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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로 접어드는 대위 병영은 늦가을의 정취가 잔뜩 묻어났다. 플라타너스 나뭇잎이 연병장을 나뒹굴었다. 구름 한 점 없이 청명한 하늘과 아침 이슬을 머금은 숲은 광활한 대지를 풍요롭게 만들었다. 오전 8시만 되어도 해가 중천에 뜬 것처럼 어색하던 생활이 서머 타임이 끝나고서야 한국의 아침처럼 변했다.

 

계절의 변화에도 신병들은 아침 청소를 끝내고 낙엽과 담배꽁초를 주우며 중대 집합을 준비했다. 매일 해오던 일이므로 일상이 되어 몸에 익숙해졌다. 참 할 일 없는 군대에 할 일 없는 놈처럼 한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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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 구보, 연대장부터 신병까지 예외 없이 모두 같은 복장에 색깔만 달리해서 중대를 구분하는 구보.

 

중대장이 멋진 불어로 블라블라 한참을 떠들었다. 알아듣는 한 두 단어를 제외하곤 불어가 참 예쁜 언어구나 생각하며 저렇게 잘할 수 있기를 바랐다. 자장가처럼 달콤한 그것은 꿈과 같은 바램일 뿐. 중대장이 소대장에게, 소대장이 다시 각 팀장인 중사에게 지시한 후 구보가 시작되었다. 나는 외인부대의 구보야말로 가장 힘든 현실적인 훈련이라 생각했다.

 

조금씩 한계를 극복해가며 뱃살이 사라지고 심지어 군살마저 사라져가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구보의 강도가 높았다. 나는 구보에서도 중간 이상이었으므로 체력은 부족하지 않았다. 구보 코스는 아름드리 나무가 우거진 운하를 끼고 달리거나, 숲을 달리거나, 농촌의 광대한 들판을 달렸다. 같은 곳을 달린 기억이 없을 정도로 코스가 많았다. 구보의 마지막 2,3km는 자유여서 더더욱 힘들었다.

 

부대원들의 구보 때는 군복이 아닌 아주 짧은 체육복을 입었는데, 체육복이라기 보다 팬티 같아 입기가 민망했다. 교육 연대가 시내에서 가까웠던 이유로 민간인들도 가끔 만났다. 심지어 시내 중심가인 미디 운하의 카스텔노다리 호수까지 달렸으므로 더더욱 민망했다. 근육질 부대원들의 허벅지를 보는 게 즐거운 일인지 '엄지 척'하며 함박미소를 날리는 마담들의 환호를 팀장이 즐겼다. 가끔씩 팀장은 그런 마담들이나 민간인들이 보이는 곳에서 ‘위치로!’를 외치면 훈련병들은 푸시업 자세를 취했다. 팀장이 외인부대 특유의 푸시업 쇼를 보여 주었다.

 

"아래로! 위로! 중간, 우로, 좌로, 중간, 아래로, 위로! 중간! 아래로! 피곤하냐!?"

 

푸시업을 하면서 멋진 쇼맨십을 보여주다가는 다시 자세를 바꾸었다.

 

"윗몸 일으키기! 157, 158, 159!"

 

중사의 우렁찬 목소리가 마치 마을을 깨우는 성당 종소리처럼 울려 퍼졌다. 몇몇은 힘들어하면서도 키득거리면서 순간을 즐겼다. 짧고 강렬한 이미지를 남기고 대원들은 바람처럼 사라졌다.

 

모든 것이 이국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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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국적인 풍경도 풍경이지만 한국에서 언론을 통해 보던 군대나, 군 면제를 받고 3주 실역 미필을 받던 때의 기억은 이랬다. 천막 같은 병영에 맨땅의 연병장, 전 소대원이 같이 잠을 자야 하는 획일화된 온돌식 내무반과 관물함, 값어치라고는 없어 보이는 보급품 등에 비해 넘치는 부대원의 자신감이 있었다. 외인부대는 오바뉴의 사령부 지원병 중대와 마찬가지로 요새처럼 근사한 건축물에 포장된 넓은 연병장, 잘 정돈된 정원과 시설이 있었다. 국가 유공자녀로 군 면제자였던 나는 전방에 근무하는 친구들을 위해 여자 친구들을 데리고 위문 공연을 다니기도 하면서 군사 비밀인 듯 굳게 다문 친구들의 군기 든 모습을 보고 의아했었다.

