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 기사 추천 기사 연재 기사 마빡 리스트






“대학은 졸업했지만….”


1930년대 일본 젊은이들 사이에서 유행했던 말이다. 대학은 졸업했지만, 취직자리가 없어서 절망했던 일본 젊은이들의 자조 섞인 푸념이었다(지금의 대한민국과 비슷하다고 해야 할까?). 1929년 불어 닥친 대공황의 여파로 일본엔 실업자가 넘쳐났고, 사람들은 일자리를 찾아 헤맸다.


일본에 위기가 닥쳤다. 단순히 경제위기로만 바라볼 문제가 아니었다. 대공황으로 일본은 또다시 ‘전쟁국가’로 돌아가려 하고 있었다. ‘다이쇼 데모크라시(大正 デモクラシー)를 바탕으로 민주주의와 정당정치를 발전시키고,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으로 군비를 삭감하고, 이렇게 확보한 재정으로 산업발전에 투자하고, 악화일로를 걸었던 해외 열강들과의 화해 분위기를 경제협력으로 이끌어 일본의 발전을 이룩한다’는 이상적인 구도, 이 모든 생각과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게 됐다.


일본은 전쟁으로 경제위기를 극복하려고 했다.



군(軍), 움직이다


1930년 말 만주에 체류하는 일본인의 수는 22만 8,700명에 이르렀다. 이렇게 많은 숫자의 일본인이 만주에 진출한 데에는 ‘국방사상 보급 운동’이라는 일본군의 숨은(?) 노력이 있었다. 당시 일본 육군은 농촌을 중심으로 국방사상(‘만주 설명회’라는 이름이 더 어울리겠지만)을 보급했다.


“만주에는 기름진 평야가 널려있다. 이게 원래는 중국 땅이지만, 당장 우리가 죽게 생겼는데 이걸 그냥 포기해? 본토에서 굶어 죽느니 만주 가서 인간답게 살아봐야 하지 않겠어?”


“만주는 우리 장병 20만의 피로 획득해 얻은 곳이다.”


일본 군부는 대공황으로 시작된 경제위기의 탈출구와 인구과잉으로 신음하고 있는 인구의 배출구로 만주를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여기에는 ‘만주의 완전한 확보’라는 군사적인 목적도 있었다.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어 만주로 가는 발판을 만들고, 만주를 확실히 다져 소련 침략의 거점으로 만든다. 이게 일본 육군의 생각이었다. 여기에는 조급함도 있었다. 장개석이 중국을 통일한 상황에서 언제 만주로 총구를 돌릴지 모르는 상황이라 만주를 확실하게 다져놔야 했다.


Untitled-1.jpg  

'만철폭파사건'으로 불리는 관동군의 조작 사건이 만주사변의 불씨가 됐다.


1931년 9월 18일, 봉천 근처의 만철선 위에서 폭발 사건이 터졌다. 관동군(만주에 주둔했던 일본 육군부대)의 음모였다. 당시 관동군은 공격준비를 마쳐 놓은 상태였고, 이 폭발사건을 빌미로 만주에 있는 중국군(장학량의 군대)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른바 ‘만주사변’이 터진 것이다.


일본 정부는 이 사실을 통보 받았을까? 당시 일본 외무대신인 시데하라 기주로(幣原)가 이걸 안 건 9월 19일 아침 신문에서였다. 시데하라는 긴급 각료회의를 열고 전쟁의 확대 방지를 천명했지만, 누구도 관동군을 제어할 수 없었다(태평양 전쟁 당시 대본영이 나서도 관동군을 통제할 수 없었다. 일본이 망한 이유를 이제 알겠는가?).


1932년 1월 3일, 관동군이 만주를 함락한다. 만주 전체를 장악한 것이다. 관동군은 정부와 군부의 견제와 압박에도 불구하고 만주 각 지역을 돌며 만주국 건국 운동을 벌이도록 선동한다. 이미 1931년 11월 8일 천진에서 폭동을 일으켜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푸이(溥儀)를 만주로 데려온 상태였다.


