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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마흔 중반, 나는 두 아이의 가장이다  

 

기왕 이렇게 전업 팟캐스터를 하시죠?”

 

딴지 편집장 너부리는 이렇게 말했다. ‘더이상 회사에 다니지 못하게 되었다 이야기의 무게보다는 한참 가볍다고 생각했으나 원래 딴지는 이따위 조직인 . 역시 너부리 편집장이 생활고에 시달릴 위로의 말을 건넨 도 없으니 주는대로 받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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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개월을 아내와 고민했다. 한국에서 마흔 중반의 나이에 있는 테크트리는 자영업 빼고는 선택지가 없었다. 전업 팟캐스터 제의가 코웃음 나는 이유는 때문이었다. 나름 영화관련 1,2위를 다투는 팟캐스트였다. 해도 진행자 세명에게 돌아가는 진행료는 20만원 남짓이다.  아이가 있는 가장으로서 전업 팟캐스터는 무책임한 결정이다. 가장 좋아하고 즐거운 일이었으나 진지하게 고민할 수준조차 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고등학교에 입학하는 아이가 있었고 이제 유치원에 들어간 막내가 있었다. 막내가 군대를 다녀와 대학원까지 간다고 가정하면 칠순까지는 뒷바라지를 해야 한다는 생각에 뒷덜미가 뻣뻣해졌다.

 

 

 

2. 가치의 가지치기와 불가능한 재취업 

 

이민의 단초는 거기에서 시작되었다. 아내와 나는 놈을 학원 뺑뺑이 돌릴 능력도 열정도 없었다. 우리 부부는 다행스럽게도 부분에 있어서 의견이 일치했다. 나는 아들놈들의 학원비를 부담하지 않으면서 자영업 테크트리를 피할 있는 14만가지의 차원우주를 텔레파시를 통해 경험해보았다. 의식의 흐름은 다음과 같은 절차를 통해 가지치기를 나갔다. (도표로 Yes, No 구성하고 싶었는데 죽지않는돌고래 편집장이 얄미워서 포기함)

 

1. 이전 수준을 상회하는 재취업이 가능한가?

 

2. 불가능하다면 자영업을 피할 있는가?

 

3. 부득이하게 자영업을 피할 없다면 블루오션을 찾아낼 있는가?

 

4. 블루오션을 찾아내면 내가 좋아하는 고기와 술을 다루지 않는 종목인가?

 

5. 고기와 술을 다루지 않는다 해도 주말에는 있는가?

 

6. 주말에 못 놀더라도 애들과 다니던 캠핑은 다닐 있는가?

 

7. 캠핑을 못다니더라도 아이들과 시간을 보낼  있는가?

 

8. 아이들과 시간을 보낼 수는 없더라도 학원 뺑뺑이는 과감히 배제할 있는가?

 

9. 이 선택을 아이들에게 강요할 있는가?

 

10. 선택을 강요할 없다면 그렇지 않은 사회를 찾을 있는가?

 

11. 다른 사회에서 과연 이전 수입에 준하는 수입을 올릴 있는가?

 

12. 그 사회는 내가 적응할 있는 사회인가?

 

13. 내가 수입도 올리고 적응도 있다면 아이들은 사회, 혹은 그곳에서 배운 언어나 학업성취로 등록금 면제되는 나라로 유학갈 있는가?

 

14. 내가 즐길만한 취미가 있는 곳인가?

