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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선천적인 무리동물이다. 공동체는 물고기에게 물과 같은 것이다. 인간은 배제당하고 살 수 없다. 원시 부족에서도 그리스 도시국가에서도 추방은 사형 바로 아래 단계의 형벌이었다. 더군다나 스피노자는 유대인이었다. 17세기 유럽에서 유대인이 유대 사회에서 추방된다면 그에게는 사회라는 것이 삭제된다.

 

절대적 고독이 엄습했다. 공동체가 온전한 나 자신이어야 하는 '개인'을 위협하면 어떡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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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조영래의 <전태일 평전> 중 일부다.

 

"우리들은 대개 어렸을 적에 제각기 어떤 종류의 철조망을 넘은 기억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평생을 통하여 끊임없이 철조망을 넘나든다. 남의 과수원에서 풋사과를 따먹기 위하여 탱자나무 울타리를 넘어 들어가다가 팔다리에 온통 가시자국이 나 본 사람, 돼지먹이의 맛을 잊지 못하고 미군부대의 철조망에 개구멍을 내고 기어들다가 등에 총탄을 맞고 죽어간 어떤 아이의 슬픈 소문을 들은 기억을 가진 사람들은, 철조망을 넘는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잘 알 것이다.

 

무엇엔가에 이끌려 또는 떠밀려 거기까지 온 우리들을 가로막고 버티고 선, 저 완강한 철조망 앞에서 어떤 사람들은 풀죽어 되돌아선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넘는다. 아니, 넘을 수밖에 없다.

 

철조망, 그것은 법이다. 질서이다. 규범이며 도덕이며 훈계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억압이다. 겹겹이 철조망을 둘러치고 그 속에서 무엇인가를 지키려는 사람들은, 철조망을 넘어서려는 사람을 짓밟고 그 쓰러진 얼굴 위에다 침을 뱉는다. 쓰러져 짓밟힌 인간의 이지러진 얼굴 위로 고통스런 죄의식의 올가미가 덮어씌워진다.

 

철조망을 넘는 과정은 무뢰한으로 전락하는 과정, 법과 질서의 테두리 밖으로 고독하게 추방되는 과정, 양심과 인륜을 박탈당한 비인간으로 밀려나는 과정이다.

 

그것은 동시에 인간으로 회복되는 과정이기도 하다. 오직 스스로의 힘으로, 그 어떤 법률과 질서와 도덕과 훈계로도 가로막을 수 없는 자신의 삶의 권리를 주장하는 과정이다. 그것은 철조망 앞에 결박당하여 의식이 마비되기를 거부하는 인간의 생명력, 인간 의지의 표현이다."

 

유대 사회는 먼저 스피노자를 회유했다. 이제라도 되돌아올 수 있다. 스피노자는 거부했다. 그 다음에는 협박이었다. 어떤 일이 벌어질 지 아는가? 스피노자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스피노자를 잃을 수 없었다. 한 번 잃으면 유대교의 교리를 짓밟을 인간이었다. 이번에는 뇌물이었다.

 

스피노자는 자신의 철학을 입다물고 살기만 하면 평생 두둑한 연금을 받을 권리를 제안받았다. 그는 이마저도 거절했다. 다음 순서는 암살이었다. 열렬한 유대교 신자였던 젊은이가 원로들에 이끌려, 신앙을 증명하기 위해 스피노자를 습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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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만다행으로 스피노자는 날씬했다. 암살자의 비수는 그의 옷을 뚫고 들어가, 몸을 피해 다시 옷을 뚫고 나왔다. 스피노자는 암살자를 증오하지 않았다. 오히려 신기해했으며, 조금은 불쌍하게 여겼다. 그의 입장에서는 인간이 이렇게 어리석을 수도 있다는 게 놀라울 뿐이었다.

 

그렇잖은가? 그의 열렬한 신앙대로 야훼가 실재한다면 어차피 스피노자는 영원한 지옥불에 떨어질 것이다. 신앙이 깊을수록 속세에서의 보복은 의미가 없어지는데, 그 깊은 신앙을 증명하기 위해 신앙과 동떨어진 행동을 하다니.

 

스피노자는 칼에 훼손된 옷을 평생 보관해 걸어두었다. 그는 가끔식 옷을 보며 세상에는 이성이 없어 뵐 정도로 어리석은 인간도 있음을 상기했다. 그래서 그는 말이 안 통하는 사람은 그냥 내버려두었다. 이 사람의 성격이 이렇다.

