상상도 못 할 일이 동료 남성 노동자의 손에 자행되고, 경찰은 그 꼬라지를 빙글빙글 웃으며 보고만 있고, 노동자들의 조직이라는 노총 간부는 되레 똥물 튀기기를 독려하고 있는 판에, 입안에 똥이 처넣어져 악도 쓰지 못하던 여성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모습을 증거로 남기고자 했을 때, 생각나는 사람은 그 사진관의 주인아저씨 뿐이었다. 울면서 자신을 찾는 여성 노동자들의 부름에 이기복 씨가 달려왔고, 셔터를 눌렀다.


하지만 이미 '지역 차원이 아닌 중앙 차원에서' 동일방직 노조 박살을 기획, 연출하고 있던 중앙정보부와 그 외 끄나풀들이 똥물 냄새에 둔감할 리 없어서 이기복 씨의 사진관은 살기등등한 기관원들의 방문을 받는다. 하지만 이기복 씨는 끝까지 필름이 없으며 "노조원들이 가져갔다."고 잡아떼어 여성 노동자들의 피눈물로 현상한 사진을 지켜 낸다.



10여 명의 여공들이 똥물을 뒤집어쓰고 있었고 노조 사무실과 사무장실 천장과 벽에 온통 똥물이 묻어 있었습니다. 또 몇몇의 여공들은 바닥에 누워 울고 있었습니다.



이기복 사장님의 회고다. 얼마나 참담한 광경이었을까. 정치에는 관심이 없고 데모 한 번 나가지 않는 처지의 누구라도 발을 구르며 분노했을 것이다. 평범한 사람 그 누구라도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정작 자신에게 칼끝이 향했을 때 그 분노를 숨김없이 드러내기란, 작은 행동이나마 발 내딛어 그 분노를 100분의 1이라도 표출해 보기란 힘들다는 걸 평범한 사람들이며 누구나 다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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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저 사진을 다시 보매 동일방직 노동자뿐만 아니라 이기복 씨가 궁금해졌다. 78년이라면 긴급조치가 시퍼렇기가 눈 흰자위처럼 허연빛으로 세상을 쓸어볼 때였다. 평범한 동네 사진관 아저씨는 과연 어떤 마음으로 이 사진을 지켜낸 것일까. 날아가는 새를 떨어뜨리는 정도가 아니라 날으는 기러기 떼 꼬치구이를 하래도 할 수 있었을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들이닥쳐서 사진 있는 거 다 아니까 내놓으라고 책상을 두들길 때 그는 무슨 용기로 "사진 없습니다. 다 가져갔습니다." 하고 시치미를 뗄 수 있었을까. 행여나 숨겨뒀던 필름이 발각이라도 됐다면 몇 년쯤은 우습게 감옥에서 썩을지 모르는 상황인데 말이다.


이기복 씨도 덜덜 떨었을 것이다. 그냥 의리고 뭐고 확 다 집어치우고 슬며시 사진을 내주며 "나야 뭐 돈 주고 찍으래서 찍은 거뿐입니다."하고 겸연쩍게 말하며 머리를 긁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나아가 "쟤들은 진짜 빨갱이들이었다니." 하면서 스스로를 위무하고 망각의 저편으로 양심의 고리를 넘겨 버리고 싶은 유혹에 휩싸였을 가능성도 크다. 실지로 그런 사람들 많았다. 하지만 '여공'들의 '추억'을 만들어 주고 김치와 치즈를 연발하며 웃음을 끌어내던 평범한 사진관 주인은 그 공포와 유혹을 넘어섰고 그는 우리 역사에 보기 드문 기록을 후세와 후손들에게 전해 주게 된다. 때론 백 권의 책보다 한 장의 사진이 더 설득력이 큰 법. 그가 없었다면 동일방직 똥물 사건은 건조한 문자와 억울한 육성으로만 남았을지도 모르지 않은가.


반드시 기깔나는 업적을 남기고 불세출의 위업을 이룩해야 위대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본때 나는 '큰 자리'에 오르는 '인물'들이어야만 역사를 만드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기복 씨 같이 평범한 사람, 장삼이사에 필부필녀의 한 사람뿐일지라도, 술 먹고 어울리는 친구들일지라도 우리 앞에 닥쳐든 역사에 무심하지 않으면, 그 공포에 저항하지는 못할망정 항복하지는 않으면, 유혹에 빠질망정 정신을 잃지는 않으면, 저 사진처럼 모래처럼 작지만 다이아몬드처럼 빛나는 역사의 알갱이들을 창조할 수 있을 것이다.


나찌의 마수에서 유대인들을 구해 낸 오스카 쉰들러는 사실 휴머니즘과는 거리가 매우 멀고, 비열한 돈거래에는 도가 텄던 비정하기까지 한 사업가였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위태로움을 무릅써 가며 유태인들을 구했다. 그의 손에 생명을 구했던 한 유태인이 그에게 그 까닭을 물은 적이 있었다. 그러자 그는 아무 거리낌 없이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그건 당연하지. 그 사람들은 내가 아는 사람들이었거든. 적어도 내가 아는 사람들한테는 인간적으로 대해 줘야 하는 거라고.




그 대답은 언뜻 싱거워 보였지만 그렇지 않았다. 그건 쉰들러가 선택한 마지막 양심의 보루였던 거다. 나찌에 저항하고 히틀러 개새끼를 부르짖는 것은 언감생심이고 나는 그 와중에 돈도 벌어야겠지만, 그렇다고 내가 아는 사람들만큼은 그렇게 참혹하게 죽어가도록 놔둘 수는 없지 않겠느냐는 것이 그의 성곽이었고 그는 그 성곽을 지켜낸 것이다.


오히려 평범한 사람이 일궈낸, 지성적이지도 않고 특출나게 용감하지도 않은 한 무뚝뚝한 독일 남자가 빚어낸 인간의 위대함이었던 셈이다. 1978년 2월 21일 이기복 씨가 그랬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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