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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이준익

주연: 박정민, 김고은, 장항선, 정규수, 신현빈, 고준, 김준한, 정선철, 배제기, 최정헌, 한별, 김광휘

음악: 방준석

촬영: 이의태

15세 관람가 / Color / 123분

 

 

건강한 변(便)을 기대했으나 전체적으로 설사

 

(스포일러 있음) 이준익 감독 신작 <변산 (邊山)>은 등장만으로도 좀 의외였다. 감독의 전작 두 편이 일제강점기 시절 한국 근대사를 상징하는 인물들을 다루는 <동주>와 <박열>이라, (<동주>의 시나리오를 쓴 신연식 감독이 근현대사 예술인 10명의 삶을 영화화 하겠다는 프로젝트와는 별개로) 앞으로 이준익 감독은 한국 근대사를 이야기하는 방식으로 필모를 채워가겠거니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두 편과 묶여서 소위 말하는 '청춘 3부작'으로 홍보되는 <변산>의 등장을 보며 따로 진행하는 게 있었는데 엎어졌나 생각했을 정도였다. 일제강점기 이야기 하다가 갑자기 21세기라니. 물론 <변산>은 <박열> 후에 바로 제작이 계획되어 작년부터 촬영된 작품이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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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학수(박정민)는 전라도 변산 출신이지만 서울태생 고아라고 주장하는 아마추어 래퍼. 그에겐 변산에서 복창 터지는 유년시절을 보낸 기억이 있다. 군 입대하는 김에 미련없이 서울로 상경하여 고향을 외면한 지가 10년째인 학수. 그러나 서울에서도 비좁은 고시원 신세에 래퍼 심뻑이라는 이름으로 <쇼 미 더 머니> 도전만 여섯번째 하고 있을 정도로 그리 잘 풀리지 않고 있다. 어느날 학수는 정체불명의 여성으로부터 아버지(장항선)가 쓰러졌다는 전화를 받는다. 처음엔 무시했지만 우연한 계기로 서울에 온 고향 친구들까지 만나고 나니, 결국 10년만에 변산을 찾아 그 곳에서 아버지를 비롯해 어린 시절 지인들도 보게 된다. 첫사랑인 미경(신현빈)은 피아노 학원 선생, 학수가 쓴 시를 훔쳐갔던 교생선생 원준(김준한)은 신문기자, 학수를 짝사랑했던 선미(김고은)는 작가, 학수가 괴롭혔던 용대(고준)는 사업 크게 벌이는 무시무시한 건달이 되어 있다. 서울에서 만났던 친구들조차 렉카차 사업을 하는 중이다. 학수가 여러모로 팍팍한 삶을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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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 청춘영화라고 했을 때 거기에 걸맞게 기대하는 지점과 설정들이 있다. <변산>에도 그런 것이 보인다. 꿈은 높은데 현실은 시궁창이라는 점. 주인공이 서른살이라 아직 청춘이라 불러줄만 하다는 점.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을 '청춘영화' 라고 부르기에는 좀 망설여진다. 고향을 지우고 싶은 사람, 가족과의 갈등 같은 아이디어들은 그냥 어느 나이대로 설정해도 할 수 있는 이야기다. 굳이 청춘 이야기라는 식으로 홍보할 필요는 없었다. 음악적인 부분의 경우에는 나름 체면치레를 하면서 입지를 드러낸다. 이준익 감독이 영화계에서 음악과 관련된 작품을 잘 만든다고 평가받고 있으니, 이를 의식한 흔적이 보인달까. 박정민 배우가 직접 소화한 심뻑의 랩이 단순한 배경음악이 아니라는 듯 하단에 자막처리해서 보여주기도 하고, 무엇보다 학수가 고향에 가겠다고 결심하는 데에는 음악이 큰 영향을 끼친다.

