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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05. 15. 금요일

도비공









마크 트웨인은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을 일컬어 '누구나 칭송하지만, 아무도 읽지 않는 책'이라 정의한 바 있다. 나도 인생의 대부분의 시간을 국부론을 읽지 않은 채로 살아왔지만 마크 트웨인의 경구를 위안삼으며 버텼다. 대학교 때 인류 역사의 고전이라는 말에 흥미가 당겨 한 번 읽어보려고는 했었다. 그러나 검은 하드커버에 제목은 아예 한자로 '國富論'이라는 금박 글씨가 찍힌 두꺼운 종이뭉치가 내뿜는 아우라에 기가 질려 감히 만져볼 생각도 못했던 기억이 난다. 책은 '읽는다'는 고유의 목적이 있긴 하지만, 꼭 그 목적 외에도 다른 용도로 이용할 수 있다. 가령 대학 동기의 석사학위 논문은 커피 쟁반으로 쓸 수 있고 약간 두툼한 책은 베개로도 쓸 수 있다. 그러나 이 책은 베개로 썼다간 목에 담이 올만큼 두꺼웠다. 읽는 것 이외의 용도라면 아무리 머리 굴려 봐야 상대를 가격하는 용도 외에는 떠올릴 수 없었는데, 이 책을 손에 쥐고 휘두르려면 손목 힘이 좋아야 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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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부론의 초판.

두 권 짜리였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국부론을 읽지 않는다. 사실 경제학 전문가나 국가 정책 입안자가 아니라면 굳이 안 읽는다고 손해 볼 일은 없는 책이다. 그렇지만 오늘날 세상에서 사이비들에 의해 가장 남용되는 사상가를 꼽으라면 나는 예수와 함께 아담 스미스를 택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비유적으로 설명한 한 두 구절만 집중적으로 부각되어 칭송을 받지만 정작 그들이 누누이 말하고자 했던 중심 사상은 차갑게 외면당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예수는 가난한 이들을 외면하는 부유한 자들에게 누차 경고를 가했고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는 낙타가 바늘 구멍에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라는 말까지 남겼다. 당신을 따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부유한 젊은이의 질문에 네 모든 것을 이웃에게 나눠주고 나를 따르라는 말로 곤혹하게 했다. 그러나 오늘날 예수는 축복의 아이콘이 되었다. 아들 밥벌이 챙겨주기로 유명한 모 목사는 무슨 삼박자 축복이라는 성경에도 없는 해괴한 주장으로 예수 잘 믿으면 돈 많이 번다는 내용의 설교를 하고 다닌다. 국내에는 이명박, 해외에는 부시와 같이, 정말 예수를 독대했다면 독사의 자식들이라는 독설과 함께 채찍을 맞았을 것으로 강력하게 추정되는 인물들 역시 예수 믿은 덕분에 자신들이 부를 이룰 수 있었다고 간증하고 다니니 세상에 이처럼 해괴한 일이 또 있을지 찾기가 어려울 것 같다.

 

아담 스미스의 경우에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레이건 행정부가 들어섰을 때 그들이 모두 아담 스미스의 실루엣이 그려진 넥타이를 착용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그러나 정작 아담 스미스가 살아 있었다면 그들이 왜 그런 넥타이를 착용했는지 고개를 갸우뚱했을 것이다. 레이건, 대처 시절부터 소위 신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은 자신들의 비조로 아담 스미스를 칭하며 자신들이 그의 후계자인 것처럼 자처하지만, 무슨 볶음 교회와 예수의 간극 못지않게, 이 간극 역시 멀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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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 스미스의 국부론에서 가장 유명한 구절이 둘 있다. 흔히 아담 스미스가 이기심을 옹호했다는 다음의 구절이 첫 번째이다. 


