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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하기 참 힘들다. 그래도 해야 한다. 지적 활동에도 영양소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신진대사에 필요한 3대 영양분이 단백질, 탄수화물, 지방이라고 한다면 SNS나 그 외 스마트폰으로 볼 수 있는 글은 지방질에 해당할 것이다.

 

맛 좋고 필요한 영양소지만 지나치면 별로 좋지 않다. 동물성 지방산은 혈관에 들러붙어 혈액의 원활한 공급을 가로막으며, 배둘레햄의 두께는 날이 갈수록 용문사 은행나무가 되고, 넘치는 기름기는 피부 미용에도 안 좋다.

 

"네 맹랑한 이론에서 그럼, 지적 활동의 탄수화물은 뭐냐?" 라고 물으신다면, 나는 고전과 교양서적이라고 대답하겠다. 탄수화물은 대개 주식(主食)으로부터 섭취된다. 사람이 살면서 이 정도는 알아야 한다는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고 시대마다 차이가 나겠지만, 어릴 적 세계문학전집부터 어디 가서 무시당하지 않을 정도의 교양을 쌓으려면 두루 펼쳐봐야 할 책들이 있다. "얼씨구 그럼 단백질은 뭐냐?" 고 질문하시겠지.

 

아시다시피 단백질은 근육의 원천이다. 기초 체력을 다진 다음에는 울퉁불퉁 근육이 있어야 힘을 쓴다. 무거운 물건들을 번쩍 번쩍 들게 해 주고 여자친구를 안아 올리다가 주저앉지 않게 해 주며, 적재적소에서 힘을 써야 할 때 필요한 두뇌의 근육을 키워주는 게 단백질이라 할 것이다.

 

그래, 그 단백질은 무슨 책으로 메운다냐 하고 물을 때 나는 이 책을 디밀면서 말할 것 같다.

 

 

“이런 책이야. 물살같은 내 머리에도 근육을 만들어 주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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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태 저 <햇볕, 장마당, 법치, 북한을 바꾸는 법>

 

좋든 싫든 북한은 우리의 상수(常數)다. 가끔 애틋하여 어쩔 줄 모르고 만나고 헤어짐에 눈물짓는 동포이면서 무슨 천형(天刑)처럼 '아, 저 시키들 좀 안 봤으면 좋겠다.' 고개마저 돌아가는 이중적 존재이지만, 수십 년간 베갯머리 속 찹쌀처럼 우리와 함께 존재해 왔고 우리의 일상에 영향을 미치며 미래를 천국으로 지옥으로 만들 수도 있는 존재다. 그래서 항상 듣기도 하고 하기도 하게 되는 질문.

 

“우리는 북한을 얼마나 알고 있는가.”

 

80년대 NL 그룹들이 전개했던 북한 바로 알기 운동은 하나의 사기극이었다. 선망했던 북한 보여주기 운동에 불과했고 그들조차 북한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UN 동시가입은 영구 분단 획책 책동이라며 언성을 높이다가 덜렁 북한이 UN에 가입해 버리자 “북한의 영단을 환영한다.”고 어버버거렸던 이들이 어떻게 북한을 제대로 알았겠는가.

 

더 안습인 것은 북한을 불구대천의 원수로 여기는 이들이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이다”는 손자병법을 통째로 무시한다는 것이다. 그들의 머리 속에서 북한은 그저 무협지 속의 사악한 제국 그 자체다. 김정은이라는 악마가 지배하고 인민들은 그 안에서 개미처럼 일만 하다가 굶어 죽기도 하고 밟혀 죽기도 하지만 김정은 대장님 만세만 부르는 미물들일 뿐이다. 빨리 그들을 김정은의 마수에서 구해야 하는 것이다.

 

진실과 사실에 근접한 모든 것들은 대개 그들을 대변한다고 솟아오른 관념의 고개들 사이 깊이 팬 골짜기에 존재한다. 높을 대로 높고 험준하게 솟아오른 북한에 대한 오해 속에서 산이 높을수록 깊을 수밖에 없는 진실의 골짜기를 향해 트래킹 하고, 때로는 밧줄을 타고 자일을 박으며 내려가 그 바닥에 발을 디딜 수 있는 힘을 지녀야 할 텐데 이 책은 그 힘을 제공하는 단백질 특식 같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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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히 꽁트로 설명해 보자. 남과 북의 접점으로 수년 동안 충실히 기능했던 개성공단을 예로 들어 본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이 개성공단 설립에 합의한 후 남과 북의 실무진이 만난 상황이다.