 

이전 수준의 재취업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외주 프로덕션의 PD 임금은 생각보다 박하다굳이 비싼 연출자를 필요도 없을만큼 연출자는 양산된다. 그러니 현장 연출자로 돌아갈 수는 없다. 연출자를 관리하고 제안서를 만드는 자리는 공중파, 종편, 케이블에서 퇴사하고 프로덕션 차리거나 들어온 이들로 바글바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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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업종변경을 통한 재취업이라는 최저임금 노동자로의 회귀를 말한다실업급여를 받기 위해 고용센터를 가보신 분은 것이다. 15년차 이상의 노동자가 70% 정도의 급여 손실을 감안하더라도 할만한 재취업 일자리는 눈씻고 찾아봐도 없다. 경력을 살리기 위해서는 자영업자가 되어 프로덕션을 다시 차리던가(30 초반에 이미 수금을 못해 말아먹은 경험이 있다. 계산서는 발행하고 수금을 하지 못해 소득세만 8천 만원이 나왔었다. 내가 망한 회사 쫒아 다니며 일부라도 돈을 달라고 애원할 아내는 매일 세무서에 가서 사정을 설명하고 빌었다. 세무서 직원은 밖으로 아내를 부르더니 이런 남자와 결혼했느냐 물었단다)기술을 새로 배워 사회 초년병으로 돌아가던가, 닭을 튀겨야 하는 결정밖에 없었다.

 

기술이 없으니 프랜차이즈로 눈이 수밖에 없고 프랜차이즈야말로 내가 가장 원하지 않는 그림이었다. 어쩔 없이 자영업으로 결정을 내린다면 노동력을 갈아 넣거나 누군가를 착취할 수 밖에 없다. 이곳에서는 더이상 답을 찾을 없다고 생각했다. 더군다나 박근혜는 이제 2년차 임기를 시작하고 있을 때였다. 3년을 기다릴 있는 여력이 없었다. 기다린다고 해도 정권이 바뀔 것이라는 보장도 없었다. 3 뒤는 4K 완전히 자리잡는 세상이다. 지금도 없는 자리가 3 뒤를 기다려 줄리 없다. 생각은 밖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일을 벌리는 데는 타고 났다. 수습마저 잘했다면 죽지않는돌고래 편집장 명령에 따위 쓰지 않고 대서양에서 초미녀들과 상어 낚시나 하고 있었을 거다. 따위는 걱정하지 않고 밖으로 나가기로 아내와 결정했다. ‘소소 싸움은 있었다. 결정이 바뀌지는 않았다. 처음에는 아내가 부정적이었고 가기로 날이 다가오면서 내가 부정적이 되어갔다. 그러나 끝까지 비행기표를 취소하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3. 맨해튼,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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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3 15. F 케네디 형아 공항에 도착했다.

 

오기 달 전, 한 달 일정으로 우리 가족은 의정부, 동두천을 거쳐 남북면옥이 지근인 알프스 스키장, 하조대를 거쳐 7 국도를 따라 경북까지 내려와 영주, 대구, 울산, 부산, 봉화, 삼천포, 남해, 목포, 광주, 전주, 대전을 돌아 여행했다. 어쩌면 다시 못 올지도 모르는 한국의 구석구석을 눈에 담아두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봉하마을을 봉화로 잘못 찍어 찾아뵙지 못하고 돌아서야 했던 밤, 울었다지인들에게 캠핑장비를 팔거나 나누어 주었다. 5년간 발이 되어준 차도 팔았다. 6개월 집을 팔기로 하고 떠나왔다.

 

맨해튼은 생각보다 작았다. 면적이 서초구 정도라 했다. 스무살 왔으면 설레고 흥분되었을 텐데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이나 록펠러 센터, 자유의 여신상보다 한인 마트가 있다는 게 반가웠다. 아내가 오기까지 1년간 백종원과 차승원 레시피로 연명했다. 이북식 닭곰탕, 돼지갈비, 단무지를 넣은 감자 샐러드, 강된장찌개, 매운 돼지 제육, 고든램스 스타일의 채끝, 등심, 안심 스테이크, 오이 소박이 2~30여가지 요리의 순서와 재료가 머릿 속에 입력되었다.

