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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고사 마지막 세대인 저는 사회와 부모님의 요구와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모든 끼와 잠재력을 억누르고 오로지 훌륭한 회사원이 되기 위해 살아왔습니다. 학창시절 내내 결석 한번 없었음은 물론이요, 16년의 회사 생활 동안 병가 한번 낸 적 없는 제게 새해 첫 출근 날 하늘이 무너지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이 사건은 엉뚱하게도 제가 글을 쓰는 계기가 되었고(국민학교 독후감 이후 제대로 된 글을 써 본 적이 없음) 딴지일보의 필진이 됨은 물론 출판사로부터 계약금까지 받고 출판을 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명문대학을 나온 것도 아니고, 대기업에 다니지도 않는 여러분 주위의 흔하디흔한 40대 사무직 회사원이 어떻게 책을 내고 작가라 불리게 됐는지, 출판기를 써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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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살의 새 아침이 밝아왔다. 갈증만 나게 하는 짧은 신정연휴를 마치고 나가는 출근길은 더욱더 고통스러웠다.

 

“올 한 해도 수고해요. 우리 멋진 남편 파이팅!”

 

러블리한 아내, 격려의 약발은 마을버스를 탄 후 5분까지만 유효했다. 새해 첫날이니까 다른 날보다 조금은 의욕적인 마음가짐으로 회사에 들어섰는데... 어째 분위기가 싸늘했다.

 

< 해외 영업팀장 김xx 보직 해제 / 지원팀 발령 >

 

아니, 대기업도 아닌 주제에 이런 인사 통보를 새해 첫날 사내문서로!

 

도대체 뭘 얼마나 잘못했길래 사전 언질 하나 없이... 이건 혹시 그만두라는 이야기인가?

 

멍한 얼굴의 나를 보고 이것저것 챙겨주던 법무팀장이 담배나 피우러 나가자고 했는데, 다리에 힘이 풀려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하루가 지나갔는지 모르게 지나가고 퇴근 후 아내에게 이야기했다.

 

“여보. 난 말이야. 이직은 하고 싶지 않아. 나쁜 회사와 더 나쁜 회사가 있을 뿐이라고 생각해. 이 인사 조치를 받아들이거나, 퇴사를 하게 되면 다른 일을 해 보고 싶어.”

 

“응. 알았어, 여보. 하지만 신중히 생각하고 결정하자. 우리 나이가 어느덧 43살이야. 당신이 조금 쉬고 싶다고 하면 나도 다시 일을 하도록 할 테니 너무 걱정하지는 마.”

 

“후... 그래. 일단 다니면서 심각하게 고민을 해 볼게.”

 

다음날부터 새로 발령받은 부서에서 기존에 하던 업무 외에 잡다한 업무까지 떠맡게 되었다. 커피 타기와 팩스 보내기, 회의실 청소와 의자 나르기도 포함돼 있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 나는 식당을 하고 싶다는 의견을 아내에게 말했다. 평소 '생활의 달인'과 '한국인의 밥상'을 누구보다 꼼꼼히 지켜보던 터라 몇 가지 아이템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용기가 가상하다기보다 참으로 무모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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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옹기에 돼지고기를 한입 크기로 잘라 묵은지로 감싼 후 옹기 채로 큰 냄비에 중탕을 하면 환상의 맛이 난다고 한국인의 밥상이 알려주었다. 치킨이나 커피 같은 흔한 아이템도 블루오션이 되지 않을까 하는 희망찬 생각을 했었다. 연습을 하기 위해서 옹기를 인터넷으로 주문했고, 필살기로 아껴둔 두 번째 아이템 손가락 김밥의 비법간장을 만들기 위해 한겨울에 포도를 사서 주말마다 간장을 졸였다.

 

“여보, 난 식당은 반대야. 당신이 현영(처제)이처럼 요리 솜씨가 뛰어난 것도 아니잖아. 자기가 주말마다 해 주는 음식들 진짜 맛있어. 그런데 그건 그냥 자취 요리의 연장이야. 그보다 더 큰 문제는, 당신은 식당 일이랑 안 맞아.”

