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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관념론 철학의 종결자이자 대륙 철학의 완성자인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은 근대의 화신이다. 그는 땅을 다지고 골조를 세우고 벽을 쌓아 근대성을 완공했다.

 

헤겔로 인해 서양인들은 동양에 대한 우월감의 근거를 확보했다. 그렇다고 헤겔을 고깝게 볼 일은 아니다. 그 덕분에 인류의 역사는 발전했고 또한 발전해야만 한다는 관념을 갖게 되었다. 헤겔은 미래에 대한 낙관과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을 선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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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르만족 중년 남성의 얼굴을 한 헤겔은 근엄하고 진지하다. 그는 독일적인 방식으로 독일적인 철학을 펼쳤다. 헤겔의 사유는 성실함과 치밀함, 장대한 스케일, 세상과 역사에 대한 군인 같은 의무감을 두루 드러낸다. 임마누엘 칸트가 서양철학의 제왕이라면 게오르크 빌헬름 헤겔은 연합군 총사령관이다. 헤겔의 거대한 피라미드를 등반하지 않고는 서양철학을 순례할 수 없다. 돌아가는 길도 지름길도 없다.

 

헤겔은 1770년 8월 27일 슈투트가르트에서 태어났다. 현재 이 도시는 프랑크푸르트와 함께 독일 자동차 산업으로 유명하며 자동차 산업의 산실로 알려져 있다. 자동차의 형태, 기술, 진보가 슈투트가르트에서 이뤄졌다. 지금도 벤츠와 포르쉐의 본사는 여기에 있다.

 

뮌헨에 본사를 둔 BMW는 벤츠와 포르쉐를 고루한 시골 선비로 보는 경향이 있다. 거꾸로 두 회사가 보는 BMW는 경박한 젊은이의 이미지다. 슈투트가르트는 독일에서 보수적인 정서로 유명한 곳이다. 우리나라의 대구처럼 분지로 되어있기도 하고 비슷하게 남쪽 도시이기도 하다. 헤겔은 이런 곳에서 현대 독일 이전에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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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은 아직 제후국들로 나뉘어 있었다. 슈투트가르트는 뷔템베르크 공작령에 소속된 도시였다. 말과 숫사슴뿔이 그려진 포르쉐의 로고는 본래 뷔템베르크 문장이다.

 

헤겔은 전형적인 부르주아 가문의 아들이었다. 현재는 부르주아라는 말이 자본가를 가리키지만 처음부터 자본을 굴리지는 못했다. 그들은 귀족을 위해 봉사하는 고급 인력으로 출발했다. 나중에는 귀족의 파이를 나눠먹는 데 성공한 사람들이다. 그의 집안은 초기 부르주아의 전형적인 모습을 띠었다.

 

헤겔의 어머니는 뷔템베르크 고등법원 변호사의 딸이었다. 아버지는 운송 회계사 고문이었는데, 바로 뷔템베르크 공작을 위한 회계였다. 그야말로 '사(士)자 돌림' 집안이다. 초기 부르주아의 정체성은 고소득 전문직인 만큼 이들의 경제력은 지식의 공부에서 나왔다. 헤겔에게 공부는 당연한 의무였다.

 

헤겔은 13살 때 어머니를 여의었다. 그녀는 담즙증에 이은 고열로 사망했다. 이때부터 아버지의 절대적인 영향력 아래 성장했다. 그는 아버지에게 반항하지 못하는 아이로 자라났다. 헤겔이 무엇을 배울지, 어떤 직업을 가질 지를 아버지가 정해버렸다. 바로 설교사였다.

 

어색해 보이지만 종교인인 설교사는 부르주아에 속했다. 독일의 종교 개혁은 독일의 제후와 선제후들에게 인기를 끌었다. 사탄인 교황이 지배하는 가톨릭과 단절하고 자신의 삶에 충실하라는 개신교 신앙은 현실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세금을 걷는 선제후들의 입맛에 맞았다. 선제후는 자기 영지의 추기경이 마음에 안 들어도 어찌하기 힘들다. 추기경의 상전은 그가 아니라 교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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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건영에게 자신의 영역에서 일하는 개신교 성직자는 자신의 신하나 마찬가지다. 설교사 역시 고소득 전문직이며, 공부 잘하는 학생들이 노려볼 만한 직업이었다.

 

헤겔에게 아버지에게 반항한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철학자 기질을 타고난 사람에게 설교사의 운명은 가혹했다. 헤겔이 신학을 통해 내린 결론은 도발적인 허무주의였다. 신이 계시다. 그런데 그게 어쨌단 말인가? 선량하면 천국에 갈 것이고 아니면 지옥에 갈 일이다. 현실과는 상관없는 일이다. 독일은 반동과 적폐의 땅이었다.

 

유럽의 이웃 나라들은 근대 민족국가로 발돋움하며 인권이 향상되고 인간의 자유를 고민하고 있었다. 독일은 헤겔이 나고 자란 뷔템베르그부터가 선제후령이었다. 봉건 영주들의 패악질이 극에 달했다. 당시의 봉건 영주는 개인적으로 선량하다고 할지언정 존재 자체만으로도 반시대적이었다.