 

쇼미더머니 예선을 통과한 학수는 카메오로 출연한 래퍼 얀키와 '어머니'라는 단어를 주제로 랩 배틀을 벌이는 상황에 처한다. 얀키와 달리 학수는 별다른 랩을 하지 못한채 침묵한다. 이 때 학수의 모습은 감정이 북받친 듯 울먹거리는 것 같기도 하고, 혹은 살면서 어머니를 거쳐 과거의 복창 터지는 분노를 생각했을 뿐, 어머니 그 자체에 대해 느껴본 감정이나 생각은 너무 오래되어 어떻게 풀어내야 할지를 몰라 하는 것 같기도 하다. <변산>은 여기서 곤경에 처한 예술가의 모습을 보여준다. 메세지를 말하는 예술가는 냉정할 필요가 있다. 스스로가 그 메세지에 취하게 되면 그건 신파 중에서도 가장 가학적인 형태가 되니 말이다. 학수는 래퍼 심뻑으로서 한계를 마주하고, 결국 변산으로 내려간다. 어머니를 떠올리면 그녀와 그 자신이 살았던 고향을 아니 떠올릴 수 없기 때문이다. 힙합 아티스트 심뻑의 입을 막는 변산은 어떤 장소인가. 굉장히 궁금해지게 만드는 연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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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정작 작품 배경이 전라도 변산이 되자, <변산>은 거의 시트콤이 된다. 사실 이는 학수가 처음 서울에서 변산의 친구들을 만나는 장면부터 예견된 사실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는 그 장면을 볼 때 지방민들을 바라보는 수도권 거주민의 시각이 대놓고 드러나는 것 같아 기분 나빴다. 변산에서 렉카차를 모는 3인방은 일제히 심하게 촌빨날리는 모습이며 <쇼 미 더 머니>가 무슨 방송인지도 모르고, 심지어 해당 프로그램 이름을 한 번에 발음하지도 못해서 "무슨 머니?" 라고 물어보기까지 한다. 딴 소리지만 깊은 산골에 사는 봉준호 감독의 <옥자> 주인공 미자도 유튜브를 통해 세상소식 다 알고 레티나 디스플레이를 알아본다. 뭐, 방송을 안 봤으면 존재를 모를 수도 있다. 그러나 노년층도 아니고 이제 갓 서른된 사람들이 10대 청소년이 쓰는 은어도 아닌 '쇼 미 더 머니' 라는 표현을 몰라서 되묻는 장면이 꽤 비현실적으로 보인다. 아무리 몰라도 저 간단한 영단어를 되물어 봐야 할 정도로 알아듣지 못하진 않을텐데.

 

물론 이런 바보 코미디가 관객을 웃기는 여러 영화적 장치 중 하나겠지. 하지만 작품 제작에 참여한 사람들은 지방민들은 헤어스타일은 펌, <쇼 미 더 머니>도 방영하지 않는 줄 알고 있나보다. <변산>이 로컬리티에 대해서 얼마나 얕게 생각하는지를 의심하게 된다. 변산이라는 지역을 묘사하는 방식 역시 무성의하다. 작품에서 등장인물들의 장소 이동이 워낙 한정적이라 주된 이야기는 항구 앞 술집, 병원, 갯벌에서 벌어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근데 저 세 장소는 변산에만 있는 것이 아니지 않나. 작품에서 묘사되는 변산은 굳이 변산이어야 할 이유가 없을 정도로 특색없다. 해당 지역의 유일한 장점으로 아름다운 노을이 거론되긴 하지만, <변산>이 노을을 네스켈 알멘드로스나 탁 후지모토 촬영감독이 테렌스 맬릭 작품에서 찍은 노을마냥 기똥차게 담아낸 것도 아니다. 달리 생각해보면 보는 사람도 느낄만한 그런 단조로움이, 학수가 고향을 거부하고 서울로 간 이유를 이해하게 되는 묘사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변산을 거부하는 이야기를 가진 작품이 아니라서 문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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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수가 이 곳에서 겪는 일은 특정 상황의 반복이다. 학수가 아버지와 과거에 겪은 일로 티격태격한다 -> 이런 상황을 지켜보거나 전해듣는 친구들이 (그 중에서도 선미가 특히) 학수를 다그친다 -> 유머러스한 상황들이 등장한다 (그 와중에 한 번씩 과거회상이 삽입) -> 맨 처음 상황 재반복. 거의 이런 식이다. 선미를 통해 주로 충고받는 지점은 학수가 변산에 있을 때 얼마나 멋진 사람이었는지를 일깨워 주는 것이다. 보통 이 말은 변산에 있었을 때는 멋졌는데, 서울이 그를 완전히 '베려부렀다'는 식으로 끝맺는다. 선미가 '베려부렀다'고 말하는 원인에는 학수가 자신을 시큰둥하게 대하는 이유도 있지만, 아버지를 매몰차게 대하는 그의 태도를 보고서인 점도 있다. 불화에 대해 선미가 제시하는 해결책은, 그저 아버지가 시한부 인생이니 학수에게 자식된 도리를 강요하는 타박이다. 서울보다 변산에서의 생활을 떠올려 보라고 덧붙이면서. 그런데 <변산>은 그런 선미의 행동에 오류가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전혀 보여주지 않는다. 선미는 학수로 인해 고향의 노을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알게됐고, 이로서 자기 꿈을 찾은 사람이다. 말하자면 그녀 또한 콩깍지 낀 눈으로 어린 시절의 학수를 떠올리기 때문에 본질을 보지 못한 채 그런 말을 할 수 있다.