 

“아니 시작도 안 했는데 무슨 초 치는 이야기를 하고 있어? 내가 식당 일이랑 맞는지 안 맞는지 당신이 어떻게 알아? 그리고 너보고 도와달란 이야기 안 할 테니 그냥 넌 굿이나 보고 떡이나 드셔. 백종원처럼 대박이 날지 누가 아냐?”

 

우리 부부는 싸우는 날이 잦아졌고, 대화도 점점 줄어들었다. 이유는 단 하나, 회사에서 받은 스트레스로 인해 싸움닭으로 변한 '나' 때문이었다.

 

아내는 이런 내가 걱정이 되었는지 시골에 계신 어머니에게 상황을 알렸고, 다음 날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어머니가 전화를 하셨다.

 

“와야. 식당 일이 얼마나 힘든지 아나? 회사가 다 그런 거다. 남들도 다 참고 다닌다.”

 

“엄마가 뭘 안다고 그래요? 회사도 안 다녀 봐 놓고서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상관 마세요.”

 

이때의 나는 콤플렉스 덩어리에 신경질 가득한 어린아이 같은 상태였다. 그 누구의 충고도 짜증과 화로 되돌려주는 못난 사람이었다.

 

회사에 가면 후배들은 날 불쌍하단 눈초리로 바라보는 것 같았고, 상사들은 '이제 그만두는 게 어때' 하는 눈총을 주는 것 같았다. 외향적이었던 성격은 점점 내성적으로 바뀌었고, 모든 일에 위축이 되고 급기야는 사람들과 마주치지 않기 위해 3층에서 지하 2층의 화장실을 이용하기 시작했다. 아무도 없는 계단을 통해서 화장실을 다녔고, 내 심리상태도 그렇게 지하 3층, 4층, 5층 아래로 끝없이 내려갔다.

 

회사에서 쌓인 스트레스는 아내에게 풀었다. 회사에서도 집에서도 무의미하고 쓸데없는 존재 같다는 생각으로 가득찼다.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것도 아니고, 대기업을 다니다 명퇴를 당할(?) 수도 없기에 치킨집을 오픈할 자본 같은 건 당연히 없었다. 그렇게 아무것도 안 보이는 미래가 점점 더 현실로 다가오니 연예인들만 걸리는 줄 알았던 공황장애 초기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아점을 해결하기 위해 찾은 코스코트 입구에서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호흡이 정상적으로 되질 않았다. 아내는 오전 11시에 눈물을 흘리며 나에게 회사를 당장 그만두라고 했다.

 

하지만 다음 날도 출근을 할 수밖에 없었고, 그렇게 지옥 같은 5개월이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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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개월 전에 예약한 괌 여행이 팀장의 반대로 취소된 어느 날.

 

“여보. 등산 카페에 2박 3일 동안 자전거로 제주도 일주하는 번개가 떴는데 우리 한번 가보자. 자기 기분도 좀 풀고, 우리 바람 좀 쐬자."

 

몸도 마음도 극도로 지친 상태였지만, 망설임 없이 떠나기로 했다. 이 여행이 터닝포인트가 될 줄은 꿈에도 모른 채로.

 

‘그래. 그동안 와이프랑 소원해진 관계도 좀 풀고. 뭐 사실 다 나 때문이지만. 오랜만에 제주도나 한번 다녀오자. 그나저나 자전거로 하루에 평균 90키로 가까이를 타야 하는데 우리 둘이 가능할까.’

 

그렇게 가벼운 마음으로 떠난 제주도 자전거 일주 여행은 무거운 몸 때문에 극한의 고통을 느끼게 되었다. 첫날 저녁, 낭만이고 나발이고 내가 왜 이런 짓을 했나 싶고 짜증이 치솟았다.

 

다행히(?) 다음 날 오전 비 예보가 있었고, 일행 한 명이 낙오 직전까지 간 상태였다. 옳거니 싶었다.

 

‘같이 하루 빠지던지 해야지. 낭만 자전거 여행하러 온 거지. 해병대 체험도 아니고 이건 뭐...’

 

하지만 둘째 날 아침 식사를 마치고 전의를 불태우며 스트레칭을 하고 있는 아내를 보고 마음을 다잡았다.

