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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무능한 기자는 여러모로 민폐를 끼친다

 

최악의 매체에서,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기사를 쓰는 기자였지만, 때때로 보람도 있었고, 재미있는 일도 있었다.

 

가장 보람된 일은 이명박 전 대통령이 일본에 방문해 일제 강점기 위안부와 강제징용 문제를 더 거론하지 않겠다고 한 발언을 보도해 이슈화 되었던 일이었다. 이 일은 용산참사와 강호순 연쇄살인 사건으로 세상이 떠들썩했던 1월 말이었다. 지금은 성남시장인 이재명 부대변인의 논평을 그대로 스트레이트 기사로 옮겼는데,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계속적으로 문제가 되어 조회수가 300만을 넘겼다. 청와대에서 사실이 아니니 기사를 내리라고 압박해 편집국에서는 한참 실랑이를 벌이기도 했다.

 

2008년 이명박 전 대통령이 취임 첫 회 일본을 방문했을 때 한 발언이었는데, 이를 아사히 신문이 보도했고, -아사히 신문은 추후 이 보도 내용을 삭제했다 - 또 이 보도내용을 시카고 트리뷴지가 받아 보도했다. 이를 이재명 당시 부대변인이 비판하는 논평을 낸 것이다.

 

보통 쏟아지는 보도자료 메일 속에서 부대변인 논평까진 신경 쓰지 못하는데 내용 자체가 그냥 넘어갈 사안이 아니라 보도를 했던 것이 문제가 됐다. 이 내용을 보도한 매체는 6개 정도 됐는데, 나중에 청와대에서 항의 전화가 오자 다른 매체들은 모두 기사를 내렸다. 나 혼자 기사를 안 내리고 버텼는데, 이재명 시장이 나중에 “그 때 기사를 안 내린 유일한 기자”라고 기억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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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2008년 10월 2일 개천절을 하루 앞두고 개성공단에 방문했던 일이었다. 당시 출입처였던 민주당 대표와 최고위원들이 개성공단에 초대 받아, 어쩌다 보니 인터넷 매체 풀 기자단에 펜기자로 합류하게 되었다.

 

이런 방문 취재는 취재 가고 싶어 하는 매체가 많은데도 불구하고 취재 인원에 제약이 오니, 방송사 영상 카메라 취재 기자 한 두 명, 카메라 취재 기자 한 두 명, 일간지 기자 한 두 명, 인터넷 매체 한 두명, 이렇게 정해지기 마련이다. 대부분 통신사 한 사는 따라가고.

 

나는 인터넷 매체 취재기자들끼리 제비뽑기로 결정할 때, 제일 마지막에 뽑아서 된 케이스였다. 그 마저도 내 운발이 아닌 남들이 다 뽑고 남은 하나를 뽑은 운발이었다.

 

당일 국회 앞 관광버스에 최고위원들과 부대변인, 당직자, 취재진을 태우고 10시쯤 출발하려는데 속보가 떴다.

 

‘탤런트 최진실 씨 사망’

 

차에 타면서 한 공중파 방송사 기자가 “우리 오늘 괜히 가는 거야. 어차피 9시 뉴스 메인 최진실 사망인데.”라고 한탄했다. 실제로 그날 저녁 MBC, KBS, SBS 메인 뉴스의 탑은 최진실 씨 자살이었다. 각 방송사가 15분씩 보도했다.

 

어쨌든, 북한 땅을 밟아 본다는 게 매우 설렜다. 그리고 국회 브리핑룸에서 늘 같이 있는 국장과 될 수 있는 한 떨어져 있어서 더욱 좋았다. 국장은 지내면 지낼수록, 인간의 ‘질’이 안 좋았다.

