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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대들이라도 축구를 잘 아는 사람들은 1990년 월드컵 대표팀 감독이며 축구협회 기술위원장으로서 그 이름이 숱하게 지상에 오르내린 이회택의 이름 석 자를 알고 있겠지만, 내 나이(70년생) 이상의 축구팬에게 이회택이란 차범근에 그렇게 뒤지지 않는 이름이다. 그는 부동의 아시아 최고의 스트라이커였고, 축구장에 입장한 관중들이 그가 출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 이회택 내보내라고 성화를 부리거나 환불 소동을 빚는 일도 드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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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범근(좌)과 이회택(우)


그가 다른 길을 택했더라면, 즉 공부로 한몫을 봐서 고시에 도전하거나 당시 출세 코스였던 육군사관학교를 가거나 했더라면 그의 인생은 그렇게 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의용군으로 입대했다가 북한을 택한 월북자의 아들이었으니까. 하지만 축구에는 연좌제가 적용될 여지가 없었던지 그는 한국의 고도 경제 성장기이자 아시아의 축구 강자로 떠오르던 60년대 말과 70년대 한국 최고의 스타 플레이어로 활약했다.


67년 대학에 입학하여 훈련 중이던 그의 앞에 검은 지프가 들이닥친다. 감독 이하 학교 관계자가 설설 기는 가운데 그는 지프에 태워져 어디론가 실려 간다. 그렇게 끌려간 곳이 '양지'팀이었다. 김종필 초대 중앙정보부장이 작성한 '음지에서 일하며 양지를 지향한다'는 부훈(部訓)에서 따온, 중앙정보부 직할 축구팀이었다.


바로 전 해, 1966년 영국 월드컵에서 8강의 신화를 쓰며 전 세계를 경악시킨 북한 축구팀의 대성공에 배가 아프다 못해 찢어질 것 같았던 박정희 대통령과 중앙정보부의 축구 진흥 프로젝트였던 것이다. 아마도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을 불러 이렇게 얘기했을 거다. 


"임자. 거 이북이 하는 걸 우리는 왜 못하나."


이 양지 축구팀은 사실상의 국가대표팀으로서 당시로서는 천국 유람과 비슷한 격이었을 유럽 전지훈련까지 받는 호강을 누렸다. 그런데 왜 이회택은 양지팀에 회한을 가졌을까?


"양지팀 봉급이 2만원이었어요. 고위 공무원보다 높았을 겁니다. 그래서 흥청망청했지요. 대표선수라면 술도 일등, 노름도 일등을 해야 하던 시절이라 요즘 같은 선수 관리가 안 되던 시절이었지요."


그렇게 10년이 넘도록 한국 축구를 주름잡던 그가 축구화를 신고 마지막으로 그라운드를 누빈 것이 1979년이었다. 1979년 제60회 전국체전은 대전에서 열렸다. 그 전국체전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축구 결승전이 바로 포항제철과 서울시청의 대결이었다. 그리고 이회택은 은퇴를 앞둔 서른넷의 노장이었다. 체력적 문제가 있었던지 전반은 뛰지 않던 그가 교체 선수로 그라운드에 들어서자 A4 용지 두 장 크기의 흑백TV 화면에서 귀가 틔는 함성이 울려 퍼졌다. 


"이회택이 나온다."


그리고 펼쳐진 그의 플레이는 가히 2014 브라질 월드컵 코트디부아르와 일본의 대전에서 보여 준 드록신, 즉 드록바의 활약에 손색이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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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안 나실 분들을 위해 해설해드리자면,

이 경기는 드록바의 투입만으로 흐름이 바뀌더니

일본의 역전패로 끝이 난다.)