우리가 매일 식사를 마련할 수 있는 것은 푸줏간 주인과 양조장 주인, 그리고 빵집 주인의 자비심 때문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이익을 위한 그들의 고려 때문이다. 우리는 그들의 자비심에 호소하지 않고 그들의 자애심에 호소하며, 그들에게 우리 자신의 필요를 말하지 않고 그들 자신에게 유리함을 말한다. 거지 이외에는 아무도 전적으로 동포들의 자비심에만 의지해서 살아가려고 하지 않는다.


또 하나는 아담 스미스가 자유 시장 경제를 옹호했다는 이 구절이다. 


사실 그는, 일반적으로 말해서, 공공의 이익을 그가 얼마나 촉진하는지도 모른다. 이 경우 그는, 다른 많은 경우에서처럼,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려서 그가 전혀 의도하지 않았던 목적을 달성하게 된다. 그가 의도하지 않았던 것이라고 해서 반드시 사회에 좋지 않은 것이 아니다. 그는 자기 자신의 이익을 추구함으로써 흔히, 그 자신이 진실로 사회의 이익을 증진시키려고 의도하는 경우보다, 더욱 효과적으로 그것을 증진시킨다. 나는 공공이익을 위해 사업한다고 떠드는 사람들이 좋은 일을 많이 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처음 두 문장 앞에 각각 번호를 붙인 이유는 뒤에서 설명하겠다.)

 

이 두 구절은 신자유주의 경제학자들에 의해 다양한 변주가 이루어졌다. 심지어 아예 두 구절이 연결되는 하나의 단락인 것처럼 취급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그래서 그들은 아담 스미스 본인은 상상조차 해본 적 없는 새로운 주장을 만들어낸다. 


"아담 스미스는 인간의 이기심을 옹호했고, 모두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노력하다보면 사회는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저절로 발전한다는 놀라운 통찰력을 보였다." 


물론 국부론처럼 긴 내용의 책을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면 대단한 지적 능력의 소유자일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 요약이 전혀 엉뚱한 것이라는 점이다. 엉뚱한 정도가 아니라, 생략과 왜곡을 통한 아담 스미스 사상에 대한 날조라 불러도 수긍할 만큼 그의 사상에서 벗어나 있다.

 

이것이 날조 내지는 사기극이라는 것을 밝히기 위해서는 먼저 국부론이 어떤 책인지 그 성격부터 파악할 필요가 있다. 특히 매일경제나 한국경제와 같은 경제지의 칼럼을 보면, '아담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인간의 이기심을 옹호했다' 내지는 '아담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자유무역의 우수성을 주장했다'로 시작되는 경우가 많다. 딱히 틀렸다고 할 수는 없지만 맞다고도 할 수 없는 진술이다. 아담 스미스는 인간의 이기심을 옹호하기 위해 책을 쓴 것이 아니고 자유무역의 우수성을 옹호하기 위해 쓴 것도 아니다. 물론 그런 내용이 책에 약간씩은 언급되어 있으니 완전히 틀렸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마치 책 내용 전체가 그런 내용으로 이루어진 것처럼 요약한 것이라면 자격 미달이다. 내가 채점자라면 그런 식의 요약을 한 학생에게는 D마이너스 학점을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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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부론은 '부강한 나라의 특징은 무엇이고 부강한 나라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주제를 다룬 일종의 보고서라 할 수 있다. 몇 년 전 중국 CCTV가 제작한 '대국굴기 시리즈(편집자 주-선진 국가들의 전성기와 발전과정을 다룬 역사 다큐멘터리)'의 오리지널 판이라 할 수 있다. 국부론에는 오늘날 경제학의 기본 개념이라 할 수 있는 수급법칙, 국민 총생산 등과 같은 다양한 개념이 등장하지만, 그렇다고 이 책이 경제학 원론처럼 경제학 자체를 소개하기 위한 책이라 볼 수는 없다. 그런 개념들을 통해 시종 일관 아담 스미스는 영국이 부강한 나라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문제의식을 이어간다.