 

어떻게 말하면 자수성가한 인물로, 언론사 사주에, 돈도 많이 벌어 호화롭게 누리고 살면서, 기자로 직종 변경까지 했으니 나름 그의 인생에는 최전성기였을 것이다. 헌데 사람들을 너무 쉽게 쓰고 함부로 잘랐다. 겉으로 보여지는 면만으로 사람을 평가했다. 성희롱 발언은 ‘양념’ 수준이었다. 국장은 국회 기자실 관리를 해주는 여직원과 친해져 점심 식사 때 많이 데리고 다니며 밥을 사주었고, 주로 국회에 처음 오는 어린 여기자들에게 다가가 친해졌다. 그들도 초반엔 국장의 사교성에 인사도 주고받고 친하게 지내는 듯 하다 시간이 지나면서 국장과 데면데면 했고, 어쩌다 국장이 나와 친한 척을 하면 겉으로는 사무적으로 대하지만 곤란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렇다보니 국회 출입하는 타 사 기자들한테 소문이 날 만큼 나 있었다. 사람이 매일 바뀌고, 기사가 기본 형식도 안 갖추고 있다 보니, 업계 사람들이 모를 리 없었다. 인턴 생활을 하면서 월 50만원을 준다는 건 아무리 10년 전이라고 하지만, 2000년대 후반에 납득이 안 갈 수준이었다. 그 시간을 나는, 버텼다. 어쩔 수 없이.

 

어쨌든 도라산역 CIQ를 지나 개성공단에 도착했다. 개성 공단 내에 마련된 회의실에서 민주당 최고위원회의를 취재했다. 그 자리에서는 당대표와 최고위원들이 하는 발언만 받아칠 수 있었다. 인터넷이 안됐기 때문에, 기사 전송을 할 수 없었다. 당시에는 노트북에 끼는 인터넷 모뎀 같은 걸 끼면 언제, 어디서든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었는데, 북한까지는 미치지 못해 사용할 수 없었다.

 

북한 취재에서 기억 남는 건 우리 숙녀복 브랜드 베스티벨리 공장을 방문했던 일이다. 북한에 살고 있는 여공들은 아무리 일하는 시간이라도, 민주당 지도부를 비롯한 취재진 40여명 한 무리가 지나가는데도 미동도 않고 미싱만 박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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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베스티벨리 공장의 책임을 담당하고 있는, 우리로 치면 공장장 정도 되는 직급의 담당자가 북한 사람이었는데, 김책공과대학을 나온 엘리트였다.

 

그분과 취재진 몇몇이 잠시 앉아 대화를 나누었는데, 김정일이 -당시만 해도 김정일이 살아 있었다. 그해 여름 북한지역에서는 대규모 홍수가 났었다- 잘 대처해 인민들이 안심했다 등등 체제 미화발언을 했다. 같이 갔던 다른 매체 남자 기자는 얼굴을 돌려 비웃음이 명백한 웃음을 짓기도 했다.

 

남측 기업에서 공장직원들에게 초코파이를 주면, 자기 업체의 직원들에게만 주는 게 금지되어 있어, 개성공단에 들어온 기업에서 일하는 직원 모두에게 주어야 한다고 했다. 여직원들은 거기서 받은 초코파이를 먹지 않고 전부 집으로 가져간다고 했다. 집에서 굶주리고 있는 가족들 때문에. 이런 사정을 아는데 북한 사회를 미화하니, 기자들도 웃을 수밖에 없었다.

 

관리자가 “거 기사님들은 다 학교를 어데 나오셨습네까?” 라고 물어봐서 “연세대요”, “숙명여대요”이렇게 대답하면서 “아십니까?”라고 물으니 “알디요. 숙명여대, 리화여대, 고려대학교, 전남대학교, 다 알디요.”라며 한 때 학생운동이 극렬했고, 그 중에서도 NL계들이 총학을 주도했던 학교 이름부터 대답해 속웃음을 짓기도 했다.

 

내가 가는 곳마다 관리자로 있던 북한측 사람들이 “거 기사님은 어디 신문 기사님이십네까? 굥향신문 기사님이십네까?” 라고 물었다. 그럴 때마다 난감하기 그지없었고, 짧게 “아닙니다”라고만 대답하고 자리를 피했다. 왜냐하면 가기 전에 교육받은 게 있기 때문이었다.

 

개성공단에 도착하기 전, 차 안에서 교육 받은 건 우리나라에서 발간하는 신문이나 잡지는 들고 들어갈 수 없다며 보관을 요구했었고, 또 거기서 아무한테 말을 걸거나, ‘아줌마’, ‘아저씨’, ‘아가씨’ 등의 용어 사용은 자제해 달라고 했다. 일종의 비속어 내지 상대에 대한 폄하 발언이라고 했다. 북한에서는 식당 서비스 하시는 분들을 부를 땐 ‘선생님’이나 ‘봉사자님’ 등으로 부른다고. 막상 와보니 북한사람들이 먼저 말을 걸어왔고, 대화를 잘 이어갔다.