 

둘째 날은 날 내친 사장 및 임원과 부장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악으로 깡으로 페달을 밟았다. 다음 날도 힘들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제주도의 풍광이 조금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온몸으로 퍼지는 고통은 점점 심해졌고, 특히 안장에 닿는 민감한 부위의 고통은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다.

 

셋째 날까지 모든 일정을 마치고 나니 이 여정을 함께한 동생들과 아내에게 전우애를(?) 느끼게 되었다. 그들과 함께하지 않았다면 둘째 날 이미 포기했을 것이고, 자전거로 보는 제주도의 참모습을 볼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극도로 예민해진 나의 신경은 더욱 날카로워졌을 테고,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자괴감만 커졌을 것이다. 좋은 사람들과 함께 한 힘들지만 의미 있는 프로젝트를 마치고 나니 확실히 기분 전환이 되었다. 그런데 뒤풀이 자리에서 아내가 함께 한 아이들에게 엉뚱한(?) 말을 했다. 모두들 극도의 성취감을 느끼고 서로를 격려하고 있을 때였다.

 

“애들아. 나이 많은 우리 동갑내기 부부 데리고 하느라 너무 고생했어. 정말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이야. 그리고 우리 남편이 얼굴은 별로지만 글을 엄청 잘 써. 내가 연애편지 보고 반했잖아. 그래서 우리의 제주 라이딩 고군분투기를 글로 써줄 거야”

 

“와우! 형 기대할게요."

 

“오~~오빠. 대단한데? 그런 재주가 있으니 이런 미인이랑 결혼했구나.”

 

내가 사실 독서광이긴 하지만, 초등학교 독후감 이후로 제대로 된 글이란 걸 써 본 적이 없는데??

 

아내를 노려봤지만 '노'라고 말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사실 아내는 식당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나에게 글을 써 보라는 말을 했었고, 난 짜증 가득한 대답을 돌려주었다.

 

“여보! 말도 안 되는 소리 좀 하지마. 글은 아무나 쓰는 줄 알아? 그리고 설사 글 써서 뭐 어쩌자고! 10년 후에 자비 출판이라도 하라고? 그게 지금 무슨 의미야!

 

제주도 자전거 대일주를 마치고 나서인지 근거 없는 자신감과 원천을 알 수 없는 의욕이 생겨났다. 기묘했던 건 그 와중에도 차분함이 유지되었다는 사실이다. 일상으로 돌아온 후, 혼자 책상 위에 흰 종이를 올려 놓고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적어 보기로 했다.

 

‘농구, 요리, 독서’

 

우물쭈물하다 좌천을 당했지만, 지금부터라도 차근히 준비해서 다시는 이런 대접을 받지 않으리라. 농구 선수가 되기에는 나이가 너무 많고, 식당은 두 여자(어머니, 부인)의 어마무시한 반대로 무산되었고, 책을 읽기만 해서는 생활이 유지가 안 된다. 어쩌지? 정말 아내 말대로 글을 한번 일단 써 볼까?

 

‘그래. 일단 제주 여행기를 써 보자. 하루하루 글을 쓰다 보면 10년 후쯤에는 책이란 걸... 아냐ㅋㅋ 무슨 말도 안 되는. 에이.’

 

그런 가벼운 마음으로 쓴 자전거 여행 후기는 너무나 재미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웃긴 것이, 당연히 그 고생을 함께 한 녀석들이 내 글을 보고 무슨 비평을 하겠는가? 그런데 일이 되려고 그런건지, 그들의 호의를 나는 객관적인 평가로 받아들이고 역사 글을 써 보기로 결정했다.

 

왜 하필 역사 글 이냐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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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학교도 들어가기 전, 아버지의 친구들은 사업만 망하면 외판원을 왜 그리들 하셨는지. 아버지는 그 친구와 술만 한잔 드시면 책들(전집)을 그렇게 사오셨다우.

 

“아니. 뭔 책을 또 샀어요? 골고루 좀 사시던가! 맨날 역사책만 사요. 이렇게! 아이고! 속 터져. 쥐꼬리만 한 월급에. 책 읽지도 않으면서.”

 

“우리 큰아들. 장남이 읽으면 된다. 시끄럽다.”