 

하고 싶었던 아니라 밖에서 사먹는 가격이 살인적이어서다. 흔한 순두부찌개가 15 내외, 반주로 곁들이는 소주 병이 15. 겸손하게 순두부 하나에 소주 마시면 30, 텍스와 팁을 포함하면 한끼 40불이 우습다. 우리돈 4만 5천원이다. 1.8리터에 28 하는 40도짜리 그란츠 병에 중국 마트에서 전지살 8 어치면 일주일을 버틴다.

 

1년간 1부터 11 애비뉴까지, 로어 맨해튼부터 센트럴 파크까지 매주 애비뉴씩을 걸어다니며 정보를 모았다. 1 정도를 걷고 경험해보니 현관만 봐도 어떤 아파트인지 대충 감이 생기고 화장실 사진만 봐도 몇번가에 있는 어느 콘도라는 알게 되었다. 뉴욕에 오는 주류 여행객들의 생각과 느낌도 이해하게 되었고 시장이 어떻게 굴러가는지도 면밀하게 검토 했다. 1년의 시장조사를 끝내고 아내가 집판 돈과 함께 아이들을 데리고 뉴욕에 왔다. 그리고 게스트 하우스를 시작했다. (죽돌 편집장이 광고도 살짝 넣으라고 하는데 내 양심상 도저히 그렇게 하지는 못하겠다www.sunnydayny.com 어쨌든 오타로 입력된 이 링크로 찾아와 딴지보고 연락했다고 해도 안깍아준다. 대신 감사함은 두 배로 갖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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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이왕 후회 할 거 

 

가족을 빼고 사람이 그립지는 않다. 을밀대, 초마, 하동관, 양미옥, 우레옥 대길갈비와 느티나무집 갈비탕, 제주도 선장오빠를 사장님이 하시는 일산 도래미와 여의도 단골이던 꼼장어집, 전주회관, 옆에 불맛제육집, 아아. 요리솜씨가 그렇게도 형편없었던 엄마의 카레와 불고기는 문득문득 아프게 파고든다. 아이들은 걱정이 없다. 큰놈은 너무 적응을 잘해 좋은 학교 있을거라 뽐뿌를 넣는 바람에 아내 입이 귀에 걸렸다.

 

둘째놈은 이벨라비를 좋아하는데 제프리만 오면 자기랑 안놀고 제프리랑만 논다고 고민이 태산이다. 사랑이 제일 아픈 거라고 이야기 해줬지만 상처는 다이노포스만이 치료할 있단다. 저지르면 수습은 신이 한다. 물론 신이 있다고 믿지 않는다. 하지만 근본과 대책과 고민이 없는 내가 문제없이 오늘을 수습하면서 살고 있다는 확률로 설명될 있는 것이 아니다. 그걸 설명할 있는 신이다.

 

지금 이민을 고민하거나 계획하는 분들에게 주제넘게 이렇다 저렇다 조언해드릴 위치는 아니다. 역량도 노하우도 없다. 살면서 사업에 실패했다. 주식으로 집도 날릴 했다. 교통사고로 돈도 까먹었다. 그래도 드리고 싶은 말씀은 있다. ‘엄마도 엄마가 처음이었다’ 라는 말처럼 인생의 거의 대부분 결정은 누구나 처음이다. 당연히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 실패한다고 인생도 실패하는 건 아니더라(지금 읽고 계시는 딴지일보도  열 번쯤 망했다). 

 

다양한 선택과 다양한 가치가 있다. 다만, 후회 거라면 질러 보고 후회하자는 신념이다. 다음 생이란 거, 믿지 않는다. 

 

 

 

 1. 뉴욕을 결정하게 가장 작은 이유 중 하나는 취미다. US오픈이 열린 베스페이지 골프장 이용료는 48. 트와일라잇이면 싸진다. 동네 근처 핫딜은 20불부터. 한국의 1/10 가격.

 

 2. 뉴욕에 오면 불프강, 피터 루거 이런데 말고 Katz Deli 가세요. 가세요. 가격은 1/3 맛은 130 전통이 보증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