 

개성공단에서 일하는 북한 사람들은 북한 사회의 엘리트들이어서 그런지, 영어를 정말 잘했다. 영어로 안내 설명을 하면 억양과 발음이 유치원 때부터 영어를 배우는 남한 사람들이 부끄러울 정도로 훌륭했다.

 

점심식사를 한 평양식당의 봉사자들은 모두 치마 길이가 깡똥한 핑크계열의 한복을 입고 있었는데, 엄청난 미인들이 많았다. 그리고 평양에도 성형 열풍이 분다더니, 쌍꺼풀 수술한 여봉사자들이 정말 많았다. 남한 사회와 다를 바 없구나 싶다가도, 생전 처음 먹어보는 식감의 음식이 나와 봉사자에게 물어보니, 북한 사투리가 심해 제대로 알아먹지 못해 수첩과 펜을 주면서 적어달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 ‘소천엽’이라고 했는데, 그게 무엇인지 아직도 알지 못한다. 다만 쓰는 글과 언어가 같은 우리 민족임은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고, 친밀감은 말할 것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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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시작을 어디서 하느냐는 매우 중요하다

 

아무래도 여행 아닌 여행 같은 취재다 보니 평소 회의실에서 마이크 대고 말만하던 최고위원들과 가까이 이야기할 기회도 있었다. 지금은 충남도지사인 안희정 최고위원이 개성공단 주변을 둘러보던 중, 몇 몇 기자들과 둘러서서 당시 미국 대선 한 달을 앞두고 -당시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 오마마의 당선이 유력했다- 정권 교체와 공직자의 교체에 대해서 특유의 철학적이고, 관념적인 이야기를 한참 했었던 기억이 난다. 그때 느낀 건, 우리가 쉽게 술자리에서 정치인들을 술안주로 쌍욕을 일삼으며 병신 취급을 하지만, 그들은 한 때 무언가에 대해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사유하고, 치열하게 살았던 사람들이라, 말 몇 마디만으로도 배울 부분이 꽤 많다는 사실이었다.

 

이런 점들을 기사로 담거나, 모두 정리해서 기자들에게 풀을 했어야 했다. 나는 그렇지 못했다. 그 일을 해야 한다는 자체를 몰랐다. 이미 출발 전 민주당에서는 엠바고를 단 보도 자료를 발송했고, 최고위원회의에서 당대표와 최고위원들이 하는 발언은 굳이 받아칠 필요가 없는데, 이런 저런 교육과 훈련을 제대로 받지 못한 나는, 풀 취재 담당이 무얼 하는지 명확하게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풀 기자단으로서 해야 할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몇 시에 무얼 타고 당 지도부들이 어디를 가고, 몇 시쯤 북한 땅으로 진입하고, 개성공단에서 열린 회의에서는 무슨 발언을 하고, 또 어디 어디를 돌아보고, 그 중에 송영길 최고위원이 북측 개성공단 안내 여직원과 사진을 찍었고, 그 안내 여직원은 모두에게 인기가 좋았으며, 개성 공단 안에서는 어떤 어떤 기업이 들어와 있는데, 그 중 어떤 기업을 특별히 방문했고, 평양식당에서 우리측 기업인들과 평양냉면, 대동강 맥주를 비롯한 어떤 음식들을 먹었는지, 언제쯤 돌아오는 차에 올라 몇 시쯤 돌아 왔는지를 세세하게 스케치해서 민주당 공보실에 줬어야 했다. 인터넷 매체를 비롯한 민주당 출입 기자들에게 발송해달라고.

