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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로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가카가 다스 실소유주라는 것이 ‘넉넉히’ 인정된다.”

 

‘주어 없음’ 드립 같은 유언비어가 판을 치며 가카에게서 다스를 뺏어간 수십 년의 아픈 세월을 딛고, 재판부는 넉넉하고 냥냥하게 가카께 다스를 돌려드렸다.

 

생각해보면, 이 모든 것은 가카께서 집념으로 되찾아 온 bbk 140억에서 시작됐다. 가카께서 쏘아 올린 140억 냠냠은 돌고 돌아 130억의 벌금 쁠라스 15년 징역이 되었으니, 이것이 공수래 공수거 아니겠는가? 생각해보니 가카께서는 법정 스님의 <무소유>나 ‘조화로운 삶’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으셨다 카셨다. 출판사 이름만 쓱 읽어도 책 전체 내용을 단번에 파악하는 가카의 능력은 불립문자를 강조하는 선불교에서 탐낼만한 인재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준비했다. 가카의 독실함은 이미 유명하지만, 길고 지루한 빵 생활 중 여러 종교 행사에 참석할 일이 많으실 텐데, 이참에 불교 공부도 쫌 해보시는 게 어떨까?

 

여기, 역사 속 최고 권력자들의 불교 귀의 사례를 대강 모아보았으니, 댓글 달던 가카의 it 정책 동지들은 꼭 좀 전해주시라.

 

 

1. 조선 태조 이성계(1335년 ~ 14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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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회암사지

전담 심리치료사 무학대사와 함께 이성계가 자주 머문 회암사는 이성계 전용 힐링캠프였다.

 

사진 출처 - 경기일보

 

우리 가카와 이성계는 참으로 닮은 점이 많다. 반쯤은 오랑캐 취급을 받았으나 불세출의 영웅이 되고, 나아가 개국 군주까지 된 이성계. 확실히 국밥 먹던 흙수저가 현대 사장이 되고, 대통령까지 해낸 가카의 삶은 이성계에게 오버랩된다. 정도전 등 신하들의 의견을 수용해 숭유억불 정책을 폈지만, 이성계 개인과 그 가족들은 독실한 불교 신자였다. 이성계가 대권을 꿈꾸며 안변에 석왕사를 지은 것처럼, 가카도 대권을 꿈꾸며 서울시를 하나님께 봉헌하지 않았던가. 개인적 독실함 역시 닮았다.

 

이성계의 말로는 아들들의 골육상쟁으로 인해 비참했다. 가카의 조카와 아들이 다스 내에서 미묘한 신경전을 벌이는 수준 정도가 아니었다. 1398년, 두 번째 와이프 사이에서 낳은 이방석을 세자로 책봉한 것에 불만을 품은 이방원의 형제들은 쿠데타를 일으켜 정도전을 비롯한 여러 공신과 이복형제 세자 이방석과 이방번을 싸그리 죽였다. 이 일로 병환을 얻은 이성계는 사실상 파업했고, 2차 왕자의 난을 거쳐 태종이 즉위한 후론 아예 무학대사와 함께 회암사로 들어가 버린다.

 

숭유억불 정책을 펼치는 나라에서 태상왕의 불교 귀의는 신하들의 불만을 낳았다. 한때 겨레의 슈퍼스타였던 그는 특유의 쇼맨쉽을 발휘한 퍼포먼스를 펼친다.

 

“느그들 뜻을 내가 모를 줄 알어? 다만 (방원이 네가 죽인) 죽은 두 아들과 사위가 너무 불쌍해서 그런다.”

 

라는 말과 함께, 하늘을 향해

 

“서방정토로 가즈아!”

 

를 외쳤다.

 

신화적인 영웅담으로 한반도를 뒤흔든 이성계. 그의 퍼포먼스는 입지전적이고 파란만장한 삶을 산 최고 권력자의 무상한 말년을 잘 보여준다. 리얼루다가 대운하로 한반도를 뒤집어 엎을뻔한 가카의 스케일에 딱 맞는 인물이 아닐 수 없다. 즉, '이성계-이명박 소름 돋는 평행이론!' 따위의 여론을 만들어내, 이성계와 동급으로 올라서는 부가적인 효과도 누릴 수 있는 불문(佛門)은 열려있다는 것이다.

