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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택트(Arrival, 2016)는 드물게 언어학자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영화입니다. 어느 날 정체 미상의 비행 물체들이 지구에 나타나고, 인류는 당황합니다. 주인공 루이스 웨버는 외계인의 언어를 번역해 달라는 요청을 받습니다. 비행 물체들이 있는 곳으로 간 루이스는 18시간 주기로 물체에 들어가, 헵타포드로 명명한 외계 생물체와 직접 소통을 시도합니다.

 

언어는 영화를 이끌어 가는 주된 요소 중 하나입니다. 인류는 난생 처음 대면하는 외계의 지적 생명체를 보고 당황합니다. 공격해야 할지, 대화를 시도해야 할지에 대한 갑론을박이 벌어집니다.

 

헵타포드의 언어를 습득하게 된 루이스에게는 하나의 커다란 변화를 겪게 됩니다. 바로 ‘시간’이라는 개념을 헵타포드처럼 이해하게 된 것입니다. 루이스는 외계인의 언어를 이해하는 것만으로 그들의 사고 체계를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하나의 언어를 이해한 것만으로 해당 언어를 가진 화자와 같이 사고할 수 있을까요?

 

 

1. 언어 상대성 이론

 

언어 상대성 이론은 종종 '사피어-워프 이론'이라고 불립니다. 이론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친 두 사람의 이름을 따온 것인데요. 에드워드 사피어와 그의 제자 벤자민 리 워프입니다. 이 이론에 따르면 개인이 습관적으로 사용하는 언어의 구조는 세계를 인식하는 데 영향을 미칩니다. 예를 들면 미국인과 한국인은 사용하는 언어가 다르기 때문에 사고의 토대가 다르다고 말하는 셈입니다.

 

언어 상대성 이론은 19세기부터 그 사상적 기반이 대두되었습니다만, 철학적 기반일 뿐이었습니다. 하나의 이론으로 완성되는 것은 20세기에 이르러서였습니다. 그 시작은 에드워드 사피어였습니다. 그는 ‘언어 간의 차등은 없다’고 주장한 인류학자 프란츠 보아스의 영향을 받아 언어가 인간의 사고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 사피어는 언어가 인간 사고에 어느 정도의 영향력을 미친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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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에드워드 사피어 / 오른쪽 벤자민 리 워프

 

사피어가 언어 상대성 이론의 기반을 닦고 난 후, 이론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학자는 벤자민 리 워프였습니다. 언어 상대성 이론이라는 이름을 지은 장본인이기도 합니다. 워프는 꽤나 특이한 이력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화재 예방 기술자이면서 동시에 언어학자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다름 아닌 에드워드 사피어에게서 언어이론을 배웠고, 그의 사조에 영향을 받아 언어 상대성 이론의 주장을 강화하는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워프는 자신이 직장 생활에서 얻은 경험과, 여러 연구 내용을 바탕으로 언어 상대성 이론의 예시를 들었습니다. 일례로, 화재 조사원으로 일하던 워프는 휘발유가 들어 있는 통 저장고와 없는 통 저장고를 가진 발전소에서, 노동자들이 전자에서는 담배를 절대 피우지 않지만, 후자에서는 담배를 피우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유류 증기 때문에 후자에서도 폭발의 위험이 있다는 것을 노동자들이 알고 있음에도 말입니다. 워프는 이것이 ‘휘발유가 없는(empty) 저장고’라는 이름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empty’라는 단어를 일상적으로 사용했기 때문에 노동자들이 저장고가 안전할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워프는 또한 아메리카 원주민인 HOPI족의 언어와 SAE(Standard Average European, 영어·프랑스어·독일어 등)을 비교했습니다. 워프는 문법적 범주의 성질이 다르다고 보았습니다. 호피족 언어에서는 행위의 발생 자체가 중요합니다. 일이 진행 중인지 진행되었는지의 여부는 표현하지 않습니다. 반면 SAE에서는 정확한 발생 시간이 정해져 있습니다. 즉, 시제의 명확한 구분에 대한 차이가 존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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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프의 연구에 따르면, 언어의 차이처럼 호피족 사람들은 세계를 계속 진행 중이고 연결된 일련의 상태로 보았습니다. 반면 SAE의 화자들은 세계의 모든 것을 측정할 수 있고, 셀 수 있으며, 반복되는 상태로 보았습니다. 워프는 앞서 말한 두 언어의 차이가, 두 언어의 화자가 세상을 인식하는 차이점을 만들어 냈다고 주장했습니다.

