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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Condi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리비아식 해법의 핵심은,

 

『선(先) 핵 폐기, 후(後) 보상』

 

이다. 이는 상당히 ‘예외적인 방식’이고, ‘미국 위주의 방식’이었다. 리비아와 미국의 정치 상황과 핵무기 프로그램의 ‘완성도’를 변수로 집어넣어야 한다.

 

어쨌든 거칠게 대입해 보자면, 2005년 10월 리비아의 핵무기 프로그램은 완전히 폐기됐고, 그 보상은 2006년 5월이 돼서야 지급됐다.

 

(리비아가 핵 포기를 선언한 뒤에도 폐기까지 1년 10개월이 걸렸다. 이 ‘기간’에 주목해야 하는 게 만약 북한 김정은 정권이 핵무기 프로그램을 동결 혹은 폐기한다고 하면, 2년 내외의 기간 안에 끝내야 한다는 말들이 정치권, 국제 정치학계에서 흘러나오는 ‘산술적 수치’가 여기서 시작될 것이다. 정치적 변수인 트럼프의 중간 선거와 재선을 염두에 두고 2년 내에 가시적 성과가 없다면, 이 ‘하늘이 준 기회’가 어그러질 확률이 높다. 모두들 입밖에 내지 않고 있지만, 내심 리비아식 해법이 모두의 머릿속에서 또아리를 틀고 있을 거다)

 

리비아가 테러 지원국 명단에서 빠지게 됐다. 지난 회에 언급했듯이 현대 자본주의 체제는 미국 주도의 WTO 체계 위에서 돌아가는 구조다. 즉, 미국과 척을 지는 순간 경제적으로 ‘정상적인’ 국가 운영을 포기해야 하고, 덤으로 정치, 군사적으로도 생존의 위협을 받을 수밖에 없다. 솔직히 말해서 군사적 위협은 그리 중요치 않다. 경제적인 압박만으로도 정권 유지에 상당한 압력으로 작용될 수밖에 없다.

 

한 번 생각해 보자. 수출입 없이 한 나라가 온전히 생활할 수 있을까? 당장 ‘먹는’ 문제만 생각해 보자. 한국의 경우 식량 자급률이 25%가 안 된다. 유사시 제주도 앞바다에 핵 잠수함 몇 척이 떠 있다면, 국내의 식량 가격은 수십, 수백 배로 뛰어오를 거다. 식량 하나만 봐도 그렇다. 여기에 원유와 각종 의약품, 생활필수품, 기타 경제활동에 필요한 자재들까지 차단된다면 나라가 어떻게 돌아갈까?

 

리비아는 살아야 했다.

 

25년 만에 리비아는 테러 지원국에서 빠져나오고, 국교가 정상화되면서 리비아에 미국 대사관이 들어서게 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게 콘돌리자 라이스(Condoleezza Rice)였다. ‘아들’ 부시 행정부 1기 때 국가 안보 보좌관으로, 2기 때는 콜린 파월의 뒤를 이어 국무부 장관이 됐던 부시 행정부의 외교 실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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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소련의 ‘해체’에 직접 나선 이가 그녀였다. 31살 때인 1986년 레이건 행정부에서 합참의장의 전략 핵정책 고문을 지내면서 소련과의 핵무기 감축 협상에 참여했다. 34살 때인 1989년 ‘아빠’ 부시 행정부에서는 국가안보위원회(NSC)에서 소련 및 동유럽 담당 책임자로 근무했다. 이때 유명한 일화가 있었는데, 소련 해체 직전인 1989년 부시와 고르바쵸프는 몰타에서 미소 정상회담을 했었다. 이때 양국 정상이 콘디(Condi : 콘돌리자의 애칭)에 대한 평가를 내렸다.

 

고르바쵸프는,

 

“그녀는 내가 아는 소련의 모든 것을 말하고 있었다.”

 

라며, 당황했던 기억을 말했다.

 

부시는 그녀를 자랑스럽게 소개하며,

 

“내가 소련에 대해 아는 것은 전부 이 사람이 들려준 것입니다.”

 

협상이 어떻게 진행됐을지는 알만 할 것이다.