열 살 어린아이에게도 그가 들어가기 전과 후의 분위기는 극명하게 달라 보였다. 연신 아나운서가 부르짖는 '노장'의 호명을 어깨에 짊어지고서도 그는 종횡무진 그라운드를 누볐고 열 살 넘게 어린 선수들을 손쉽게 제치며 포철 선수들에게 힘을 불어넣었다. 아쉽게 마지막 한 점을 따라가지 못해 4대3으로 패해 준우승에 그쳤지만 실로 짜릿한 대추격전이었고 명승부였다.


그런데 그해 전국체전의 마지막 일정은 부마항쟁의 마지막 날과 겹쳐 있다. 부마항쟁이 터진 건 1979년 10월 16일. 폐막은 17일.


가난 속에 새끼줄로 공을 만들어 차던 월북자의 아들이 스타플레이어로서 한 시대를 풍미하고 생애 거의 마지막 경기를 치르던 무렵, 18년 동안 한국을 지배했던 왕년의 남조선로동당 군사 총책, 자신의 쿠데타 이후 반색을 하며 내려온 북한의 밀사이자 왕년의 정신적 스승이라 할 황태성을 만나지도 않고 죽였으며 그가 가져온 북한 필름을 보면서 "우리는 언제 저렇게 될까." 탄식하던 군인, 그 후 북한과 한 하늘을 두고 살 수 없는 적이자 라이벌 관계를 형성하며 심지어 정보기관 산하의 특수 축구팀을 만들기까지 했던 대통령, 이회택이 뛰던 탄탄한 축구팀의 모기업인 포항제철을 설립한 것을 필두로 고도 경제 성장의 70년대를 이끄는 와중에 잔인한 유신의 칼날을 휘둘렀던 독재자의 마지막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알 리 없는 열 살의 어린아이는 "떴다 떴다 이회택"(이회택의 전성기 시절 축구팬들은 떴다 떴다 비행기를 개사해 불렀다고 했다)을 부르며 열광하고 있었을 뿐.


전국체전 폐막을 알리는 1979년 10월 18일 자 동아일보의 1면 톱은 '부산에 비상계엄'이었다. 이미 사람 여럿을 목매달고 폐인을 만들었던 유신의 광기의 서슬은 푸르다 못해 검게 변색돼 있었다. 1면에 실린 박정희 대통령 담화문의 일부. 


"(...전략...) 부산에서 지각없는 일부 학생들과 이에 합세한 불순분자들이 이 엄연한 국가 현실을 망각 외면하고 공공질서를 파괴하는 난폭한 행동으로 사회 혼란을 조성하여 시민들을 불안케 하고 있음은 개탄을 금치 못할 일입니다. 나는 이와 같은 중대한 국면에 처하여 헌법이 부여한 막중한 책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헌법 제54조 규정에 따라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 부산직할시 일원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게 된 것입니다. (...후략...)"


이 담화문에서 개인적으로 눈에 띄었던 단어 중 하나가 '나는'이다. 대통령으로서 '3천7백만 국민'에게 고하면서 '저는'도 아니고 하다못해 후일 전두환 대통령이 즐겨 쓴 '본인'도 아니고 '나는'을 고집하는 위엄이라니. 그의 명령으로 부산 일원에는 18일 0시를 기해 비상계엄령이 떨어졌다. 이미 16일과 17일 양일간 경찰차 12대가 불타거나 부서지고 21개 파출소가 쑥대밭이 되고 세무서와 도청에까지 시위대의 공격이 이어지는 상황에서 유신 정부는 인내심이 많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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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인들의 시위에 군대를, 그것도 유사시 적의 심장부를 강타하도록 훈련된 최정예 부대를 투입하는 방식은 이때 도입된다. 박희도 준장이 지휘하는 1공수여단과 최세창 준장의 3공수여단 (이 이름들을 기억해 두기 바란다) 박구일 대령이 지휘하는 해병대 1사단 7연대가 부산에 투입된다. 해병대는 좀 나았다고 전해지지만 공수 부대는 대단한(?) 활약을 선보인다. 대검 꽂은 M16을 휘두른 공수부대의 폭력은 몇 달 뒤 광주에서 일어나는 비극의 처절한 프롤로그가 된다.