 

국부론 전체에서 그의 어조는 객관적이고 특정 계급에 치우치지 않는 중립자의 모습을 보인다. 이를테면 분업이 놀라운 생산성을 이끌어낸다고 분업의 성과에 대해 극찬하지만 동시에 분업이 이루어지면 노동자들은 단순 동작만을 반복하게 되어 전체 노동자 계급이 지적으로 쇠퇴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도 지적하면서 이를 막기 위해서는 노동자 계급에 대한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주장을 한다. 정책 입안자로서 아담 스미스의 모습을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오늘날 신자유주의 추종자들의 착각과는 달리 아담 스미스는 기업인들에게 그다지 호의적이지도 않았고, 그들이 본다면 뒷목을 잡으며 '이런 종북주의자'라고 외칠만한 발언도 많이 했다.

 

노동자들의 단합에 관해서는 자주 듣게 되지만 고용주들의 연합에 관해서는 거의 듣지 못한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이 때문에 고용주들의 연합은 매우 드물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진상을 알지 못할 뿐 아니라 세상물정을 잘 모르는 사람이다. 고용주들은 노동임금을 현재의 수준 이상으로 올리지 않기 위해서 언제 어디서나 일종의 암묵적인, 그러면서도 한결같은 연합을 지속적으로 맺고 있다. (중략) 고용주들의 이 연합은 항상 매우 조용히 비밀스럽게 진행되므로, 그것이 실행으로 옮겨져서, 때때로 그런 것처럼, 노동자들이 저항의 필요성을 절감하면서도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굴복하고 말 때까지, 다른 사람들은 고용주들의 연합에 대해 아무것도 들을 수 없다. (중략) 그러나 그들(노동자들)의 단합은, 공격적인 것이든 방어적인 것이든, 항상 세상의 이목을 끈다. 왜냐하면, 문제를 신속하게 해결하기 위해서 노동자들은 언제나 큰 소리로 소란을 피우고, 때로는 매우 놀라운 폭행과 폭력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절망하고, 그리고 절망적인 사람처럼 온갖 황당하고 제멋대로인 행동을 하는데, 그 이유는 그들은 고용주를 위협해서 자기들의 요구를 곧바로 받아들이도록 하거나 아니면 굶어죽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고용주들도 노동자들을 향해 큰소리를 지르고, 치안판사의 도움을 끊임없이 소리높여 요구하고, 하인·노동자·직인의 단합에 대해 엄한 현행 법률의 엄격한 집행을 소리높여 요구한다. 이리하여 노동자들은 이 소란스러운 단합의 폭력행사로부터 거의 아무런 이익도 얻지 못하는데, 부분적으로는 치안판사의 개입 때문에, 부분적으로는 고용주들의 뛰어난 침착함 때문에,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대부분의 노동자들이 당장의 생존을 위해 굴복할 수밖에 없는 필연성 때문에, 이러한 폭력행사는 주모자의 처벌과 파멸 이외에는 아무 것도 얻지 못하고 끝나고 마는 것이 보통이다.


당시까지 사람들은 특정한 국가가 부유해지는 가장 큰 원인에 대해 그 나라 국민들의 국민성 내지는 민족성을 꼽았던 모양이다. 하긴, 오늘날에도 이러한 관점은 여전히 통용되는 실정이다. 2차대전의 폐허를 딛고 경제 기적을 달성한 게르만 민족의 위대함이니, 앵글로 색슨족의 도전정신이니 하는 이야기를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다. 그러나 아담 스미스는 국가의 부강함은 민족성에 달린 것이 아니라 그 나라 국민들의 노동생산성에 달려 있다는 날카로운 통찰력을 선보인다. 각 나라마다 노동생산성이 차이를 보이는 것은 분업이 어느 정도 세분화되었느냐에 달린 것이지 민족성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밝히면서 국부론은 긴 여정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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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들 아담 스미스가 인간의 이기심을 옹호했다고 말하는 구절이 여기서 등장한다. 아담 스미스가 보기에 분업은 인간 특유의 교환하는 성향(propensity to exchange)에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그 성향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저 유명한 이기심 옹호 구절이 탄생한 것이다.