 

문제는 아버지 부시가 아들 부시를 ‘대통령’으로 만들겠다는 망상을 가지면서부터였다. 아버지 부시는 공화당의 대부였던 조지 슐츠 前 국무부 장관을 찾게 되었고, ‘지구 생명체 최대의 위협(당시 영국 런던시장의 코멘트였다)’이었던, ‘아들’ 부시를 사람으로 만들... 아니, ‘대통령’으로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조지 슐츠는 즉각 ‘가정교사’를 찾게 된다.

 

“당신 아들이 무식한 건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오. 특히 외교 분야에 있어선 까막눈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오. 주지사급에서 놀겠다면 외교는 몰라도 되겠지만, 적어도 미국의 대통령 자리를 노린다면 외교는 필수 코스요. 부시에게 가정교사를 붙여 주어야겠소.”

 

1998년 콘디는 조지 W. 부시의 외교 가정교사가 된다.

 

‘아들’ 부시는 대통령이 됐고, 동화책을 읽다가 911테러 소식을 듣게 된다. 뒤이어 아프가니스탄, 이라크를 침공했으며, 리비아의 핵무기 포기 협상에도 뛰어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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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돌리자 라이스가 ‘아들’ 부시 행정부 1기 내에서는 ‘정치력의 실패’를 보여줬다는 게 당시 미국 내 언론들의 반응이었다. 911 테러 직후 미국은 눈이 돌아갔다. 문제는 이 당시 미국이 아무리 눈이 돌아갔어도 ‘전쟁’이란 카드를 함부로 꺼낼 수는 없었다는 거다. 아프가니스탄 침공은 ‘당연한’ 결과이지만, 이후 이라크와의 전쟁이 문제였다. 언제나 그렇지만, 국방부는 자신이 ‘밥값’을 한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전쟁을 선호했다.

 

반면, 국무부 역시 자신들이 ‘밥값’을 한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외교적 해결을 하고 싶어 했다. 럼즈펠드와 콜린 파월은 자신들의 위치에서 세상을 바라봤다. 럼즈펠드는 ‘전쟁’이었고, 1차 걸프전을 치렀던 콜린 파월은 ‘외교적 해법을 조금 더 고민해 보자’란 입장이었다. 이 당시 국방부와 국무부의 갈등은 상당히 심각한 수준이었다. 이때 정치력을 발휘해야 할 이가 안보 보좌관이었다. 그러나 당시 콘돌리자 라이스는 너무 어렸다. 키신저나 브레진스키와 같은 노회한 정치력을 기대할 수가 없었다. 결국 양 부처의 갈등은 극단으로 치달았고, 언론은 콘돌리자 라이스의 역할 부재에 대해 성토했다.

 

물론, 부시는 콘돌리자 라이스 편이었다. ‘지구 생명체 최대의 위협’은 알아먹기 힘든 ‘외교 용어’와 ‘국제 관계’를 자신의 언어 체계 안에서 설명해 줄 친절한 가정교사가 필요했고, 그 결과 콘디는 수많은 공격 앞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 당시 부시는 외교적 사안에 터질 때마다 입을 다물었는데, 부시의 입에서 나오는 ‘적절한 코멘트’와 ‘외교적 방향성’의 구상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콘디에게 의지했다.

 

당시 콘디에 대한 부시의 절대적 신뢰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일화가 있는데, 이라크 핵 위협에 관한 연설문을 부적절하게 다룬 콘디에 대한 경질설이 나돌았을 때 부시 대통령은 두말없이 콘디의 편이 돼 주었다.

 

“콘돌리자 라이스 박사는 정직하고 훌륭한 사람이며, 그녀가 행정부에서 일하게 되었다는 것은 미국으로서는 운이 좋은 것이다.”

 

가정교사 없이는 외교 정책을 조율할 수 없었던 부시였다.