 

사피어와 워프는 같은 이론을 주장하는 듯 보였지만, 그 결은 좀 달랐습니다. 이른바 ‘강한 형태(Strong version)’와 ‘약한 형태(Weak version)’입니다. 사피어나 워프가 직접적으로 두 형태를 구분하지 않았지만 언어 상대성 이론이 발달함에 따라 두 형태로 갈린 것입니다. 언어 상대성 이론의 강한 형태는 ‘언어 결정론’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습관적으로 사용하는 언어의 구조가 개인의 사고방식을 ‘결정’한다는 내용입니다. 언어가 인간의 사고에 미치는 영향을 아주 강력하게 주장하는 경우인데, 워프가 초기에 지지한 입장이 바로 이 '언어 결정론'입니다. 약한 형태는 언어가 인간의 사고에 끼치는 영향은 분명히 있지만, 결정적 요인은 아니라는 입장입니다.

 

사피어와 워프 이후로도 언어 상대성 이론은 끊임없이 발전을 거듭했습니다. 여러 학자들이 언어 상대성 이론을 주의 깊게 연구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언어 상대성 이론은 여러 비판에 직면하기도 했습니다.

 

 

2. 언어 상대성 이론은 옳은가?

 

<컨택트>에서는 헵타포드의 언어를 배우자마자 그들처럼 사고할 수 있는 것 같이 표현되었습니다. 이는 언어 결정론의 영향을 깊게 받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만큼 스토리를 이끌어 가는데 언어 상대성 이론은 매력적이었다고 볼 수 있겠지요. 그러나 이론 자체의 매력과 설득력은 별개의 부분입니다. 언어 상대성 이론은 수많은 비판에 직면했습니다.

 

연구 결과는 물론이고 언어 철학적으로도 비판을 받았습니다. 만약 인간들이 사용하는 언어 능력이 사고력을 결정한다면,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 동물들은 사고력이 없는 것이 되는지. 또한 언어 사용에 어려움을 겪는 아이들이나 언어 장애를 겪는 이들의 사고 능력을 언어 능력만으로 평가 절하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쉽게 답하기 어려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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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암 촘스키

 

워프가 내어놓은 여러 예시들도 비판을 받았습니다. 에릭 르네버그나 노암 촘스키 같은 언어학자들은 그가 직장 생활에서 경험한 예시의 상관관계를 증명할 방법이 없고, 순환 논법으로 인해 논리적 오류를 지니고 있다고 비판했습니다. 다른 예시들 역시 연구라기보다는 우화적이며, 수많은 언어에 적용될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이 든다는 비판이 존재합니다.

 

우리의 일반적 생각으로도 여러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집단은 같은 문화를 공유할 수 없는지? 인간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언어인데, 언어가 인간의 사고를 지배한다는 것이 타당한지? 이런 의문점들로 인해 언어 상대성 이론은 많은 비판을 받았고, 그중 언어 결정론은 이론적 힘을 잃는 수준까지 이르렀습니다.

 

언어 상대성 이론은 여전히 가치가 있는 이론입니다. 여러 매체에서 다뤄지고 있으며, 언어가 사고에 미치는 영향을 측정하려는 연구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중언어 화자와 단일언어 화자의 차이점에 관한 연구도 진행 중입니다. 현재 학계에서 언어 상대성 이론이 받아들여지는 정도는 ‘언어가 사고에 영향을 미치긴 하지만, 그 수위에 대해 연구가 계속되고 있다’ 정도로 정리해 볼 수 있겠습니다. <컨택트>에서처럼 외계인의 언어를 배운다고, 바로 고차원적인 사고를 하고 심지어 시간마저 거스르는 경지에 이르긴 어려워 보입니다.

 

지금까지 언어 상대성 이론을 한번 살펴보았습니다. 사실 이름은 어렵게 되어 있지만 내용은 그렇게 어렵지도 않지요. 생각해 보면 우리는 언제나 언어 상대성 이론 속에서 살아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대부분 어릴 때 “고운 말을 써야 심성이 고와진다”라는 말을 듣고 자랐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