 

조선과 명나라 조정을 비교해보자. 중국 인구가 수십 배라고 해서 정부의 규모가 수십 배 크진 않다. 정부라는 조직은 아무리 소국이어도 어느 정도 규모를 갖춰야 한다. 큰 나라도 외교부 장관은 한 명만 있으면 되고, 작은 나라라고 0.1명이 있을 수는 없다. 독일 땅의 수많은 제후들은 같은 머릿수의 백성이 불필요하게 노동과 세금을 착취당함을 뜻했다.

 

독일의 봉건 영주들은 사치와 수탈의 분야에서 서로 경쟁했다. 자기 백성은 한 줌인데 스페인 황제처럼 누리고 싶어 했다. 어떤 제후는 백성에게 거주와 이동의 자유를 제한했다. 외국에 용병으로 팔기 위해서였다. 전쟁터에서 죽으면 그만이고, 다쳐서 돌아오면 그냥 거지처럼 살도록 내버려 뒀다. 심지어 부상병을 현지에 버리고 오라는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 그렇게 번 돈으로 중국제 차도 사 마시고 이탈리아제 가구도 샀다.

 

독일의 제후들은 인신매매범이라는 비난이 공론화되었다. 독일은 정의도 근대도 인간성도 없는 땅이었다. 르네상스가 시작된 지 수백 년은 된 시점이었다. 종교 개혁을 일으킨 땅도 독일이고 음악과 사상, 교육에서도 선진적이었지만 정작 독일 백성의 삶은 처참했다.

 

독일은 어떻게 구원될 수 있을까? 신이 나서서 해결해 줄 일이 아니었다. 결국 인간의 일이다. '인간사' 혹은 '세상사'는 헤겔 철학의 중요한 몸통이다. 이런 결론을 내리기까지 친구의 영향이 없었다고 하기는 힘들다. 그에게는 강력한 영향을 끼친 역사적 인물이 있다. 그것도 바로 옆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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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은 18살에 튀빙겐 대학교에 입학한다. 3인실 기숙사에 배정받았는데, 룸메이트로 횔덜린이란 친구가 있는 게 아닌가. 그렇다. 독일 시인 그 횔덜린이다. 그런데 13살 밖에 안 된 어린아이도 방 안에 침대를 배정받은 게 아닌가? 루터파 신학자인 아버지를 둔 이 소년의 이름은 셸링이다. 맞다. 유명한 독일 철학자인 그 프리드리히 셸링이다. 역사적 인물 세 명은 룸메이트였던 것이다.

 

훗날 '튀빙겐 삼총사'로 불리는 프리드리히 빌헬름 요제프 셸링, 프리드리히 횔덜린,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세 명의 프리드리히 중 가장 주목할 만한 인재는 단연 셸링이었다. 불과 13세에 대학생이 되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 그는 신동이었다. 그는 5살 많은 형인 헤겔은 물론 횔덜린보다도 훨씬 뛰어났다.

 

세 룸메이트가 2학년으로 진학한 1789년 프랑스 시민혁명 소식을 들었다. 독일 민족은 아직 중앙집권적 전제군주제도 성취하지 못했는데 이웃 민족은 왕을 끌어내렸다. 세 친구는 아득히 추월당한 현실을 개탄하고 '우리도 해내지 못하란 법은 없다'는 희망을 불태웠다. 튀빙겐 대학교는 신학교였다. 셋은 부모에 의해 신학교에 보내졌지만 두 명은 철학자로, 한 명은 독일인의 각성과 행동을 촉구하는 시인으로 변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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셸링은 십 대 때부터 주목받았다. 그는 헤겔과 함께 지낸 기숙사에서 미청년으로 자라났다. 잘생긴 얼굴과 매혹적인 눈매, 우아하게 피어난 곱슬머리에 감성적인 말솜씨는 그를 스타로 만들었다.

 

셸링은 스무 살이 넘어가자 비록 부르주아 가문 출신이지만 '귀족적 정신의 소유자'로 인정받았다. 이런 사람을 귀족으로 예우할 수 없다면 미개한 사람임이 분명했다. 그래서 프리드리히 '폰(von)' 셸링으로 불리며 어디를 가나 봉건 귀족에 해당하는 의전을 받았다. 그리고 불과 23살의 나이에 예나 대학교의 철학과 정교수로 취임하게 된다. 그만큼 독일인들은 급했다. 독일에도 희망이 있다고 말해주는 철학을 전개한다면 시대의 지성이 될 만했다. 물론 셸링 자신의 타고난 스타성도 한몫을 단단히 했다. 그에 반해 대기만성형인 헤겔은 범재였다.

 

당시 독일 사상계는 임마누엘 칸트의 철학이 남긴 난제를 해결해 줄 인물을 찾았다. 셸링은 나름대로의 방법을 제시했다. 독일 사회에 칸트는 왜 넘어야 할 벽이었을까? 셸링, 그리고 한 세대 위 철학자인 요한 고틀리프 피히테가 스타가 된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이 경위를 들여다보면 헤겔 철학의 태동과 그의 성공시대를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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