헨리푸이.jpg

마지막 황제인 푸이(溥儀)는 만주국 1대 황제가 되었다.


그리고 대망의 1932년 3월 1일, 만주국이 탄생한다. 인구 3천 4백만, 한반도 면적의 5배나 되는 나라가 몇 달 만에 탄생한 것이다. 이런 만주국의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문서가 하나 있는데, 바로 푸이가 관동군 사령관 혼조 시게루(本庄繁)에게 보낸 서한이다.


1. 폐국(弊國)은 금후 국방 및 치안 유지를 귀국에 위탁하고 그 소요 경비를 모두 만주국이 부담한다.


2. 폐국은 귀국 군대가 국방상 필요로 하는 한, 기설(旣設) 철도, 항만, 수로, 항공로 등의 관리 및 신로 부설을 모두 귀국 또는 귀국이 지정하는 기관에 위탁함을 승인한다.


3. 폐국은 귀국 군대가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각종 시설에 관해 극력 이를 원조한다.


4. 귀국인으로서 달식명망(達識名望) 있는 자를 폐국 참의로 임명하고 기타 중앙 및 지방 관공서에 귀국인을 임명하되, 그 선임은 귀국 사령관의 추천에 따르고 해직은 동 사령관의 동의를 요건으로 한다.


5. 상기 각항의 취지 및 규정은 장래 양국 사이의 정식으로 체결할 조약의 기초가 되는 것이다.



만주국은 청나라의 후신일까? 아니면 일본의 식민지일까? 둘 다 틀렸다. 만주국은 ‘관동군의 나라’였다. 일본 정부는 만주사변이 시작될 때부터 이를 반대해 왔지만 이미 일본의 군부는 민간의 통제를 벗어난 조직이었다.


일본 군부에게 만주는 러일 전쟁 당시 20만 명의 일본 장병이 피를 흘려 얻은, 특별한 곳이었다. 일본 군부는 만주는 일본의 생명선과 같은 곳이라며, ‘만주생명선론’을 주장하고 나섰다. 그러나 이 생명선이 위협받고 있었다. ‘워싱턴 체제’에 의해 제1차 세계대전 당시 확보했던 21개조 요구를 위협받았고, 급속한 공업화로 소련이 옛 러시아의 위세를 회복하는 듯 보였다. 여기에 더해 장개석이 중국을 통일하면서 조만간 중국과 충돌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렇다면 어째서 관동군은 만주를 점령해 직접 통치하지 않고 번거롭게 ‘만주국’을 만들었던 것일까? ‘워싱턴 체제’ 때문이었다. ‘9개국 조약’이 걸려 있던 것이다. 9개국 조약은 1922년 워싱턴에 회의에 참가했던 미국, 영국, 네덜란드, 이탈리아, 프랑스, 벨기에, 포르투갈, 일본, 중화민국이 맺은 조약으로, 중국의 영토 보전과 독립된 주권의 확인을 핵심으로 한다.


여기에 하나 더 걸린 것이 1928년 8월 27일 프랑스 파리에서 체결된 ‘부전조약(不戰條約)’이다. 한마디로 ‘전쟁을 하지 말자’는 것이다. 물론 자위권 발동 차원의 전쟁은 인정하지만 국제 분쟁의 해결을 위해 전쟁을 수단으로 삼지 말자는 내용을 담은 조약이다. 미국과 프랑스, 영국, 독일, 일본을 포함한 15개국이 우선 조인한 상태였다.


관동군은 이 조약을 피해가기 위해 ‘만주국’이라는 유령회사와 푸이라는 바지사장을 전면에 내세웠다. 이렇게 되면 관동군은 명목상 중국을 침략한 게 아니라 중국과 별개인 새로운 국가를 건설한 것이 된다. 이에 대한 일본 군부의 판단은 어땠을까?


 만주국초대내각.jpg

만주국 초대 내각의 면면


1932년 1월, 육군, 해군, 외무성은 하나의 결론을 내린다.


