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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트리히 북스테후데라는 인물이 있었다. 바로크 음악의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인물이다. 서양 고전음악 오르간 1인자! 이 사람은 뤼베크의 성 마리아 교회의 오르간 주자였다. 여기서 뤼베크라는 도시의 역사를 알아야 성 마리아 교회 오르간 주자의 위상을 이해할 수 있다.

 

뤼베크는 중세 유럽의 상인 조합인 그 유명한 '한자동맹'의 중심지였다. 한자동맹이 전성기일 때 유럽에서 가장 잘 나가는 건축 양식은 고딕양식이었다. 한자동맹이 벌어들인 그 많은 돈으로 뤼베크는 도시 전체를 리모델링했다. 신도시를 지은 것이다.

 

당대의 유행이 고딕이었으니 뤼베크 신도시 건설은 고딕고딕했다... 이 도시는 현재 고딕 양식의 박물관으로 불린다. 고딕을 여기서 한 마디로 정의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그래도 가장 큰 특징을 이야기한다면 하늘(천국)을 향한 열망이라고 설명된다. 하늘을 찌를 듯이 쭉쭉 올라가 있다. 성 마리아 교회도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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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이는 중요하다. 실내 악기인 오르간의 파이프는 천장 이상으로 높이 올라갈 수 없기 때문이다. 뤼베크 성당의 건축 수준과 높이 때문에 이곳의 오르간은 오르간 중에서도 최고급이었다. 오르간은 일개 뮤지션이 사적으로 소유할 만한 물건이 아니다. 오르간 자체가 값비싼 건축물이며 교회건축의 일부다.

 

뤼베크 성당의 오르간 주자는 아무나 될 수가 없었다. 음악가들에게는 꿈의 보직이었다.

 

"어이쿠 저는 뭐 그냥 오르간이나 치며 사는 놈입니다."

 

"허허 뭐 같은 음악인끼리... 그런데 활동하시는 곳이?"

 

"허허 어쩌다보니 뤼베크에서 살고 있네요그려.^^"

 

"뤼... 뤼베크? 따거!"

 

대충 이런 분위기였다. 뤼베크의 오르간 주자는 뤼베크 시에서 주관하는 음악회의 지휘자도 겸했는데 이 콘서트의 명성은 전국구였다. 교회에서 찬송가 부를 때 반주 넣는 사람으로 보면 안 된다.

 

북스테후데는 원래 덴마크 사람이다. 뤼베크의 오르간을 차지하기 위해 뤼베크에 귀화했을 정도로 이 자리는 상징적이었다. 그런데 성 마리아 교회에는 이상한 룰이 있었다. 오르간 주자 자리가 세습이었다.

 

아니 최고의 실력자만 가능한 자리가 세습이라니? 사실 이는 뤼베크 오르간 주자의 위상을 보여준다. 지위 세습은 귀족에게만 가능하다. 성 마리아 성당의 오르간 주자는 정식 귀족은 아니어도 평민 이상이라는 의미였다. 문제는...

 

아들에게 재능이 없으면 어쩌란 말인가? 그래서 세습에는 추가적인 룰이 있었다.

 

'사위 세습도 가능하다.'

 

최고의 오르간을 연주하기 위해서는 전임자의 딸과 결혼해야만 했던 것이다. 북스테후데도 전임 주자의 사위가 되었다. 그리고 그는 딸만 일곱을 낳았다. 과년한 맏딸은 아직도 시집을 가지 못한 채였다. 뤼베크의 오르간 주자를 맡길 만한 재능의 소유자가 나타나지 않은 탓이다.

 

사위 보는 게 인생의 목표가 된 채 늙어간 60대의 북스테후데... 그의 앞에 18세의 헨델이 나타났다! 헨델의 재능을 알아본 북스테후데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야 임마 내 딸은 니꺼다!'

 

물론 생각만 한 건 아니었다. 북스테후데는 헨델을 사위로 받으려는 의지를 숨기지 않았다. 그러나 맏딸 안나 마르가리타는 매력이 없었나보다. 헨델의 야심에 뤼베크는 좁기도 했을 것이고.

 

이때 뤼베크 밑에서 합숙하는 연습생은 헨델 혼자가 아니었다. 훗날 유명 작곡가 겸 음악평론가가 되는 요한 마테존도 와 있었다. 그는 헨델의 4살 선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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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마테존

 

마테존은 함부르크에서 소문한 부잣집 아들이었다(존경받는 집안은 아니었다. 그의 아버지는 악명 높은 세리였기에...). 북스테후데가 보아하니 헨델만은 못한 거 같지만 마테존 요놈도 싹수가 아주 괜찮았다. 그래서 헨델이 심드렁하자 마테존에게도 마수를 뻗었다. 너 내 딸이랑 결혼 결혼 결혼 결혼...

