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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유명한 헤겔의 이력서다.

 

"저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은 1770년 8월 27일 슈투트가르트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게오르크 루트비히 헤겔께서는 운송 회계사 고문을 지내셨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 크리스티네 루이제 프롬은 제게 개인교습을 시켜줬을 뿐 아니라 고대어와 현대어 그리고 학문의 기초를 가르치는 슈투트가르트의 공립 김나지움에서 수업을 받게 함으로써 저를 학문적으로 교육하는 데 정성을 기울이셨습니다. 저는 18세에 튀빙겐의 신학원에 입학하였습니다. ... (중략) ... 저는 부모님의 희망에 따라 설교사직을 선택하였고 이후 신학이 가진 고전문학 그리고 철학과의 연계성을 고려하여 신학 공부에 충실하였습니다.

 

신학과 졸업 후, 저는 신학을 바탕으로 하는 직업들 가운데 실제 설교사직에 별로 구속되지 않는 직업, 이를테면 고전 문학과 철학 연구에 필요한 여유를 얻을 수 있으며 또한 외국에서 상이한 조건 밑에 생활하면서도 짬을 낼 수 있는 직업을 선택하였습니다. 이러한 직업으로 가정교사직을 베른과 프랑크푸르트에서 찾았으며, 여기에서 제가 결정한 삶의 과제인 학문 연구에 몰두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얻었습니다. 6년간 이 두 도시에서 시간을 보낸 후, 아버지가 사망하자 철학에 마음과 몸을 바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예나 대학의 명성은 제 장래를 위해 보다 훌륭히 공부할 수 있고 교수직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엿보는 데 선택의 여지가 없는 곳이었습니다. 피히테와 셸링 철학체계의 차이점, 전자의 불충분한 점에 관한 논문을 써 그곳에 지원하였으며, 얼마 후 저의 박사학위논문, <행성들의 궤도에 관하여>의 공개 변론을 통한 심사에서 그곳 심사위원회로부터 교수 허가를 받았습니다. 저는 셸링 교수와 함께 <철학비판잡지> 두 권을 간행하였으며, 이 가운데 저의 논문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 (중략) ...

 

3년 전부터 철학과 강사로 일하면서 여러 가지 강의를 하였으며, 작년 겨울에는 수많은 학생들이 강의를 들었습니다. 지난해 공작 관할의 광물학 협회의 제2 부의장으로 선출되었으며 최근에는 자연 연구 협회에 정회원으로 가입되었습니다. 수많은 연구 가운데 철학이 나의 천직으로 굳어졌기에 친애하는 관계 당국으로부터 정교수로 채용되기를 갈망합니다."

 

그야말로 이력서의 교본이다. 부모님, 성장과정, 업무능력, 스펙, 희망사항까지 일목요연하다. 하지만 옹색하다. 가정교사 생활은 생계가 아닌 철학 연구를 위한 선택으로 에둘렀다. 무엇보다 이력서의 주인공은 헤겔이 아니라 셸링이다. 별 볼 일 없는 경력을 나열하고 있지만 핵심은 셸링이 자신을 알아봐 주고 있다는 읍소였다.

 

예나 대학은 미심쩍어 했지만 그래도 셸링의 얼굴을 봐서 헤겔을 취직시켜주기로 했다. 다음 해인 1805년, 헤겔은 드디어 예나 대학에 출근하게 되었다. 정교수도, 부교수도 아닌 원외교수였다. 월급도 나오지 않는 비정규직이었다.