“만주국은 만주에 거주하는 만주인들의 자발적 분리 독립이다.”


우드로 윌슨이 주창한 민족자결주의를 내세워 만주국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미국의 개입을 막으려 했던 것이다. 이것으로 미국과 일본은 돌이킬 수 없는 상태로 갈라섰고, 이후 태평양 전쟁까지 악화일로를 걷는다.



마지막 희망이 사라지다


1932년 5월 15일, 일본 해군 장교들이 일본 총리를 죽이는 일이 발생한다. 바로 ‘5.15 사건’이다. 당시 젊은 해군 장교들은 런던해군 군축조약을 체결했던 전직 총리인 와카쓰키 레이지로(若槻禮次郞)를 암살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는데, 와카쓰키가 선거에서 패해 퇴진하자 와카쓰키 대신 정부를 공격하기로 결심한다.


결국 이들은 총리관저를 습격해 당시 총리였던 이누카이 츠요시(犬養毅)를 암살한다. 놀라운 건 체포된 이들에 대한 일본 국민들의 반응이었다. 일본 국민들은 이들을 석방해야 한다며 구명운동을 벌였는데, 탄원서에 서명한 이들만 35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 백주대낮에 일국의 총리를 암살하고 쿠데타를 모의한 이들을 살려야 한다고 말하다니 이게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는가? 당시 일본은 미쳐 돌아가고 있었다.


5152.jpg

‘5.15 사건’을 보도하는 아사히 신문


문제는 꿩 대신 닭이라고, 와카쓰키 레이지로(若槻禮次郞) 대신 죽은 이누카이 츠요시(犬養毅)가 일본에게는 너무도 아까운 인물이란 점이다. 그는 일본의 대표적인 민주 운동가로, 폭주하던 군부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대안으로 여겨지던 인물이었다. 김옥균과 쑨원(孫文)을 지지한다고 말할 정도니 어떤 성정의 인물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가 군부의 압박에 못 이겨 만주국의 당위성을 설파 한 것은 분명한 잘못이지만, 일본의 다이쇼 데모크라시를 이끌어 나가 군부의 독주를 차단하고 민주주의를 성장시킬 유일한 인물이었다는 건 인정해야 할 부분이다.


그런 그가 암살을 당하면서 일본은 완전한 전쟁국가로 달려간다. 이는 그의 뒤를 이은 30대 총리 사이토 마코토(斎藤実)를 보면 확인할 수 있다. 사이토 마코토는 해군 대장 출신이었다. 그러니까 군부출신 인사가 총리에 오른 것이다.


그가 재임기간 동안 내놓은 최고의 업적(?)은 만주국의 정식 승인이었다.


“나라가 초토화되더라도 만주국을 승인한다.”


그가 중의원에서 했던 말이다. 당시 국제 사회의 분위기를 생각하면, 일본은 고립무원의 길로 달려가고 있었다.


중국은 만주사변이 발발하자마자 국제연맹에 제소한다(1931년 9월 21일). 뒤이어 미국은 만주사변의 책임은 일본에 있다고 선언했고, 1932년 1월 7일엔 만주 사태에 대한 불승인 방침을 천명한다. 국제연맹도 발 빠르게 대응했는데, 1931년 12월 10일 만주사변에 대한 실지조사단 구성을 결의해 영국의 리튼(Victor A. G. B. Lytton) 백작을 위원장에 임명한다. 리튼 백작은 4개월간의 조사를 통해 ‘리튼 보고서(Lytton Report)’를 국제연맹에 제출한다.


Lytton_Commission_at_railway.jpg

철로의 폭발한 부분을 조사 중인 리튼 조사단


‘리튼 보고서’에서 리튼은 일본이 ‘9개국 조약’을 위반했다고 말하며, 이에 따라 만주에 지방적 자치정부를 설치해 비무장지대로 할 것을 제안했다(일본에 대한 배려 차원으로 일본의 권익도 인정했다).


