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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뤼흐 스피노자는 철학자들의 철학자다. 철학자라는 동물은 서로 핏대를 세우고 반박하는 게 일이다. 어쩌면 철학자란, 남이 만들어 놓은 작업물에 기대 교묘하게 빈 틈을 찾아 사상가의 반열에 오르는 데 성공한 인간들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현대에 와서 돌이켜보면, 대부분의 서양철학자들이 스피노자를 칭송하는데 주저함이 없음을 알게 된다. 그런 면에서 스피노자는 진정한 스타다. 앙리 베르그송은 이렇게 말했다.

 

"모든 철학자에겐 두 명의 철학자가 있다. 자기 자신과 스피노자다."

 

스피노자는 고독과 신비, 지조의 철학자다. 철학자들은 확고불변한 진리를 찾기 위해, 무지와 의혹에 대항해 도끼를 들고 땀을 뻘뻘 흘린다. 스피노자는 그런 식으로 쟁취하는 진리를 거부했다. 그는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권총으로 간단히 도그마를 처치한 후 유유히 사라진다. 그런 면에서 스피노자는 열등감 제조기다. 철학자로 역사에 기록된 이들은 하나같이 천재 중의 천재인데도 그렇다.

 

너 자신과 너의 삶을 사랑하라는 말을 하기 위해 그토록 많은 비난과 저주를 받은 사람은 없다. 그토록 초연했던 사람도 없다. 스피노자는 윤리학의 제왕이자 철학의 지존이다. 그리고 굴복을 모르는 정신력의 소유자다. 단언컨대 그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개인주의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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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는 1632년 11월 24일, 데카르트의 <방법서설>이 출간되기 5년 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태어났다. 그런데 스피노자 이 양반, 무려 친할머니가 마녀재판을 받아 화형당한 분이다. 그의 인생을 알려면 먼저 스피노자 가문의 이력부터 살펴야 한다.

 

스피노자 가문의 고향은 스페인이다. 영어로는 'sephardic jew'라고 하는 스페인계 유대인 집안이다. 당연히 스페인의 유대교 커뮤니티에 속해 있었다. 슬슬 근대가 시작되자 보수적인 스페인은 마녀사냥으로 유명해진다. 스피노자 집안은 1492년에 추방명령을 받았다. 이베리에 반도에서 어딜 가겠는가? 그나마 문화와 언어가 비슷한 포르투갈에 갔다. 스피노자가 태어나기 140년 전이다.

 

스피노자, 이때는 포르투갈어로 '지 에스피노사' 가문은 한동안 포르투갈에서 잘 지냈다. 그러나 마르틴 루터의 종교혁명이 일어나고 유럽이 종교전쟁에 휩싸이면서 사정은 달라졌다. 신교(개신교)와 구교(카톨릭)는 서로를 사탄의 하수인이라고 믿었다. 관대함과 포용은 먼 나라 이야기가 됐다.

 

카톨릭을 사수한 이베리아반도는 요즘 식으로는 '극우주의'에 빠졌다. 마녀사냥의 열풍이 불었다. 포르투갈은 국내 유대인들에게 선택을 강요했다.

 

“개종할래, 죽을래?”

 

죽을 수는 없으니 온 유대인 가문이 카톨릭으로 개종했다. 속으로는 은밀하게 유대교를 믿었다고 추정된다. 사실 추정 정도가 아니라 기정사실로 취급된다. 이렇게 개종을 택한 유대인들을 스페인어로 꼼베르쏘, 포르투갈어로 꽁베르수라고 한다. '전향자'라는 뜻이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공식 명칭이다. 실제로는 ‘마라노’라고 불렸다.

 

마라노는 돼지를 일컫는 말인데, 보다 구체적으로는 우리에서 똥과 진흙에 뒹구는 상태의 돼지를 뜻한다. '나는 네가 속으로는 유태교도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태도다. 이런 취급을 받고서라도 무엇보다 생존이 중요했다. 하지만 포르투갈인들 입장에서는 이 ‘마라노’를 해코지할 근거가 없다. 그런데도 스피노자의 할머니는 마녀로 고발당했다.

 

스피노자 집안에 시집 온 유대인 여성은 대체 어떤 죄목으로 고발당했을까? 정확한 자료가 없다. 다만 추측은 할 수 있다.

 

유대교인들은 재산이 좀 있어도 바지런하다. 언제 다 빼앗길지 모르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적대적인 사회에서 심리적 안정감을 갖는 가장 빠른 방법은 현금을 쟁여놓는 일. 그래서 유대교 여성들은 남편의 벌이가 충분해도 소소한 부업을 많이 했다.

 

유럽에서 여성의 부업 중 대표적인 것이 민간요법이다. 약초를 팔거나 배합해서 복용시키고, 때로는 우리나라의 시골에서 벌침 놓듯 사혈(묵은 피를 빼는 것) 서비스 따위도 한다. 마녀사냥에 걸리면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다. 탈이 나도 악마의 의지고, 나으면 악마의 능력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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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처한 상황은 거기서 거기고, 비슷한 조건에서 비슷한 해결책을 낸다. 한국과 유럽의 민간요법, 탕약문화는 비슷했다. 원래 유럽의 '약주'인 예거마이스터에선 한약 냄새가 난다. 우리나라에서는 탕약을 먹고 약효가 잘 흡수되도록 피를 빨리 돌리려는 목적으로 술을 마셨는데 이를 약주라 한다. 이게 발전하면 재료와 술을 합체시켜버리는 한국식 담금주가 되기도 하고 예거마이스터가 되기도 한다.