 

내가 보기에도 학수는 고향에 정이 떨어질만도 하다. <변산>이 홍보를 위해 쓴 표현인 '흑역사'는 예고편 등에서는 주로 첫사랑 고백실패 같은 학창시절 추억으로 묘사된다. 하지만 그건 양념이고, 작품에서 칭하는 흑역사란 사실 학수네 가족 이야기다. 건달인 아버지로 인해 학수의 집안은 파탄난다. 생전에 뼈빠지게 고생하시다 돌아가신 어머니의 빈소를 지키던 학수는 아버지의 죄를 물으러 온 경찰에게 깡패 자식으로 조롱받는다. 시인으로서의 재능은 교생선생으로 온 원준이 그가 쓴 시를 훔쳐 등단하면서 엎어진다. 그리고 마침내 도망간 아버지를 찾아냈을 때 그는 다른 여자와 바람을 피우고 있다. 그가 주변 사람들에게 주로 투덜대고 아버지와 티격태격하는 데에는, 어떻게 보면 유년시절 때 겪은 마음의 상처와 울분을 쏟아내는 모습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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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변산>은 이상하다. 학수가 자기가 겪은 고통을 몇 번이고 대화로 드러내지만 변산에 살고 있는 모든 인물들은 학수를 타박하기만 할 뿐, 한 번이라도 그의 말을 제대로 들어주려고 하지 않는다. 물론 용대와 나름 악역 포지션으로 기획되어 등장하는 원준은 듣지 않아도 되지만 말이다. 용대가 건달로 인생이 풀린 데에 학수가 조금이나마 영향을 끼쳤을지도 모르니 사실 그건 얻어맞아도 달리 할 말이 없다. 작품 역시 그런 우스꽝스러움을 전달하는 의도로 학수와 용대의 장면을 묘사한다. 감상하면서 실제 <쇼 미 더 머니> 프로그램 출연자들이 인성 면에서 밑천을 드러내고 있으므로, 이를 비꼬면서 학수라는 인물이 그렇게 동정받을만한 인물이 아님을 보여주려 용대를 만들어냈나 생각했다. 실제로도 용대라는 인물은 친구들 중에서 비중이 큰 인물 중 하나다. 그리고 흐름상 학수 아버지가 애비 노릇을 할 수 있게끔 도움을 주는 인물이기도 하다. 작품은 아버지로부터 조언을 받은 학수가 용대와 갯벌에서 맞서는 장면을 보여주면서 부자 간의 갈등을 봉합시키지만, 이는 동시에 학수가 관객에게 이해받을 수 있는 과정을 차단하는 결과를 낳는다. 그래서인지 작품도 이걸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판단이 안 섰나보다. 학수와 용대가 갯벌에서 한창 싸우고 있을 때 갑자기 등장하지 않던 초등학교 동창들을 모두 불러 난장판을 만든다. 이말년 작가의 '와장창'을 영화로 구현하면 이런 모습이 나오려나. 무리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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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학수와 용대 간의 문제는 두 사람이 해결해야 할 일이다. 학수가 아버지로 인한 가정파탄 때문에 삐뚤어져서 애꿏은 용대를 괴롭혔다는 식의 이야기가 나오긴 하지만, 이에 대해 학수 아버지가 조언해 줬다고 부모로서 제 몫을 했다고 평가하기엔 좀 그렇다. 여태껏 해왔던 발암 유발 행위들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학수와 용대는 갯벌에서 싸우고 개운하다며 허허 웃지만, 그 개운함은 철저히 두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감정이지 아버지에게 그 자리를 허용할 수는 없다. 작품에서 학수 아버지는 쏘아붙이는 아들에게 가끔 미안하다고 답하지만, 그건 단지 불편한 상황을 건성으로 무마하려는 노력에 가깝다. 그가 학수에게 해주는 것이라고는 아들 앞에서 아파할 자격이 없다며 겉으로만 멀쩡한 척 하고, 그가 없을 때 끙끙 앓는 모습을 보여줄 뿐이다. 작품은 시한부 판정을 받은 학수 아버지가 겪는 고통으로 그에게 동정심을 유발한다. 이 정도로 그는 아들에게 용서받는 아버지가 될 수 있을까?

