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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학 때부터 통일 투쟁하는 친구들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아니, 상극이었다. “기어이 우리 대에 조국 통일 이룩하자.”고 외치는 놈들을 보면 우리 대의 평균 수명이 성경에 나오는 므두셀라 정도 되면 모를까 뭐에 취해서 놀고들 있다고 비웃었다. “통일은 우리의 소원일 수만은 없다. 오로지 통일만이 살길이어라.” 분연히 눈물 흘리는 친구들 뒤에서 “통일은 우리의 살길일 수만은 없다. 통일도 변혁 후에 올 것이어라” 하며 약 올리는 게 내 일이었다.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도 그러하다. 북한은 왕국이고 남한은 공화국인데, 하물며 그간 달라진 게 얼마나 많은데 같은 민족이고 무엇이고 섣불리 통일했다가 오늘날의 예멘 꼴 안나면 다행일 텐데, 무슨 통일이 그리 급하다고... 일단 평화부터 찾고 북한도 남한도 서로 좋은 나라 만들다 보면, 그 웬수같이 싸우던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가 합쳐져 영국을 이루듯 우리도 그런 날이 올 것이다, 정도로 생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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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그러나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열혈 통일론자가 됐다. 주성하 기자의 이 <평양 자본주의 백과 전서>는 아무리 수십년간 남북 이질화가 진행되었다 하여도, 왕국 3대에 권력자의 형이 외국에서 독가스로 암살되고 권력자의 고모부가 삽시간에 포살되는 나라라 하여도, 우리는 하나구나, 우리는 한 민족이구나, 우리는 통일해야 되는구나, 지금은 안돼도 언젠가는 되어야 하겠구나, 하는 뜨거운 조국 통일의 열망에 휩싸이게 만들었다.

 

아아, 왕년의 NL 친구들아, 진심으로 미안하다. 내 미욱하여 여러분이 통일을 외치는 이유를 몰랐었구나. 왜 우리는 하나여야 하는지 몰랐던 내가 실로 참담하구나. 통일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가 돼야 한다.

 

 

2. 

이유는 이 책을 보면 안다. 이미 북한은 우리처럼 돈으로 움직이는 사회가 되었다. 그 돈의 성질은 다양하겠지만 최소한 북한에는 하루에 우리 돈으로 기백만원씩 술 사먹는 특권층 (김씨 왕가나 그 측근들 뿐 아니라 자기 능력(?)으로 돈 번)들이 엄연히 존재하고, 그런 신분으로 상승하기 위해 2천만 중 상당수가 노력하고 있는 사회다.

 

사회주의 국가로서 세금은 없으나 소득을 늘리려면 뇌물을 줘야 하고, 평균 20퍼센트, 소득이 많으면 50%까지 뇌물로 바치면서 그 안정성을 지키는, 거의 우리의 소득세와 유사한 시스템을 갖춘 나라다.

 

그 특권층에 진입하기 위한 투쟁은 눈물겹다. 부모들의 자식 교육 열정은 남한의 강남을 능가한다고 한다. 돈 있는 집에서는 영어와 피아노 과외는 기본, 자식을 좋은 대학에 보내고 탐나는 직장에 보내기 위해 돈을 아끼지 않는다.

 

북한 최고의 대학인 김일성 대학을 두고는 이런 말이 있다고 한다. “돈이 제일 많은 학생도 김대에 있고 돈이 제일 없는 학생도 김대에 있다”. 경제력이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되 그래도 대놓고 전면화하지는 못하는 상황. 아아, 이 역시 우리의 서울대와 무엇이 다르냐. 이미 명문대학은 강남 등 “엄마의 정보력과 할아버의 재력”을 지닌 인재들이 차지한 바 오래로 ‘지역 균형’과 ‘학교장 추천’으로 겨우 겨우 구색을 맞추는 우리의 모습 아닌가. 아아, 우리는 하나, 우리는 한민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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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동산 붐이 일면서 아파트가 대랑으로 건설되었지만 위에서 떼먹고 중간에서 뜯고 아래에서 삥뜯는 부실이 되었던 악몽을 우리 어찌 잊으랴. 규정 대비 철근 아껴 해 드시고 설계도에 나온 콘크리트 비율 맞추지 않으시고 현장 노동자들은 안전 기준도 없이 일하면서 그 십장들은 어떻게든 시멘트 빼돌리고 대충 대충 눈막음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우리는 안다.