 

 

2. 일본 헤이제이 덴노(774년 ~ 82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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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덴노 정치사엔 ‘인세이’라는 괴랄한 시스템이 있다. 덴노가 황태자에게 황위를 양위한 후, 막후에서 권력을 행사하는 방식이다. 한반도에선 세종 초기 태종이 상왕으로 오지랖을 부리던 것을 빼면 거의 전례가 없다(가카께서 형을 방패로 세우고 다스를 운영했던 시스템은 오사카 조기유학으로 배워오신 것이 아닐까?). 좌우간, 8세기 말 헤이안 시대에 인세이 방식을 최초로 시도했던 사람이 제51대 덴노 헤이제이다.

 

806년 즉위한 헤이제이 덴노는 나름대로 열심히 국정을 수행했다. 그러나 4년 만에 원인을 정확히 알 수 없는 병, 즉 신병(神病)에 걸렸고 810년, 사가 덴노에게 양위했다. 일본사에서 매력적인 악녀 캐릭터로 꼽히는 헤이제이 덴노의 와이프 후지와라노 구스코와 그의 오빠가 강력히 반대했으나, 헤이제이는 이때까지만 해도 양위의 뜻이 강했다.

 

그러나 4년간 취했던 권력의 달콤함이 너무도 짧았을까? 거처를 옮긴 헤이제이는 새로 즉위한 사가 덴노와 제도의 변경을 두고 대립하기 시작했다. 사가 덴노도 순순히 권력을 내줄 생각이 없었고, 조정은 두 파로 나뉘었다. 1년간의 기 싸움 끝에 헤이제이는 선전포고와 다름없는 조서를 내리니,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이제부터 우리 집이 수도임ㅋ”

 

하루 아침에 천도를 결정한 칙서에 민심은 요동쳤고, 그보다 더 벙찐 사가 덴노는 반대파를 잡아들였다. 두 명의 덴노는 ‘스치기만 해도 치명타’ 같은 기 싸움을 벌였으나, 사가 덴노의 군사가 메이웨더처럼 완벽한 방어태세를 보여준 끝에 헤이제이 상황은 거병도 하지 못한 채 끝났다. 잽 한 번 날려보지 못하고 패배한 헤이제이 상황의 와이프인 구스코는 음독자살했고, 상황 본인은 머리를 깎고 출가했다. 출가 이후 14년의 세월을 더 살았지만, 특기할 만한 흔적이 남지 않았다.

 

권력은 맺고 끊음이 분명해야 한다. 특히나 임기가 정해진 대통령일수록, 퇴임 후 뒷감당하기 어려운 일을 벌이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다. 천년만년 권력을 누리실 것처럼 댓글 부대를 운영하시던 가카를 위한 불문(佛門)은 이렇게 열려있다. 이렇게 된 거, 역사의 죄인임을 받아들이시고 머리 깎으시는 건 어떨까?

 

 

3. 인도 마가다국 아잣따삿투 왕(B.C.490? ~ B.C.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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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황석굴에 그려진 <관경변상도>

빔비사라 왕에게 설법하는 붓다의 모습과, 마가다 왕국의 쿠데타가 그려져 있다.

 

출처 - 불교신문

 

기원전 6세기 인도에는 다양한 사상과 국가가 우후죽순 솟아났다. 이 지역의 골목대장이 된 마가다국의 왕 빔비사라는 여느 똘똘한 왕들처럼 군사적, 외교적, 정치적으로 뛰어난 활약을 보여주며 전성기를 이끌기 시작했다. 모든 것을 다 가진 그 였지만, 한 가지 해소되지 않는 고민이 있었다. 그것은 하나의 저주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나라는 한창 융성해졌지만, 후사를 이을 자식이 없었기에 신통한 점성술사에게 물어보았다. 점성술사의 예언은 다음과 같았다.

 

“죠오기 비후라 산에 한 선인이 사는디, 3년 뒤에 죽어서 왕의 자식이 될 거니 걱정말어."

 

그러나 마음 급한 빔비사라 왕은, ‘어차피 죽을 거면 지금 죽여도 되겠네?’라는 쿨한 마음으로 자객을 보내 선인을 죽였고, 선인은 죽어가면서

 

“다음 생에 왕의 자식으로 태어나 왕을 죽이리라”

 

라는 저주를 퍼부었다.

 

동북부의 패자이지만 가족 문제에 있어선 쫄보인 빔비사라 왕은 아잣타삿투라는 왕자를 낳자마자 던져 죽이려 했으나, 왕자는 새끼손가락만 잃고 살아남게 된다. 그 후 생각을 고쳐먹은 왕은 금이야 옥이야 왕자를 키우게 되며 나라의 근심은 사라지는 듯했다. 그러나 세금 문제로 아빠와 싸우던 아들 아잣타삿투는 출생의 비밀을 듣게 되고, 쿠데타를 일으켜 “왕위를 계승 중입니다.”를 시전, 결국 빔비사라 왕은 유폐 당해 감옥에서 생을 마감한다.

