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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나라 왕 구천은 오나라를 향한 복수의 칼을 갈며 하루하루를 보냈어. 마음이 해이해질 때마다 쓰디쓴 쓸개를 맛보며 마음을 다잡았으면서 말이야. 월나라 최고의 지략가인 범려는 오나라에 인질로 남게 되었어. 오자서가 월나라 왕 구천의 귀국은 허락해도 범려만은 절대로 안 된다고 생떼를 써서 얻어낸 결과물이야. 미녀 서시가 왕에게 아무리 귓바람을 불어넣어도 범려의 본국 송환만은 실패했지만, 범려는 적국에서 인질로 잡혀 있으며 오히려 그곳의 정세를 살펴보고 왕에게 서신으로 실질적인 조언을 계속해 주었어.

 

“더 바짝 엎드려야 합니다. 오나라에서 우리를 아예 투명 인간 취급할 정도로 무시를 받아야 합니다. 그것만이 살길입니다. 본국에서 반성문을 쓰고 재물만 받치고 있다가는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입니다.”

 

“아무리 내가 패전국의 왕이기는 하지만 명색이 왕인데 도대체 뭘 얼마나 더 하란 말이오?”

 

“오나라로 직접 와 왕에게 수시로 문안 인사를 하셔야 합니다. 더 좋은 건 오나라 왕 부차의 아버지 묘에 가서 풀도 뽑고 청소를 하면 가장 좋습니다.”

 

이렇게 범려의 원격 조정에 의해 월나라 왕 구천은 임원 집에 김장하러 가는 부장처럼 와이프까지 대동하고, 오나라를 직접 방문했어. 국빈 방문의 형식? 그런 건 당연히 없었지. 구천은 문안 인사를 마친 후 정말로 오나라 왕 아버지 묘지에 가서 부부가 직접 풀도 뽑고 열일을 했다고 해. 이건 마치 복수를 위해 자신의 발톱을 감춘 영웅본색의 주윤발을 능가하는 '쓸개 내놓음'이 아닐 수 없어. 범려의 조언대로, 간이고 쓸개고 다 빼놓고 엎드리니 오나라 왕 부차는 그들의 인생 연기에 완전히 속아 넘어갔어.

 

“아니, 저 인간은 그래도 왕이란 작자가 너무한 것 아니냐? 자존심도 없나? 그래! 으하하하! 나의 카리스마에 완전히 압도되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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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말하자 범려가 꽂아 둔 서시가 남자의 자신감과 자만심을 동시에 자극했어.

 

“소녀도 그리 생각하옵니다. 왕께서 베풀어 주신 더 넓은 아량에 저 인간은 완전히 매료된 것 같사옵니다. 이제 남은 힘도 없으니 별도리도 없지만요. 호호호호. 이참에 더 큰 아량을 베풀어 주신다면, 대대손손 왕에 대한 칭송이 끓이질 않을 것입니다.”

 

“더 큰 아량이라 했느냐?”

 

“어차피 월나라는 이제 전하 발톱의 때만도 못한 상태입니다. 월나라 신하 범려를 굳이 여기 인질로 잡아 둘 필요가 있을까요? 아직도 우리가 그들을 두려워하는 것 같다는 인상을 대중들에게 줄 필요가 있을까요?”

 

“옳거니. 네 말이 맞도다. 자기 나라 왕이 우리 아버지 묘지기를 하는 판에 신하 하나를 인질로 잡아 두면 모양새도 안 좋겠구나. 범려 그 자를 송환하도록 내 조치를 하마.”

 

모두가 안일함에 빠져 있을 때 오직 오자서만이 매의 눈으로 범려와 월나라를 주시하고 있었어.

 

“천부당만부당한 말씀이옵니다. 범려의 송환 조치는 호랑이를 우리에서 풀어 주는 것과 같은 어리석은 짓이옵니다.”

 

“뭐라? 내가 결정한 일에 대해서 어리석다고? 저 인간이 보자 보자 하니까. 야! 오자서! 내가 타이거 of 타이거야! 범려나 월나라 나부랭이에게 쫄 것 같아? 그 지나친 두려움으로 인해 우리가 중원으로 나가지를 못해. 아, 짜증나!”

 

오나라 왕 부차는 이미 범려나 월나라는 안중에 없었고 중원으로의 진출을 노리고 있었는데, 사사건건 오자서가 월나라를 조심하라고 걸고넘어지니 짜증이 났어. 그렇게 둘 사이는 점점 멀어져 갔어. 이런 와중에 왕 부차가 오자서를 이웃 제나라로 파견을 보내니, 감정의 골은 깊어질 대로 깊어졌지.

 

‘아! 나는 오직 충심에서 한 이야기인데, 나를 멀리하려 하는구나. 나도 보험을 하나 들어 놔야겠다.’

 

오자서는 왕으로부터 외교관 발령서를 받아들고 제나라로 떠난 후, 본국으로 재입국할 때 자신의 아들을 제나라에 남겨두고 왔어. 이런 좋은 먹잇감을 서시가 놓칠 리가 없잖아.

