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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2040년 10월 26일. 나는 서울 모 대학원 역사학 박사과정에 재학중이며, 지도교수의 배려로 몇 군데 학교에 시간강사로 출강 중이다. 오늘은 수업이 없는 날이지만 지도교수 대신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열리는 <국정국사교과서 발간회의>에 참석해야 한다. 본의 아니게 마음이 바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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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구미시를 박정희시로 바꾸자'는 공약을 내놓았던

호 (전 구미시장)


원래 서울에 있던 국사편찬위원회는 얼마 전 박정희시, 그러니까 옛날 구미시로 옮겼다. 지역균형발전이라는 명분과 함께 역사학계가 앞장서서 박정희 정신을 계승 발전시켜야 한다는 취지에서였다. 때문에 이런 회의가 열리면 다른 지역에 있는 교수들은 KTX를 타고 움직여야 했고, 귀찮아 하는 학자들은 슬금슬금 회의를 피하기 시작했다. 하긴, 25년 전 소위 ‘역사교과서 국정화 파동’ 이후 정부에 비판적인 학자들은 교과서 제작을 아예 거부하고 있는 상태다. 그 결과 특정 지역을 중심으로 한 어용학자들 몇몇이 교과서 제작을 주도했고, 이젠 냄비받침으로나 어울리는 책이 되고 말았다.


나의 지도교수도 교과서 집필을 거부했으나 나의 어려운 형편을 감안해 푼돈이라도 받아쓰라는 심정으로 나를 여기에 추천했다. 다행히 집필위원이나 검토위원 명단은 공개하지 않는다니 학계에 쪽팔릴 일도 없는 셈이다. 혹시 참고서나 문제집이라도 쓰게 된다면 대박이고.


아내가 무거운 몸을 이끌고 밥을 차려준다. 대기업 정규직이었던 그녀는 임신 및 출산 과정에서 근무성적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노동법에 따른 일반해고를 당했다. 다른 직장을 알아보고 있으나 경력단절여성인 그녀에겐 비정규직 말고는 대안이 없다. 게다가 졸지에 전업주부가 된 그녀라, 보육시설에 아이를 맡길 수도 없어 꼼짝없이 구직활동을 접어야 했다.


그나마 교육과정이 개편되어 아이가 만 5세가 되는 내후년에는 초등학교에 들어갈 테니 아내의 부담도 조금은 줄어들지 모른다. 아니지, 그때부턴 더더욱 치열한 경쟁에 뛰어들어야 하는구나. 만 15세가 되는 해에 좋은 대학에 들어가지 못하면 정규직이 되는 건 현실적으로 기대하기 어렵다. 그런데 좋은 대학에 들어가려면 만 13세에 외국어고나 자율형 사립고에 들어가야 한다. 예전 같으면 막 중학교 입학할 나이지만, 지금은 만 13세에 이미 많은 것들이 결정되어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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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다.


고교나 대학에 입학한 후에도 막대한 등록금 부담을 감당하는 건 오로지 학생과 학부모의 몫이다. 계속된 대학 구조조정의 여파로 등록금은 천정부지로 올라갔지만, 그에 대한 지원은 미약하다. 의무교육 이후의 과정은 개인의 선택에 따른 만큼 마땅히 수익자가 부담해야 한다는 것이다. 도리어 조기 사회 진출을 통해 취업 등에 있어 고졸자들을 우대하는 정책을 적극 펼쳐 대학 진학률은 상당히 낮아진 상황이다.


과거 14~16년 교육을 받던 사람들이 8년 만에 학교를 마치고, 교과과정은 기초학문보다는 실용기술 중심으로 간략해졌다. 이는 학교를 중심으로 먹고 살던 인문학과 자연과학 전공자들에겐 큰 타격이 되었다. 다행히 역사, 국민윤리, 외국어 같은 과목들은 국가에서 정책적으로 우대해 주는 편이지만, 조금이라도 제도권에서 벗어난 교육을 할 경우 그 즉시 밥줄이 끊겼다. 이에 반발하던 전교조는 법원의 판결로 해산되며 불법단체가 되고 말았다.