 

왕위에 등극한 아잣타삿투. 그는 혼란한 나라를 정리하고 마가다국을 더 번영시켰다. 그러나 패륜을 저지르고 등극한 왕위이기에 아버지를 죽인 것에 대한 자책감과 자신도 아버지와 같은 길을 걸을까 불안해하며, 그의 아들 우다야밧다카가 차라리 출가해 버렸으면 하는 마음을 거두지 못했다. 빔비사라 왕을 평생 동안 감싸던 권력에 대한 불안이 아들 아잣타삿투에게도 이어진 것이다.

 

고민하던 아잣타삿투는, 아들의 출가를 독려하기 위해 아버지 빔비사라 왕과 깊은 관계를 맺었던 붓다를 찾아가 이렇게 묻는다.

 

“출가하면 개이득입니까?”

 

붓다는 출가의 현실적인 이익과 종교적 이익을 차근차근 설명하며 아잣타삿투 왕의 고민을 해결해주었고, 아버지를 죽인 왕은 참회하며 불교에 귀의한다. 경전에서는 종교적 신념으로 설명하지만, 정치적인 이유가 더 컸을 것이다. 그러나 슬픈 예감은 들린 적이 없는 법, 아잣타삿투 왕 역시 아빠처럼 아들 우다야밧다카에게 "왕위를 계승 중입니다."를 당해 비참한 말로를 맞았다.

 

두 부자가 모두 권력욕에서 비롯된 아들내미에 대한 의심과 집착을 거두지 못한 채 불행한 결말로 떠났다. 집착이라면 우리 가카께서도 한 가닥 하시는 바, 끝까지 bbk 140억에 대한 집착을 놓지 못해 이 지경까지 오지 않았는가. 그런 가카를 위한 불문은 언제나 오픈되어 있지만, 두 부자의 예처럼 불교에 귀의하고 참회해서 지은 죄가 갑자기 사라지진 않으니, 안타깝게도 죗값은 에누리 없이 냥냥하게 치르셔야겠다. 헤헷, 고멘네.

 

 

4. 한국 대통령 전두환(1931년... 안타깝게도 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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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정샷도 작작 찍으셔야죠 각하...

 

만약 불교에 귀의하고 싶지 않지만, 반성 코스프레라도 하고 싶다면? 걱정 말라. 훌륭한 모델이 지척에 있다. 불굴의 생명력으로 자서전까지 펴내신 전두환처럼 말이다. 87년 6월 항쟁으로 직선제 개헌을 수용한 전두환은 친구를 믿었으나, 노태우는 5공 청산을 통해 전두환의 팔과 다리를 잘라냈고, 88년 전두환을 백담사에 유배 보내며 ‘뜻밖의 불교 귀의’를 시켰다. 전두환은 떠날 때만 해도 이렇게 말했다.

 

“노태우 그놈이 아무리 대통령이라도 이런 식으로 하면 나한테 귀싸대기 맞는다.”

 

그렇게 유폐된 백담사에서 전두환 부부는 온갖 에피소드를 양산했다. 절간에 생활용품 한 트럭을 사가는 것을 시작으로, 지인을 시켜 회를 사 오게 했다가 주지 스님한테 뺀찌 먹고, 나물밥이 익숙하지 않아 계속 밥을 남기는 등 힘겨운 적응기를 거쳐 능숙한 현자 코스프레를 해내기 시작했다. <전두환 회고록>에서는 이 시기를 ‘백담사에서의 769일’이라는 챕터로 담고 있다.

 

"백일기도 동안 ‘아무도 미워하지 말자. 모두 내 잘못이고 내 탓이라고 생각하자’고 다짐했지만, 1분도 지나지 않아 억울함이 엄습했다." / ‘자신이 어렵게 평화적 정부 이양을 했고, GNP 600억 달러에 빚이 200억 달러인 나라를 4000억 달라 부자 나라로 만들어 넘겨줬는데 수모를 겪고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갱제만 발전시키면 그만’이라는 가카의 사상과 닮지 않았는가? 게다가 전두환은 백일기도를 하면서 광주 민주화 운동의 희생자와 삼청 교육대 희생자의 극락왕생을 위한 기도를 했다 카는데, 노무현 대통령의 영결식장에서 두 손을 모아 기도하던 가카의 모습이 오버랩 되는 장면이다.