 

남 : 공단 만들고 공장 유치하려면 지적도가 필요합니다. 좀 주시죠.
북 : 지적도라는 게 뭐입네까?
남 : 사업 장소를 명확히 하고 그 지역에서 안정적으로 영업할 수 있도록 지정해야 기업이 들어올 거 아닙니까? 토지의 위치, 소유, 용도, 소유자 정보가 들어간 서류죠. 지적도라는 말을 북한에서는 안 쓰는 모양인데... 뭐라고 합니까 그럼?
북 : 아 이 공화국에서는 모든 토지는 국유입네다. 기래서 그딴 거 없습네다. 일제 때 있던 토지문서도 죄 없애 버렸시오. 지적도며 등기부며 다 기래요.
남 : 아니 뭐라구요?

 

이종태 기자의 말에 따르면, 실제로 남북 협력이나 물자 지원 과정에서 북한 어느 지역에 비료를 주고픈데 정확하게 그 지역 협동 농장의 위치를 지정할 수가 없는 상황에서는 조선 시대같은 표현이 등장한다고 한다.

 

“강원도 고성군 온정리 개울 건너편 1000평”

 

개성에서도 처음에는 비슷하지 않았을까.

 

"경계선으로부터 언덕 두 개 넘어 100평, 그 옆 소나무숲의마지막 나무 옆 50평"

 

북한은 남한과의 접촉 과정에서 상당히 많은 것을 깨닫고 변화한다. 이종태 기자가 주목하고 있는 것은 바로 법이다. 지적도는 커녕 세금까지도 없애버렸던 북한에 외부 영향이 파고들면 들수록, 그 영향에 대응하면 할수록 관련 법이 생겨날 수밖에 없고, 동시에 법은 현실 속 구멍을 넓혀 나간다.

 

토지 국유화 개념을 포기하지 않는 중국 공산당이 토지 이용권을 인정했을 때, 사실상 소유권과 비슷한 개념으로 확대되고 중국의 법은 그 ‘이용권’을 보장하기 위해 진화했듯 말이다. 북한도 다를 것이 없다.

 

“작은 것이라도 명문화된 법 규정이 생기면 보호받을 수 있는 근거가 된다. 법의 보호를 통해 북한 주민들의 권리가 실질적으로 신장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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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개성공단으로 돌아가자. 책을 읽다보면 개성공단을 폐쇄한 박근혜 정권에 대한 적의가 솟아오른다. 남북 평화적 차원이 아니라 안보적 차원에서, 그리고 승공(勝共)적 차원에서 그렇다. 개성공단은 우리에게 강력한 무기였고 북한을 변화시킬 수 있는 지렛대였다. 또 하나의 꽁트를 보자.

 

남 : 기업들로부터 세금은 어떻게 받으실 겁니까?
북 : 세금? 우리 공화국은 기딴 거 없습네다. 기건 낡은 자본주의 사회의 유물이디요. 1974년 1월에 얼마 안 되는 소득세마저 철폐해서 우리 공화국에서는 세금은 이제...
남 : 됐고요. 그럼 기업들한테 돈 안 받으실 건 아니잖아요?
북 : 기러문요 받아야디. 우리도 외국인 투자기업법 및 외국인 세금법을 1993년에 제정하기는 했습니다.
남 : 자 자 그럼 기업들 실적을 들여다보셔야죠? 기업 소득세는 순익을 기준으로 해서 세율이 정해지는데 어떻게 하실 건데요? 그 전문 인력들은 보유하고 계시겠죠?
북 : (머리를 긁적이다가) 기래서 말인데 말입네다. 거 남측에서 한 1~2년 세금 좀 받아 주시면 안되겠습네까? 그리고 우리가 이쪽 인력이 없어서 기런데 좀 세무 회계 전문가 양성 좀 해 주시라요.

