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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대한민국은 글자 그대로 동토의 공화국이었다. 유신 헌법에 반대만 해도 사형까지 가능한, 법도 아니고 말도 안 되는 긴급조치가 대한민국을 짓누르고 있었다. 어느 정도였는가를 내 경험을 통해 이야기해보자면, 1976년 국민학교에 입학하고 코 찔찔 흘리며 운동장에서 다망구를 하던 무렵, 담임 선생님으로부터 이런 말을 들어야 했다. 


"여러분. 경찰 아저씨들은 경찰복만 입고 있는 게 아니에요. 부모님이나 어른들한테 들은 말을 아무데서나 하면 안돼요. 잘못하면 사복 입은 경찰 아저씨들이 잡아가요."


믿기지 않는다면 담임 선생님 성함까지 끄집어내 두겠다. 강명희 선생님이었고, 나는 1학년 3반이었다. 그리고 '사복형사'라는 말...은 그 언저리 때 나의 한국어 보캐불러리에 등재되었다.



그렇게 4년이 갔다. 79년이 왔다. 국민학교 4학년인 나야 알 길이 없었지만 서울은 꽤 시끄러웠다. 대통령이 대학 하나에 휴교령을 내리면서 긴급조치를 발동하는 우스꽝스러운 일도 있었고, 여타 대학교의 학생들은 끈질기게 유신의 폭압에 저항하고 있었다. 그런데 한국 제 2의 도시의 국립 부산대학교는 유독 조용했다. 어떤 조직 사건에 얽혀 부산대학교 학생운동권이 붕괴 수준의 타격을 입은 것이 가장 큰 원인이었지만, '유신대학교'라는 비아냥을 들을 정도로 조용했다. 오죽하면 모 여대에서 소포로 가위를 보내 "잘라 버려라."고 했다는 유언비어까지 생겨났을까.



하지만 부산대학교 학생들도 끊임없이 뭔가를 준비하고 있었다. 거기에 조응하기라도 하듯 부산이 지역구였던 김영삼 당시 신민당 총재가 뉴욕 타임즈와의 회견에서 미국은 독재 정권을 지원하면 안된다는 식의 인터뷰를 빌미로 국회에서 제명되는 등 부산의 민심을 자극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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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시위 날짜가 잡혔다. 10월 15일이었다. "15일 10시 도서관 앞으로!" 라는 유인물이 도처에 뿌려졌지만 시위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건 학생들의 호응이 적은 탓이 아니라 준비의 미비 탓이었다. 오전 10시 직전에 "10시에 집결" 하라는 유인물을 뿌렸으니 될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학생들은 웅성거렸다. "할라모 학실하게 하지. 언넘이 이따구로 했노."



위는 다시 준비됐다. 그 주역은 경제학과 2학년 정광민이었다. 전날 밤새 등사기로 밀어낸 선언문을 몇몇 학우들에게 나눠 준 후 정광민은 자신의 동기들과 선후배들이 앉아 있던 강의실 문을 박차고 들어간다.


"여러분 때가 왔습니다. 유신 독재에 맞서 우리 모두 피흘려 투쟁합시다."



강의실에 앉아 있던 40여 명의 학생들은 그야말로 용수철처럼 튀어 올랐다. 차마 내가 입밖에 꺼내지는 못해도 누가 대신 해 주기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던 말을 들은 것이다. "나가자."


인근의 학생들이 끼어들고 도서관에서 준비 중이던 또 다른 시위 팀이 가세하면서 삽시간에 시위대는 수백 명으로 불어났다. 그리고 지난 몇 년 간 감히 입 밖에도 냈다가는 사형 선고도 감수해야 했던 두려운 구호가 캠퍼스를 울렸다. "유신독재 타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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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위가 일어나면 주동자부터 잡는 것을 매뉴얼로 익혔던 사복 형사들이 정광민을 덮쳤다. 그러나 잠시후 그들은 학생들에게 얻어터지고 언덕 아래로 굴러 떨어지고 만다. '유신대학교'에서 유신의 종말을 알리는 봉화가 오르는 순간이었다.