 

거의 모든 동물류에서 각 동물은 성숙하면 완전히 독립하며, 자연상태에서는 다른 동물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은 항상 다른 동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데, 단지 그들의 선심에만 기대해서는 그 도움을 얻을 수가 없다. 그가 만약 그들 자신의 자애심(self-love)이 자기에게 유리하게 발휘되도록 할 수 있다면, 그래서 자기가 그들 자신에게 이익이 된다는 것을 설득할 수 있다면, 그들의 도움을 얻으려는 그의 목적은 더 효과적으로 달성될 것이다. 타인과 어떤 종류의 거래를 하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이렇게 제의한다. '내가 원하는 것을 나에게 주시오, 그러면 당신이 원하는 것을 가지게 될 것이오.' 이것이 이러한 거래에 담겨진 의미이다.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는 피차간에 자기가 필요로 하는 도움의 대부분을 얻게 된다. '우리가 매일 식사를 마련할 수 있는 것은 푸줏간 주인과 양조장 주인, 그리고 빵집 주인의 자비심 때문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이익을 위한 그들의 고려 때문이다.'


이상스럽게도 이기심 옹호자들은 아담 스미스의 발언에서 전반부는 생략해버리고 '우리가'로 시작되는 부분만 발췌해서 소개한다. 그러나 흔히 생략해버리는 전반부를 살펴본다면 아담 스미스가 단순히 이기심을 옹호하기 위해 글을 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담 스미스는 인간의 교환 성향이 어떻게 분업을 낳게 되었는지를 설명하려 했을 뿐이지 인간의 이기심을 옹호하려는 생각 따위는 눈곱만큼도 하지 않았다. 인용된 구절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우리가'로 시작되는 단락은 설득력을 높이기 위해 첨부된 예시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사실 없어도 상관없는 부분이다. 문장을 요약하는 훈련을 할 때 가장 먼저 배우는 것이 저러한 예시의 생략이다. 그런데 이 있으나 없으나 큰 지장 없는 예시 단락이 아담 스미스의 대표 사상인 것처럼 포장되어 선전되고 있으니 그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얼마나 기가 찬 일이겠는가.

 

더구나 아담 스미스가 생각하는 이기심은 속물들의 이기심과는 거리가 있는 이기심이다. 무조건 자신의 이익을 챙기려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이익을 챙겨주면서 나의 이익을 취하는 성향으로, 엄밀히 말하면 '호혜적 이기주의(?)'라고 불러도 될 이기주의라 할 수 있다. '내가 먼저 등을 밀어줄테니 나의 등을 밀어다오.'와 같은 태도를 호혜적 이타주의라 부르는데, 순서만 바뀌었을 뿐 내용은 같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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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업과 교환 성향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교환의 척도가 되는 화폐에 대한 고찰이 필수적이다. 아담 스미스는 화폐의 교환 가치에 대해 긴 설명을 늘어놓는다. 오늘날 경제학에서 상품의 가치는 희소성에 의해 결정된다고 설명하는데 이 대목에서 아담 스미스는 상품의 가치는 그것을 생산하기 위해 투여된 인간의 노동에 의해 결정된다는 주장을 펼친다. 아담 스미스의 진정한 후계자는 마르크스라는 말이 괜히 나온 말이 아니다.

 

이후 아담 스미스는 자본의 성질, 축적, 각국의 상이한 국부증진 과정, 당시 경제학의 두 분파였던 중농주의와 중상주의에 대한 고찰, 국왕과 국가의 수입 등에 대해 전반적인 고찰을 하고 있는데, 이중에는 오늘날에도 새로운 아이디어를 제기하는 참신한 발상이 있는가 하면, 시대 상황의 변화로 인해 굳이 알지 않아도 되는 주장들이 섞여 있다. 애초에 내가 글을 쓴 이유는 국부론의 전체 내용을 요약하기 위해서가 아니라(그런 중노동은 취미 없다), 아담 스미스가 후대에 어떻게 남용되었는가를 말하기 위해서였으니 내용 요약은 이 정도로 마무리한다.