 

그게 민주당을 출입하는 펜 기자들을 대표해 풀 취재를 간 나의 역할이었다. 그 역할에 대해서는 해맑은 백치였고, 단순히 개성공단 취재 순간, 그 모든 것들을 즐기기 바빴다. 평소처럼 회의에서 나온 당지도부들의 발언을 하나씩 쪼개 스트레이트 기사로 내기만 했던 나는 개성공단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도 똑같은 기사를 내보냈을 뿐이었다. 나중에 나의 패착을 깨닫고 타사 기자들에게 굉장히 미안했다. 무엇보다 민주당 지도부가 개성공단을 방문한 것도 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 의미를 알았다면 그렇게 형편없는 기사를 쓰거나, 임무를 해태하지 않았을 텐데, 두고두고 아쉬움이 남았다.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지금은 국회의원이었지만 당시는 수석부대변인이었던 유은혜 부대변인이 버스에 타고 있던 기자들에게 “11월에는 평양에 같이 가요!”라고 했다. 이거야 말로 큰 뉴스였다. 그해 7월 고 박왕자 씨가 금강산을 방문 중 피살당한 사건이 벌어져 남북경색 국면으로 접어들 때였다. 민주당 부대변인이 그렇게 말했다는 건, 이미 평양 방문이 어떤 채널로 이야기가 어느 정도 오고갔다는 이야기고, 일이 성사되는 데 있어 8부 능선을 넘었다는 소리였다. 정말 큰 뉴스가 아닐 수 없었는데, 아는 게 부족했던 나는 모든 뉴스에서 ‘물’ 먹었다. 굳이 왜 개성까지 갔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다고 편집국에서도 뭐라 하지는 않았다. 일 못하면 일로나 혼내킬 것이지, 그들도 일의 수준이란 게 없었으니, 일로 시비 거는 일은 없었다. 주로 회식에 참여하지 않거나, 국장 비위에 좋은 말을 하지 않거나, 언론계 선배랍시고 -제대로 된 언론계 경력이 아닌 영업이나 다를 일들을 했던 사람들을 모조리 취재 기자로 써서 선, 후배를 따진다는 게 무의미 했음에도- 선배들의 우스운 행세에 납죽 엎드려 받아주지 않는 일들만이 문제가 되었다.

 

그러니 개성공단에 가서도 한 일 이라곤, 타사 선배가 준 달러로 -개성공단에서는 통화 화폐로 달러를 사용한다- 금강산인지 하는 북한 담배 두 갑을 사와서 최고참 선배였던 나보다 세 살이나 어린 여자 선배에게 선물로 준 일이었다. 한 마디로 ‘담배셔틀’이었다. 그 담배를 건네자 선배의 답례는 “진짜 착하다”라는 기분 나쁜 칭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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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에서의 핵심 주제를 언론계에서는 ‘야마’라고 부른다. 누가 이런 발언을 했고, 오늘 회의에서 무슨 말이 나왔고, 여야 원내대표 회동에서 무슨 말이 나왔다라고 구구절절 말하면 선배들이나 국장들은 보통 “그래서 야마가 뭔데?”라는 답변이 돌아온다.

 

이 야마는 출입처를 오래 취재해 온 기자들의 현안파악 능력과 배경지식이 갖춰진 사람들이 확실히 잘 잡는다. 어느 직종에서건 구력이란 게 왜 중요한지,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명확히 보여준다.

 

고백하자면 그 당시 내가 야마 잡는 수준은 정말 개판이었고, 굳이 정치부 기자로 국회 출입을 안 하던 사람도 잡는 수준이었다. 물론, 국장이라는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국장이라는 사람은 심지어 엉뚱한 사자성어를 문장에 가져다 쓰고, 상식도 모자랐다. 그러니 기사가 전반적으로 수준 낮았다. 게다가 국회출입하면서 정치인들과 쉽게 접하다 보니, 자기가 뭐라도 된 듯한 ‘시건방’이 하늘을 찔렀다. 이건 그 국장이 정도가 심해서 그렇지, 모든 국회출입기자들이 정치인들과 한 공간에 있으면서, 정치인들이 알아서 갑 대우를 해주니, 어깨에 힘이 들어가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어느 곳에서도 겸손하고, 듣는 사람, 전달하는 사람이니 나의 말을 아끼고, 두드러지게 튀지 않도록 하며, 잘 모를 때에는 가만히 듣는 게 최선의 자세임에도, 이 모든 걸 배우지 못했고 오히려 '당당하게 하라!', '기죽지 마라!' 라고 배웠으니, 당시 내 모습이 얼마나 꼴불견이었는지, 다시 생각하면 이불 속에서 하이킥 백 만 번은 할 노릇이었다.

