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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발주머니를 빙빙 돌리고 다니던 초딩시절에는 방과 후 몰려다니다가 친구 집에 들어가 남의 집밥을 얻어먹는 것이 큰 실례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덕선이와 택이가 살던 <응답하라 1988>의 쌍문동 친구들처럼 내 집같이 드나들지는 않았지만 90년대 후반에도 남의 집 아이에게 밥은 넉넉히 내어주는 정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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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앗이하듯 오늘은 이 집에서 먹고 내일은 저 집에서 먹고 모레는 우리 집에서 친구들과 밥을 나눠 먹었던 기억 속에 가장 강렬한 것은 남의 집 김치 맛이다. 같은 지역의 채소와 비슷한 속 재료를 같은 지역문화권의 비슷한 방법으로 버무려 놓았을 텐데도 맛이 다 달랐다. 집집마다 김장의 예산이 달라 어느 집은 좀 더 좋은 젓갈을 썼는지도 모르지만, 꼭 그런 ‘김치 계급론’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어느 집은 식구가 많아 일주일에 몇 포기씩 김치를 소비한다거나, 어느 집은 맞벌이로 외식이 잦아 집 반찬을 자주 꺼내 먹을 일이 없다거나, 집에 고집스러운 할머니가 계셔서 아직도 아파트 화단 파묻은 김장독 김치를 먹는다거나 하는 복잡다단한 가정사가 김치 맛에 오롯이 배어 있었다. 친구들 생김새만큼 다양한 김치를 먹고 자랐다. 

 

남의 집 김치가 매번 퍽 낯설게 느껴졌던 것은 어릴 때부터 오랜 시간 먹고 자라 입에 밴 우리 집 김치 맛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에겐 익숙하지만 친구에게는 좀 낯선, 그런 맛과 향기. 한 가정의 가족 구성원들의 섭생과 일상이 버무려져 음식에 배어드는 그 집만의 독특한 가풍 같은 것 말이다. 뿔뿔이 흩어져 어딘가에서 다 같은 중국산 김치를 먹고 지내고 있겠지만 내 어린 시절 친구들도 우리 엄마가 끓여준 김치찌개에서 맡았던 그런 낯선 냄새로 우리 집 식구들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내가 그네들 집밥을 기억하는 것처럼.

 

 

어느 집구석

 

영화 속 둘째 아들 인모(박해일 분)는 형제 중에 제일 똑똑해서 집안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대학도 나왔고 영화감독이 되었지만, 데뷔작을 시원하게 말아먹었다. 막장으로 치닫는 인생을 포기하려다가 죽기 전에 집밥이나 먹으려고 돌아온 엄마(윤여정 분) 집에는 그보다 한술 더 뜨는 잉여 끝판왕, 전직 건달 큰 형 한모(윤제문 분)가 이미 서식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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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모: (냉장고에서 김치를 꺼내며) 닭죽에 대한 예의도 모르는 새끼... 여기 왜 왔어?

인모: 아들이 엄마 집에 오는데 이유가 있냐?

한모: 대한민국 영화감독이 창창한 대낮에 엄마 집에 오는 건 이유가 있어야지 씨발롬아.

 

화장품 외판 일을 하는 엄마의 작은 벌이에 기생하며 평화로운 백수 생활을 영위하던 한모는 동생의 등장에 잔뜩 경계심을 드러내며 이거 먹고 떨어지라는 듯 인모의 밥그릇에 김치를 찢어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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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집의 고소한 콩가루 내음은 여기저기서 모락모락 피어난다. 남편과 부부싸움 끝에 시퍼렇게 멍이 들어 온 막내딸 미연(공효진 분)은 두 번째 이혼을 하겠다고 선언한다. 데리고 온 미연의 딸 민경(진지희 분)은 맞춤법과 존댓말을 배울 생각이 없고 담배를 맛있게 필 줄 알며 가출을 일삼는 대책 없는 여중생이다. 그렇게 평균연령 47세의 철없는 삼 남매는 다시 홀어머니 슬하로 모여들어 지지고 볶는 가족의 동거를 재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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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장으로 버무려놓은 캐릭터들이 우글거리니 집구석에 바람 잘 날이 없다. 조카는 피자를 시켜 혼자 얌체같이 먹고 삼촌들은 또 그것을 뺏어 먹으려고 으름장을 놓는다. 인모는 형이 몇 달째 공들이며 마음에 둔 동네 미용실 여자를 한순간에 홀랑 꾀어내어 술을 마신다. 속상한 한모는 조카 팬티를 뒤집어쓰고 자위행위를 하다가 식구들에게 들키고, 비구니처럼 살겠다던 미연은 또 어딘가에서 남자를 데려와 시집을 가겠다고 한다. 엉망진창 총체적 난국이다. 