수천 명으로 늘어난 시위대였지만 구호 외에는 하나로 그 감정을 모으고 의지를 다질 노래가 부족했다. 애국가도 한 두 번이고 '선구자'는 너무 장중했다. 오죽 부를 노래가 없었으면 "일출봉에 해 뜨거든 날 불러주오"까지 나왔다. 어둠이 영원할 것 같은 시절, 쨍하고 떠오를 해가 그리웠던 마음은 이해하겠지만 데모할 때 부를 노래는 도저히 아니었다.



그때 술 떨어진 술꾼처럼 뭔가 아쉬움에 허덕이던 부산대학교 학생들의 마음을 묶어세운 노래가 캠퍼스에 울려 퍼졌다. 부산대학교 교가였다. ".....진리와 이상으로 불타는 젊은 학도 외치노니 학문의 자유 이곳이 우리들의 부산대학교, 부산대학교" 학생들은 이 노래를 부르며 눈물을 글썽였다. 이윽고 사복경찰이 판을 치던 캠퍼스는 분노한 젊음들에 의해 장악됐다.



수천 명의 학생들이 필사적으로 저지하는 경찰의 벽을 무너뜨리고 시내로 진출했다. 곳곳에서 격렬한 충돌이 빚어지는 가운데 학생들은 시청 앞으로 집결하기로 했다. 학생들을 가득 가득 태운 버스가 시청 앞으로 내닫자 경찰은 그 중간 지점인 서면을 차단하고 버스에 탄 대학생들을 무조건 끌어내렸다. 그러나 경찰은 그 짓을 하는 것이 얼마나 미련한 것이었던가를 깨달았다. 간선도로가 하나 뿐인 부산에서 서면을 틀어막는 것은 전 도시를 마비시키는 일이었던 것이다. 속수무책 대학생들의 버스는 시민들의 환호 속에 남포동으로 달렸다. 어떤 버스 기사는 경찰차가 쫓아오자 맹렬히 악셀레이타를 밟아 경찰을 따돌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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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포동에 집결한 학생들은 경찰에 맞서 데모를 벌이면서 또 한 번 자신들의 교가를 부르면서 뭉친다. "젊은 학도 외치노니 학문의 자유 이곳이 우리들의 부산대학교, 부산대학교" 남포동 번화가에는 부산대학교 출신의 회사원들이 부지기수였다. 그들은 가물가물한 교가를 따라 부르며 후배들을 고무한다. 남포동에서 가까운 동아대학교 학생들도 합세했고 마침내 남포동은 분노와 희망, 열기와 각오를 장작으로 한 불바다가 된다.



유신 정권의 종말의 시작이었다. "부산과 마산이 일어나면 정권이 바뀐다."는 신화를 완성한 (4.19를 부른 3.15 마산 의거에 이어서) 사건이었고, 87년 6월 항쟁의 물길을 바꿔 놓았던 부산 대시위의 전초였다. 현지를 시찰했던 유신 정권의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증언은 그 성격을 정확히 꿰뚫고 있다.


"160명을 연행했는데 16명이 학생이고 나머지는 다 일반 시민입니다. 그리고 데모 양상을 보니까 데모하는 사람들도 하는 사람들이지만 그들에게 주먹밥을 주고 또 사이다나 콜라를 갖다 주고 경찰에 밀리면 자기 집에 숨겨 주고 하는 것이 데모하는 사람과 시민들이 완전히 의기투합한 사태입니다."


1979년 10월 16일 부산대학교의 불씨는 그렇게 불의 홍수가 되어 도시를 덮쳤고 열흘 뒤에는 독재자의 목숨까지도 삼킨다. 역사는 그를 부마항쟁이라 부른다. 부산은 롯데 자이언츠의 도시가 아니라 대한민국을 여러 번 뒤바꾼 도시였다. 비록 오늘날에는 그 사실이 잊혀지거나 아예 분실되었거나 부산 스스로가 그를 저버렸다고 하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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