 

지금까지 '아담 스미스가 국부론에서 인간의 이기심을 옹호했다'라는 주장이 얼마나 저급한 요약인지 살펴보았다. 이제 세간에 알려진 또 다른 아담 스미스의 남용 사례에 대해 살펴볼 차례이다. 흔히들 아담 스미스가 자유무역을 옹호했다라고 하는데, 이것 자체로는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마치 오늘날 신자유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세계화와 국제 자유무역의 옹호를 의미한다면 그것은 단언코 틀린 말이다.

 

이 부분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먼저 중농주의와 중상주의에 대한 아담 스미스의 견해를 알아둘 필요가 있다. 중농주의는 토지 생산물이 모든 나라의 수입의 주요 원천이라는 주장을 펼쳤고, 중상주의는 상업을 통해 축적한 금·은과 같은 귀금속(오늘날 상황에 맞게 바꿔 말하자면 달러)이 모든 나라의 수입의 주요 원천이라는 주장을 펼쳤다. 이것은 단순히 경제학자들의 견해 차이 문제가 아니라 토지를 소유한 봉건 귀족들과 상업으로 부를 축적한 부르주아들의 입장 차이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당시 중상주의자들은 쌓아놓은 금은이 국부의 원천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수출은 금은을 획득하는 것이므로 좋은 것이고 수입은 금은을 유출시키는 것이므로 나쁜 것이라는 사고방식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아담 스미스는 한 나라의 부는 그 나라가 보유한 화폐 뿐만아니라 그 나라가 소유한 생필품이나 공산품과 같은 재화 전체라고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금은을 획득하는 것에만 집착하는 중상주의자들의 모순을 지적한다.

 

불필요한 금은을 국내에 도입하거나 붙들어 놓음으로써 그 나라의 부를 증가시키려고 하는 시도는 가정에 불필요한 주방도구를 보유케 함으로써 가정의 기쁨을 증가시키려는 시도만큼이나 어리석다는 것이다. 불필요한 주방도구를 구입하는 비용은 가정의 식료품의 양 · 질을 증가시키기는커녕 감소시킬 것이다. 마찬가지로, 불필요한 금은을 구매하는 비용은 어느 나라에서나 국민에게 의식주를 제공하고 국민을 고용하는 데 사용할 부를 필연적으로 감소시킬 수밖에 없다. 반드시 기억하고 있어야 할 것은, 금은이 주화의 형태를 취하건 식기의 형태를 취하건, 주방 기구가 도구인 것과 마찬가지로, 도구라는 사실이다.

 

신대륙의 발견 이후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신대륙에서 유입된 엄청난 금은으로 인해 한 때 막강한 국력을 과시하게 된다. 그러나 지나치게 많이 유입된 금은은 물가의 폭등을 유발했고 결국 아담 스미스가 살던 시대의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이미 몰락한 국가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이런 사실을 바탕으로 아담 스미스는 금은이 국부의 원천이므로 무역을 중시해야한다는 주장은 틀린 것이고 무역을 하면 개인적으로 이익을 보는 사람들의 주장이라 일축한다.

 

아담 스미스는 토지 생산물이 부의 원천이라는 중농주의자들의 견해를 일정 부분 지지한다. 그렇기 때문에 아담 스미스는 한 나라가 부유해지기 위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할 것은 농업이라고 주장한다.

 

같은 양의 자본으로 농업자의 자본보다 더 많은 양의 생산적 노동을 가동시키는 것은 없다. 그의 일꾼뿐만 아니라 역축도 생산적 노동자이다. 농업에서는 자연도 인간과 더불어 노동한다. 자연의 노동은 비용이 전혀 들지 않지만, 그것의 생산물은 가장 비싼 일꾼의 생산물처럼 가치를 갖는다. (중략) 그러므로 농업에 사용된 자본은 제조업에 사용된 동일 규모의 자본보다 많은 양의 생산적 노동을 가동시킬 뿐만 아니라, 그것이 고용하는 생산적 노동량에 비해 훨씬 큰 가치를 그 나라의 토지·노동의 연간 생산물, 즉 주민의 진정한 부와 수입에 부가한다. 자본이 사용되는 모든 방법 중에서 농업에 대한 투자가 사회에 가장 유리한 방식이다. (중략) 우리의 아메리카 식민지가 그렇게 빨리 부강할 수 있었던 주요 원인은 바로 그들의 총자본이 지금까지 농업에 투자되었다는 점에 있다.