 

유럽엔 탕약 문화가 없다고 생각하는 이유엔 역시 마녀사냥의 영향이 크다. 민간요법으로 먹고 사는 독신 여성의 씨를 말려버림으로써 다양한 기술들이 실전되어 버렸다. 현재 남아있는 테크닉은 한 줌 정도다. 당장 마녀나 사악한 마법사 하면 생각나는 게 부글부글 끓는 녹색이나 보라색 수프다. 실체는 그냥 탕약이다. 콜라와 토닉워터는 탕약 문화의 대표적인 잔재다.

 

스피노자의 할머니는? 사연을 알 수 없지만 어떻게든 엮였을 것이다. 할아버지의 이름은 '이삭'인데, 이삭은 아내가 화형대에서 산 채로 불타는 모습을 뜬 눈으로 목격했다. 남은 자식들이라도 살려야 했다. 그리고 배우자를 화형시킨 국가에서 누가 하루라도 더 살고 싶겠는가.

 

이삭은 엄마 잃은 자식들을 끌어안고 프랑스로 향했다.

 

프랑스로 간 이유는 그 유명한 앙리 4세의 낭트 칙령 이후였기 때문이다. 낭트 칙령은 종교의 자유를 보장한 유럽 최초의 법령이었다. 그러나 카톨릭과 개신교 둘 중 하나를 선택할 권리였지, 유대교는 해당 사항이 없었다.

 

스피노자 가족은 1615년에 가까스로 삶의 기반을 마련한 프랑스에서 추방명령을 받았다. 이제 남은 곳은 네덜란드 뿐이었다. 네덜란드는 종교적 자유에 가장 개방적인 국가였다. 특히나 상공업의 발달을 위해 유대인 이민을 환영했다. 유대인은 유럽과 중동 어디에나 있다. 유대인을 포섭하면 국제적인 유대 무역 네트워크의 허브가 될 수 있다.

 

네덜란드는 아예 팔을 걷어붙이고 히브리어로는 '지나고그', 네덜란드어로는 '요덴뷔르트'라고 하는 유대인 자치 거주구역을 허가해주기까지 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 추방된 유대인을 모조리 받아들일 기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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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 가족은 일단 발길이 닿는 대로 로테르담에 당도했다. 이삭은 거기서 가족이 굶어죽지 않을 기반을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당연히 상업이었다. 이삭은 포르투갈에서 프랑스를 거쳐 네덜란드에 이민을 오기까지 어디서는 무엇을 구매하고 어디에는 무엇을 팔면 좋을지 면밀히 관찰해왔다.

 

이삭은 로테르담에서 자식들을 위해 미친듯이 일했다. 그리고 1627년, 마침내 생명의 기운이 다해 로테르담에서 처절했던 삶을 마감했다. 내쫓기고 빼앗기는 삶이었다. 그는 공동묘지 바깥의 공터에 묻혔다. 아직 유대인이 묻힐 수 있는 묘지는 마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사망한 이삭의 시신에 포경수술을 했다. '마라노' 취급을 받으며 유대교를 버렸다고 거짓말해야 하는 삶이었다. 포르투갈에서는 감히 포경수술을 할 수 없었다. 죽어서라도 진정한 유대인으로 묻히라는 뜻에서였다. 거꾸로 이 일은 네덜란드의 품에 안긴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에 얼마나 집착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보여준다.

 

아버지 이삭의 사업체를 물려받은 큰아들 미겔은 이를 악물고 일했다. 미겔 가족은 마침내 국제 무역도시 암스테르담에 입성하는데 성공했다. 스피노자는 할아버지가 사망한 뒤 5년 후 암스테르담 유대인 거주지, 이제는 부유해진 집안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미겔은 아이의 이름을 '바뤼흐'로 지었다. 히브리어로 복받은 자라는 뜻이다. 우리 식으로는 복돌이, 혹은 만복이 정도 되는 이름이다. 한국어 성서에는 '바룩'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라틴어로는 베네딕투스가 같은 뜻이다. 스페인어로는 베네딕토, 포르투갈어로는 베네니토 혹은 확 줄여서 벤토다.

 

미겔은 필시 집안의 모국어인 포르투갈어로 아들의 이름을 불렀을 것이다. 복. 이제 집안이 헤쳐 온 공포와 고난은 끝났다는 선언이기도 했다. 바뤼흐 스피노자의 세대만큼은 편안히 복을 누리길 믿고 또한 바랐을 것이다.

 

미겔은 훗날 둘째 아들 바뤼흐가 유대인 커뮤니티를 뒤집어 놓고 그걸로도 모자라 전 유럽에 맞서 홀로 사상의 전쟁을 치를 줄은 꿈에도 몰랐다. 개인의 자유와 존엄성을 위해 인간은 어디까지 고독을 감수할 수 있는가? 우리는 바뤼흐 스피노자를 통해 그 한계를 어림잡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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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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