 

이렇게 장황하게 콘돌리자 라이스의 이야기를 하는 건 리비아 핵 협상과 북한 핵협상을 말하기 위해서이다. 기묘하다고 해야 할까? 카다피는 콘돌리자 라이스의 ‘팬’이었다. 아니, 어쩌면 콘디를 짝사랑하거나 최소한 ‘이상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농담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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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다피는 콘디의 사진을 모아 사진집을 만들었고, 콘디의 활동 영상을 편집한 영상물을 제작했다. 심지어 이걸 콘디가 리비아를 방문했을 때 콘디 앞에서 틀었다(당시 콘디는 자신 앞에서 ‘부적절한 영상’을 상영할 줄 알았다. 그러나 의외로 ‘평범’한 영상이기에 안도했었다).

 

핵협상 당시 미국 정부는 카다피의 콘디에 대한 ‘감정’을 협상에 이용하려 했고, 실제로 이를 행동에 옮겼다. 당시 콘디가 리비아 핵협상을 끝낸 뒤 세계(콕 찍어 핵무기 개발에 나서는 이들)에 하나의 메시지를 건넸다.

 

“2003년 리비아 국민들에게 전환점이 됐던 것처럼 2006년은 북한과 이란 국민들에게도 전환점이 될 수 있다.”

 

이 당시 반기문 UN 사무총장을 비롯해 세계 각국의 외교 전문가들은,

 

“핵무기를 협상을 통해 제거했다.”

 

“리비아가 군사적 굴복이 아니라 경제적 실리를 선택한 현명한 결정이다.”

 

“국제정치에 인센티브가 작동한 훌륭한 선례”

 

라고 리비아식 핵 해법에 찬사를 보냈다.

 

한마디만 하겠다.

 

“개소리”

 

이 당시 반기문 사무총장의 브리핑을 들어보자.

 

“리비아는 대량 살상 무기를 스스로 포기해 미국으로부터 여러 가지 인센티브를 받게 됐다.”

 

과연 이게 사실일까? 당시 UN 사무총장으로 정치적 발언을 해야 할 수밖에 없다는 건 인정한다. 그러나 이게 사실이 아니란 건 국제정치에 대한 식견이 조금만 있다면 알 수 있었다. 이 당시 리비아는 미국의 전쟁 공포를 인정했다. 실제로 리비아가 핵 프로그램 포기로 내건 선결 조건은,

 

“핵 프로그램을 포기하겠으니, 미국과 영국이 보장해달라.”

 

라는 거였다(2003년 12월 리비아가 핵 프로그램 완전 포기를 대외에 천명했던 시기는 공교롭게도 후세인이 체포되던 때였다).

 

(1990년대 후반부터 리비아와 미국이 관계 개선을 위한 물밑 접촉이 있었다는 것. 이 물밑 접촉이 서로에 대한 ‘최소한의 신뢰’를 만들었다는 건 인정해야 할 대목이다. 그러나 보다 본질적인 이유는 리비아의 ‘공포’였다. 물론, 90년대의 접촉과 신뢰 회복을 위한 노력을 부정하는 건 아니다. 이런 노력은 ‘협상’을 위한 최소한의 신뢰, 그 이상으로 발전하기는 어려웠다는 게 내 개인적인 판단이다)

 

당시 리비아는 미국과의 전쟁에 대한 부담감을 느꼈다. 협상의 칼자루는 미국이 쥐고 있었다.

 

‘아들’ 부시는,

 

“리비아가 국제사회로 복귀하려면 완전하고 검증 가능한 비핵화가 이뤄져야 한다.”

 

라고 대외에 천명했다. 소위 말하는 『검증을 통한 신뢰』였다. 그렇다면, 이 당시 북한 핵은 어떻게 됐을까? 안타까운 사실은 당시 미국은 북한에 대한 그 어떠한 ‘행동’도 보이지 않았다. 북한에 대한 직접 협상도, 리비아식의 핵 포기 유인책도 없었다.

 

까놓고 말하자. 이 당시 콘디는 대한민국을 신뢰하지 않았다. 공교롭게도 김대중, 노무현으로 이어지는 민주정부 10년 동안 ‘아들’ 부시를 만나야 했다. 콘디는 김대중을 ‘이상주의자’로, 노무현을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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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부시의 1기 행정부의 안보 보좌관은 콘디였다. 한국 측 카운트 파트너는 청와대 국가안전보장 회의(NSC)의 이종석 사무차장이었다(훗날 통일부 장관이 된다). 김일성 주체사상 연구 1세대로, 노무현 정부의 대북 문제 브레인이었으며 특사로 북한에까지 갔다 온 이종석 사무차장을 콘디는 싫어했다(당시 청와대 외교 노선은 ‘자주파’와 ‘동맹파’로 나눠졌었다는 게 공공연한 사실이었는데, 이 당시 이종석 사무차장은 자주파의 선봉장이었다. 물론... 그때도, 지금도 이런 ‘파벌’은 없다는 게 공식적인 입장이다).