교육 분야의 투자가 줄어든 대신 활성화된 것은 국방 쪽이었다. 한때 1년 9개월까지 줄었던 군복무 기간은 저출산으로 인한 병력감소 우려 속에 다시 2년으로 환원되었고, 예비군 훈련 또한 심심하면 터지는 북한의 무력도발 때마다 슬금슬금 늘어났다. 북한은 물론 일본과의 긴장 관계가 고조되며, 독도를 지키기 위한 한국형 전투기, 잠수함 등의 개발사업에 천문학적인 예산이 들었다. 늘어난 국방예산 덕분에 국방과학연구소나 전사(戰史)연구소와 같은 곳도 번창하였으니 순수학문 전공자도 그나마 숨통이 트였다고나 할까.


아내와 아이를 뒤로 한 채 박정희시로 떠나는 수서발 KTX에 몸을 실었다. 민영화된 터라 KTX의 요금은 상당히 비싸졌다. 그래서 평상시엔 탈 수 없었지만 출장비 처리를 할 수 있는 오늘만큼은 큰 고민 없이 탈 수 있다. 옛날 같았으면 철도청 공무원이었을 승무원들은 대다수가 비정규직 내지 파견근로자로 탈바꿈해 있었다. 덕분에 KTX를 인수한 외국계 자본은 큰돈을 벌었다는 소문이다.


차내에서 스마트폰을 열고 뉴스를 훑어보았다. 두 달 뒤에 대통령을 선출할 ‘통일준비위원회를 소집한다’는 공고가 떴다는 소식이다. 2022년에 통일준비위원회에서 외교, 국방, 통일을 전담할 6년 임기의 대통령을 선출하는 것으로 헌법이 개정됐다. 직선제로 인한 국력의 낭비와 사회적 갈등이 심하다는 이유에서였다. 그 결과 2022년부터 치러진 3번의 대통령 선거에선 모두 박근혜가 당선되어 직선제로 뽑혔던 5년간의 임기에 더해 18년을 추가로 집권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국민의 반발이 심하지 않았던 건 이원집정제 개헌을 통해 내치에 관한 실권이 총리에게 넘어간 데다 종편과 보수언론의 일방적인 홍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힘입은 노년층의 적극적인 지지는 물론, 국정교과서로 역사를 배운 학생들이 유권자가 되며 그녀에 대한 지지는 더욱 공고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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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엔 통일을 준비하는 위원회에 불과했지만, 2040년에 이르러선 다.


올해 88세인 대통령은 여전히 한해 서너 차례씩 해외순방에 나설 정도로 건강하지만, 고령으로 인해 출마를 포기할지 모른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후계자로 여러 사람이 물망에 올랐지만 대통령이 염두에 두고 있는 건 자신의 조카라고 했다. 다만 아직 피선거권 연령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1번 더 연임하면서 자연스럽게 물려줄 거라는 이야기가 있다. 아마 오늘 개최될 박정희 서거 61주기 추도식에서 입장을 밝히지 않겠느냐는 관측 기사가 올라와 있었다.


서울을 떠난 지 2시간 만에 국사편찬위원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오늘 회의의 주제는 ‘1945년 이후 최근 100여 년의 근현대사 서술’에 관한 부분이었다. 회의 자료로 배포된 국사교과서 초안을 가볍게 읽어보았다.


1945년 우리나라는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배로부터 광복을 맞이하였다. 태평양전쟁에서 미국을 비롯한 연합국이 일본에 승리한 덕분이었다. 그러나 미국을 움직인 이승만의 외교력과 비밀 독립군이었던 박정희의 맹활약 또한 큰 역할을 했다.


1948년 좌파 세력의 방해를 뚫고 UN이 승인한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인 대한민국이 건국되었다. 이를 주도한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국부로 존경받고 있다.


1950년 북한 공산집단이 기습적인 남침을 감행했다. 그들은 민간인 학살, 납치, 포로학대 등 숱한 전쟁범죄로 전 세계의 지탄을 받았다. 대한민국은 자유우방 16개국과 함께 UN군을 조직하여 공산군에 맞서 자유를 지켜내는데 성공했다. 이승만의 결단으로 미국이 작전통제권을 행사할 수 있었던 것이 효율적인 전쟁수행을 가능케 했다.


1960년 선거 절차상의 사소한 문제를 빌미로 소요사태가 발생하였다. 이는 일부 좌익세력의 선동으로 크게 확대되었고, 이승만은 더 이상의 혼란을 막기 위해 하야했다. 국부의 안타깝지만 아름다운 퇴장이었다.


1961년 새로 집권한 민주당 정부의 부패와 무능은 심각한 사회혼란을 야기했고, 국민들은 경제를 일으켜 세울 강력한 리더십을 희망했다. 이러한 열망 속에 박정희를 지도자로 한 군부가 5.16 혁명을 일으켜 나라를 바로 세웠다. 박정희는 국민들의 광범위한 지지를 바탕으로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높은 경제성장을 이끌었다.


