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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동아일보 주성하 기자를 만났다. 페북 담벼락에서 주성하 기자 보고 싶으신 분 손들라고 하니 거진 30여 명이 손을 들어 주셨고, 그 정도 인원이 카페 하나를 점거하고 많은 이야기를 듣고 묻고 답했다. 자기가 살던 고향을 떠난다는 것, 그냥 떠나는 것도 아니고 두 번 다시 마주하지 못할 가능성의 위험을 감수하고 제 살던 터전을 버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때까지의 자기 인생을 봉인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 결정이 쉬울 리 만무하다. 오랫동안 쌓여온 불만이 폭발하거나, 결정적인 유혹이 있거나, 방아쇠 같은 사건이 빵 터져 모든 상황을 리셋해야 하는 상황이 생기거나 등등 하여간 결정적인 촉매는 반드시 존재한다. 그럼 주성하 기자의 방아쇠는 무엇이었나.

 

풍계리 핵 실험장 폭파 참관을 위해 외신 기자들이 원산에서 풍계리까지 열 몇 시간을 기차 타고 갔다고 한 데서 보듯, 또 김정은 국무위원장 자신이 민망해했듯, 북한의 철도 사정은 극히 열악하다. 전력 없으면 멈춰서고 철로 사정도 일제 때보다 별로 나아진 것이 없는 암담함 가운데 수백 킬로미터 기차 여행이라면 도대체 몇 밤을 길거리에서 지새워야 하는지 알 수 없는 지경이라 했다. 함경도가 고향이며 평양 김일성 대학에서 공부한 주성하 기자가 기차를 탔다. 며칠이 걸릴지 알 수 없는 여정임을 익히 아는 어머니가 주먹밥을 싸 주셨다. 스물한 개.

 

이른바 고난의 행군 기간이었다. 몇 명이 굶어죽었는지 모르는 기아의 참극이 북한 변경을 뒤덮고 있었다(주성하 기자는 50만에서 100만 사이로 추정한다). 소걸음으로 기어가던 기차가 서면 꽃제비들이 몰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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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중 한 여자아이는 노래를 기가 막히게 불렀다. 한국에서 태어났다면 음악 영재나 아이돌로 떴을 성싶었던 여자 꽃제비 아이는 군인들을 상대로 노래를 부르고 먹을 것을 얻고 있었다. 부모는 굶어죽었다고 했다. 그 목소리가 너무 예뻐서 더 슬펐던 소녀의 노랫소리에 주성하 기자는 어머니가 주신 주먹밥을 꺼냈다.

 

“야. 이거 먹으라.”

 

소녀는 주먹밥을 받았는데 자기보다 좀 어린 꽃제비 남자아이를 불렀다. 둘은 주먹밥을 나눠 먹기 시작했다. 그런데 먹는 속도가 달랐다. 남자 꽃제비 아이가 허겁지겁 걸신들린 듯 먹었다면 소녀는 남자아이가 다섯 번 베어 먹을 때 한 번 입에 대는 정도.

 

동생을 조금이라도 더 먹게 하려는 누나의 배려 같았다. 그 모습을 보고 울컥하지 않을 한국 사람이나 조선 사람은 드물다. 남이건 북이건 이렇게 물을 것이다.

 

“동생이냐?"

 

소녀의 답은 뜻밖이었다.

 

“친동생은 아닙니다. 강계에서 만나 같이 다닙니다.”

 

친동생도 아니었다. 소녀는 목구멍에 힘줄 돋도록 노래를 부르고 얻어낸 음식들을 자기보다 어린 꽃제비에게 조금이라도 더 돌리고 있었다. 그 표정이 그렇게 흐뭇했다고 한다. 친누나도 아닌데 어떻게 저런 표정을 지을 수 있을까. 아무 관계도 아니고 핏줄도 아닌 꽃제비 아이에게 음식을 양보하면서 어떻게 저렇게 기쁠 수 있을까. 그 배도 분명 주림에 익숙한 배일 터인데.

