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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선조 때 유홍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 의심 많았던 선조에게 시종일관 신임을 받았던 사람이다. 그 신임의 원천은 바로 ‘종계변무’(宗系辨誣)를 매조지한 데 있었다. 종계변무란 건국 초기부터 무려 2백년 동안 명나라에 잘못 기록된 태조 이성계의 가계(家系)를 바로잡고자 해 온 사건을 말한다.

 

고려 말 1390년(공양왕 2) 이성계의 정적이던 윤이(尹彛)·이초(李初)가 명나라로 도망가서 이성계를 타도하려는 목적으로, 공양왕이 고려 왕실의 후손이 아니고 이성계의 인척이라 하고 떠든 적이 있다.

 

이들은 이성계와 공양왕이 공모해 명나라를 치려고 한다면서, 이성계가 고려의 권신 이인임(李仁任)의 후손이라는 엉뚱한 소리를 했고, 명나라는 이 말을 믿고 덜렁 명나라 태조실록과 대명회전(大明會典)에 그대로 기록해 버렸다. 대의명분으로 밥 먹고 살았던 나라 조선으로서는 대단한 수치요 어떻게든 해결해야 할 숙원 사업이 됐다. 이인임은 이성계의 쿠데타로 실각했던 사람 아닌가. 그 사람의 피붙이라니, 용서할 수 없는 모독이었다.

 

태조 이래 조선은 툭하면 이 문제를 거론하며 명나라에 수정을 요구했으나 명나라는 귓등으로만 들었다. “우리 태조의 유훈이다 해.” 이러면 끝이었다. 그러나 일단 명분을 세운 이상 어떻게든 그것을 관철하려드는 것은 배달 겨레의 종특. 조선은 포기하지 않았다. 이 문제를 일단락짓고 그 수정된 실체를 조선 임금 앞에 들이민 주요 공로자 가운데 하나가 유홍이었던 것이다.

 

그는 “명나라 예부에서 (수정한) 대명회전은 황제가 보지 않았으므로 주기가 어렵다고 하니, 유홍이 꿇어 앉아서 땅에 머리를 두드려서 피가 흐르니, 상서 심리(沈鯉)가 여기에 감동되어 황제께 아뢰어 수정된 대명회전 부분을 보내 주었던 것이다.” 즉 땅에 머리 찧어 이마에서 피 질질 흘리며 울부짖었던 것이니 그 충성심 하늘에 닿았고 압록강 건너올 때 강물도 춤을 추며 충신의 귀환을 반겼으리라.

 

그 후 유홍의 탄탄대로야 말할 것이 없다. 임진왜란이 터질 당시에는 이조판서까지 지낸 뒤였다 부산에 상륙한 일본군은 거침없이 북상해 왔다. 이일이 출전했으나 병력은 제대로 없이 장수만 달려가는 형국이었고 올라오는 장계들은 전부 죽겠다고 아우성치고 있었다. 나라가 제대로 망하는 것인가. 선조도 얼굴이 파래졌다. 피난 가려면 짐꾼이며 가마꾼의 신발이 많이 필요할 터, 은밀히 미투리들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온 도성 백성들이 눈치를 알아챘다. “이것들이 우리는 피난도 못가게 만드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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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유홍은 분연히 일어나 임금 앞으로 간다. “도성은 죽음으로 사수해야 하옵니다.”를 피끓는 목소리로 부르짖은 유홍은 임금을 날카롭게 몰아세웠다. “미투리는 궁중에서 사용할 물품이 아니고 백금(白金)은 적을 방어할 물건이 아닌데도 지금 전쟁이 급한 중에 문득 백금을 사들이라 명하시니 전하께서 어찌 나라를 망칠 일을 하시는 것이옵니까?”

 

선조도 당황했다. 이 영감이 이리 나오면 곤란한데... 머리를 땅에 찧어 피를 흘리며 종계변무를 성공시킨 공신 아닌가. 선조는 유홍을 은근히 타이른다. “미투리야 출정하는 병사들을 위해 산 것이고 백금은 난리 전에 이미 사들이라고 한 것이니 신경쓰지 마시오.” 그런데 선조도 그 순간에는 몰랐을 것이다. 이 충성스런 영감이 자기 가족들은 이미 깡그리 빼돌려 놓았던 것을.

 

유홍의 충성은 그런 식이었다. 자신의 이익이 목전에 보이는 일이라면 모양이 구겨지는 것 따위는 아랑곳않고 몸을 던질 줄 알았다. 선조 임금이 앞서 종계변무에 신경을 쓰고 실패하면 모가지 뎅강 할 것이라고 협박도 했으나 2백년 동안 못한 일을 성공시키지 못했다고 죽기야 했으랴. 

 

그러나 임금이 그토록 신경을 쓰는 일에 몸으로 충성을 보이는 것은 결코 아낄 일이 아니었다. 땅에 이마를 찧어 피 흘리는 것도 안된다면 까짓거 무명지 질끈 깨물어 혈서인들 못쓰겠는가. 그래서 그렇게 했다. 전쟁이 터지고 적군이 수도를 향해 죄어들어올 때 우선적으로 할 일은 자기 가족을 피난시키는 일이었다. 그러나 임금 앞에서는 그러면 안되는 것이다 말 한 마디로 천 냥 빚을 줘야 하는 것이다. “도성을 지켜야 하옵니다.” 나중에라도 할 말이 있었다. “나는 도성을 지키자고 했었느니...”