 

아아, 그런데 그런 일이 북한에서도 똑같이 일어났단다. 바로 평천 아파트 붕괴 사고. 멀쩡한 23층 아파트가 하루 아침에 무너졌다. 집안에 있던 3백 명의 목숨이 그냥 사라졌다. 붕괴 현장에서는 골조 같은 것도 없이 흙더미만 있었다고 한다. 당 간부부터 현장에서 공사를 담당했던 돌격대까지 알뜰하게 해처먹은 탓이다.

 

이 미칠 것 같은 동질감이여. 일체감이여. 우리는 하나. 우리의 소원은 통일.

 

 

3. 

“평양은 서울만큼 어쩌면 서울보다 더 교육열이 높은 곳이다. 아이 교육은 부모 재력 따라간다. 교양원은 돈 내는 아이만 따로 남겨 국어나 수학을 더 공부시킨다.” 공교육인지 사교육인지 분간이 안가지만 어쨌건 돈 더 내면 따로 시켜주는 교육이 어찌 공교육이랴. 거기에 더하여 아이들은 이렇다고 한다. “누가 전학이라도 오면 아이들이 몰려와 ‘너희 부모는 뭐하니’부터 묻는다. (장마당에서) 화장품 장사한다고 대답하면 돈 좀 빠지냐(벌리냐)라고 묻는다.”

 

아아, 백두산 뻗어내려 반도 삼천리... 우리는 하나, 단군의 자손이라. 유치원 애들이 만나도 너네 집 몇 평이고 어느 아파트 사느냐고 묻는 이 민족의 종특. 느그 아버지 모하시노의 자랑찬 전통이 수십년 갈라져 살아온 어색한 동포 북한 사회에서도 여지없이 통용되고 있음이 이 아니 눈물겨운가. 아,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

 

한 탈북자는 이상한 이유로 탈북했다. “아내를 사랑 없는 결혼에서 해방시켜 주고 싶어서.” 국정원에서 이 사람을 조사하던 이들은 다 고개를 갸우뚱했을 것이다. "무슨 소리냐. 이 녀석 간첩 아니야? 아냐 간첩이면 이럴 리가 없어..." 하면서. 그는 몰랐다. 자기가 왜 중매결혼한 아내에게 전혀 끌리지 않았는지. 왜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시간 가는 줄 모른다는 신혼도 경험한 바 없고 왜 아내를 안고 싶지 않았는지. 자신이 성적 소수자인 걸 몰랐던 탓이다. 성적 소수자는 ‘부도덕한 정신적 질병’이라 여기기 때문이란다.

 

오호라 퀴어 퍼레이드를 막아서며 “사랑하기 때문에 반대합니다.” 주절거리던 기독교인들이여. “동성애는 정신병”이라고 우기며 AIDS가 다 동성애 때문이고, 동성애는 치료받을 수 있다며 언성 높이던 개신교도들이여. 너희들이 종북이었구나. 너희들은 여기서 그 빌어먹을 상식을 배워 왔구나. 단파방송을 들었던 거냐. 남파간첩에 포섭된 거냐. 어쩌면 그리 북한과 똑같은 생각으로 세상과 사람을 대할 수 있는 것이냐. 이 종북 새끼들아.

 

하기사 이것이 너희의 문제일까. 우리 민족의 문제이고, 우리 민족이 서로 닮아 있기 때문인 것을... 아 우리는 하나... 우리는 한민족... 반갑습니다, 반갑습니다, 우리들 만나니 반갑습니다~~~, 노래가 자동 재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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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다가 날 샐 것 같아서 그만하게 되는데 이 책은 사람의 감정을 매우 불안정하게 만든다. 키득키득 북한도 이러네, 하다가 진지하게 야 북한도 이러는구나, 했다가 가끔은 공포에 질려 왜 이렇게 똑같냐 했다가 우리는 하나, 조국은 하나다, 온 벽과 천정과 바닥에 쓰고 싶어지는 것이다. 반만년의 역사를 이어온 우리는 하나의 민족 백두산의 정기가 내리어 이 땅은 하나의 조국... 아싸 아싸 아싸.