 

국정감사 기간에도 각 주요 상임위 별로 취재를 가야 하는데, 국장부터가 그렇게 취재하고 기사 쓸 줄을 몰랐으니 오로지 아침회의와 정론관에 죽치고 앉아 들어오는 기자회견과 브리핑 내용만 받아 쓸 뿐이었다. 그리고 각 의원실 별로 배포한 보도 자료나 가져다 베낄 뿐이었다. 뿐만 아니라 대변인들이 브리핑과 논평을 하고 난 후에도 정론관 밖에서 기자들이 많은 질문들을 해대는데 -이걸 백브리핑이라고 한다- 난 한 번도 이걸 챙기지 못했었다. 한 삼 개월이 지난 후에야 챙길 수 있었다.

 

 

 

3. 만나서 기분 더러웠고, 다시는 보지 말자

 

출입한 지 삼 개월째 되니 인턴기간 3개월에서 일 개월 줄여주고 수습기자로 발령을 내준다며, 인턴 월급 50만원에서 100만원으로 올려준다고 했다. 그렇게 4개월 꾸역꾸역 일을 해오다 12월 시상식 가까워서 일을 그만 둘 뻔 했었다. 실제로 그만 둔다고 했다. 그날은 국회 외교통상통일상임위원회에서 한미FTA 비준안 상정을 위해 당시 여당 소속이었던 박진 위원장과 한나라당 위원들이 회의실 문을 잠그고 날치기 처리하는 일을 벌였다. 그러자 야당에서는 해머까지 들고 와서 문을 부수고, 국회 전쟁이 일어난 날이었다.

 

회사 구성원들 사이에서 겉돌고, 타사 기자들과 잘 어울리던 나를 회사차원에서도 곱게 볼 리 없었고, 국장과 죽이 잘 맞았던 회사 선배였던 동영상 촬영 편집 기자하고도 갈등이 심했다.

 

당장 그날 회사에서 주최하는 장한 한국인인지, 아름다운 한국인인지 뭔지 하는 시상식을 한다며, 공군회관으로 오라고 했다. 와서 시상식 내용을 기사로 쓰라고 했는데, 도저히 창피해서 그 일 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그리고 식사 자리에서나, 잠시 쉬는 시간에 국회 기자실 여직원들과 함께 있으면서도 “여기 다 처녀 아니잖아?” 라면서 성희롱에 가까운 음담패설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그들을 그냥 지켜보기에도 지쳤었다.

 

그래서 “그만두고 싶다” 하고 귀가한 적이 있다. 다음 날 국회로 다시 찾아가 입사 3개월 차에야 지급 받고 한 달 조금 넘게 쓴 노트북을 국장에게 반납하려고 했다. 국장은 의외로 나를 잡았다. 

 

“솔직히 이전 애들이 국회를 못 버티고 금방 나갔는데, 너는 한 2년 정도 더 있었으면 좋겠다. 이제 국회도 안정화 되었고, 이대로 갔으면 좋겠다. 오늘 하루 집에 가서 쉬고 다시 생각하고 낼 출근해라” 라며.

 

그러면서 “너 아직 멀었어. A가 훨씬 글도 잘 써” 라는 말을 덧붙였다. 기사를 못 쓴다는 건 기분 나쁜 일은 아니었으나, 나를 그렇게 밖에 못 가르친 사수였던 본인 책임인 줄은 모르고 거기다 다른 사람과 비교까지 하는, 금도를 모르는 인간의 형편없는 실체를 다시 한 번 확인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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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일 있기 한 달 전, 한나라당 출입 기자로 다른 매체에서 국회 출입하던 여기자가 회사가 망하고, 이곳으로 이직한 참이었다.

 

어쨌든 오전에 국회를 나와 한참을 혼자 돌아다녔던 것 같다. 오후에 국회에서 만나 정이 들었던 후배 기자를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다시 일하기로 결정했다. 일단 어디 갈 곳이 없었고, 경력으로 이직을 한다해도, 경력 자체가 6개월도 아닌 4개월은 턱도 없는 일이었다. 일 년이나 이 년은 버텨야 어디 이력서라도 내밀어 볼 일이었다. 부모님이 제일 걸렸다. 국장에게 문자를 보냈다.