 

열정노동이었지만 경력이 간절한 헤겔은 거절할 처지가 아니었다. 그는 예나로 거처를 옮겨 허름한 하숙방을 구했다. 복층집의 2층이었다. 요즘으로 치면 고시원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예나 대학에서 헤겔과 셸링의 철학 교류는 계속되었다. 셸링은 헤겔과 함께 잡지를 내주는 등 룸메이트를 끌어주기 위해 계속 신경을 써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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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6년은 가난에 시달리던 헤겔에게 특별한 해였다. 무엇보다 예나가 전쟁에 휘말렸다. 나폴레옹이 드디어 독일을 접수하러 왔다. 예나 전투에서 프로이센 군대를 박살 낸 나폴레옹은 새로 산 물건의 포장을 뜯고 감상하듯이 점령지를 말을 타고 둘러보았다. 발코니에서 말을 타고 지나쳐가는 나폴레옹을 본 헤겔은 역사에 길이 남을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저기 말을 탄 세계정신이 지나간다.”

 

그날 밤 헤겔은 나폴레옹 군대가 승전을 축하하기 위해 축포를 쏘는 모습을 멀리서 바라보았다. 축포의 번쩍임은 밝은 미래를 이끌고 오는 여명처럼 그에게 감동으로 다가왔다.

 

독일 민족의 일원인 헤겔이 프랑스인 점령자에게 찬사를 바친 일은 얼핏 이상해 보인다. 당대 독일인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이해할 수 있다. 독일 민족의 대표 선수는 프로이센이었지만 프로이센이 곧 민족 전체는 아니었다. 프로이센의 패배는 봉건 군주의 패배다. 프랑스 혁명이야 프랑스 시민들이 일으켰지만, 대포군단을 이끌고 혁명의 가치를 유럽 세계에 전파하고 다니는 이는 나폴레옹이다.

 

현재 선진국이라면 당연한 듯 가지고 있는 근대 법체계는 모두 나폴레옹 법전의 후예다. 이 법전의 원리는 하나, 바로 인권이다. 영주의 말 한마디면 멀쩡한 사람이 사라지는 독일 땅에 자유와 평등의 가치가 도래했다. 헤겔의 눈에 나폴레옹은 근대화의 십자가를 진 영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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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팔을 치켜들고 나폴레옹을 환영한 또 다른 유명한 독일인이 있다. 바로 루드비히 판 베토벤이다. 그가 나폴레옹에게 헌정하기 위해 3번 교향곡 <영웅>을 썼다는 사실은 유명하다. 나폴레옹이 봉건 군주인 황제 자리에 오르자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게 바친다’는 원고의 표제를 펜으로 그어버리기는 했지만 말이다. 베토벤이 어찌나 화가 났던지 펜촉이 종이를 뚫어버렸다.

 

1806년은 헤겔이 묵던 복층집 주인이 사망한 해이기도 하다. 훗날 호사가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일이 있었으니, 그가 죽자마자 헤겔은 과부가 된 안주인과 곧바로 애인 사이가 되었다. 두 사람은 다음 해인 1807년에 아들을 낳았다(이 아이는 나중에 20대의 나이로 군인이 되어 전쟁터에서 전사했다). 남편이 죽기 전에 과연 아무 사이도 아니었을까?

 

헤겔은 늦게 주목받았다. 그럴 수밖에 없다. 그의 철학은 방대하고 정밀하게 철학의 모든 테마를 논리적 모순 없이 완벽한 피라미드로 쌓아올렸다. 그렇기 때문에 사상도, 저서도 늦게 나왔다. 반대로 한 번 명성을 쌓고 나서는 절대자의 지위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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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 철학의 큰 그림은 1807년부터 스케치가 드러났다. 그는 이 해에 <정신현상학>을 출간했다. 서구 문명의 문화, 사상, 종교를 총망라해 하나의 패턴으로 설명해내는 대업의 출발이었다. 셸링의 하락세는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정신현상학>을 읽고 길길이 날뛰었다. 자기를 비판했다는 이유였다. 학자들끼리 서로 비판하는 건 건전하고 자연스러운 일이다. 전에도 두 사람은 철학에서 있어서는 비판적인 사이였다.