 

가끔 그런 얘기들을 듣는다. 북한과 교류하게 되면 제발 이 땅의 대재벌이나 탐욕스러운 이들이 먼저 들어가서 순박한 북한 사람들을 골탕먹이는 일이 없기를... 이런 류의 참 착한 소리. 그런 분들은 가장 먼저 총알같이 이 책을 읽으시기 바란다. 읽다 보면 아실 것이다. 당신들이 이미 일종의 오리엔탈리즘의 포로인 것을. 자본주의에 찌든 남한 사람들에 비해 북한 사람들은 순박할 것이라는 발상 자체가 얼마나 어마어마 무시무시한지를 이 책은 알게 해 준다.

 

북한 사람들에게 평양이 어떤 존재인지 평양시민이 어떤 지위인지, 거기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해 얼마나 발버둥치는지 알면, 재미교포 아줌마의 철없는 여행기가 얼마나 코끼리 다리 붙잡고 코끼리는 기둥이라고 외치는 소리에 지나지 않는가를 깨달으실 것이다. “니들이 북한을 알어?”라고 수시로 떠벌이는 민족주의자 여러분. 그 개성공단 이사장인가 하는 김진향님. 제발 이 책 읽으시기 바란다. “조국을 배신한 자들” 일지라도 그 조국에서 수십년 살다 온 사람들이다. 어찌 당신들만큼 북한을 모르겠는가.

 

 

4. 

이 책으로 북한을 안다 어쩐다 하는 건 과장이다. 2천 5백만 인구의 나라를 어찌 책 한권으로 알 수 있으랴. 하지만 아무리 수박을 끌어안고 혀가 끊어지도록 겉을 핥은들 수박이 익었는지를 알 수 없다. 일단 칼을 대고 뻘건 속을 봐야 그리고 거기에 혀를 얹어 봐야 익었는지 삭았는지 무보다 싱거운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그 칼이다. 날이 잘 선 칼이고 썩썩 수박을 가르고 찍어서 맛 좀 봐 보슈 하면서 내밀 수 있는 칼이다. 그 뒤에 그 수박을 사고 안 사고는, 그리고 쩌억 갈라서 내 배를 채우든 내다 버리든 선택하는 건 독자의 몫일 것이지만.

 

보다 보면 웃음도 여러 번 터지고 가슴 뭉클도 한 두 번이 아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통쾌하다. 아 이랬구나, 이래서 그랬구나, 싶은 대목이 수십 번 등장한다. 단파방송 듣고 주체사상에 대하여 문건 보며 북한을 알았던 세대들에게 특히 권한다. 당신들이 상상하는 북한과 한 번 대조라도 해 보기 바란다. 북한이라면 천안함 연평도만 기억하는 젊은 세대들에게도 권한다. 북한의 젊은 세대는 여러분과도 닮아 있다. 책을 읽은 다음에는 어서 만나고 싶어질지도 모른다. 이 얘긴 해줘야 하는데, 어, 이건 좀 들어야 되는데 하면서.

 

드라마 <태양의 후예>가 북한에서 인기를 끌면서 북한 국경 수비대에서는 (당연히 중국으로부터 뭐 볼 것이 많이 들어오는) 남한 군인의 말투가 화제였다고 했다. “...하지 말입니다.”라는 말투는 자신들이 쓰는 것인데 남조선 아이들이 이를 어찌 알고!!!!, 이런 신기함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가 알다시피 그 말투는 우리 군인들도 수십년 전부터 써 온 말이었다. 북한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으면서도. 그저 남과 북의 군인들이 그 위계질서 속에서 똑같이 개발한, 기이한 표현인 것이다. 웃기지 않은가. 그토록 갈라져서 총칼 들고 죽이네 살리네 하면서도 생각하는 것부터 말하는 것까지 닮아가는 남과 북. 오오 통일이여, 우리들의 사랑이여. 주성하 기자에게 감사한다. 나는 이제 NL이 되련다.

 

기어이 우리 대에 조국 통일 이룩하... 아니, 그래도 이건 아니야. 바꿔야지. 기어이 언젠가는 조국 통일 이룩하자. 꼬옥 이룩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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