 

어린 나이에도 장남이 뭔지 나라도 이 책을 읽어야 집안의 평화가 유지된다고 생각한 걸까요? 우선 그냥 책이 좋았고, 좁아터진 한옥 집안 구석구석 차이는 게 역사책이었고, 이렇게 전 자연히 역사 덕후로 자랐습니다.

 

무수한 단점 중에서 반가운 새싹처럼 고개를 내민 저의 장점이 하나가 있습니다.

 

어떤 사실이나 현상에 대해서 누구보다 쉽고 재미있게 설명하는 재주는 자타공인입니다. 흠. 흠.

 

이런 연유로 역사를 주제로 글을 쓰기로 결심했습니다.

 

우선 익명성이 보장되는 카페의 자유게시판에 고려시대 '이자겸의 난'에 대한 짧은 글을 올려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생각지도 못한 댓글들이 달렸습니다.

 

‘멋진 글솜씨 엄지 척입니다.’

 

‘참으로 다음 글을 기다리게 하시는 탁월한 글솜씨입니다.’

 

1년에 100권 정도의 책을 읽고, 읽고 싶었던 책의 첫 페이지를 넘길 때는 작은 설렘이 느껴질 정도로 책을 좋아하긴 하지만, 제대로 글을 써 본 적은 없었습니다.

 

놀라움과 기쁨이 충만한 하루하루의 연속이었습니다. 단 한 명이라도 내 글을 기다려 줄 거라는 생각에 퇴근 후에도 글 쓰는 일을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돈이 되는 일이 아닌데도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을 하니 이렇게 신날 수가 없었습니다. 신경질도 줄어들고 예전처럼 아내와 웃고 떠드는 일상도 되찾았습니다.

 

아내에게 카페에 올린 글을 아무 말 없이 보여주었습니다.

 

“오! 이거 재미있다. 어디서 퍼온 글이야?”

 

아내와 친구들은 왜 이런 재능을 이제야 발견했냐며 난리법석을 떨었습니다. 누구나 한가지 재주는 타고난다고 생각합니다.

 

‘이윤추구’라는 오직 하나의 목표만을 위해 개인의 개성과 존엄성 따위는 무시해도 되는 회사 업무는 우리에게 돈은 주지만, 이런 기쁨을 주진 못했습니다.

 

내 글을 기다려 주는 단 한 명의 익명의 상대를 위해서 더 좋은 글을 쓰고 싶었습니다. 스티브 킹과 유시민, 이외수 작가의 글쓰기에 대한 책을 사서 읽었습니다. 그분들의 가르침 중 저는 단 한 가지! 단순명료하게 쉽게 쓰라는 조언만 뇌 깊숙이 각인시켰습니다.

 

글이 하나둘씩 쌓이자 개인 블로그를 개설했습니다. 솔직히 당시의 마음은 ‘파워 블로그’가 돼서, 배너 광고 같은 거 하게 되면 용돈 벌이를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도 있었지만 현실은?

 

첫날 방문자 수가 2명. 아내와 나.

 

그렇게 또 100여일의 시간은 흘러갔습니다.

 

내 글을 읽어 주고 댓글을 달아 주는 사람들이 너무나 고마웠기에 글쓰기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사실 누군가의 글을 읽고 댓글을 달아 준다는 것이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잖아요!

 

단언컨대 댓글이 없었다면 나의 글쓰기는 생각보다 훨씬 일찍 멈추었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러던 어느 일요일 아침. 블로그 방문자 수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6개월 동안 방문자 수가 5천 명도 안되었는데 하루 만에 만 명이 넘어있었고 엄청난 친구 요청이 들어와 있었습니다. 이게 무슨 일인지 싶어 블로그에 들어가 보니 며칠 전에 대형 커뮤니티에 올린 글이 베스트 글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야. 이것 봐라. 내 글이 먹히는구나? 그렇다면 다음은?'

 

딴지키즈라고 하기에는 나이가 너무 많지만, 딴지의 초창기부터 성장 과정을 지켜온 수많은 사람 중의 한 명입니다.

 

오유에서 글이 베오베가 되고 나니, 화이트 스완이 제게 이렇게 속삭였습니다.