 

한국 군대가 개인의 역량 평가 없이 모두 병장이 된다면 외인부대에선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나는 한국 군대를 갈굼의 문화, 갑질을 행하면서 의미나 이유, 죄의식 없는 실질적인 현장 실습장이라고 확신했다. 너보다 높은 계급으로서의 갈굼일 뿐. 이해가 되거나 정당한지에 대한 구분 없이 한국 사회를 계급화 시켜 노예화된 시스템으로 만드는 첨병으로 보였다.

 

내가 한국 군대를 다녔다면, 최고의 고문관이 되어 윤 일병이 되거나 임 병장이 되었을 것이라 확신했으므로 외인부대 생활은 금상첨화였다. 감시와 통제, 갈굼과 집단 린치가 한국 군대의 병폐라면 외인부대원들에겐 4개월의 훈련 기간만 빼곤 철저하게 보호되었다. 물론, 있었다 하더라도 나는 별로 느끼지 못했고 나에게 있었다면 그것은 오로지 나 자신이었다!

 

공식적으로는 교육대에서의 4개월은 외부와의 접촉이 차단되어 편지를 쓰거나 전화, 인터넷을 할 수 없었지만 조금씩 허용되었다. 케피를 수여받은 신병들은 피엑스를 당직 병장의 통솔 하에 방문했다.

 

농장에서 병장들과 하사관들의 끊임없는 모욕적인 언행(인간적인 가치 저하, 동물 취급)에 대한 보상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짜릿한 자유로움은 군대 같지 않았고 군복을 입고 있는 나 자신을 잊을 만큼 짬을 즐길 수 있었다. 피엑스에서는 맥주와 와인을 팔았으므로 당연히 사 먹을 수 있었다. 아직 신병이라 자유가 덜 하긴 했지만 저녁 시간에 가끔씩 주어지는 자유시간에 담배도 사서 피우고, 포르노 잡지에 관심이 없는 척 관심을 가지기도 했다.

 

성에 대해 무지했던 나이 서른. 외국에서 보는 포르노 잡지에 나오는 금발의 미녀들이 드러낸 속살은 신비롭지도 아름답지도, 전혀 설레지도 않았다. 성에 대해 무지했으나 그만한 나이의 젊은이가 가지는 연애의 한 부분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에 대해 무지했던 나이에 만나는 섹스 샵과, 가판대에서 신문 사듯 살 수 있는 포르노 잡지책이 어찌 충격적이지 않을 수 있었을까! 문득, 적은 나이도 아닌데 부끄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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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로 와서 외인부대에 지원하기 전까지 나는 복싱 코치와 형님이 운영하는 건설업체 작은 사장으로, 전라남도 녹동, 고흥, 완도 지역에서 여러 친구들과 젊음을 불태웠었다. 나이 서른에 운동을 계속하기에도 어줍지 않았고 코치랍시고 용돈도 안되는 복싱 코치는 창살 없는 감옥이었다.

 

같이 복싱을 했던 동료들은 나더러 ‘자유인’이라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시집과 죄와 벌을 읽었고 샹송과 팝송에 능했으며, 쉬는 날엔 이젤을 앞에 두고 수채화 연습으로 시간을 보냈으므로 동료들과 언행이 달랐다. 뿐만 아니라 전혀 폭력적이지 않았고, 오히려 너무 이성적이라 대화로 풀려는 경향이 강해서 싸우려고 드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사실, 너무나도 온건한 평화주의자여서 글러브를 벗은 상태에서 싸우라는 아우성을 이해하지 못했다. 게다가 운동 신경이 뛰어나지도 않아 하위 그룹에 머물렀다. 내성적이지만 까불거리고 논리적이지 못한 고등학교 1학년. 친구를 따라 복싱 체육관을 찾았던 것이 내세울 것 없는 선수가 되었고 진주의 한 복싱 체육관 코치가 되었지만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일을 하고 있었다. 자주 관장님의 감시와 통제에서 탈출해 지리산으로 훌쩍 도망을 가기도 했다. 돌아오면 모른 체 해줬다.