시민들의 80% 이상이 머리에 상처를 입었다. 다친 시민들의 진단 병명을 늘어놓으면 군인들이 어떻게 두들겨 팼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창자파열, 뇌좌상, 뇌진탕, 전두부파열상, 후두부열창, 안면열창, 안면부내부열창, 전신타박상, 뇌경막손상…. 

(조갑제닷컴, 부마사태와 김재규)



20일에는 마산에도 위수령이 선포돼 '부마항쟁'의 단어를 완성한다. 시위는 가라앉은 듯 했지만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이 시위가 왜 일어났고 누구를 겨냥하고 있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순수한 일반 시민에 의한 민중봉기로서 시민이 데모대원에게 음료수와 맥주를 날라주고 피신처를 제공하는 등 데모하는 사람과 시민이 완전히 의기투합하여 한 덩어리가 되어 있었고 체제저항과 정책 불신 및 물가고에 대한 반발에 조세저항까지 겹친 민란"이라고 보고하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동네를 벗어날 일이 별로 없던 어린이에게는 그 거대한 역사의 물줄기는 별로 영향을 주지 못했다. 부모님과 함께 외출했다가 두 시간 당겨진 통금(밤 10시)에 걸릴까 봐 허겁지겁 뛰었을 때는 정말 무서웠지만 그 외에는 세상이 어떻게 얼어붙었고 또는 어떻게 들끓고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10월 27일 새벽이 오기 전까지는


어려서 나는 원래 새벽반이었다. 새벽 6시면 일어나서 책도 보고 동네 앞산도 다녀오곤 했는데 1979년의 10월 27일도 산기슭을 배회하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동네 구멍가게 형이 뭔가를 열심히 찾고 있는 게 눈에 띄었다. 아마 아침 7시 반쯤 되었을 것이다. 이미 날이 훤히 밝은 지 오래였으니까.


"뭐 찾능교?" 


물었을 때 그 형의 답은 천만뜻밖이었다. 지금도 귀에서 잉잉거리는 다급한 말투로 그는 이렇게 얘기했다. 


"야, 니도 빨리 집에 가서 태극기 찾아라. 대통령이 죽었단다. 조기 달아야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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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알이 양 귓전을 뚫는 느낌이랄까 찌잉 소리가 머리 한복판을 관통하고 두어 바퀴를 돌았다. 농담이라고 생각할 겨를조차 없었던 게, 워낙 그 형의 말이 진지했고, 그의 다급한 손길이 태극기를 이미 꺼내 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마징가 제트처럼 집으로 날아갔다. 


"대통령이 죽었답니더. 대통령이 돌아가셨답니더." 


그 소리는 북괴군이 쳐들어왔다는 말과 동급의 무게로 집안을 흔들었다. 처음에는 무슨 소리냐를 연발하던 아버지 어머니도 새파랗게 질린 아들의 표정을 보고는 심상찮은 일이 터졌음을 직감하신 거 같았다. 아침 TV 방송이 없던 시절, 온 가족은 라디오 앞으로 집결했다. 거기서 흘러나오던 아나운서의 침울한 목소리.


"차지철 경호실장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다투는 과정에서 우발적으로 발사된 총에 박정희 대통령 각하가 서거......" 


여기까지 듣던 어머니가 어이가 없다는 듯 말씀하셨다. 


"미친 놈들 대통령 앞에서 총 들고 싸웠다는 거야?" 


나는 이때 여러 개의 한국어 '보캐뷸러리'를 습득했다. '우발적'이란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서거'가 무엇인지 말이다. 결국 대통령 앞에서 중앙정보부장이라는 사람과 경호실장이라는 사람이 싸우다가 총을 빼 들었고 쏜다 안 쏜다 실랑이하다가 우연히 발사된 총알에 대통령이 죽었다는 것이다. 일단 대통령이 '중상'도 아니고 '서거'라고 못 박았으니 대통령이 죽은 것은 분명했다. 그런데 여기서 아버지가 이상한 말씀으로 어머니에게 대답했다.