 

이 처세는 도움이 됐다. 이 사태에 책임을 지라는 여론이 비등하면서 영의정 이산해와 좌의정 유성룡 등이 물러났을 때 새롭게 우의정을 차지한 게 유홍이었고 도체찰사, 즉 전쟁의 총책임자로까지 올라선다. 그런데 평양에 들어와 한숨 돌리던 중 도원수 김명원의 장계가 올라왔다.

 

“부원수 신각이 제 명을 따르지 않고 양주로 홀로 도주하였으니 이는 군율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내막은 임진강 방어선이 허무하게 허물어지면서 김명원은 도망했으나 부원수 신각은 적을 맞아 유격전으로 싸울 각오로 따르지 않은 것이었다. 또 신각은 임진왜란 발발 이래 육지에서의 첫 승첩을 거두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내막을 알 길이 없었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던 유홍은 임금에게 또 분연히 아뢴다.

 

“오늘날의 폐단은 기율이 엄하지 못한 데에 있습니다. 도원수 김명원의 지시를 어긴 부원수 신각에게 군법을 엄하게 보여야 합니다.” 그 다급한 전쟁 중에도 외침에는 무능해도 자기 백성들 처벌은 기막히게 유능했던 조정은 즉시 선전관을 보냈고 신각은 목이 달아나고 말았다.

 

이렇게 서슬 푸른 도체찰사인지라 임금도 믿음이 생겼던지 어서 내려가서 적을 막으라 명령한다. 그러나 이 도체찰사 유홍은 충성의 대상이 어디까지나 자신이었다. 입신영달을 위한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하겠으나 망할 게 뻔히 보이는 길을 어명이라고 찾아갈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어명을 거부한다.

 

“송구하옵니다. 소인은 갈 수가 없사옵니다.” 보통의 경우 합당한 연유를 댔을 것이다. “소신은 문신이오니 전투를 지휘할 이는 따로 있사옵니다.” 하고 아무개를 천거하였을 수도 있다. 그러나 신립이 전사한 이후 이렇다 할 장수도 없었고, 천거할 인물도 없는 막다른 골목이었다. 여기서 유홍은 실로 기막힌 핑계를 댄다.

 

“발바닥에 종기가 나서 갈 수 없사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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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족발의 건강을 해칠 수 있다는 ‘족발 안정’의 문제로 도체찰사의 소임을 맡아 전장으로 나가라는 당연한 어명을 거부한 것이다. 얼마 전에 군율이 문제라며 신각의 목을 신속하게 쳐 버리자고 충동질했던 인간이! 아마 어지간한 선조도 말을 더듬었을 것이다. 조... 종기라고?

 

듣다 못한 대사헌 이헌국이 끼어들었다. “기성부원군! 당신이 재능이 있나 덕이 있나. 그런데도 정승의 자리를 받았으니 더 이상 망극할 수 없는 성은을 입었는데, 발바닥에 종기가 났다고 못나가겠다? 아 씨바. (이건 기록에 없다) 이건 진짜 잔치판에 기생이 나와설랑 목이 아파요. 하면서 노래를 안 부르는 것과 같잖소. 당신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대사헌 이헌국은 유홍을 두들겨 팰 기세였다고 한다. 기록에는 없지만 유홍은 버선을 벗어들고 자! 자! 보라고 하며 발바닥을 들이밀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인간이었다. 끝내 도체찰사 유홍은 누릴 것 다 누리면서 피할 것은 다 피하고 하고픈 일은 다 하면서 해야 할 일은 하지 않았다. 그러고도 편안히 눈을 감았고 충목(忠穆)이라는 시호까지 챙겼다.

 

유홍의 초상화가 제대로 검색되지 않아 그와 매우 흡사하게 살았던 한 인간, “사법체계의 근간이 흔들리거나 정치적인 세력 등의 부당한 영향력이 침투할 틈이 조금이라도 허용되는 순간 어렵사리 이루어낸 사법부 독립은 무너지고 민주주의는 후퇴하고 말 것"이라고 그림같이 말하면서 판사 블랙리스트 작성하고, 재판 농단하고 물러나서는 법에 따른 절차도 거부하고, 심지어 똘마니 판사로부터 ‘주거안정’을 이유로 압수수색조차 면책받고 있는 자의 얼굴을 대신 올린다. 아마도 비슷하게 생겼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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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시는 유홍이 출전을 거부한 뒤 평양성 보통문 밖에 나붙은 시로서 작자는 미상이며 조선왕조실록 별책부록에 전한다.

 

奏拒雁訂僞何麗 주거안정위하여

가짜를 물리치고 그릇된 기록 바로잡으라 아뢴 것 얼마나 아름다웠나.

鴨水水色慕歎多 압수수색모탄다 

압록강 물빛도 연모하고 감탄함 그득했는데

豈足跏惰鼓燒理 개족가타고소리

어찌 양반다리 하고앉아 (변방의) 북소리 흘러들으며 지킬 도리 불사르는가

敵閉王恙勝殆羅 적폐왕양승태라

적병은 왕을 조여오고 근심은 커져 온 세상 위태로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