 

“전하. 오자서에 대한 기이한 소문을 들었사옵니다.”

 

“아. 진짜 너도 징하다. 징해. 그자에 대한 이야기는 그만해라. 나도 너만큼 그 자가 싫다.”

 

“그래도 꼭 아셔야 할 것 같아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오자서 그 자가 제나라에 아들을 남겨두고 귀국을 했다고 하옵니다. 이는 필시 여기서 역모를 꾀한 후 실패하게 되면 이중 국적자인 아들의 목숨만은 보험처럼 남겨둔 처사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집착왕 오자서의 복수심에 대한 깊이를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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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눈에 안 그래도 눈엣가시 같던 오자서였어. 왕 부차는 오자서를 조용히 불러들였어.

 

“긴말하지 않겠소. 그동안 우리 오나라를 위해 헌신한 그대의 공은 잊지 않겠소. 절반은 당신 개인의 복수를 위해서 한 일이겠지만. 서로 아름다운 마무리를 합시다. 깨끗이 자결하시오.”

 

오자서도 긴말은 하지 않았어. 복수의 화신답게 자결을 하면서 왕에게 저주를 쏟아부었다고 해.

 

“어리석은 자여. 그대 이름은 왕이로다. 마지막 부탁이 있다. 내 무덤 주위에 가래나무를 심어 달라.”

 

“어허! 이 양반 봐라. 아무리 막판이라도 왕에게 막말 까는 거야, 지금? 가래나무는 뭐 하려고? 이유나 들어보자.”

 

“그 가래나무가 자라면 네놈의 관을 만들 것이다.”

 

“이런! 감히 신하 나부랭이가. 네놈의 무덤이라도 있을 줄 알았느냐? 여봐라, 당장 이자를 끌고 나가서 찢어 죽이고 시체는 양자강에 버리도록 하라.”

 

오자서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고 오나라 국정이 점점 산으로 가게 되었어. 바닥에 바짝 엎드려 있던 월나라 왕 구천은 범려를 조용히 불렀어.

 

“오자서가 죽고 백비가 국정을 농단한 지 벌써 3년이 지났소. 아직도 더 기다려야 하오?”

 

“그동안 제 말을 따라서 잘 참아 주셨습니다. 제 기대 이상이십니다. 한 번에 격퇴하기는 어렵겠지만 지금 출격하시면 승산은 우리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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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나라의 국력은 서서히 역전되더니 마침내 기원전 473년에 월나라가 오나라를 완전히 멸망시켰고, 훗날 우리는 이를 오월쟁패라고 부르고 있어. 또한 와신상담의 완성이야.

 

오나라 왕 부차는 기브 앤 테이크 하자며 나도 한 번 살려 달라고 애걸복걸을 했으나, 범려도 왕 부천도 못 본 척을 했어. 미션 ‘와신상담’이 마침내 이렇게 막을 내리긴 했는데, 주연 배우 범려는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어. 동료 신하가 의아해하며 물었어.

 

“아니. 지금 어디로 가신다는 말입니까? 개고생은 우리가 다 하고 이제 각종 포상금에 요직을 차지하고 살 일만 남았는데요!”

 

“당신도 나와 함께 떠나지 않겠습니까? 우리 왕 범려는 위기 상황에서 같이할 수는 있지만 평화 시대에는 함께할 인물이 못 됩니다.”

 

“그게 무슨 말이오. 오월쟁패가 누구 때문에 된 것인데, 설마 우리를 그리 쉽게 내치겠소?”

 

“토사구팽! 토끼 사냥이 마치면 쓸모가 없어진 사냥개는 삶아 먹게 되는 법입니다. 저는 그럼 이만.”

 

토사구팽은 범려와 동료의 대화 중에 나온 사자성어야. 범려는 자신이 직접 뽑아 길러 오나라 멸망의 비밀 병기로 썼던 서시와 함께 길을 나섰어.

 

“나리. 어디로 가시렵니까?”

 

“그동안 참으로 고생이 많았다. 우선 제나라로 떠날 것이다. 그리고 다시는 정치판으로 돌아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하면 앞으로는 무엇을 하실 작정이십니까?”

 

“글쎄다. 책을 써 볼까? 어찌 나를 따라나선 것이 걱정되는 눈빛이로구나.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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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려는 병법에 관한 책을 쓰긴 했지만 지금까지 전해지지는 않고 있어. 낭중지추! 범려는 비록 정계를 떠났지만 그의 비범함은 재계에서도 엄청난 빛을 발했다고 해. 한국의 재벌 부럽지 않은 막대한 부를 축적한 후, 그가 한 일은 바로 사회환원! 범려가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하던데, (역사 공부도 안 하고 인문학적 소양이 부족한 일부 몰지각한 극히 일부의) 부자들이 이 말의 뜻을 알아들으려나.

 

“귀한 것이 극에 이르면 도리어 천한 것으로 바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