"누가 죽였을 수도 있고."


움찔 눈이 튀어나올 만큼 놀라는 내 앞에서 아버지는 한마디를 더 하셨다. 그것은 5.16쿠데타 당시 대통령 윤보선이 했다는 그 말과 같았다. 


"올 게 왔구만."


비록 어렸지만 그 말의 의미를 모를 만큼 언어 감각이 뒤떨어지지는 않았기에 나는 아버지의 반응이 의아했다. 올 게 오다니, 대통령이 누군가에게 죽임을 당하는 일이 눈이 튀어나올 만큼 놀라운 일은 아니라는 말씀이 아니신가.


어쨌건 학교는 가야 했다. 학교 분위기도 뒤숭숭했다. 나처럼 라디오 뉴스라도 듣고 온 아이들도 있었지만 괴뢰군이 쳐들어와서 박정희 대통령 목을 따 갔다는 아이들도 있었고, 서거는 잘못된 소식이고 대통령은 살아 계시다고 책상을 치는 아이도 있었다. 그 논쟁은 선생님이 들어오시면서 간단하게 정리됐다. 대통령이 죽은 게 맞았다. 그런데 그 뒤가 간단하지 못했다. 반장이 일어서 차려 경례를 하고 일어선 채로 선생님의 짤막한 인사를 듣고 앉는 것이 정석이었는데 차려 경례 후 선생님이 눈물의 훈화가 조회 후 1교시 내내 진행된 것이다. 기억나는 멘트는 대충 이러하다.


"하늘이 무너져도 이렇게 무너진단 말이냐. 땅이 꺼져도 이렇게 꺼진단 말이냐. 아직도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대통령이 돌아가셨다. 우리 모두의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이다." 


당시 우리 담임 선생님 아동문학 하시는 양반이었다. 부산 아동문학가 협회 회장인가 감투도 쓰고 계신 분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추모의 변도 절절했고 뭐라 알아먹기 힘든 미사여구도 동원됐다. 돌이켜 보면 그때 담임 선생님의 정신 상태는 김일성이 죽었을 때의 북조선 인민들과 별 차이가 없었던 것 같다.


분위기 맞추느라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흘낏 선생님을 봤을 때 그는 눈물을 철철 흘리고 있었다. 그 눈물은 이내 아이들에게 전염되었고 반 아이들 대부분이 엉엉 울었다. 나는 솔직히 다리가 아파서 울었지만. 교무실을 지나다가 교무실 벽 높다랗게 걸려 있는 박정희 대통령의 사진을 보았다. 아 저분이 돌아가셨구나. 그분은 내가 태어날 때부터 대통령인 그분이, 우리 어머니가 중학생 때부터 대통령이셨다는 그분이 돌아가셨다는구나. 뉴스에 나와서 논바닥에 퍼질러 앉아 막걸리도 자시고 해운대 암소갈비집에 다녀가셔서 대통령이 왕림한 집이라고 소문도 나게 했던 저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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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며칠 동안 분위기는 온통 흑백이었다. 컬러 TV가 없던 시절이었으니 당연하기도 했겠으나 TV는 하루종일 향불만 피워 올렸고 문공부 장관은 기자들 앞에서 헉헉대며 울었다. 비상계엄은 부산 마산에서 전국으로 확대됐고 박 대통령의 빈소 앞에는 통곡하며 분향하는 사람들이 줄을 섰다.


그렇게 며칠이 흘렀다. 박 대통령 장례는 건국 후 최초의 국장으로 9일장을 치르기로 결정됐다. 날짜는 11월 3일이었다. 이날 초중고 전 학교는 휴교했다. 국장이 있기 전날 담임 선생님은 또 한 번 우리의 다리를 아프게 했다. 장장 수십 분 동안 장광설을 늘어놓으셨던 것이다. 