리튼 보고서는 1933년 2월 24일 국제연맹 총회에서 42 대 1(1은 일본이었다)로 채택됐다. 당시 전권대표였던 마쓰오카 요우스케(松岡洋右)는 마지막 연설에서,


“어떤 나라에게나 양보도 타협도 할 수 없는 사활적인 문제가 있는데, 일본에게는 바로 만주 문제가 일본인의 생사가 달려있는 도저히 양보할 수 없는 사활적 문제다.”


라고 말하고 국제연맹의 회의장을 박차고 나온다.


1933년 3월 27일, 일본은 정식으로 국제연맹의 탈퇴를 통보한다. 이후 일본의 행보는 전쟁을 향해 달려가는 형세였다. 그리고 1934년 일본은 지난 10여 년 간 족쇄(?)가 됐던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 체제를 탈퇴한다. 영국은 끝까지 일본의 복귀를 기대했지만, 일본은 이런 영국의 기대를 배신했다.


드디어 해군휴일이 끝났다. 조약 시대에 묶여있던 해군은 이제 무조약 시대를 맞이해 다시 한 번 건함경쟁에 뛰어들 채비를 한다.



마치며


‘워싱턴 체제’가 붕괴된 지 3년 만에 인류는 제2차 세계대전이란 미증유의 대전쟁을 겪는다. 워싱턴 체제가 잡아챈 고삐의 위력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단순한 우연일까?


만주사변으로 국제연맹을 탈퇴하고, ‘워싱턴 체제’마저 이탈한 일본은 이제 그 누구도 말릴 수 없는 전쟁의 길로 달려간다. 1937년 태평양 전쟁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 중일 전쟁이 일어나고, 그 이후 9년간 일본은 중국과 미국이란 늪 속에서 허우적거린다.


1941년 여름 일본의 가장 유능한 인재 35명이 극비에 소집 돼 ‘총력전 연구소’를 설립한다. 여기에 참여한 인재들은 일본 각계를 대표하는 조직에서 가장 촉망받는 인재들이었다. 이들은 미국과의 전쟁에 앞서 ‘과연 미국과 전쟁을 치른다면 이길 수 있는가’를 연구했다. 그들은 일본과 미국의 국력을 면밀히 비교했고, 전쟁 상황에서 벌어질 상황을 예측했고, 수많은 변수들을 확인했다. (이 이야기는 책 <쇼와 16년 여름의 패전>에 자세히 나와 있다)


그리고 나온 결론은?


“일본은 미국과의 전쟁에서 이길 수 없다.”


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전쟁을 강행했다.


묻고 싶어진다. 


“일본은 어째서 전쟁을 선택했던 걸까?”


다음 회에는 외전 형식으로 ‘마지노선’에 관한 이야기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이야기가 끝나면 전쟁국가 일본이 치른 전쟁 중 최고의 하이라이트인 ‘태평양 전쟁’에 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중일전쟁으로 시작해 태평양 전쟁으로 이어지는 전쟁국가 일본의 ‘최후의 불꽃’을 이야기할 거다.


 vq3.jpg



* 참고자료


1. 전쟁국가 일본/ 살림출판사/ 이성환
2. 호호당 선생의 ‘프리스타일’
3. 세계전쟁사/ 육군사관학교 전사학과/ 황금알
4. 러일전쟁과 을사보호조약/ 이북스펍/ 이윤섭
5. 조선역사 바로잡기/ 가람기획/ 이상태
6. 다시 쓰는 한국근대사/ 평단문화사/ 이윤섭
7. 대본영의 참모들/ 나남/ 위텐런 지음, 박윤식 옮김 
8. 나무위키





지난 기사


드레드노트의 탄생

1차 세계대전, 뒤바뀐 국제정치의 주도권

일본의 데모크라시(デモクラシー)

최악의 대통령, 최고의 조약을 성사시키다

각자의 계산1

8회,

일본은 어떻게 실패했나2





펜더


편집: 딴지일보 챙타쿠

Profile
딴지일보 공식 계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