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1961년 인천 부평 미군기지 기지촌 풍경
일본 대신 한반도에 등장한 미군. 이미 일본에서는 공창제가 폐지됐고, 한국에서도 공창제 폐지에 대한 목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지만, 미군은 일본군이 남겨놓은 ‘공창제’를 버리기 싫어했다(이에 대한 반응은 패전국 일본에서와의 것과 달랐다).
1946년 5월 미군정은 ‘부녀자 매매 또는 그 매매계약의 금지’를 법령으로 제정, 발표한다(법령 70호). 이와 함께 정치적인 확대해석을 경계하는 ‘부연설명’이 따라붙는다.
“부녀자의 인신매매만을 금지할 뿐 공창제를 폐지한 것은 아니다.”
당시 미군정청 장관이었던 아서 러취(Archer L. Lerch)의 발언이었다. 미군은 공창제를 없앨 생각이 없었다.
법령 70호의 '매매의 금지와 매매계약의 금지'는 원치 않는 성매매를 하던 여성들에게는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었지만, 반대로 성매매 여성은 늘었다. 근본적인 문제는 ‘생계’였다. 마땅히 갈 곳도 없고, 기술도 없었던 이들이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몸을 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해방 이후 혼란한 정국 상황과 경제 문제도 한 몫 했다.
또 하나 '머릿수'를 채워야 했다. 집창촌은 그대로 있는데, 그 집창촌에 있던 여성들 중 상당수가 빠져나갔다. 패전과 함께 고국으로 돌아간 일본 여성들이었다. 그 빈자리를 한국 여성들이 채워야 했다.
이 시기 대대적인 권력 교체가 일어났다. 일본인 포주와 여성들이 빠져나간 자리를 한국인 포주와 여성들이 채웠고, 일본식으로 불리던 이름도 한국식으로 바뀌었다. 익히 들어온 집창촌의 이름은 다 이 시기에 등장했다. 한 때 동양 최고(最古), 최대(最大)의 집창촌으로 유명했던 '완월동 집창촌'의 원래 이름은 '미도리마치(綠町)'였고, 대구 '자갈마당'의 원래 이름은 '야에가키초(八重垣町)'였다.
해방된 조국에서 미국식 민주주의를 생각하던 때 성매매 여성은 계속 늘어나고 있는 아이러니. 미군정이 미적거리면서 공창제 폐지를 뒤로 미루자(아예 생각이 없는 듯한 모습이었다) 여성단체들이 들고 일어났다. 인권을 말하는 나라의 군대가 거꾸로 성매매를 조장하는 상황이었으니 그럴만 했다. 사회 지도층 인사들도 움직이기 시작했고, 이 무렵 각 신문 사설도 ‘공창제 폐지’를 외치고 있었다.
“일본은 공창제를 폐지했는데, 우리는 어째서 유지하고 있는가? 미군정은 우리를 차별하고 있는 건가?”
미국은 1947년 10월 ‘부녀자 매매 또는 그 매매계약의 금지’에 ‘공창제 폐지’를 덧붙인다.
공창제 폐지됐지만, 이를 받아들이는 입장이나 이를 단속해야 하는 입장에서는 난감하기 이를 데 없었다. 물론 초반에는 꽤 의욕적이었다. 집창촌이 있는 지역의 유지나 독지가들이 ‘공창폐지대책위원회’를 조직해 성매매 여성들의 자활을 돕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지원이 효과가 있었을까? 성매매 여성들은 막대한 빚을 지고 있었고, 성매매로 버는 돈은 일반적인 기술로 버는 돈에 비해 많았다. 그것을 고려한다면 실효성이 있는지 의문이었다.
또 성매매 산업에 관련된 수많은 이익 관계자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특히 ‘포주’들에게 공창제 폐지는 날벼락이었다.
그들은 즉시 행동에 나선다. 포주들은 '대석업자연맹'이라는 ‘단체’를 만들어(정치적 발언을 하기 전의 수순을 그대로 밟았다), 전통적인 방법(?)을 사용했다.
“공창제 폐지와 성매매 여성들의 자활에 대해서는 원칙적으로 동의한다. 그러나 실시 일정이 너무 촉박하다. 급박하게 정책을 시행하다 보면 분명 문제가 발생한다. 성매매 산업에 종사하는 여성들이나 관계 산업을 통해 생활을 영위하는 이들이 전직(轉職)을 하기 위해서라도 최소한의 시간을 달라.”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 같지 않은가? 원칙적으로 합의하지만, 업계종사자들을 위해, 산업 피해를 최소화 하기 위해, 유예기간을 달라는 말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다. 1940년대 중반에 나온 말이 7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대로 쓰이고 있다. 이 정도면 전가의 보도라고 말해야 할까?
대외적인 입장을 정리한 성매매 업계는 또 다른 ‘전통적인 방법’도 실행했다. '로비'였다.
입법위원과 고위관리들에게 개인적으로 건네는 뇌물은 애교로 봐줄 수 있었다. 심각한 문제는 ‘조직적인' 모금과 뇌물 지급이었다. 당시 포주들은 공창제 폐지를 유예시키거나 무효화시키기 위해 정치자금을 모금했다. 방법은 아주 간단했다. 성매매 여성에게 1인 당 2천 원 씩 거뒀던 거다. 이렇게 700만 원의 비자금을 조성한 뒤 로비자금으로 사용했다.
(1940년대의 쌀값 평균을 보면 '1인 당 2천 원'이 어떤 액수인지 이해가 될 거다. 당시 쌀 한 가마(80kg)가 22.68원이었고, 1945년 8월에 비해 물가가 30배 이상 폭등한 1946년의 공무원 평균 월급은 425원이었다. 따라서 2천 원이란 꽤 큰 돈이었다는 걸 알 수 있다)
로비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 공창제는 폐지되었다.
이후 한국은 성매매 없는 깨끗하고 아름다운 나라가 됐을까?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내야겠는데... 적어도 ‘성매매’에 한해서는 더 나빠졌다.
최초 ‘공창제 폐지’의 핵심 명분은,
“성매매 여성들의 인권을 보호하고, 사회로 돌려보내는 것.”
“성매매의 근절”
이었지만, 변하기는커녕 상황은 더 꼬였다. 성매매 여성들에 대한 사회적 시선도 문제였다.
“가정 파괴자.” “조선여성의 수치.”
낙인 찍힌 여성들이 사회에 정착할 수 있을까? 물론 이를 극복하고 사회에 정착할 수도 있겠지만 그를 위해선 ‘물적 토대’가 필요하다. 해방 직후의 혼란한 사회에서 그들이 홀로 생계를 유지할 만한 일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인천 1946년
성매매 여성들은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었고, 공창제가 폐지된 상황에서 이들은 여관이나 카페, 바 등에 취직해 밀매춘을 했다. 공창제가 존재하던 시기에는 특정한 장소에서 성매매가 이루어졌으나, 공창제가 폐지된 이후 여기저기로 흩어진 것이다. 단속은 물론 관리에도 허점이 드러날 수밖에 없었고, 미군정은 결국 이들에게 성병 검진과 함께 허가증을 발부하는 형태로 ‘사창’을 인정했다.
사창의 등장은 영업 형태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사창은 기본적으로 밀매음이었다. 새로운 형태의 선전방식이 필요했는데, 이 때 택한 게 인력거꾼이었다. 인력거꾼이 거나하게 취한 이들이나 성매매하길 원하는 이를 모셔가는 거였다(인력거꾼들은 사창가와 계약을 맺은 상태였다).
이렇게 사창은 독버섯처럼 일상으로 파고들었고, 어느새 공창의 규모를 넘어서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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