 

“국장님 죄송합니다. 다시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잡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라고 보냈다. 그리곤 열심히 하라는 답장이 왔던 것 같다. 나중에 알고 보니 국장이 국회에 출입하던 동영상촬영, 편집기자와 한나라당 출입기자에게 “야, 얘 웃기다. 내가 언제 잡았다고? 다시 출근한단다”라고 이야기를 했다는 것이다.

 

필요할 땐 거짓말과 사원들 사이의 이간질, 비하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몇 개월이 지나 회사 구성원들은 모두 알고 있었지만, 모두 저마다 각자의 사정과 생활 때문에 참고 회사에 다니는 형편이었다.

 

그렇게 12월이 지나고 1월이 지났다. 1월 음력 설을 지나 2월 중순, 나는 정말로 사표를 쓰고 나오게 되었다.

 

국장이 당시 한나라당의 친박계였던 -당시는 친이계와 친박계 구분이 명백했다- 한 여성 의원과 어설픈 일로 설전을 벌인 것이다. 국장이 기사를 썼는데, 사실관계가 틀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여성의원이 기사를 내리거나 정정해달라고 하자, 국장은 못 해주겠다며 설전이 오고갔다. 오히려 국장은 제목을 아주 자극적으로 뽑아 기사를 썼고, 지금은 없어진 통신사 포털 메인에 배치가 되었다. 그 여성 의원 측에서는 더 이상 문제 안 삼았는데, 분을 못 이긴 국장은 다음 날 아침 국회 식당으로 불러내 보도자료 같은 걸 주었다.

 

그 여성의원과 벌인 설전을 비판하고 규탄하는 내용이었다. 그걸 몇 몇 한나라당 출입기자들에게 주며 기사를 써달라고 부탁했고, 나에게는 민주당 부대변인이나 누구에게 주면서 논평을 좀 내달라고 말해달라는 것이었다.

 

기가 찼다. 안 된다고 그 자리에서 자르니 국장이 화를 냈고, 그 후로 며칠간 냉랭하게 보냈다. 나로서도 상사에 대한 예우를 조금도 해주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 주 토요일 회사에서 업무를 하는데 주간지를 창간할 예정이니 주간지용 기사를 쓰라고 하였다. 내용이나 주제는 상관없이 정치기사면 된다고, 몇 장 이내로 쓰라고 했다. 쓰다 보니 내용이 많아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물어보니 국장이 “나중에 내용 자르면 되니까 그냥 써서 내라”고 했다. 나는 그 말을 믿고 기사분량이 조금 오버된 채로 제출했다. 그리고 월요일 국회에서 일하고 있는데 부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너 왜 이렇게 분량을 못 맞춰 내니?” 라고 물어 “조금 넘쳐도 국장님이 편집과 교정 볼 때 잘라주신다고 했는데요”라고 말했다. 얼마 후. 같이 국회에 있는 동영상촬영, 편집 기자에게 회사로 들어오라는 호출명령이 내려졌다.

 

회사에 들어가니 국장이 씩씩거리며 회의실에 앉혀두고 소리 소리를 지르며 “내가 언제 잘라 준다고 했어?” 부터 시작해, 노발대발하면서 온갖 인신공격성 발언을 해댔다. 몇 마디 반박하다가, 더 이상 말이 통하지 않음을 느끼고 언성을 높인 끝에 사직했다.

 

사직하고 일주일간 받지 못한 급여는 그대로 떼였다. 이후에 급여 문제로 연락을 하니 국장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노동청에 신고도 넣었으나, 제대로 이행되지 않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퇴직하면서 마지막 한 달치 월급과 퇴직금을 못 받은 사람도 있었다. 그 사람은 노동청에 신고해서 지급 판결을 받았는데도 못 받았다고 했다. 나도 비록 6개월이지만 재직하면서 4대 보험 가입이 안 돼 있었으니, 그 회사의 임금 지불 문제라든가, 기본적인 경영의 투명성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형편없었다.

 

어쨌든 기자로서의 첫 발을 내 디딘, 첫 직장과의 인연이 그렇게 더럽게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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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