 

별 볼일 없던 내 인생의 특이점은 완도에서 일어났다. 가만 있어도 생겼던 연애의 경험이, 나이가 차자 결혼 얘기가 오가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여자 때문에 구치소를 살기도 했다. 사랑을 잃은 젊은 마음에 영혼이 빠져나간 듯 고통스러운 순간이 방화와 자살까지 이르러 실패했고, 구치소 생활을 하게 되었던 부끄러운 과거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설레임은 찾아왔지만 결말은 비극으로 끝났다.

 

완도 제일 가는 부잣집 딸이었던 특출난 미모의 그녀는 가난한 어떤 남자와 연애 중이었다. 부잣집 사모님 같이 소녀 같던 그녀의 어머니가 나를 초대해, 공군 조종사인 아들에게 주겠다며 간직해 둔 발렌타인 30년산과 오골계를 내놓고 아버지께 소개하며 성대한 잔치까지 벌이기도 했다. 우여곡절 끝에 만난 그녀의 남자를 목포까지 찾아가서 만났다. 그가 하는 얘기는 너무도 충격적이었다. 여자는 고등학교 때, 예쁘고 끼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런 그녀를 동네 양아치들 7명이 강간을 했다고 했다. 그들의 선배였던 이 양아치가 거둬들여 사랑해주고 있다고 했다. 그는 울기도 하고 하소연도 했다. 여자가 불쌍했다. 어린 마음에도 집착과 사이코패스적인 심리라고 보았다. 어린 마음이 서로서로 모자란 마음에, 모자라는 표현으로, 위험천만하지만 아름다운 청춘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정신 차려!”

 

당직 병사 풋풋(Foot Foot; 4개월 훈련 뒤, 성적이 뛰어나거나 군 경력이 뛰어난 훈련병을 자대 배치 없이 곧장 병장 훈련(CM1) 4개월을 받게 하고 진급된 병장. 이런 친구들 중에도 뛰어난 인원은 곧장 중사까지 진급 가능한데 6개월의 훈련을 거쳐야 한다)이 상념 속에 젖어 있는 교육실 안의 정적을 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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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ème R.E 구글 뷰

 

훈련병들은 오전 사격을 끝내자마자 판초를 꺼내 놓고 그 위에 FAMAS를 분해해 부품 하나하나 이름을 외워가며 청소를 하고 있었다. 달콤한 과거의 회상이 깨어지고 현실이란... 따분하고 아무 의미 없어 보이는 총기 청소에 인내력 테스트를 하고 있는 순간이 미칠 것만 같았다. 일찍 끝낸 신병은 검사를 맡고 밖으로 나가 담배를 피우거나 커피를 마셔도 좋다고 했다. 다 마쳤다고 손을 든 동료들이 풋풋에게 검사를 맡다가 지적을 당하고 푸시업 10개를 한 후 다시 총기 청소를 했다. 성공한 친구들은 의기양양하게 밖으로 나가 휴식을 취했다.

 

실내 사격장은 운동장과 맞닿아 있었다. 6명씩 조를 지어 사격장에 들어가면 나머지는 밖에서 대기하는 동안 담배를 피우며 차례를 기다렸다. 문득, 1990년에 3주 실역 미필로 출퇴근을 하던 아련한 기억이 났다. 사격 한 번 하려고 PT 체조와 뺑뺑이에 유격 훈련까지 마치고 녹초가 되어 쏴 보았던 몇 발의 총알. 그 경험이 실탄 사격의 전부였던 나는, 휴가 나온 친구들을 만나거나 제대한 친구들을 만나면 할 말이 없었다. 포장마차 끄트머리에 앉아 대화에 끼지도 못하고 안주만 축내면서 친구들의 군대 얘기를 들으면 대한민국은 마치 혼자 다 지키는 것처럼 영웅담이 과했다.

 

그런 기억으로 그 유명한 프랑스 외인부대에서 사격 연습을 하는데, 실내 사격장에서 헤드폰을 끼고 엎드려 쏴, 무릎 쏴, 서서 쏴, 그리고 근접 속사 네 자세로 20발을 쏘고는 밖으로 나와 담배를 피우거나 농담을 하는 빠져도 한참 빠진 군대를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총기 청소의 길고 지겨운 시간은 심지어 저녁 시간이 되어도 끝나지 않았다.