 

주성하 기자는 그 소녀 꽃제비를 보면서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고 한다. 도대체 누가 너희를 이런 형편에 빠뜨렸는가. 새까만 군인들의 귀에도 황홀한 음색을 지녔고, 약한 아이 돌보며 그 배불러감에 미소 그릴 줄 아는 착한 아이를 누가 이런 꽃제비로 만들었는가. 주성하 기자는 이 기막힌 현실을 싸지른 이들과 맞서 싸우리라 결심했다고 한다. ‘김대(김일성대학)' 학생이라는 출세의 보증 수표를 찢고 완전히 새로운 삶을 향해 뛰어드는 디딤돌이자 번지 점프대 같은 기억.

 

요즘 북한 형편이 현격히 나아지고 최소한 굶어 죽는 사람이 사라지면서 탈북자 수는 급격히 줄고 있지만 그래도 3만 명에 육박하고 있다. 결코 낮은 수치가 아니다. 그들 역시 주성하 기자처럼 결정적인 ‘방아쇠’ 같은 사연들을 마음의 꼬리표로 매달고 살아가고 있을 것이고, 말부터 생각까지 다 낯선 한국 땅을 뻘밭 지나듯 한 발 한 발 힘들여 떼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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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성하 기자가 추천사를 쓴 <남북 청춘, 인권을 말하다>는 탈북자 가운데 대구에 정착한 대학생들과 대구의 대학생들이 ‘인권’을 주제로 모임을 가지고 대화를 나누고 글로 정리한 ‘토닥토닥 프로젝트’의 산물이다.

 

얼마 전 북한 관광 다녀온 한 재미교포 아주머니의 북한 여행기가 무슨 북한 바로 알기의 고전처럼 인용되는 걸 보면서 씁쓸하게 웃었다. 거기에 민주노동당 시절부터 ‘종교인’으로 이름 높았던 친북(이라 써 준다) 인사까지 끼어들어 콘서트를 진행했던 모습을 보면서는 한숨 소리가 높아졌다. 아니 북한을 알려 줄 사람이 3만 명이나 되는데. 그중 남에서건 북에서건 사회의 때가 덜 묻은 대학생만 해도 수천 명인데 왜 패키지 관광 다녀온 여행자가 북한의 참모습을 전하는 메신저가 돼야 하는가.

 

온갖 종편에 등장해서 방송사 작가가 시키는 대로 떠들고, 새까만 하사관 출신 주제에 김정은 가문의 온갖 내밀한 사연들을 다 아는 양 설레발쳐 대는 탈북자들의 그림자가 너무 짙다. '조국을 배신하고 왔다'는 해괴한 편견(참 속없고 잔인한 사람들)의 벽은 의외로 높다. 그런 분위기를 감안할 때 이 책의 가치는 오롯이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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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주제는 인권이다. 인권은 기본적으로 보편의 문제여야 한다. ‘특수한 사정’에 따라 그 제한이 용인되고 침해가 허락된다면 그 순간 인권의 개념이 허물어진다. 북한의 형편과 문화에 따라 인권의 개념이 자유자재로 변형되고 그걸 수용해야 한다면, 사형 선고 다음 날 인혁당 관련자 8명의 목을 매달아 버렸던 박정희 유신독재의 ‘인권’도 눈 딱 감고 그 ‘특수성’을 더듬어야 하니까.

 

이 책에서 만나는 남과 북의 대학생들, 특히 북의 대학생들의 목소리가 소중한 이유는 일단 담담하다는 것이다. 비분강개가 없고 신세한탄이 적고 어깨에 힘도 없고 목소리에 각도 없다. '북한에서는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개념인 인권을 접하고 이해해 가면서 그것을 실마리로 자신의 과거를 풀어내고 오늘을 엮는다. 사실상 인권 앞에서 취약하고 상처 많은 남과 북의 ‘동질성(?)'이 구현되는 모습에 적잖이 기뻐(?)하게 되기도 한다. 아, 우리 민족 맞구나.

