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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는 1670년 헤이그로 거처를 옮겼다. 말이 거처지 하숙집이나 여관방에 불과했고, 그나마 좋은 방도 아니었다. 그러는 와중에 팬덤은 스피노자를 찾아내고 말았다. 그리고 그가 렌즈를 깎으며 빈궁하게 살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상한 일이다.

 

렌즈는 고가품이었고 렌즈 세공은 고급 노동이었다. 더욱이 스피노자의 렌즈는 최상품이었다. 네덜란드의 천문학자 크리스티안 하위헌스도 그의 고객이었다. 하위헌스는 토성의 고리와 위성 타이탄을 발견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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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의 천문학자 크리스티안 하위헌스

 

하위헌스는 당시 기술로 가능한 최고배율의 망원경에 들어갈 정밀렌즈를 스피노자에게 의뢰했다.

 

그런데도 스피노자는 돈이 부족했다. 수입의 대부분을 렌즈마냥 고가품인 책을 구입하는 데 썼기 때문이다. 친구와 팬들은 스피노자를 돕고 싶었다.

 

"제발 연구와 저술만 하라."

 

스피노자는 번번이 거절했다. 나중에는 지인들이 돈을 말 그대로 '욱여넣었다'. 스피노자의 거처에는 예고 없이 거액이 도달하곤 했다. 그럴 때마다 꼭 필요한 데만 돈을 쓰고 나머지는 그대로 돌려보냈다.

 

스피노자가 팬들의 '조공'을 자신의 즐거움만을 위해 쓴 게 있다면 파이프 담배다. 돈을 돌려보내기 전에 질 좋은 담배를 조금 사서 맛봤는데 이것이 유일한 취미였다. 이렇게 고급 담배가 생기면 스피노자는 1층으로 내려와 여관 주인과 담배를 나눠 피우며 담소를 즐겼다.

 

가끔씩 하는 흡연이지만 결과적으로 건강에는 좋지 않았다. 렌즈 세공을 하면서 깎여 날린 유리 가루가 그의 폐에 쌓이고 있었다. 서른 중반을 넘긴 스피노자는 점점 창백하고 수척해졌다.

 

스피노자에게는 무슨 취미가 있었을까? 렌즈로 방 안에 집을 지은 거미를 관찰하기도 했고, 모기와 파리를 잡아 친절히 거미줄에 붙여주기도 했다. 정 지루하면 어린아이처럼 거미끼리 싸움을 붙이기도 했다. 이쯤 되면 혼자 놀기의 진수다.

 

스피노자에 열광한 이들 중에는 시몬 드 브리스라는 인물이 있다. 스피노자도 나름 부유한 상인의 아들이지만, 시몬 드 브리스는 암스테르담의 재벌로 부유함의 단위가 다른 사람이었다.

 

시몬 드 브리스는 스피노자에게 존경을 바치는 뜻으로 1000달러라는 거금을 후원하려고 했다. 스피노자는 거절했다. 재벌은 통이 큰 법. 브리스는 아예 자신의 유산 상속인으로 스피노자를 지명했다. 희대의 천재가 풍족한 환경에서 하인들의 수발을 받아 가며 자신의 사상을 펼치기를 원해서였다.

 

스피노자는 예의를 갖춰 완곡히 거절했다.

 

"자연은 지극히 작은 것에 만족합니다."

 

스피노자는 생명이 유지되고 활동하는 데 있어 낭비를 혐오했다. 그는 네덜란드의 상공업이 부익부 빈익빈의 양극화로 흘러가는 현상에 불편함을 느꼈다. 시몬 드 브리스는 친절한 신사였지만 구조적 착취의 수혜자였다. 착취의 결과를 향유하는 것도 착취이기는 매한가지다.