 

음악 공부하러 왔다가 결혼 압박에 시다린 두 사람은 어장 탈출을 결심했다. 둘은 마테존의 근거지인 함부르크로 도망가버렸다. 우리의 북스테후데, 대어를 두 마리를 한 번에 놓치고 말았다. 상심에 빠진 북스테후데! 그런데 2년 후, 이번에는 또 다른 한 청년이 오르간을 가르쳐 달라며 찾아온다. 그 청년의 이름은 요한 세바스찬 바흐. 훗날 서양고전음악의 아버지로 불리우는 그 양반이다.

 

북스테후데는 바흐만큼은 반드시 사위로 눌러 앉히려고 작심했다. 하지만 이미 바흐는 6촌 누나인 마리아 바르바라와 열정적인 연애 중이었다(두 사람은 결혼한다). 결국 바흐도 견디지를 못하고 야반도주했다.

 

북스테후데는 후계자 사위를 앉히지 못하고 사망하고 말았다. 맏딸 안나 마르가리타의 자존감도 오랫동안 상처받지 않았을까? 박복한 그녀는 아버지 사후 괜찮은 오르간 주자와 결혼했다. 아버지의 숙원을 이뤄주고 뤼베크의 오르간 주자 자리도 이었다. 애초에 아버지의 욕심이 너무 과했던 건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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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트리히 북스테후데

 

함부르크로 간 헨델은 특유의 자기중심적인 성격으로 결투 사건을 일으켰다.

 

4살 선배 마테존은 헨델보다 먼저 성공했다. 그가 작곡한 오페라 <클레오파트라>가 함부르크 오페라 하우스에서 공연하게 된 것이다. 이때 하프시코드 반주를 맡은 사람이 헨델이었다. 그런데 헨델은 마테존의 작곡이 자기 취향보다 아래라고 생각했다.

 

'이딴 걸 나보고 연주하라고?'

 

공연 당일. 헨델은 작곡가의 의지를 무시하고 자기 취향대로 하프시코드를 연주했다. 배우도 연주자도, 악보와 다른 연주가 흘러나오니 제대로 대응할 수가 없다. 남의 공연을 망친 거다.

 

이왕 망가진 공연, 열이 뻗친 마테존은 무대로 뛰어올라가 헨델을 끌어내리려고 몸싸움을 했다. 그러나 헨델은 거구에 장사였다. 그는 굴하지 않고 버텨가며 끝까지 제멋대로 연주했다.

 

난리통 속에 공연이 끝나고 멱살잡이를 벌이던 두 사람은 문득 깨달았다.

 

'우리 왜 좋은 칼 놔두고 주먹으로 이러고 있지?'

 

남자들이 칼을 패용하고 결투를 벌이던 시대였다. 두 사람은 검술로 끝짱을 내자며 결투에 돌입했다. 그러나 힘 세고 성격 거친 헨델이 간과한 게 있다. 몸싸움은 힘의 세계지만 검술은 기술의 세계다. 어릴 때부터 좋은 스승 밑에서 배운 부잣집 도련님이 유리하다. 마테존의 승리였다.

 

마테존의 칼은 한델의 가슴을 정확히 찔렀다. 헌데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옷의 단추를 찌르고 칼끝이 휘는 걸로 끝났다. 이쯤 되니 후배를 죽일 뻔한 마테존이나 죽을 뻔한 헨델이나 정신을 차리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결투는 이렇게 끝났다. 두 사람은 화해하고 평생 친구로 지냈다. 어떤가, 이 양반들 '클래식 음악가'의 이미지와는 좀 다르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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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발소집 아들 헨델도 머리를 자르려면 남의 이발소에 갈 수밖에 없었다. 그는 함부르크 이발소집 딸에게 반하고 말았다. 그러나 사랑의 요철은 웬만해선 잘 맞지 않는 법. 그녀는 헨델을 마음에 두지 않았다.

 

'음악으로 승부해주지!'

 

헨델은 혼신의 힘을 다해 사랑의 음악을 작곡했다. 그리고는 그녀에게 악보를 선물로 주었다. 연애편지가 아니라 연애악보인가? 음, 연애편지를 줬어야했다. 작곡을 배운 적 없는 이발소집 아씨에게 악보는 사랑의 메시지가 아니라 그냥 콩나물밭이었다.