"내일은 국장일이다. 느그 집안에 아부지가 돌아가시면 우예 되겠노. 밥이 넘어가겠나. 책이 눈에 들어오겠나. 똑같아. 내일은 나라의 아부지가 돌아가셔서 장례를 치르는 날이다. 그래서 느그도 학교 안나오는 기다. 공부가 눈에 안들어와서. 선생인 나도 수업을 할 수가 없어서......" 


대충 재구성한 멘트는 이렇지만 당시의 선생님 멘트와 대차가 없을 것이다. 그는 분명히 나라의 아버지라고 했다.


어쨌든 학교에 안 나오다니 이게 웬 떡이냐. 몇 놈들이 참 철도 없이 복도를 가로지르면서 와 내일 학교 안 나온다 환호하다가 바로 옆 반 선생님에게 걸렸다. 십 년 굶은 호랑이 멧돼지 본 기세로 교실 문을 박차고 나온 선생님에게 그 몇 놈의 아이들은 눈동자가 돌아가도록 얻어터지고 한 명은 코피 범벅이 되고 말았다.


다음 날 아침 일찍 나는 동네 유치원 원장님께 심부름을 갔었다. 책상에 앉아서 뭔가 사무를 보고 있던 원장 선생님이 TV를 켜고 계시지 않길래 나는 입바른 소리 잘하는 어린이로서 설레발을 떨었다. "샘예. 국장 보셔야지예. 대통령 장례 아닙니꺼." 그러면서 호들갑 떨며 티브이를 켰다. 또깍. 흑백 TV에 실황 중계가 비쳤다. 광화문 네거리에 긴 아치로 된 박정희 대통령 각하 국장 휘장도 보였다.


그때 나이 쉰 줄의 원장 선생님은 갑자기 혼잣말을 했다. 


"일은 참 많이 했지, 저 사람이." 


'나라의 아버님'이 가신 마당이었기에 나는 의아해서 유치원 원장 샘을 바라보았다. '저 어르신'도 아니고 '저 분'도 아니고 '저 사람'이라니. 그런데 그다음 튀어나온 말을 나는 지금도 그 특유의 경상도 억양까지 선명히 기억한다.


"소새끼 같이. 소새끼 같이 열심히 했지."


서울 사람들이 이 말을 하면 그 뉘앙스가 애매할 수 있으나 경상도 사람이 저 말을 감정을 뉘앙스에 실어서 하면 그 뜻은 매우 확연하고 명료해진다. 그때 원장 선생님은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감정이 심히 좋지 못했다. 왜 그러셨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때 원장 선생님의 방점은 확연히 "열심히 했지."가 아니라 "소새끼"에 찍혀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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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로 펼쳐진 풍경은 영화 <효자동 이발사>를 보면 안다. 영구차는 투명했고 그 안에 태극기 덮인 관이 있었으며 육사 생도들이 그 관을 호위하며 천천히 한 발 한 발 각을 지어 걸어갔다, 모르긴 해도 아마 다음날 육사 생도들 무릎 관절 때문에 앓아누웠을 것이다. 티브이에서 성우가 읽는 박정희 대통령에게 바치는 조시가 흘러나왔다. 작사자는 이은상이었다. 고지가 바로 저긴데 예서 말 수는 없다며 사람들의 등짝을 때리는 채찍 같은 시를 지었던 그분의 조시는 절절하고 명문이었다.


태산이 무너진 듯 강물이 갈라진 듯

이 충격 이 비통 어디다 비기리까

이 가을 어인 광풍 낙엽 지듯 가시어도

가지마다 황금 열매 주렁주렁 열렸소이다.