1972년 박정희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정치인들은 배신과 정쟁으로 점철된 구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선진 통일 조국을 만들기 위해 국력의 효율화가 절실하다’는 국민들의 열화와 같은 지지에 힘입어 10월 유신이 선포되었다. 유신은 투표를 통해 90% 넘는 국민의 지지를 받았으며, 이를 통해 수출 100억 달러, 1인당 국민소득 1천 달러 등 획기적인 성과를 달성할 수 있었다.


1979년 권력욕에 찌든 김재규의 패륜적인 배신행위로 인해 박정희가 서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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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광주를 비롯한 일부 지역에서 북한의 지령을 받은 좌익 세력들이 준동하여 사회가 혼란하였으나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 세력이 등장하여 수습할 수 있었다.


1987년 헌법을 부정하는 세력들의 불법 폭력시위가 빈발하여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전두환, 노태우를 비롯한 집권세력은 평화적 정권교체라는 대의를 위해 6.29 선언을 발표하여 국민통합과 사회적 대타협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그 결과 노태우는 국민들의 압도적인 지지로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었다.


1997년 도덕적 해이에 빠진 국민들의 과소비와 파업, 사사건건 발목을 잡는 야당의 비협조로 인해 IMF 경제위기가 발생하였다. 끝내 좌파 세력이 집권하며 사회는 대혼란에 빠졌다.


2007년 좌파 정권 10년으로 민생은 도탄에 빠졌고 국민들은 정권교체를 열망하였다. 이는 박근혜의 아름다운 승복을 통해 구체화될 수 있었다.


2012년 종북 세력의 선전 선동으로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해달라는 각계각층의 성원을 바탕으로 박근혜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2014년 박근혜 정부는 세월호 침몰사고 등을 비롯한 여러 위기에 맞서, 혼란을 부추긴 통합진보당을 해산하고 경제 살리기를 위해 노력하였다.


2015년 박근혜 정부는 메르스 사태와 북한의 포격도발 등 여러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하고 올바른 역사 교과서를 통하여 국민통합에 앞장섰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분명 역사학자 상당수의 견해는 아니었다. 그러나 국정교과서가 발행된 지 20년이 넘어가면서, 이를 통해 교육받은 국민 대다수가 이런 사관을 정설로 믿게 되었다. 학부 1, 2학년 교양 수업에 들어가 보면 가관도 아니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배워온 교과서 내용에, 종편과 일베를 통해 세뇌되다시피 한 학생들의 왜곡된 시각을 한두 학기 학부 수업으로 바로잡을 수는 없었다. 심지어 나쁜 학점을 받은 학생들은 중‧고등학교 교과서를 들고 와 항의하기 일쑤였다. 그럴 때마다 벽에 대고 이야기하는 갑갑함을 느꼈다.


“자, 특별히 이의 없으시죠? 별 말씀들이 없으시면 이만 마치고 식사들 하시죠.”


위원장인 김 교수가 서둘러 회의를 마무리 짓는다. 조만간 교육부 총리로 영전하거나 국회의원 공천을 받을 거라는 소문이 파다한 이였다. 그냥 넘어가려다 학문적 양심이 목에 걸려 한 마디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기, 다른 건 뭐 해석의 영역이니 그렇다 치고요. 박정희가 ‘비밀 독립군’이었다는 건 좀 아니지 않습니까? 해방 당시 일본군 중위였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이 교수, 그게 뭔 말이오? 그럼 박정희 각하가 친일이라도 했다는 게요?”


회의장이 웅성거렸다.


“냉정하게 이야기해서 일본군에 강제로 끌려간 게 아니라 혈서까지 쓰고 자원입대한 것은 친일이라고 봐야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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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임마? 네까짓 게 뭘 안다고 우리 박정희 각하를 비난하고 지X이야! 우리 각하가 안 계셨으면 대한민국은 없어.”


어디서 많이 보던 얼굴이다. 역사학자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누구더라? 아, 일베 운영진 중 한 사람이구나. 근데 저 자가 왜 여기 와있는 거지?


“당시엔 우리 군대가 없었으니 군인이 되려면 일본군에라도 입대해야 하지 않겠소. 그럼 당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전부 친일파란 말이오?”