 

셸링은 몇 단계 아래였던 헤겔이 자신을 뛰어넘는다는 가능성을 상상도 해보지 않았다. 그는 헤겔이 반박 불가능한 논리와 자신과는 차원이 다른 스케일을 갖췄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헤겔은 당황하고, 황당했다.

 

“셸링의 철학을 비판했을 뿐이지, 내가 인간 셸링을 비판한 것은 아니잖은가."

 

당연한 말이다. 그러나 셸링의 귀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세간의 주목을 한 몸에 받았던 셸링의 품위와 관대함은 자신이 주인공일 때에만 발휘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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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출간 이후 셸링의 지위는 독일의 미래에서 '헤겔 선생의 친구'로 조정되었다. 그는 1809년 <인간적 자유의 본질>을 출간하지만 대세로 떠오른 헤겔에 대적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재치와 필력으로 시대의 지성이 되었지만, 어수룩한 헤겔에게 한 번 추월당하자 재역전은 불가능했다. 셸링의 철학은 여기서 멈추게 된다. 그는 남은 평생을 다음 책을 저술하는 데 보냈지만 결국 미완성 원고로 남고 말았다.

 

1808년은 헤겔에게 바쁜 해였다. 일단 예나를 떠나야 했다. 혼자 떠났다고 과부와 친자식을 버렸다고 보긴 어렵다. 애인은 하숙방을 운영해야 했다. 건물을 떼어내 다른 도시로 갈 순 없는 노릇이다. 예나를 떠난 건 뉘렘베르크 김니지움(고등학교) 교장으로 와 달라는 요청을 받아서다. 요새로 치면 웬만한 대학 총장 자리다. 거기다 뉘렘베르크에서는 김나지움 교장으로 와 주시는 조건으로 한 가지 부탁을 올렸으니, 허락해 주신다면 <정신현상학>을 학교 수업 교재로 사용해도 되는지였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헤겔은 서재, 교장실, 관저, 하인, 두둑한 봉급 그리고 철학을 할 충분한 여유를 제공받았다. 1811년에는 늦은 나이에 결혼까지 했다. 신부는 21년 연하였다. 뉘른베르크 토박이이자 깊은 귀족 집안인 튀셔 가문의 스무 살 난 장녀였다. 귀족 가문의 맏사위가 될 정도로 이제 독일의 지성은 셸링이 아닌 헤겔이었다.

 

대학이 내버려 둘 리가 없었다. 헤겔은 에를랑겐 대학, 베를린 대학,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러브콜을 받았다. 하나같이 독일 최고의 명문이다. 십여 년 전 눈물 젖은 자소서를 썼던 헤겔은 하이델베르크 대학을 선택해 1816년 자리를 옮겼다. 이때 마침 하숙집 안주인이 사망해 고아가 돼 있던 친아들을 잊지 않고 데려와 가족의 일원으로 만들었다.

 

1818년에는 베를린 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부임했다. 8년간 VIP 신분으로 비엔나, 파리, 프라하 등지를 돌며 명사들을 만나고 강연도 하는 우아한 생활을 한다. 이쯤 되면 셸링은 정신분열에 걸릴 지경이었다.

 

1830년은 헤겔에게 인생의 정점이었다. 당시 독일은 나폴레옹이 몰락하고 나서 급속도로 상승한 프로이센 왕국이 독일 땅을 하나의 체제로 편입시키는 중이었다. 헤겔은 중세 봉건주의의 다음 단계가 프로이센이 추구하는 중앙집권이라 보았다. 당연히 프로이센을 지지했다.

 

헤겔은 프로이센 국왕에 의해 기사로 서임, 정식 귀족이 되었다. 이 때문에 '관제철학자', 더 심하게는 '부역자'로 비판받기도 하지만 억측이다. 그의 철학과 모순되지 않는다. 같은 해 헤겔은 베를린대학교 총장으로 부임하기도 했으며 당대의 철학 그 자체로 추앙받았다. 셸링의 기분은 어땠을까? 좋지는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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