 

“모두 밖으로 헤쳐 모여!”

 

“당타스, ‘J’avais un camarade’ 선창한다!”

 

“자베장 까마라드…”

 

“식당을 향해 행진하며 군가 한다. 군가는 ‘J’avais un camarade’, 앞으로 가!”

 

외인부대 군가는 느리고 슬프다. 군가 수첩을 해석해 보면 그렇게 슬플 수가 없었다. 저물어 가는 석양 아래, 전사한 외인부대 선배를 추억하며 천천히 식사를 하러 가는 군인을 상상해 보라! 뉴스나 다큐에 나오는 모습은 멋있지만 가사는 눈물을 쏙 빼놓을 정도로 슬프다.

 

 

내겐 최고의 전우가 있었지

평화 시든 전쟁 시든

우리는 마치 두 형제처럼

보폭에 맞춰 걸었던

보폭을 맞춰 걸었던

 

하지만 총 알 한 발이 우리를 맞추면

먼지 속에

쓰러진 전우가 있어

내 마음은 찢어지네

내 마음은 찢어지네

 

내 운명은 죽기를 원하지만 나는 총을 장전하네

그래, 잘 가, 안녕 내 형제여

이승이든 저승이든

언제나 같이 하자

언제나 같이 하자

 

농장에서의 혹독했던 배고픔은 케피블랑을 착용함으로 끝나고 어느 정도 자유도 주어졌다. 식사량은 여전히 성에 차지 않았지만 혹독함이 단련되었던 탓인지 위가 작아졌고 음식에 대한 불만도 없이 적응되었다. 식사를 끝내고 다시 돌아온 신병들은 점등 시간이 될 때까지 총기를 닦았다. 파마스가 싫어졌다.

 

아침 구보가 없는 날에는 수영을 하러 갔다. 연대 내의 수영장 인원 수용 한계로 시내의 공공 수영장을 이용하기도 했다. 유치원 아이들이 선생님을 따라와서 수영을 배우는 그야말로 공공인 수영장에서 대원들은 테스트도 하고 경기도 했다.

 

바닷가에서 나고 자라 물귀신이란 별명도 있었지만 테크닉이 없었던 탓도 있고 사실, 수영장이란 시설을 처음 이용해 보는 것이어서 신기했다. 민간 수영 코치가 따로 나와 신병 교육을 시켰다. 1천여 명의 장교, 하사관, 지원병, 특수 교육병들과 지원 신병들로 구성된 당주 병영은 부대원이 된 사람들에 대한 복지가 평생직장임을 느끼게 할 만큼 애착이 가는 시스템이었다.

 

부대 내의 복지시설 중 특이사항은 일과가 끝난 후 잠수, 스키, 복싱, 배드민턴, 핸드볼 등을 즐길 수 있는 종합 체육관이 있다는 것뿐만 아니라, 시내의 민간 교육 시설에서의 교육이나 활용도 얼마든지 가능했다는 점이었다. 병영 내에서의 생활이 싫으면 4년 차 근무부터는 시내의 집을 구하거나 동거를 해도 괜찮았다. 자대 배치 받고 내무반 생활이 어느 정도 익숙해지면 휴대전화나 노트북 등의 사용도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일과 시간을 제외하면 아무런 터치 없이 병영의 모든 시설물을 이용할 수 있었다. 심지어 밤새도록 술을 마셔도 다음 날 일과에 지장만 주지 않으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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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병인 우리에게 우체국 명의의 신용 카드가 주어졌다. 주 단위로 사용 한도가 있는 카드였다. 보험 설계사가 와서 일대일 면담을 하면서 보험에 들었다. 행정적인 절차들이 하나씩 하나씩, 아주 천천히 이루어졌고 바쁠 것 없이 시간이 가는 대로 때가 되면 이루어졌다. 신병들의 일거수일투족은 소대장, 중대장에게 보고, 문서화 되어 보관되었고 병장 진급과 하사관 진급 혹은 전공 병과에도 적용되었다. 어느 것 하나 허술하게 관리되지 않았다. 부대가 정해놓은 절차에 따라 자대 배치 받을 연대를 복수 선택했다. 병과도 간호병, 행정병, 기술병, 요리병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선택이 가능했다.