 

헨델은 며칠 후 ‘이만하면 마음을 돌렸겠지’ 싶은 마음으로 이발소를 찾아갔다. 마침 아가씨는 머리를 손질하던 중이었다. 헨델은 사랑하는 여인이 머리를 하는 모습을 훔쳐보았다. 오 러블리... 그러나 곧이어 멘탈파괴를 당하고 만다. 그녀는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헸거든.

 

"아빠 거기 헨델이 갖고 온 악보 몇 장만 찢어주세요. 머리카락 좀 쓸어담게."

 

헨델은 퍽 처참한 방식으로 최초의 실연을 당하고 말았다. 그는 함부르크를 떠나 고향 할레로 돌아왔다. 추잡한 격투극과 실연의 추억만 남기고.

 

할레 귀향은 당연했다. 작곡가로서 슬슬 커리어를 시작해 보려면 후원자인 영주님이 계신 고향이 제일 편하잖겠는가. 그러나...

 

헨델이 열심히 작곡을 한들, 영주님이 마련해 준 할레의 실내악단은 그의 성에 안 찼다. 실력 없는 연주자들과 구식 악기는 그의 음악을 100% 구현하지 못했다. 헨델은 이런 걸 참을 만큼 느긋한 성격이 아니었다.

 

큰 물!

 

그는 큰 물을 원했다. 헨델은 이탈리아로 음악 유학을 한 번 더 떠난다. 왜 이탈리아냐 하면, 오페라 때문이었다.

 

당시 오페라는 대중적 인기를 얻는 흥행사업이었다. 이탈리아는 오페라의 고향이다. 요즘으로 치면 헐리우드 블록버스터랄까? 헨델은 헐리우드로 영화 유학을 떠난 것과 같다. 그는 이탈리아에서 대중을 사로잡고 감동과 쾌감을 주는 기법을 착실히 익혔다. 그리고 호승심이 발동했다.

 

'과연 이탈리아에서도 내가 통할까?'

 

20대 초반의 헨델은 오페라 <로드리고>를 이탈리아아로 작사, 작곡했다(확실히 이 양반 공부도 잘 했다). 피렌체에서 공연된 <로드리고>는 흥행에 성공했다. 헨델은 대중 작곡가로 참 빨리도 명성을 얻었다.

 

헨델은 마케팅의 차원에서도 타고난 감각을 자랑했다. 그는 자신의 인지도를 높이기 위해 기회가 있을 때마다 건반악기 연주 도장 깨기를 시전했다. 뉴스의 주인공이 되는 것, 그리고 지속적으로 뉴스에 노출되는 것 만한 마케팅은 없다.

 

독일에서 온 젊은이가 이탈리아 전역에서 도장깨기를 하고 다니자 이탈리아 본토 젊은이 하나가 나섰다.

 

"내 선에서 정리를 하겠다."

 

오오 그의 이름은 도메니코 스카를라티. 이 양반도 훗날 위대한 작곡가가 된다. 그의 아버지 역시 유명한 오페라 작곡가이기도 했으니, 스카를라티와 헨델의 대결은 상징성이 있었다. 연주 대결은 어쩐지 이탈리아 대표와 독일 대표의 싸움처럼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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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이 커졌다. 이 역사적인 대결은 기어이 국왕 급의 신분인 추기경 전하의 저택에서 벌어지고야 말았다. 이 때 헨델의 나이 24세. 결과는 미묘했다. 하프시코드 연주는 스카를라티의 승리였다. 오르간은 헨델이 이겼다.

 

대결 이후 두 사람은 화해하고 평생 서로를 존경하면서 살았다고 하는데... 글세. 겉으로만 그랬다. 실은 둘 다 시합 결과에 납득 못 했다. 예상컨대 추기경 전하께서 좋게 좋게 끝내기 위해 비긴 걸로 채점하지 않았나 싶다. 앞으로 스카를라티는 헨델의 대중적 인기를 질투하게 된다. 물론 헨델은 그 사실을 몹시 즐겼다고 한다.

 

헨델을 질투한 사람은 많다. 대표적으로는 보논치니가 있다. 헨델은 미움받는 걸 사랑했다. 성공한 사람만이 미움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음악계를 들쑤신 헨델은 독일에 돌아왔다. 이제는 그도 취직이란 걸 해야 했다. 물론 이미 명성이 있었던지라 아무 자리에나 만족할 순 없었다.

 

과연 그는 최고의 직장을 찾았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