 

학수와 용대의 관계말고, 학수와 아버지의 관계에서는 접근법이 좀 달라야 했다. 쏟아내는 아들의 분노를 아버지가 이해하는 과정이 필요했고, 그 아버지 또한 학수에게 한 인간으로서 이해받는 과정이 필요했다. 작품은 학수와 아버지의 관계를 묘사할 때 이 두 가지를 생략시킨다. 그 바람에 작품이 아들인 학수에게 아버지를 이해하길 설득하는게 아니라 강요하는 형태가 된다. <변산>은 변산이라는 도시를 특징없이 묘사해서 '어째서 학수가 서울이 아닌 그 곳에서 더 나아질 수 있는지'에 대해 제대로 설득하지 못한다. 그리고 아버지의 경우에는 널 낳아준 사람이니 존경하고 용서해야 하며, 애정을 좀 가져보자며 외친다. 서로 곪은 부분을 바람직하게 터뜨려야 진정한 화해인 건데 <변산>은 부모자식 관계에서는 말하지 않아도 다 안다고 생각하나보다. 근데 그러기에는 학수 아버지는 구제불능이고, 변산의 친구들은 너무 생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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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의문만 든다. 이 작품은 그럴만한 역량도 안 되면서 왜 자꾸 학수 보고 아버지를 용서하라고 등을 떠밀까. 굳이 두 사람이 화해할 필요가 있었을까? 난 작품이 이렇게 된 원인이 씨만 뿌린 구제불능 건달 노인을 억지로라도 아버지 자리에 앉혀 놓으려는 노력에서 비롯되지 않았나 생각하는 쪽이다. <변산>은 어떻게든 모든 것을 용서하려고만 들어서 스스로 고리타분해지길 자처한다. 그래서 지금껏 겪은 일들로부터 영감을 받아 만든 학수의 곡이 마지막에 등장할 때도 전혀 의미있게 들리지 않는다. 제대로 사유하고 만든 곡인지 의심하게 된다. 굉장히 왜곡된 방식으로 가족관계 개선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는데 그 스스로는 맞는 방법이라고 여기는 것 같아서 위험해 보이기까지 하는 작품. 용서에 대한 강박으로 인해 창조된 손익분기점 200만짜리 괴물. 그것이 <변산>이다. 

 

 

p.s.

1) 이런 류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 중 역시 최고는 이누도 잇신 감독의 <메종 드 히미코>를 따라올 작품이 없는 것 같다. <변산>에 진짜 필요한 것도 따뜻한 웃음이 아니라 냉소이지 않았을까.

 

2) <변산>을 보면서 장점이라고 생각한 부분은 박정민 배우의 안정된 연기. 김고은 배우는 수수한 이미지로 연기할 때 가장 잘 어울린다는 점. 그리고 신현빈 배우의 미경 캐릭터다. 뭔가 양다리 걸치기가 취미인 팜므파탈 소시오패스 여왕님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다. 가끔 이해가 가지 않는 구석이 있지만, 그래서 이 작품에서 가장 신선하고 재밌기도 하다. 사실 배우들의 연기는 아무 이상없다. 배역이 이상할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