 

콘디는 이종석 차장을 콕 찍어 싫다는 표현을 했고, 당시 야당(지금 야당의 전신)은 개떼처럼 들고일어나 이종석 차장의 경질을 요구했던 기억이 난다. 이런 갈등의 핵심에는 콘디가 국제정치, 아니 ‘정치’를 바라보는 관점이 있었다. 그녀가 흑인이면서 민주당이 아닌 공화당을 선택한 이유가 뭘까?

 

“나는 현실주의자다. 현실세계는 힘이 본질이다.”

 

그녀의 주장이었다. 그렇다면, 외교에 대해선 어떤 입장이었을까?

 

“외교는 국익의 도구이다. 외교는 강력한 힘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

 

그런 그녀에게 동북아의 조그만 반도 국가, 그것도 반으로 쪼개진 나라의 ‘유화정책’을 어떻게 바라봤을까? 이 당시 노무현 정부와 부시 행정부(콕 찍어 ‘콘디’와의 관계)와의 ‘북한’을 둘러싼 관계를 보여준 단적인 사건이 하나 있다. 바로 ‘작계 5029’를 둘러싼 갈등이다.

 

Operational Plan 5029. 우리에게는 작계 5029라 불리는 이 작전 계획은 북한 내의 쿠데타, 혁명, 대규모 망명 및 대량 탈북, 대량 살상 무기 유출 등의 상황에 대처하겠다는 명목으로 2005년 한미 연합 사령부가 수립한 작전이다.

 

이 당시 한국 정부는 반발했다.

 

“한국 정부의 주권을 침해하는 행위다!”

 

당연한 말일 것이다. 그러자 미 국방부의 리처드 롤리스(Richard Lawless) 차관보가 이종석 차장을 만나 닦아세웠다(전문용어로 ‘야지’ 놓았다고 해야 할까?).

 

“한국 정부가 북한 지역에 대해 아무런 주권이 없는데, 우리가 무슨 한국 정부의 주권을 침해했는가?”

 

콘디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갔다. 2006년 콘디는 하나의 선언을 날린다.

 

“북한은 주권 국가이다.”

 

갑자기 북한을 사랑하게 된 걸까? 아니다. 이건 외교적인 선언이다. 한국은 북한 지역에 아무런 주권이 없다는 걸 전 세계적으로 선언해 버린 거다.

 

냉정하게 말해보자.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을 맺을 때 우리는 여기에 참여하지 못했다. 한미연합사는 또 어떤가? 엄밀히 말해 한미연합사의 법적인 ‘신분’은 UN 사령부의 권한을 위임받은 형태다. 지난 세월 우리는 한미연합사의 통제 아래에서 살아왔다. 좀 더 가슴 아픈 이야기를 하나 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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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주의자라 자청하는 이들이 그렇게 빨아대는 미국, 70년 가까이 이 땅에 주둔해 있는 주한미군, UN 사령부에서는 이제까지 단 한 번도... 진짜, 단 한 번도!

 

“한국이 한반도의 통일을 주도하는 것을 인정한다.”

 

란 말을 하지 않았다. 법적으로 한국은 정전협정 당사국이 아니며, 전작권은 미국에 있다. 법적으로 본다면, 우리는 한반도 내에서 통일을 위한 그 어떠한 법적 보호를 국제사회에서 받을 수 없다(이는 현재 전 세계에서 가장 강한 두 나라인 미국과 중국의 입장이다. 중국의 경우에도 정전협정 대상국이 아니라 전작권이 미국에 있는 ‘반쪽 국가’의 주장에 귀 기울여줄 의무가 없다. 미국은 더 말할 것도 아니고).

 

...전시작전권 환수의 의미를 이제 좀 알겠는가?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