 

“네 글은 딴지일보에 기사화될 수 있어. 망설이지 말고 어서 독투에 글을 보내라고! 안되면 마는 거지. 뭘 망설여 임마!”

 

한편 블랙스완은

 

“네가 미쳤구나. 어디 언감생심. 딴지 기사글 못 봤어? 필력들이 장난이 아닌데, 이제 글이라고 써 본지 6개월도 안 된 놈이 어디 언감생심.”

 

지금 생각해보면 웃긴 일이지만 당시에는 몹시나 심각했습니다.

 

약 2주 동안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끝에 독자 투고란에 ‘허난설헌’ 에피소드를 던져 놓고, 누가 볼까 두려워 창을 닫아 버렸습니다. 혹시라도 악플이 달릴까 두려워 매일 들어가 보던 딴지일보에 한동안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사이 이런저런 일로 독투에 글을 올린 일을 까맣게 잊고 있던 금요일 오후. 퇴근 시간까지 남은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강풀의 만화를 볼까 하다 나도 모르게 딴지로 들어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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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기사에 역사 이야기가 올라와 있었습니다.

 

‘어, 이거 뭐지? 허난설헌 이야기네? 어디 내 글이랑 비교해 봐야겠다. 어? 이상하다. 어디서 많이 본 글인데? 오잉?'

 

네! 맞습니다. 맞고요! 제 글이 독자투고란에서 납치가 되어 기사화되었던 것입니다.

 

“여, 여보... 내, 내 새끼가... 내가 손가락으로 낳은 글이 무려 딴지일보에 기사로 채택되었어. 나 지금 손이 떨리는데 왜 말이 잘 안 나오지? 자기도 당장 딴지에 들어가 봐.”

 

이건 마치 대형 출판사와 출판 계약을 맺은 것처럼 꿈 같은 일이었습니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랬습니다. 그 이후, 다른 글이 2번 더 납치되어 기사화되었고, 저는 대망의 딴지 필진이 되었습니다.

 

제 연락처를 보내고 나니 딴지의 담당 기자의 전화가 왔고, 무려 원고료가 제공될 터이니 글을 연재하고 싶다는 겁니다. 짐짓 평온한 척하며 담당 기자와 통화를 마친 후, 전화기를 한참 동안 쳐다보았습니다.

 

‘이거 보이스 피싱 아니겠지? 아냐. 보이스 피싱이라면 조선이나 중앙 정도는 되야지ㅋ 딴지를 팔아먹을 리는 없어. 가만있자. 그나저나 정말 내가 쓴 글로 돈을 벌 수 있단 말이야? 오, 신이시여 어찌하여 저에게 이런 감당하기 힘든 행운을 주시옵니까.’

 

원고료가 입금도 되지 않았는데 연남동의 분위기 끝내주는 파스타 집에서 와이프와 그날의 기쁨을 만끽하였습니다. 한 달 후 원고료를 보니 그날 저녁이랑 비슷하게 나왔다는 게 함정. 딴지에서의 연재는 화폐 단위로 측정할 수 없다며 우리는 매월 18일 딴지의 번영을 기리며 작은 파티를 열었습니다.

 

이후,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어느 순간 짜증과 월요병과 대인기피증이 먼 나라 이야기가 되어 있었습니다. 혹시라도 '이러다 정말 작가가 되는 거 아니야?' 하는 생각이 흑마술처럼 전두엽을 뒤덮기 시작했습니다. 너무나 막연한 생각이었고, 출판을 위해 뭘 어떻게 해야 할지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지도 않았던 시기였습니다.

 

가까운 지인들과 저녁을 먹는 자리였습니다. 의례적인 인사를 마치고 대화의 주제는 자연스레 나의 딴지일보 입성기가 되었죠! 므흣.

 

“이야 진짜 대단하다. 43년 동안 본인도 몰랐던 재주가 있을 줄이야. 진짜 축하한다.”

 

“형 진짜 멋져요. 회사 생활을 하면서 다른 걸 해낸다는 게 보통 일이 아닌데 형 때문에 저도 자극받아서 뭐라도 시작해 보려구요.”

 

“그쵸. 우리 남편 대단하죠? 너무 멋있어요. 이러다 진짜 우리 남편 작가 되는 거 아닌지 몰라. 책 나오면 꼭 한 권씩 사주세요.”