 

좌우간, 전두환은 백담사에서 ‘결국 모든 것은 자신이 뿌린 대로 거두는 것‘이란 이치를 깨달았다 카는데, 그걸 아는 사람이 이제껏 그러고 있나 싶다. 사실 이런 나이롱 불자 따위 안 오는 게 더 낫지만, 가카는 나의 최애니까 불문은 언제나 열려 있는 것으로 하겠다.

 

 

5. 중국 수나라 양제(569년 ~ 61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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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제가 대운하에서 타고 놀았다는 대용주.

만약 가카도 4대강이 아니라 대운하를 파셨다면,

자전거길을 타는 사진 보다 배 타는 사진을 남기셨을 것이다.

안타까울 따름이다.

 

세계에는 이름난 운하가 여럿 있다. 파나마 운하, 수에즈 운하, 그리고 중국의 대운하. 안타깝게도 백두대간을 뚫어서 대운하를 만드시겠다는 야심 찬 계획이 수포로 돌아간 뒤로, 그의 배포에 비하면 동네 개천 수준인 4대강에 만족하셔야만 했던 가카에겐 이데아 같은 존재, 수나라 양제도 꽤 독실한 불교 신자였다.

 

수양제의 불교 사랑은 가카의 개신교 사랑과 비슷한 구석이 너무나도 많다. 가카는 선거법 위반으로 국회의원직에서 사퇴하며 정치 생명의 위기를 맞았을 때, 소망교회에서 독실한 신앙인으로 재탄생하며 부활할 수 있었다. 수양제도 태자인 형의 자리를 빼앗기 위해 바른 생활 청년임을 연기하며 부모의 눈에 들기 위해 노력했고, 그 일환으로 당시 명망 높은 스님인 지의 스님을 스승으로 삼아 불교에 귀의했다. 이때 제자가 되면서 청년이던 수양제가 남긴 글이 전해 온다.

 

“부처님의 자비심을 가지고 마치 외아들을 돌보는 것처럼 모든 백성을 바라볼 수 있게 해주십시오.”

 

부처님 대신 하나님을, 백성 대신 국민으로 쓰면 가카께서 국가조찬기도회에서 읊으시던 기도문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그는 패륜을 저지르며 황위에 등극했고, 이후 역사에 길이 빛날 암군의 대명사가 되어주신다. 가카께서는 국가를 수익모델로 삼아 어떻게든 땡겨 쓰는데 골몰하셨던 것처럼, 수양제도 대운하 건설, 2번째 수도 건설, 만리장성 복구 등의 거대 사업에 꼭 자신을 위한 향락 시설을 끼워 넣는 모습을 보여준다.

 

결국, 말년엔 전국에서 일어난 반란의 포위망에 쫓기게 된 그는 술자리에서 와이프가 그를 응원하는 말을 하자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세상사 무상하고, 인생은 꿈 같으며, 빈천고락이 따로 정해진 것도 아니니 목이 잘린들 무슨 상관일고!”

 

그러나 정작 반란군이 코앞까지 들이닥친 상황에서는 "내가 무슨 죄를 지었는데?"라고 물었다고 한다. 이 역시 끝까지 억울함을 호소하시는 가카의 모습과 오버랩된다. 수양제가 제행무상(諸行無常)의 의미를 제대로 알았다면 나라를 그 지경으로 말아먹지는 않았을 것이다. 가카께서는 아직 늦지 않았다. 더 추해지기 전에 불문에 귀의하여 제행무상의 의미를 되새겨보시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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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 법회 시간에 딴짓하고 그러면 나중에 삼천배 크리 맞습니다.

 

 

더 소개하고 싶지만, 분량상 5명의 최고 권력자를 디벼보았다. 생각해보니 우리 가카는 어쩌면 불문에 귀의해서도 불교를 수익모델로 삼아 부활하시지 않을까 염려도 된다. 조계종의 몇몇 스님들에겐 참으로 소중한 인재로 대접받을 수도 있겠다.

 

어쨌건, 감형 없이 15년간 독실한 깜빵 생활 되시기를 발원하며, 130억 납부도 잊지 말고 꼬박꼬박하시라!

 

 

 

 

 

 

Profile
조선사 교양서를 쓰고 있는, 딴지가 배출한 또 하나의 잉여 작가
딴지의 조선사, 문화재, 불교, 축구 파트를 맡고 있슴다.
이 네 개 파트의 미래가 어둡다는 거지요.

『시시콜콜한 조선의 편지들』
『시시콜콜한 조선의 일기들』
『시시콜콜 조선복지실록』
『시시콜콜 조선부동산실록』 신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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