아담 스미스는 농업이 발전하면 농기구의 필요와 같은 이유 때문에 연쇄적으로 공업이 발전하게 되고, 공업이 발전하면 이제는 자유로운 거래의 필요성에 의해 상업이 발전하고, 상업이 발전하게 되면 국가의 잉여생산물을 외국과 거래하는 국제무역이 성행한다고 예측했다. 그리고 이렇게 발생하는 국제무역은 필요에 의해 발생한 것이기 때문에 규제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이것이 소위 말하는 아담 스미스가 국제자유무역을 옹호했다는 주장의 실체이다. 살펴본 바와 같이 그런 주장이 분명 틀렸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맞다라고 말하기에는 너무나 빈약하다. 마치 '아담 스미스는 남자이다'라는 주장처럼 공허하고 무의미한 내용이다. 한편 이 대목을 설명하면서 아담 스미스는 매우 인상적인 서술을 남긴다.

 

한 나라의 자본량이 너무 많이 증가하여 더 이상 그 나라의 소비를 충족시키고 생산적 노동을 유지하는 데 모두 사용될 수 없을 때, 그 잉여분은 중개무역으로 자연스럽게 흘러들어가 다른 나라에 대해 동일한 역할을 하는 데 사용된다. 중개무역은 엄청난 국부의 자연적인 결과이며 상징이지, 그것의 자연적인 원인인 것 같지는 않다. 특별한 장려책으로 그것을 자극하려고 했던 정치가는 결과와 상징을 그 원인으로 잘못 알았던 것 같다.


나도 연식이 좀 있는 탓에(많지는 않다. 오해 금지!) '수출만이 살 길이다'라고 주장하며 국민들 머리카락 잘라 가발 수출하는 데 사활을 걸었던 어떤 대통령의 시대를 겪은 바 있다. 아담 스미스의 서술은 마치 그의 출현을 예언이라도 한 것 같다. 그는 수출을 하기 위해서는 공업이 발전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농촌에 있는 노동력을 도시로 끌고 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사고방식으로 진행된 저곡가 정책은 대한민국 농촌을 황폐화시켰고 도시로 탈출한 대량의 인구를 잉여화해 공장주를 위한 값싼 노동력으로 전락시켰다. 결과적으로 경제 지표는 계속해서 상승하지만(그나마 근래에 이르러서는 그 동력 또한 약해진 듯하다) 몇몇 부유층을 제외한 대다수 국민들의 체감 경기 지수는 언제나 바닥이다. 어째서 국내의 수많은 경제학자들은 아담 스미스가 주장한 길과는 정 반대의 길로 향하던 그가 머리에 총탄을 맞고 쓰러진 그날까지, 심지어 그가 죽은 지 사십 년이 되어가는 오늘날까지도 그 길이 잘못된 길이라는 것을 말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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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 스미스의 가장 대표적인 남용이라 할 수 있는 '보이지 않는 손'은 농업과 중개무역에 대한 이러한 고찰의 연장선상에서 등장한다. 살펴본 바와 같이 아담 스미스는 중개무역이 국부가 증가하면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현상으로 이해하고 특별히 규제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지만, 가급적이면 국내의 자본이 중개무역으로 쏠리는 것보다는 국내 생산에 재투자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입장이었다.