 

 

이 집의 김치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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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집안 식구들의 분위기는 묘하다. 인모는 어머니 계신 밥상 옆에서 담배를 뻑뻑 피워대다가도 노인네 혼자 어떻게 대식구의 반찬값을 벌어오나 염려하기도 하고, 한모는 영화감독 한다고 집안 말아먹은 인모를 힐난하다가도 밖에 나가서는 친구들에게 입이 마르도록 동생 자랑을 한다. 오빠들은 미연을 이년 저년 하며 욕지거리를 하다가도 남의 집 귀한 여동생에게 손찌검한 남자들은 가만두지 않는다. 어른에 대한 공경, 형제간의 우애 같은 것은 개나 줘버린 콩가루 오브 콩가루 집안이지만 그 기저에는 서로에 대한 서툰 애정과 끈끈한 결속이 있다. 서로 미워하면서도 애틋하고, 꼴도 보기 싫어했다가도 누군가 안 좋은 일이 생기면 마음 아파 어쩔 줄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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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콩가루 집안에서 밥을 얻어먹으면 입으로 들어갈지 코로 들어갈지 모를 것 같지만, 의외로 식사 풍경 만큼은 평화롭다. 한심한 자식들이 복닥거리는 집에서 큰 소리 한번 안내는 어머니는 열심히 돈을 벌어와 밥을 지어 식구들을 먹인다. 사람은 잘 먹어야 힘을 쓴다고. 속이 든든하면 없던 힘도 생기는 법이라고. 밥상머리에서도 삼 남매는 툭하면 서로의 상처를 건드리며 아웅다웅하지만, 어머니는 그저 고기를 구워 자식들 숟가락에 올려놓는다. 애들은 원래 싸우면서 크는 거야 하는 표정으로. 

 

식구들은 방금 전까지 서로 쥐 잡듯이 잡다가도 어머니가 밥상을 내오면 씩씩거리며 분주히 숟가락질을 한다. 콩가루면 어떤가. 식구란 밥 식(食)에 입 구(口)자를 쓰는 사람들 아닌가. 이 집 밥상에 엉덩이를 구겨 넣고 된장국 적신 밥 한 숟갈에 시큼한 김치 한쪽을 우적우적 먹어보고 싶다. 어릴 적 어느 친구 집에서 먹었던 그 맛일 것 같아서.

 

 

가족이란 무엇인가

 

2015년, 통계청은 부부와 자녀로 구성된 가구가 전체 가구의 32.3%라고 발표했다. 예측에 따르면 2019년엔 1인 가구가 부부와 자녀가 함께 사는 집보다 많아진다. 머지않아 식구들이 모여 밥을 차려 먹는 장면이 나오는 시대극을 보며 ‘저땐 저랬지.’라는 말이 절로 나올지도 모르겠다.

 

가족들은 쉽게 분리되고 홀로 살아가는 것이 익숙한 풍경이 되었다. 하는 일이 다르고, 떨어져 먹는 것이 다르다 보니 가족은 가끔 남보다도 못한 존재가 되기도 한다. 애정 어린 걱정으로 건넨 말도 미운 송곳으로 보내진다. 가족이어서 더 아프다. 어른들은 부모보다 더 가난하게 살아가는 최초의 청년세대에게 전해줄 뾰족한 삶의 지혜가 줄어들었고, 자식들은 취업과 결혼과 출산 등 자꾸 밀리는 삶의 과업들에 고향 집을 찾아갈 면목이 줄어든다.

 

하지만, 제아무리 남극에 얼음이 녹고 남해안에 열대 식물이 자라난다 해도 입추가 되면 어김없이 바람이 차가워지고 경칩에는 개구리가 기다렸다는 듯 깨어난다. 서울 집의 넷 중 하나는 홀로 사는 사람들이고 그중 절반은 결혼과 출산을 포기했다지만, 저번 추석에도 고속도로엔 고향을 향하는 차들로 넘쳐났다.

 

삼라만상이 절기(節氣)를 넘나들지 않는 것처럼 세상 아무리 삭막해졌다 한들, 사람 사는 모양새가 인륜의 굴레를 벗어나지 않는다. 우리는 아직도 가족이라는 이름의 결속을 놓치지 않고 살아간다. 서로를 미워하고 원망해도 결국 걱정하며 애정한다. 같은 김치를 먹고 자란 사이에는 끊을 수 없는 서로의 진한 역사가 있다.  

 

미우니 고우니 서로 한심하기도 하고 서운하기도 하고 가족 맞나 싶을 때가 있는 사람들을 만날 명절이 또 돌아왔다. 퍽 반갑지 않더라도, 오랜만에 익숙한 김치찌개 국물에 소주한잔 하고 오시길. 고향 가는 길이 멀다면 영화도 한번 보시길. 영화 속 대책 없는 가족들을 보다는 조금은 양호할 가능성이 큰 가족들이 갑자기 예뻐 보일지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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