 

아무것도 알 길 없는 햇병아리 신병들은, 그것도 모든 프랑스어가 아름다운 금발 미녀의 자장가 소리처럼 달콤하기만 할 뿐 무슨 소리인지 알아들을 길 없는 신병들이 3년여 복무하면 의무적으로 받아야 하는 교육을 선택해야 했다. 어느 연대에 자대 배치를 받든 이곳 교육대는 반드시 돌아오는 곳이었다.

 

먼저 지원했다가 4년 차 근무병으로 병장 교육을 받거나, 전공 병과 교육을 받으러 온 한국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1997년 11월 4외인 연대에 한국인이 몰려오고 있었다. 한국에 IMF인지 뭔지 생소한 게 터져 나라가 망할 지경이라고 했다. 중사들이 와서 ‘한국은 망했다’고 했다. 무슨 말인지 하나도 이해하지 못했다.

 

1소대원들은 달콤한 병영을 두고 남쪽 25km 지점의 ‘레싹’ 농장으로 전투 훈련을 위해 다시 이동했다. 이번에는 전투 행군 중에 일어나는 실전 대비 훈련과 보고체계를 훈련했다. 소총계의 신화라고 알려진 AK-47 소총을 처음 보았다. 파마스 분해 조립이 5분 정도 걸리는데 러시아권 동료가 스윽 보더니 30초도 안되어 분해 조립을 끝내버렸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보게 될 개인화기들을 맛보기로 보여주고 간단한 설명을 곁들였다. 화생방 교육도 이어졌지만 가둬 놓고 버티게 하는 훈련은 존재하지 않았다. 인권에 관한 문제인 듯 했다. 우리가 집중해야 할 것은 전투 행군 중에 일어나는 상황에 대한 보고였다.

 

언어가 부족했기 때문에 행동에 곁들여지는 언어가 중요했다. 소대에는 나 이외에도 어리바리 신병들이 50%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전투 행군 중에 일어나고 있는 상황 즉, 훈련 상황 설명과 실습을 나는 보기만 할 뿐 이해는 거의 안되고 있었다.

 

“잘했어! 잘하고 있어!”

 

팀을 리드하던 훈련병이 뒤따르는 전우들에게 손을 들어 몸을 피하라는 신호를 줬다. 숲으로 몸을 숨긴 대원이 군모를 쳐서 팀장(하사나 중사) 부르자 칭찬을 하며 순조로운 진행에 기쁜 듯 소리쳤다.

 

“잘했어! 잘했어~ 바로 그거야! 그래 무슨 일이야?”

 

"저기… 저 앞에…”

 

신병이 앞에 일어난 상황을 보고하기 위해 앞을 주시하며 팀장에게 보고를 하려 했지만 말문이 막혔다. 이 웃긴 상황은 더더욱 웃긴 상황으로 이어졌다.

 

“그래! 저 앞에 뭐가 있어? 저 앞을 어떻게 지시해야 하나?”

 

“내 팔이 가리키는 방향!”

 

대원이 가르친 대로 척척 대답을 했다.

 

“좋아! 네 팔은 어딨나?”

 

“좋아! 네 팔은 어딨나?”

 

신병이 졸지에 팀장의 말을 따라 했다. 중사는 내 팔이 가리키는 방향을 말할 때, 팔을 내밀어 정확한 위치를 팀장에게 보여주어야 하는데 신병이 그렇게 하지 않고 말만 따라 했던 것이다. 중사가 웃음을 참지 못하고 킥킥거리고 다른 프렌치 동료들도 킥킥거렸다. 세상 진지하게 앞을 보며 보고를 하던 동료가 영문을 모른 채 팀장을 쳐다봤다. 영락없는 동네 바보의 모습이었다. 나는 왜 웃는지도 모르고 같이 따라 킥킥거렸다.

 

“좋아, 좋아… 침착해야지… 우리 침착하자… ㅋㅋㅋ 자, 잘 봐! 네 팔이 어디 있나?”