 

“고난의 행군 때 남자들은 국가의 강요에 의해 무조건 출근을 해야 했다. 설령 직장에 나가서 담배만 피우고 있다 할지라도 말이다. 그때부터 여성들은 생계를 위해 생활 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다. 직장 생활을 하던 여성들이 시장으로 나왔다... 남자들은 직장을 지키는 사람이고 여성들은 경제 활동을 전담함과 동시에 가정도 지켜야 했다.”

 

돈도 벌고 가정도 책임져야 하는 북한판 슈퍼우먼. 일 없어도 직장에 나오라는 국가의 부당한 요구에는 꼼짝도 못하면서 돈 벌어 오는 아내들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건 드물지 않았던 남자들의 찌질한 폭력성. 우상화의 대상이 되긴 하나, 자신의 머리칼을 잘라 김일성의 신발 깔창을 만드는(동상을 막기 위한 내조) 모습으로 부각되는 김일성의 첫 부인 김정숙. 세계 최고 수준의 가부장 제도가 버젓한 나라의, 그러나 결코 낯설지 않은 모습이 펼쳐진다.

 

“선생님이 각 학생을 호명하며 집에서 무슨 밥을 먹는지 물어보았다. 큰소리로 대답하지 않으면 들리지 않는다고 했다. 고향에서는 가난한 자와 잘 사는 자를 평가하는 잣대가 크게 두 가지였다. ‘집에서 무슨 밥을 먹고 있는가’, ‘반찬은 어떤 것을 먹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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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의 행군 즈음 있었던 일종의 ‘가정 환경 조사’였다. 남한쯤 되면 “느그 아버지 뭐 하시노.”의 북한 버전쯤 되겠다. 차는 있는지 집은 전세인지 자가인지 묻던. 자본주의가 아닌 사회주의를 자처하는 사회에서 이런 조사(?)가 벌어진다니.

 

“부모의 경제력이 빈약하면 부당한 처우를 받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곤 했다. 특히 여름철이면 방과 후에 선생님들이 운영하는 농장으로 가서 풀을 심거나 다른 일들을 했어야 했다. 잘 사는 집 아이들은 그런 일을 하지 않아도 선생님한테 미움받지 않았다.”

 

아니 이건 남조선에서 옛날에 흔했던 일이 아닙...

 

북한 같은 곳에서나 경험 가능한 특이한 기억도 등장한다.

 

“세 발의 총성, 침묵 속에 뿔뿔이 흩어지는 사람들, 하얀 눈 위에 뿌려진 붉은 피.”

 

즉 공개 처형의 모습이다. 그 모습을 목도한 청년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언제든 정부가 정해둔 법을 어기면 죽임을 당할 수도 있는 것도 인간이라는 식으로 나의 인식은 굳어져 있었다... 인간이라면 누려야 할 기본 권리인 자유는 국가의 것이지 개인의 것이 아니었다.”

 

읽으면서 걷잡을 수 없이 드는 생각은 “어, 우리 세대까진 통일도 가능하겠다.”였다. 억지로 내려 보면 40대 중반까지는 북한의 이 정서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그 ‘억지로’의 한계가 너무 명징하다는 것이다. 남한 사람들의 ‘왕년 타령’도 꼰대들 헛소리로 치부되는 판에 2천4백만 인구가 우리와는 한때 닮았으나 점점 판이해지는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것은 적응의 문제가 아니라 결단의 문제다. 어느 정도까지 같이 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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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 사람들은 탈북의 과정을 잘 모른다. 누가 무슨 고생을 했든 고생담은 그다지 재미있는 얘기가 아닐뿐더러 천편일률로 비슷하리라 여기기 때문이리라. 그저 몽골이나 동남아 거쳐 온다는 정도만 빈약한 상식일 뿐. 한국 사람들이 관광차 많이 찾는 태국의 치앙마이에서 한 탈북자가 겪은 일을 보면서 나는 무척 놀랐다.