오천 년 이 겨레의 찌든 가난 몰아내고

조상의 얼과 전통 찾아서 되살리고

세계의 한국으로 큰 발자국 내디뎠기

민족의 영도자외다, 역사의 중흥주외다.

(중략) 

십자가 지신 오늘 붉은 피 흘리셔도 피의 값 헛되지 않아 보람 더욱 찾으리다.

육십 년 한평생 국민의 동반자였고

오직 한길 나라 사랑 그 길에 바친 이여.

굳센 의지 끈질긴 실천 그 누구도 못 지을 업적

민족사의 금자탑이라 두고두고 우러보리라.

(하략)



연도에는 수많은 이들이 나와 있었다. 그리고 서러운 울음을 터뜨렸다. 진짜로 부모를 잃은 듯이 울었다. 어떤 할머니는 엎드려서 울었고 우리 동네 곳곳에서도 울음 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이고 아이고. 그때 나는 알았다. 울음은 전염된다는 걸. 소리는 점점 더 커졌고 울음은 전파되었으며 나중에는 소새끼 운운했던 원장 선생님까지 눈시울을 붉혔던 것이다.


태산에 강물도 슬퍼하는 민족의 지도자에 역사의 중흥주요, 십자가까지 지신 예수에다가 민족사의 금자탑까지. 이런 워딩을 구사하는 나라는 지구 상에 몇 나라 안된다. 굳이 들자면 동족의 나라뿐. 사실 이 날은 그로부터 13년 뒤 김일성 주석의 사망 때 북한이 보여 준 풍경의 전조였으며, 그날 내가 본 모습은 북한에서 선보인 통곡의 물결(?)과 거의 일치하고 있었다. 탈북자 출신 동아일보 주성하 기자가 묘사한 김일성 주석 사망일의 북한 풍경을 보면서 나는 일종의 평행이론 같은 재연에 경악했다.


나는 남과 북에서 각각 슬피 울었던 사람들의 진정성을 부인하지 않는다. 앓던 이도 빠지면 섭섭한 게 인간인데 18년 동안 또는 50년 동안 한 나라를 틀어쥐었던 절대권자의 죽음에 범연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물론 3천7백만 국민 사이에는 많은 스펙트럼이 있었다. 국장일 학교 안 간다고 좋아하던 아이들의 뺨을 무슨 빨갱이라도 잡은 양 강타하던 선생님도 있었고, 서거 소식에 태극기부터 조건반사적으로 찾던 구멍가게 형처럼 눈치가 몸에 밴 사람들, "올 게 왔구나" 중얼거리던 아버지처럼 정권의 몰락을 예감하고 있던 사람들, 긍정성과 부정성을 모두 담아 '소새끼'라는 표현을 했던 원장 선생님 같은 분들, 박정희 타도를 부르짖으며 남포동 거리를 누비다가 공수부대에 두들겨 맞은 사람들 등등 모두가 엄연했다. 하지만 그들에게 10.26과 그 후 1주일은 침묵의 향불 속에서도 설렘이 일렁이던 시간이었다.


계엄의 서슬은 시퍼렜으나 유신의 심장은 멈췄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세상이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열 살 초딩이었던 나도 그랬을까. 축구 보기를 좋아했고 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을 보면서 처음으로 새벽별을 담았던, 10.26 며칠 전 이회택의 질주에 열광하던 한 소년은 이렇게 아버지에게 물었다. "그럼 박스컵(박정희 대통령 배 국제축구대회를 이렇게 불렀다)은 이제 최스컵(당시 대통령 권한대행이 최씨라고 했으므로)이 되는 거야?" 아버지는 "최스컵?"하며 고개를 갸웃하셨다. "뭐 그렇게 될 수도 있고 바뀔 수도 있고." 며칠 뒤 나는 TV에서 특이한 인물을 하나 보게 된다. 군복 차림의 대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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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의 죽음과 더불어 또 한 명의 역사적 인물이 국민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역사는 계속되고 있었다.





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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