점잖게 말하는 사람 앞쪽에 ‘어버이연합 상임고문’이란 명패가 놓여있다. 학자들 대신 이런 사람들이 역사교과서를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 각하는 완전무결한 반인반신이시다. 너 따위 듣보잡 학자 나부랭이가 함부로 입에 올릴 분이 아니야!”


‘박정희 기념사업회’ 기획실장이었다.


“자자, 진정들 하시고. 이 교수. 선배 학자로서 충고하는데 확실하게 검증되지 않은 이야기로 혹세무민하는 것은 국민통합을 위한 올바른 역사교과서의 취지에 반하는 것이오. 아무리 학자라 해도 종북세력의 주장에 동조하는 건 허용되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겠지?”


그랬다. 지난 4반세기(25년) 동안 정부의 주장에 반대하던 많은 학자와 네티즌들이 국가보안법 또는 허위사실유포에 의한 명예훼손 등으로 처벌받아 왔다. 검경과 사법부는 국민통합 저해사범들에 대해 무관용 원칙을 적용해 왔고, 법이 두려운 사람들은 스스로의 말과 글을 조심하기 시작했다.


회의를 마치고 우울해진 나는 식사도 마다하고 서울로 돌아왔다. 가슴이 답답해져 병원에 가봐야 할 것 같았다. 의료민영화로 인해 건강보험 당연지정제가 폐지되어, 민간보험에 들지 않고는 대부분 병원에 갈 수 없었다. 원격 진료를 받아볼까도 생각했으나 막대한 진료비를 감당할 수 없었다. 한참을 기다린 끝에 가까스로 간단한 약처방을 받고 거리로 나섰다.


대학로, 지난날 지성과 예술이 살아 숨 쉬던 이 곳은 오늘날 소비와 유흥의 공간으로 전락한지 오래였다. 이곳 어딘가에 벙커원이라는 곳이 있었던 것을 기억한다. 한때는 반정부 인터넷 매체로 명성을 떨치던 <딴지일보>의 편집부가 있었지만, <딴지일보>가 불법 유해 사이트로 지정되어 수뇌부가 검거된 지금은 술집으로 바뀐 지 오래였다. 일부 필진이 <딴지일보> 서버를 외국으로 옮겨 운영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리기도 했으나, 국내에선 접속이 차단되어 warning.or.kr로 연결될 뿐 확인할 길이 없었다.


벙커원 문을 열자 바텐더로 전업한 죽돌이가 나를 맞이한다. 죽돌이는 찬장에서 시바스리갈 한 병을 꺼내 잔에 따라주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 그 날이구만.”


진한 알콜이 몸에 들어가자 화끈한 열기가 솟아오르며 세상에 두려울 게 없었다. 61년 전, 김재규도 이런 기분이었을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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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


나도 모르게 누군가를 겨냥한, 그러나 주어는 없는 말이 튀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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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자”


소심한 죽돌이가 난감한 표정으로 내 입을 막으려 든다. 멀지 않은 곳에 파출소가 있었던 것 같다. 뭐 어때. 내친 김에 무대에 올라 마이크를 들고 마음속에 묻어둔 현대사 강의를 시작하기로 했다.


“대한민국은 ‘남북 분단’과 ‘친일파 청산’이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민족정기를 회복하지 못했다는 태생적인 한계를 안고 출범했습니다. 이는 이승만의 장기집권으로 이어졌으나 위대한 국민들은 4.19 혁명으로 독재를 극복하는 성숙한 민주의식을 보여주었습니다. 뒤이어 5.16 쿠데타가 일어났고, 군사정권이 장기화되며 10월 유신과 12.12, 5.17등 좋지 않은 선례를 남겼으나 6월 항쟁에서 드러난 시민의 힘으로 민주화를 성취할 수 있었습니다. 비록 지금의 시간이 역사 속에선 시련으로 기록될지 모르겠으나, 지난날 독재를 이겨낸 자랑스러운 기억을 잊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반드시 민주주의를 되찾을 수 있을 거라 확신합니다.”


한산한 벙커에는 죽돌이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나의 역사 강의를 들어주는 사람도 죽돌이 뿐이었다. 멀리 켜놓은 TV에서 박정희 서거 61주기 추모식에 대한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박정희의 과업을 이어가는 일은 자신의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멈추지 않을 것이며, 더 나아가서는 그 이후에도 대대손손 계속될 거라는 내용이었다. 취기가 올라서인지 머릿속에서 김재규와 발터PPK 권총의 모습이 아른거리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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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 딴지일보 챙타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