 

시몬 드 브리스는 정 그렇다면 스피노자에게 정말로 최소한의 금액만 연금 형식으로 후원하겠다고 했다. 1년에 500플로린이라는, 그의 막대한 재산에 비하면 그야말로 티끌 같은 액수를 제안했다. 스피노자는 이조차 너무 많다며 곤란해했다. 옥신각신 끝에 스피노자가 300플로린을 받는 데 동의하고 나서야 시몬 드 브리스는 비로소 물러났다.

 

스피노자는 금욕주의자였을까? 그는 실제로 스토아 학파에 친화적이었다고 한다. 많은 이들은 스피노자의 자발적 가난이 스토아 철학의 영향이라고 설명한다.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스토아 학파의 금욕주의는 귀족적이다. 당장 누릴 수 있는데 절제하는 정신 수련에 가깝다. 렌즈 세공은 중노동이다. 중노동과 금욕은 종류가 다른 활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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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는 금욕보다는 일상의 즐거움이 소중하다고 이야기했다.

 

"현명한 사람의 조건 중 하나를 말해보고자 한다. 현명한 사람은 스스로를 재충전하고 기운 나게 하기 위한 중용의 묘를 안다. 중용이란 좋은 음식과 술을 음미하는 것이다. 푸르른 초목을 즐길 줄 알고 사는 곳을 꾸밀 줄 알며 음악, 운동, 무대 예술과 같은 것들을 즐기는 일이다. 이러한 것들은 다른 이들을 해치지 않고서도 향유할 수 있다."

 

나는 이렇게 해석한다. 스피노자는 노동하지 않고 누리는 꿀물을 싫어했다. 그는 자본주의에 반대하지는 않았지만 자본주의의 그늘은 혐오했다. 스피노자에게는 렌즈 세공 기술과 팔다리가 있다. 체력이 있는 한 그걸로 먹고사는 일이 그에게는 타당했다고 여긴다.

 

스피노자의 렌즈 세공 작업은 낮 시간에 이루어졌다. 태양의 직사광에 비춰야 렌즈의 정밀도를 확인할 수 있다. 밤에는 새벽 3시까지 연구와 집필에 몰두했다. 체력 고갈 외에도 안구 피로와 두통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해가 지고 나서야 사색을 시작해 모두 잠든 시간에 사상을 전개하는 스피노자의 모습은 그가 악마와 결탁했다는 심증의 훌륭한 증거가 되었다. 스피노자는 반박 불가능한 기하학적, 연역적 방식으로 철학을 저술했다. 형이상학이다. 형이상학은 로고스의 정수가 아닌가? 신이 보증하고 인간에게 허락해 준 이성의 보물을 신을 모욕하는 데 사용하는 일이 가능한가?

 

가능하다. 한때 천사였고 신에 근접한 능력을 가진 지옥의 주인에게 영혼을 팔았다면 말이다. 그의 이름은 루시퍼, 바로 사탄이다.

 

사탄의 부하 스피노자를 지지하는 인물 중에는 얀 데 비트가 있었다. 네덜란드의 대정치가로, 인류가 공화국을 꾸려온 역사에서 빠질 수 없는 위대한 공화파 정치인이었다. 얀 데 비트는 십수 년간 공화국 네덜란드를 이끌어온 실권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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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의 정치가 얀 데 비트

 

스피노자와 얀 데 비트는 어둠 속에서 서로를 남몰래 존경하며 교류했다. 얀 데 비트가 악마의 하수인이 펼친 철학에 공감한다면 정치적으로 심각한 타격을 입을 터였다. 거꾸로 스피노자가 얀 데 비트 지지를 밝히면 그것도 데 비트에게 악재였다. 두 사람은 정치와 사상의 로미오와 줄리엣이었다.

 

스피노자는 얀 데 비트가 이끄는 공화국 정치를 인류의 미래를 닦는 초석으로 보았다.

 

"이 번영의 나라에는 귀족이 없으며, 어떠한 계급과 종교를 갖고 있어도 함께 공존하며 살아간다."