 

① 그러나 한 사회의 연간수입은 그 사회의 노동의 연간 총생산물의 교환가치와 정확히 같다. ② 또는 오히려 그것의 교환가치와 정확히 동일한 것이다. ③ 따라서 각 개인이 최선을 다해 자기 자본을 본국 노동의 유지에 사용하고 노동생산물이 최대의 가치를 갖도록 노동을 이끈다면, 각 개인은 필연적으로 사회의 연간수입이 가능한 한 최대의 가치를 갖도록 노력하는 것이 된다. ④ 사실 그는, 일반적으로 말해서, 공공의 이익을 그가 얼마나 촉진하는지도 모른다. ⑤ 외국 노동보다 본국 노동의 유지를 선호하는 것은 오로지 자기 자신의 안전을 위해서고, 노동생산물이 최대의 가치를 갖도록 그 노동을 이끈 것은 오로지 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다. ⑥ 이 경우 그는, 다른 많은 경우에서처럼,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려서 그가 전혀 의도하지 않았던 목적을 달성하게 된다. ⑦ 그가 의도하지 않았던 것이라고 해서 반드시 사회에 좋지 않은 것이 아니다. ⑧ 그는 자기 자신의 이익을 추구함으로써 흔히, 그 자신이 진실로 사회의 이익을 증진시키려고 의도하는 경우보다, 더욱 효과적으로 그것을 증진시킨다. ⑨ 나는 공공이익을 위해 사업한다고 떠드는 사람들이 좋은 일을 많이 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이것이 이른바 '보이지 않는 손'의 실체이다. 아담 스미스는 국내 자본이 외국으로 유출되는 것을 그다지 바람직하게 생각하지 않았고 그 자본이 국내에 투자되었을 때 경기가 선순환하게 된다는 개념을 비유적으로 '보이지 않는 손'이라고 표현했을 뿐이다.

 

위에서 나는 이 단락의 각 문장에 번호를 붙였다. 보다시피 일부만 인용되고 있는 전체 단락에서 생략된 문장들을 복원해보면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것을 통해 아담 스미스가 하고자 했던 말은 국내 투자가 중개 무역보다 낫다라는 것이었음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하지만 오늘날 이 글이 인용될 때는 그 부분은 생략된 채로 인용되며 마치 아담 스미스가 경제학의 근본 원리를 밝힌 것처럼 호들갑을 떨어댄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손' 자체는 위에서 언급한 '인간 이기심 옹호'와 마찬가지로 내용 전개상 없어도 상관없는(글의 문학적 감수성은 다소 감소하겠지만) 표현이다. 아담 스미스를 칭송하는 것이야 그들의 자유이겠지만, 본래의 뜻을 왜곡하고 훼손한 채로 칭송하는 것은 모욕에 불과하다. 가령 일본 언어학자들이 세종대왕을 카나 문자의 기본 원리를 확립한 위대한 언어학자라고 칭송한다면, 우리가 어쨌든 일본 사람들이 세종대왕 칭찬하니 좋다고 할 것인가 아니면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한 행동으로 받아들일 것인가. 이러한 모욕의 사례는 어디에서나 쉽게 검색할 수 있다. 가령 그레고리 맨큐는 이런 식으로 아담 스미스를 능욕한다.

 

"고전학파 경제학자 아담 스미스는 1776년에 저술한 국부론에서 경제학의 가장 중요한 발견을 했다. 그것은 바로 가계와 기업들이 시장에서 상호작용하는 과정에서 마치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리는 것처럼 행동하여 바람직한 시장성과를 나타낸다는 것이다. 경제학의 목표 중 하나는 바로 이 보이지 않는 손이 어떻게 이런 마술을 행하는지를 배우는 데 있다. (중략) 보이지 않는 손은 경제적 풍요가 공정하게 분배되도록 하지 못할 수도 있다. 시장 경제는 사람들이 구입하고 싶은 것을 만들어내는 능력에 비례해서 사람들이 보상을 받도록 하는 체계이다. 세계에서 농구를 제일 잘 하는 선수가 세계에서 체스를 제일 잘 하는 선수보다 돈을 더 많이 버는 이유는, 사람들이 농구경기를 보기 위해 지불하고자 하는 금액이 체스게임을 보기 위해 지불하고자 하는 금액보다 크기 때문이다."