 

팀장의 환장할 것 같은 오랜 설명과 눈치를 주고서야 동료가 팔을 앞으로 내뻗으며 훈련한 대로 정확하게 미션을 완료해냈다. 마치 나를 보는 것처럼 조마조마했던 쫄깃한 심장이 가라앉았다. 우리는 걷고 걸으며 전투 행군을 했다. 밤이 되면 비부악(야영)을 했고 소대 고문관이 가장 어려운 시간대 보초를 섰다. 나는 어느 시간대에 상관없이 누가 서든 설 것이므로 개의치 않았다.

 

눈치 빠른 친구들은 그 와중에도 소대를 완전히 파악한 모양이었다. 나 하나 간수하기에도 바쁜데 분위기 파악하고 가야 할 길을 정한 거면 그것도 대단한 능력이었다.

 

우리 소대가 피레네 산맥에 위치한 유명한 휴양지 ‘포미게르(Formiguères: 스페인 국경에 위치한 외인부대원 휴양지)’에서 겨울 산악 스키 훈련 겸 휴양을 갔을 때였다. 하루는 소대장 알브레슛이 소대원들을 모아 놓고 오늘 방송국에서 취재를 나오는데 혹시 인터폴이나 범죄 관련해 수배 된 대원이 있는지를 물었다. 몇몇이 이유를 설명하고 빠졌고 폴란드 동료 하나가 소대장이 말하는 중에 눈빛을 피했다고 바로 그 자리에서 폭행을 당했다.

 

외인부대원은 상대의 눈빛을 피해서는 안되며 고개를 쳐들고 바라봐야 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눈길을 피해서는 안됐다. 외인부대의 특성상, 여러 나라에서 취재가 있어 원치 않는 대원이 있으면 얼마든지 피할 수 있었고 이유를 묻지 않았다. 개인의 의사를 충분히 존중해주었다. 일주일 간의 꿈같은 시간이 지나 교육대로 돌아온 소대는 본격적인 근무에 들어갔다. 5분 대기조, 야간 경비, 연대장 면담에 가끔씩 장군이 오면 장군 면담도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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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인부대 사령관(COMLE)검열. 나팔수에서 사병까지 예외 없이 진행한다. 연대장과 중대장, 소대장까지 집합

 

가끔씩 간 크게 담 넘어 외출하고 오는 특수 병과 교육생들의 길목에 잠복하고 있다가 잡아 오기도 했다. 근무가 없는 소대원들은 장교 식당 지원을 나가 설거지와 청소를 하기도 했다. 장교 식당이 위치한 곳은 한국에서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살찌고 요염한 사슴과 노루, 토끼가 뛰어노는 넓디넓은 정원과 숲으로 둘러싸였고, 고풍스러운 성처럼 현실에서는 보기 힘든 바로크 양식을 취한 성이었다. 클래식 영화에서 보는 듯한 고풍스런 향연의 현장이 거기 있었고, 신병 소대원들은 노예처럼 그들의 향연에 동원되어 접시를 닦고 향연이 끝날 때를 기다려 청소를 끝내고 나서야 원대 복귀할 수 있었다. 기분이 묘했다. 결코 좋은 기분이 아니었다. 하사관들 클럽과 중사 이상 원사 이하의 식당은 따로 있었다. 공식적인 일상과 이면의 일상이 그렇게 달랐다.

 

95년 지원할 때, 나와 같이 있다가 합격했던 한국 친구를 5분 대기조 근무 중 만났다. 공수 특전단 출신에 키가 큰 친구로 병장 교육을 받으러 왔다고 했다. 친구를 만난 사실을 안 팀장이 특별 휴식을 주었다. 우리는 아무 말 없이 담배만 피우다가 헤어졌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온 어느 날, 5분 대기조 때 개인적으로 구입한 라디오를 통해 김대중 대표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는 소식을 프랑스 라디오를 통해 들으며 잠이 들었다.

 

 

 

 

 

Profile
2013년 3월, 애묘, 40대를 위한 딴지미팅 목적으로 가입! 2018년 초 2개월간 탈퇴 후 재가입. 딴지 뇐네.
파뤼 거주
북아프리카 자주 출몰.
50 넘겨 꿈과 희망 잃은 독거노인!
잘죽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