 

네덜란드 왕실의 뿌리는 존경받을 자격이 충분하다. 네덜란드의 국부이자 독립 항쟁의 영웅 '오라녜 공 빌럼'에서부터 시작된 오라녜 가에 대한 시민들의 충성심은 이해할 만할 뿐 아니라 온당하다. 그러나 모든 시민이 주인인 공화주의를 좌절시킬 자격은 누구에게도 없다는 게 스피노자의 믿음이었다.

 

유럽은 상속 전쟁에 수년간 휘말려 있었다. 얀 데 비트는 평화주의와 외교로 공화국을 지켜내고자 했다. 프랑스의 태양왕 루이 14세는 상속 전쟁에서 자신의 편을 들지 않은 네덜란드를 응징하리라 엄포를 놓았다.

 

1672년, 루이 14세의 군대는 네덜란드를 전면 침공했다. 네덜란드는 높은 경제력과 협상력으로 유럽의 물밑 외교에서 힘을 발휘했다. 네덜란드는 강대국들의 힘이 균형을 이루어 네덜란드가 완충지대로 남길 바랐다. 스페인 제국의 탄압을 경험한 네덜란드에 또 다른 대제국의 출현은 악재였다. 프랑스의 태양을 넘어 유럽의 태양이 되고자 했던 루이 14에게 네덜란드는 첫 번째 해치울 눈엣가시이자 먹잇감이었다.

 

전란이 나라를 휩쓸자 네덜란드 시민들은 평화주의 노선을 고집했던 얀 데 비트에게 책임의 화살을 돌렸다.

 

"그가 그토록 추구했던 평화의 결과가 이것이란 말인가?"

 

시민들은 왕당파의 선동에 넘어가고 말았다. 그 옛날 스페인에 맞서 떨치고 일어나 백성을 이끌고 독립을 쟁취한 영웅, 바로 오라녜 공 빌럼이었다. 그의 후손이 여러분 가까이 있다! 국력과 민심을 하나로 모아 외적의 침입을 막아줄 군주의 혈통이 있건만, 누구 때문에 나라가 전란에 시달리게 되었는가?

 

얀 데 비트 탓이었다.

 

공화국의 자유를 누리던 시민들은 폭도로 돌변해 얀 데 비트의 집을 습격했다. 데 비트 형제, 얀과 코르넬리우스가 끌려 나와 폭도들에게 맞아죽었다. 형제의 시신은 배가 갈려 내장이 적출됐고 성기가 잘린 채 알몸으로 거꾸로 매달렸다. 사람들은 형제의 시신을 조각조각 잘라내 뜯어먹고 기념품으로 사고팔았다. 광기 그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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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주인인 자유로운 시민이 공포와 분노에 사로잡혀 봉건 군주를 부르짖고, 동료 시민을 참살한 사건에 스피노자는 경악했다. 이 아름다운 국가의 시민이 무지의 노예가 되다니! 자유에 대한 스피노자의 다음 두 문장에는 이때의 경험이 녹아들어 있으며, 따라서 일맥상통한다.

 

"국가의 진정한 목적은 개인의 자유에 있다."

 

"철학의 궁극적 목적은 자유를 쟁취하는 것이다."

 

주체적 개인이 절뚝거릴 때 폭력과 야만이 창궐하는 것이다. 스피노자는 기록된 역사에서 이때 생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분노를 터뜨렸다. 그는 '극단의 야만인들'이라는 대자보를 써 데 비트 형제를 죽인 폭도들이 있는 곳으로 뛰쳐나가려고 했다.

 

스피노자는 스스로를 위해서는 한 번도 이성을 잃지 않았다. 자신을 파문한 유대 교회의 야만성에 대해 일언반구도 한 적 없다. 얀 데 비트의 죽음 앞에서는 평온을 유지하지 못했다. 폭도들이 피의 축제를 벌이는 살해 현장에서 그들을 공개 비난할 생각이었다. 이제 스피노자는 죽은 목숨이었다.

 

 

 

...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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