 

“치앙마이의 감옥은 북한 사람들로 인산인해였다... 돈이 있는 사람들은 돈을 주고 몸을 누일 자리를 샀다. 무일푼의 경우 대부분의 시간을 서서 지내야 했다.”

 

아프리카 노예선도 흑인들이 누울 자리를 계산하고 노예들을 태웠다. 배도 아닌 감옥에서 무릎을 무릎으로 기대고 등을 등으로 받치며 선 채로 쪽잠을 자야 했던 것이다. 이 청년들이. 외양으로 보면 전혀 티 하나 차이를 볼 수 없는 청년들이. 그러고 들어와서 ‘거지’에 '촌스러운 놈들' 욕까지는 버티는데 거기에 ’조국의 배신자‘라는 욕설까지 첨가하고 보면 책에 나오는 토로가 처참하게 사실적이다.

 

“우리는 그저 같은 사람이잖아요. 휴전선 하나 때문에 그런 것 뿐인데요.”

 

나는 그들에게서 희망을 본다. 그들의 존재와 미래가 희망이다. 그들을 포용하고 역량을 활용하고 우리 공동체의 일원으로 우뚝 세울 수 있다면 평화적 교류와 이해, 그리고 아주 먼 훗날의 통일에 크나큰 날개들이 될 것이다. 자유 왕래가 이루어지고 남한 사람들이 북한에 몰려간다면, 장담하는데 6.25 같은 내전이 잉태될 가능성이 크다. 남한 식으로 ‘아랫사람’, ‘월급 받는 사람들’을 부렸다가는 어느 주먹에 맞아 병원에 실려갈지 모르고 남한에서 흔히 있는 ‘돈지랄’을 했다가는 어느 강물에 실려 동해 바다나 서해 바다로 흘러갈지 모른다. 그만큼 서로의 차이 자체가 폭탄이며 그 폭발력은 극에 달해 있다.

 

남북의 정상회담이 연이어 벌어지고 개마고원 트래킹과 기차 타고 유럽 가자 구호는 우렁차지만 막상 그 길을 이끌 깜냥이 있는 사람들은 극히 적다. 따지고 보면 적지도 않다. 청년층만 수천 명이고 전체는 수만 명이다. 남과 북을 동시에 살아본 경험은 그대로 자산이다. 아마 우리 사회는 그 자산을 절실히 필요로 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보수고 진보고 이들의 존재에 대해 그리 큰 관심을 두지 않는다.

 

북한 바로 알기를 해야 한다고 하는데 '북한 살다 온 사람들'을 제치고 '북한 한 번 가 본 사람들'의 여행담에 귀를 쫑긋거리는 ‘기이한’ 현실이 계속 재생 중이다. 종편에 나오는 삿된 탈북자들의 분 바른 남한 방송 멘트는 접어두고, ‘서울 한 번 가본 사람들’의 ‘서울’ 얘기에 너무 빠지지 말고, 우리 사회에 제 발로 걸어들어온 자산들에 대해 관심을 기울여 보자. 이 책은 그 출발이 되기에 족할 것 같다. 모든 세상에서 빛나는 ‘청춘’이고 모든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소중한 ‘인권’이기에.

 

책에 등장하는 웃픈 에피소드 하나.

 

어디서 왔냐는 질문을 받으면 대개 탈북자들은 연변에서 왔다고 한다. 탈북자라고 하면 더 뜨악한 시선을 받는다고 한다. 한 번은 한 여학생이 마음먹고 "함경북도에서 왔어요."라고 답했다. 그러자 상대방은 뭐라고 했을까?

 

"함경북도는 중국 어디에요?"

 

 

 

 
필자의 신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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