 

아내의 이 정도 자랑이 팔불출인가요? 평생 회사만 다니던 직딩이 6개월 만에 해낸 성과 치고 대단하지 않나요? 시기인지 질투인지 현실을 직시하라는 말이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날의 분위기를 순식간에 깨는 차가운 말이 나의 가슴을 정확히 겨냥했습니다.

 

“언니! 무슨 작가 되는 게 그렇게 쉬운 줄 알아? 그리고 요즘 작가 되도 돈 못 벌어요. 내 지인 중에 책 낸 사람 있는데, 인세로 3만 6천 원 받았대요. 괜히 회사 일 소홀히 한다고 더 안 좋은 일 당하는 거 아닌가 몰라...”

 

아내는 몹시 당황하였고, 그 말도 일리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다만 제가 얼굴이 화끈거려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편견을 깨고 싶었습니다. 직딩도 딴짓을 통해 뭔가를 해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그래. 책 아무나 내는 거 아니지. 근데 딴지 필진도 아무나 되는 거 아니거덩? 네가 내 전투욕을 아주 자극하는구나. 너 때문에 내가 내일부터 출판사에 원고 투고 시작한다.’

 

우리나라에 출판사가 그렇게 많은 줄 몰랐습니다.

 

출판업계 현황을 전혀 모르니 이름을 들어본 민음사, 창비 같은 곳에 무조건 원고 투고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드디어 전화가 왔습니다.

 

“선생님! 저희 출판사에 원고 투고하셨죠? 혹시 내일 오후에 시간 괜찮으신지요?”

 

이런 전화를 처음 받아 봐서인지 너무나 당황하여 엉뚱한 답변이 튀어 나왔습니다.

 

“네... 맞아요... 그런데, 왜 그러시죠?”

 

'아^^; 님이 원고를 투고했으니, 책 내자고 전화하는 거잖아. 이 새끼야!'

 

라고 하지 않았을까요?

 

얼떨결에 미팅 시간을 확정하고 전화를 끓었는데 도무지 믿기지 않아서, 출판사 전화번호가 맞는지 인터넷에 확인까지 해 보았습니다.

 

부정이라도 탈까 아내에게도 비밀로 하고, 회사에는 외근 신청을 한 후 파주 출판단지로 향했습니다. 인터넷에 찾아보니 무명의 작가들을 상대로 사기를 치는 출판사도 있다는 둥, 요즘 출판시장이 최악이라 계약금은 꿈도 꾸지 말라는 둥, 인세도 3%정도만 주는 출판사도 있다는 둥, 부족한 자료 가운데서도 부정적인 내용이 많았습니다.

 

출판사에서는 편집장까지 직접 나와 저를 맞아 주었습니다. 편집장은 '선생님 같은 무명의 작가는 우리 같은 큰 출판사와 계약을 해야 출간과 동시에 사라질 가능성을 줄일 수 있다. 글이 좋아 여러 곳에서 연락이 왔겠지만, 우리랑 꼭 같이 해 봤으면 좋겠다.'는 겁니다.

 

“생각해 보시고 연락을 주시면, 계약서를 바로 보내 드리겠습니다.”

 

“아, 네... 사실 몇 군데 미팅이 잡혀 있는 곳이 있어서, 아내와 상의 후 빠른 시일 내에 답변을 드리겠습니다.”

 

출판사 문을 나서자 나도 모르게 두 발이 공중으로 솟아오르며, 허공에 주먹을 내질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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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우~~~~~~~~~~~~~~~~~~~~~~~~~~~~~~~~!”

 

출판사와 좋은 조건으로 계약을 하고, 집된장처럼 11개월을 묵혀 올해 2월 23일 드디어 “찌라시 한국사”가 세상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감사하게도 초판 2천 부에, 3월 초 추가 2천 부를 찍는 등 나름 순항을 이어 가고 있습니다.

 

세상의 벽이 생각보다 높지 않다는 생각이 안 드셨나요? 저 같은 사람도 작가가 되는 판국에, 뭘 망설이십니까!

 

저처럼 딴짓 한번 해 보시고, 세상을 향해 딴지 한번 걸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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찌라시 한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