 

암살마저 실패하자, 마침내 스피노자는 종교재판에 끌려갔다.

 

유대 커뮤니티가 보장받은 자치권은 네덜란드의 법령을 크게 거스를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재판과 집행이 가능했고 조선시대 식으로 말하자면 '멍석말이' 정도의 고통과 모욕을 줄 수는 있었다. 물론 유죄일 경우에는.

 

좌불안석인 것은 유대 사회의 권력자들이었다. 피의자 스피노자는 당당하고 침착하게 요구했다.

 

"인간사에 개입하는 인격신이 존재한다는 증거를 제시하라."

 

"이 법정이 나를 독실한 유대교인으로 만들고자 한다면, 마땅히 법정이 나를 설득하는 데 성공하라."

 

스피노자에게 논파당하며 꿀 먹은 벙어리가 된 법정은 동문서답을 했다.

 

“인격신(야훼)의 존재를 의심한 게 사실인가?”

 

다시 말해 그대가 악마인 게 사실인가? 동문서답이었다. 법정은 몰아넣기식 우기기 외에는 다른 전략을 찾지 못했다.

 

"야훼를 부정하는가?"

 

유죄판결을 받지 않으려면 그렇지 않다고 하면 된다. 집단이냐 개인인가. 개인은 자기 자신이기 위해 어떤 것까지 감수할 수 있는가? 스피노자는 직선으로 돌을 던졌다.

 

"나는 야훼를 부정한다."

 

이로써 재판은 유죄판결로 매조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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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는 유대 교회로 끌려가 교회 문간에 배를 깔고 엎드림 당했다. 유대 커뮤니티 구성원 모두가 그를 발로 밟고 실내로 입장한다. 의무였으므로 이 중에는 그의 혈육도 있다.

 

모두 입장한 후 마지막 남은 스피노자가 실내로 끌려간다. 그리고 가운데의 촛불을 보게 한다. 어떤 촛불인가? 커다란 대야에 도축한 짐승의 피를 담아놓고 그 위에 검은 색 양초를 띄웠다. 하나가 아니라 참석자 수만큼 띄우는데 회당 안은 빛을 차단시켰기 때문에 촛불로만 밝혀진 상태다.

 

촛불이 상징하는 것은 스피노자의 영혼이다. 다 함께 저주의 제문을 외고, 참석자들은 차례로 하나씩 자기 몫으로 할당된 촛불을 끈다. 마지막 촛불이 꺼지면서 완전한 암흑이 오는데, 스피노자의 영혼이 소멸되었음을 의미한다. 우리나라 무속에서는 영살(구천을 떠돌며 민폐를 끼치는 영혼이 끝내 저승에 가지 못할 때 최후의 수단으로 혼을 없애는데, 무당들도 금기시한다)에 해당한다.

 

다음은 의식이 끝날 때까지, 스피노자가 자신이 속한 사회 구성원 전부의 합창으로 들은 저주의 내용이다. 심한 정도를 넘어 전율적인 수준이다.

 

“지도자들은 우리가 선언하는 그 순간부터 스피노자를 파문하고 이스라엘 백성 안에서 축출하기로 결정했다. 천사들의 결의와 성인들의 판단에 따라 신과 신성한 공동체의 승인을 받아 631개의 계명이 쓰여 있는 이 신성한 두루마리 앞에서, 우리는 바뤼흐 스피노자를 파문하고 저주하고 비난하며 제명하고 추방한다.

 

여호수아가 여리고성을 저주해 무너뜨린 그 저주와 엘리사가 소년들을 저주한 그 저주를 받고(곰 두 마리가 나타나 엘리사를 조롱한 아이들을 찢어죽인 사건을 말한다) 율법서에 쓰인 그 모든 저주를 받으라. 낮에 저주받을 것이며 밤에 저주받을 것이다. 잠잘 때 저주받고 일어날 때 저주받으리라. 이 책에 적힌 모든 저주가 그에게 덮쳐지리라.