 

위의 인용에서 아담 스미스의 생각이라 할 수 있는 부분은 사실상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세 단어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모두 후대 경제학자들이 가져다 붙인 생각들이다. 차라리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개념에서 영감을 얻어 이와 같은 아이디어를 만들었다라고 실토하는 것이 학자의 바른 길이겠지만 오늘날 경제학자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실제로는 밀턴 프리드먼의 아이디어를 마치 아담 스미스의 것인 양 구분하지 않고 혼재해 사용하고, 따라서 당연히 밀턴 프리드먼이 들어야 할 비판과 욕을 아담 스미스에게 떠넘기고 있다.

 

이를테면 비용절감이라는 핑계로 자국의 공장을 폐쇄하고 중국이나 남미의 저임금 국가로 이전하는 자본가들의 행태를 아담 스미스가 보았다면 무엇이라고 했을까? 틀림없이 비판의 목소리를 냈을 것이다. 아담 스미스의 사상은 신자유주의 경제 정책과는 거리가 멀다.

 

국가 간의 무역에 있어서도 아담 스미스는 자유무역이라는 명목 하에 사실상 인도와 같은 국가를 착취하는 행태를 보였던 동인도 회사의 방식에 비판의 목소리를 냈다. 그는 무역 상대국을 착취하는 것보다는 그들이 부유한 국가로 성장한 뒤 공정하게 거래하는 것이 서로에게 이익이라는 견해를 밝혔다. 그런 연장선상에서 아담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영국이 당시 식민지로 지배하고 있던 미국을 독립시키고 자유무역을 하는 것이 서로에게 이익이라고 주장했다. 미국 독립전쟁의 기폭제가 된 보스턴 차 사건이 일어난 것이 1773년도이고 국부론이 발간된 1776년은 워싱턴을 총사령관으로 추대한 북아메리카 13개 식민주가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영국군에 항전한 해였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아담 스미스가 그런 주장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정치적 부담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세계화의 미명 아래 가난한 나라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다국적 기업의 행태에 아담 스미스가 인간의 이기심이 사회를 발전시킨다며 지지할 것인지 아니면 반대의 입장을 표명할 것인지, 지금까지 살펴본 바로는 후자가 맞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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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내가 국부론을 직접 읽기 전까지는 몇 가지 편견이 있었다. 첫째로는 아담 스미스가 자본가 계급의 옹호자일 것이라는 편견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말 그대로 편견에 불과했다. 아담 스미스는 국가 전체의 이익에 관심이 있었던 사람이지 특정 계급 구성원들만의 계급적 이익에는 관심이 없었다. 또 하나는 국부론이 무척 난해할 것이라는 편견이었다. 물론 다루는 영역이 광범위하고, 일부는 오늘날 현실과 맞지 않는 탓에 지루한 대목이 있을 수 있다. 대표적으로 금화와 은화의 환율 변화를 역사적으로 고찰한 부분은 사실상 오늘날 독자의 입장에서는 따분하기만 하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생동감 있는 문체와 친절한 해석 덕분에 국부론 독서는 전혀 지루하지 않고 흥미진진했다. 이 말은 이 책이 아직까지 생명력을 잃지 않았다는 의미일 것이다. 물론 모든 사람이 이 책을 읽으면 좋겠지만 안 읽는다고 문제 될 것은 없다. 다만 신자유주의자들이 국가를 장악하고 오직 대기업에게만 이익이 가는 정책을 추진하면서 이것이 아담 스미스의 가르침이라고 거짓말을 하는 오늘날, 국부론을 읽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아담 스미스의 통찰이 신자유주의자들의 싸구려 사이비 경제 이론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 정도는 사람들이 알아야 할 것 같다. 아담 스미스는 결코 신자유주의자들의 전유물이 될 수도 없고 되어서도 안 된다. 오히려 그는 상식 있는 사람들에게 혜안을 주는 존재로, 우리들의 친근한 경제 선생님으로 남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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