 

거짓말 같지만 실화라고 한다. 북한은 개성공단을 통해서 어마어마한 현실과 마주치고 있었고, 이전의 유령 같은 합자가 아니라 피와 살이 되는 교류와 협력을 경험해 갔던 것이다. 남한도 마찬가지다. 남한 기업들은 각양각색의 아이디어를 내서, 동족이긴 하지만 세상 어느 족속보다 이질적일 수 있는 북한 노동자들을 상대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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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기업은 노동자들의 ‘자주 관리’에 상당한 권리를 위임해 버렸다. 생산 공정이 단순할 경우 자재 공급하고 임금만 주면 북한 노동자 대표들이 알아서 ‘자주적으로’ 운영하는 것도 괜찮았다고 한다. 또 어떤 공장에서는 엄격히 작업장을 통제하고 심지어 한국인 직원들을 라인마다 깔기도 했다. 어떤 기업들은 아예 '우리는 가족'을 시전하기도 했다. 기업주와 경영진이 출근시간마다 공장 앞에 나와 도열하여 북한 노동자들을 맞아 주었다는 것이다.

 

개성공단의 남북 공동 아이템으로 각광받은 초코파이만 해도 그렇다. 입주 기업들에 따르면 초코파이는 생산성을 높이거나 연장 근로를 유인하는데 상당한 위력을 발휘했다. 이 점에 대해서도 남북은 생각이 달랐다.

 

북 : 거 자꾸 초코파이 가지고 우리 노동자들 낚시하려 들지 마시라요.
남 : 아니 무슨 말씀을... 좋아들 하잖아요. 성과도 좋은데
북 : 우리 공화국 인민들은 기런 데에 끌리지 않습네다. 차라리 성과 좋은 노동자에게 꽃다발 걸어주고 노력 영웅으로 끌어올려 주시라요. 기거이 도움이 될 겁네다.

 

이랬던 북한 관리들과 노동자 대표들은 몇 년 가지도 않아서 “보다 더 많은 인센티브를 달라.”고 요구하게 된다. 북한을 바꾸고 사람들을 개조하는 수단을 우리가 가진 적이 있었던가. 그 비싼 확성기 휴전선에 대 놓고 꽝꽝대는 것보다, 탈북자 가운데 일부가 하는 것처럼 1달러짜리 삐라에 붙여 뿌리는 것보다, 백 배는 더 효과적이고 천 배는 더 파괴력이 있었던 것이 개성공단이었다. 그런데 이걸 우리 손으로 닫아 버렸다.

 

통일이 되든 교류를 하든 한국의 상수일 수밖에 없고 해결해야 할 문제일 수밖에 없는 북한을 접하고 바로 파악할 수 있는, 돈 주고도 못 살 경험으로 향하는 문을 스스로 걸어 잠가 버렸다.

 

“잃을 것 없는 놈들이 무섭다”면서 북한으로 하여금 “잃을 것이 있게 만드는”, 전쟁 같은 미친 짓을 상상 속에서 지워 버리게 만들 수 있는 기회와 여지를 박차 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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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개성공단에서 자신감을 얻어(그 자신감이 결국 모순을 일으키겠지만), 나진 선봉 지구 등에서 새로운 시도를 계속하고 있고 북한 내부에서는 고모부나 의붓형 우습게 죽여 버리는 김정은조차 어쩔 수 없는 장마당 경제가 불길처럼 번져 가고 있는데...

 

단숨에 이 책을 읽고 아쉬운 마음으로 덮다 보니 결국 이종태 기자의 결론에 동의함과 더불어 냉장고에 들어 있던 맥주캔을 찾게 된다. 열을 식히고 싶지만 그렇다고 소주 먹고 취하고 싶지도 않은 마음, 더운 열보다는 차가운 냉기가 필요해서랄까. 그 결론은 이러하다.

 

“북한이 시장 경제를 발전시키면서 인민들의 자유를 증진시키고 법률로써 사회를 다스려 나갈 때 북한의 변화는 이루어진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북한이 그런 길을 선택할 수 있는 기회와 조건을 만들어 주고 그 길로 유도하는 것이다. 몹시 까다로운 길이지만 유일한 길이다. ”

 
 
 
 

 

 

 
필자의 신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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