 

하나님께서 그의 이름을 하늘 아래에서 지울 것이오며 율법서에 쓰인 모든 저주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모든 부족과 사람들을 악에 빠진 그로부터 떼어놓으리로다. 주여 그에게 파멸을 내리소서. 어느 누구도 그와 대화하지 말 것이며 어느 누구도 그와 글로써 교제하지 말 것이며 그에게 친절해서도 안 되며 그와 한 지붕 아래 머물러서도 안 되며 그의 가까이에 가서도 안 되며(거리까지 명시했는데 3큐빅, 대략 1미터다) 그가 쓴 책을 읽어서도 안 되느니라...”

 

이렇게 제명과 추방이 완료되었다.

 

이렇게 심한 저주를 받은 철학자는 역사에 없다. 이 마저도 스피노자에게는 가벼운 시작에 불과했다. 17세기 유대교의 파문 의식이 이다지도 비인간적이었단 말인가? 그렇지는 않다. 스피노자의 경우가 특별히 심했다.

 

유대교 사회는 스피노자를 상대로 한 논쟁에서 전패 당했다. 논파당했다는 것은 곧 어느 정도는 설득되었다는 의미다. 그들은 스피노자의 논리가 옳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집단적으로 탈출하기 위해, 또한 스스로의 신앙을 집단에 증명하기 위해 기꺼이 광기를 뒤집어썼다. 모두가 공범이 되는 데 성공하면 피해자만이 주범이 된다. 폭력의 수위가 높을수록 안락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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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는 좌절하거나 분노하지 않았다. 외려 그의 반응은 심드렁한 편에 속했다. 등허리가 밟히느라 척추도 아프고 빈정도 꽤 상한 모양이지만 이 모든 고초를 간단하게 정리했다.

 

'이제 자유다.'

 

스피노자는 자신을 저주하고 추방한 이웃들에 적개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는 실로 놀라운 정신력과 차분함의 소유자다. 스피노자는 인간을 어디까지나 이해와 존중의 대상으로 보았다. 그들에게는 그들만의 이유가 있었으리라.

 

“나는 인간들의 행위에 웃거나 울지 않으며, 또한 증오하지도 않는다. 다만 이해하려고 노력할 뿐이다.”

 

스피노자 이후의 철학자들은 그의 고귀한 정신적 태도를 흠모함과 동시에 강력한 질투심을 느꼈다. 이런 일을 당하고도 아무렇지 않게 평온한 상태를 유지하고 세상에 대한 두려움조차 느끼지 않은 철학자는 없다. 논리는 고군분투하면 조직해 낼 수 있지만 그의 우아한 성정은 원한다고 훔칠 수 있는 게 아니다. 이때 스피노자의 나이 24살, 1656년이었다.

 

스피노자는 불과 20대 초반에 자기 사상의 얼개가 형성되었음을 느꼈다. 스피노자의 파문은 집단이 아닌 개인이 탄생한 순간이다. 우리가 누리는 근대 개인주의는 '개인 스피노자'와 함께 태동했다.

 

스피노자는 유대인들에게 버림받은 유대인, 철저한 외톨이가 되어 칩거할 곳을 찾아다녔다. 그는 4년 후 1660년 라인 강변의 조그만 마을 레인스뷔르흐에 장기 체류하기로 결정했다. 이곳에서 자신의 철학을 체계화하고 발표할 생각이었다.

 

스피노자는 서양 철학의 도그마와 종교의 모순을 차분히, 그러나 냉혈하게 포위섬멸한다. 이런 면에서 그의 철학은 '야성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동시에 고상하다. 스피노자는 공포에 질리지도 않고 흥분하지도 않는다.

 

철학자들은 시대를 초월해 서로 경쟁심을 느끼지만 스피노자의 지성 앞에서는 태도가 달라진다. 스피노자를 흠모하거나, 외면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원색적으로 비난한다. 게오르크 헤겔의 경우는 알아서 고개를 숙였다.

 

"스피노자주의자가 아니면 철학자가 아니다."

 

앙리 베르그송도 자진납세한 철학자 중 하나다.

 

"모든 철학자에게는 두 명의 철학자가 있다. 자기 자신과 스피노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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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리 베르그송(좌) / 게오르크 헤겔(우)

 

다시 1660년. 이제는 유대사회 정도가 아니라 전 유럽이 스피노자를 혐오하고 저주할 차례였지만 상관없었다. 아니 어쩔 수 없었다.

 

'내 생각이 그러하기 때문'이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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