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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동두천의 기지촌 풍경. 구와바라 시세이(눈빛 아카이브) 제공

 

한국에 주둔한 미군들은 어떤 식으로 성매매를 했을까?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성매매’ 하나만 놓고 봤을 때 한국에 주둔한 미군들은 축복받은 존재였다. 이미 일본이 길을 닦아 놓은 상태에서 미군은 달리기만 하면 됐다. 이들은 번거롭게 현지인들을 섭외하고, 흥정하고, 성매매 장소를 물색할 필요가 없었다. 모든 게 갖춰진 상태였다. 여기에 더해 ‘찾아가는 서비스’까지 연결됐다.

 

당시 미군의 성매매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는 최초 한국에 주둔한 ‘부평’을 보면 이해가 빠르다. 21세기 현재 미군이 주둔한 지역과 한국군이 주둔한 주둔지 중 상당수는 일본군이 식민지 시절 건설한 곳이 많다. 군사적 요충지에 대해서는 판단이 거의 다 엇비슷하고, 이미 만들어진 기반 시설에 그대로 들어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기에 미군도, 한국군도 일본군이 만들어 놓은 군사 시설을 활용했다(우리나라 공군 기지, 해군 기지 중 태반이 이런 식이다).

 

일본군이 빠져나간 뒤(이때까지 일본군이 완전히 빠져나간 건 아니다. 한동안 일본군과 미군이 같은 기지에서 생활했던 경우도 많았다) 그 빈자리를 차지한 건 미군이었다. 부평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인천은 항구 도시다. 항구란 곧 대규모 물자 하역이 이루어지는 곳이고, 자연스럽게 대규모 창고가 건설될 수밖에 없는 입지 조건이다. 그 결과 일제 시대 때 부평에 대규모 창고가 들어서게 된다. 이곳에 미군의 병참 기지가 주둔하게 된다. 언제나 그렇지만, 군대에 가장 중요한 건 보급이다. 먹고, 입고, 싸우기 위해서는 보급이 보장되어야 한다.

 

미군은 기본에 충실했다. 한반도에 발을 내딛자마자 부평에 보급 기지를 건설한 거다. 약 4천여 명의 미군 병사들이 이곳에 주둔했는데, 이들은 남한 전역의 미군에 대한 병참, 보급, 수송 업무를 전담하게 된다. 이렇게 되자 곧 여성들이 몰렸다. 1,000여 명의 성매매 여성들이 미군 부대 앞으로 몰려 들었고, 이들은 미군을 상대로 몸을 팔기 시작했다. 기지촌의 시작이다. 이런 움직임은 부평만의 모습은 아니었다. 외국 군대 주둔지의 성지였던 용산(몽골군, 일본군, 명나라군, 미군 등등)에도 기지촌이 생겼고, 군산 비행장(K-8)부터 시작해 미군이 주둔한 곳은 규모의 차이만 있을 뿐 기지촌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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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미군으로서는 나쁠 게 없었다. 병사들이 갈 곳이 정해져 있으니 군대를 통제하기에도, 여성들을 관리하기에도 용이했다. 미군은 성매매 여성들을 통제했고, 이들의 성병 검사를 강제했다. 여성들도 일제 시대를 겪었기에 정부의 통제와 성병 검사에 별다른 반감이 없었다.

 

1945년 후반부터 미군은 미국 병사들에게 ‘출입 허가 구역 on limits’에 대한 정리와 병사들에 대한 교육이 이루어졌다. 미군 지휘부들은 병사들의 통제와 성병 예방 차원에서 좁은 구역의 기지촌과 몇몇 미군 전용 클럽을 인정하고 이곳을 관리한다는 정책 방향을 결정했다. 이는 헌병들에게도 기쁜 소식이었다. 서울 시내 전역, 혹은 부대 인근 도시 전체를 순찰하는 것보다는 몇몇 출입 가능 지역만 관리하면 되는 거였다. 미군 병사들은 이때부터 출입 허가 구역을 방문해 자신들의 성욕을 배출했다. 미군 지휘관들, 헌병들, 군의관들, 병사들... 모두가 행복해지는 방법이었다.

 

미군을 상대로 한 성매매는 공창제가 폐지됐음에도 별다른 타격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미군의 다양한 성매매를 즐길 수 있는 계기가 됐다. 미군은 부대 주변 기지촌은 물론, 부대 안의 클럽 하우스에서도 여자를 쉽게 구할 수 있었다. 이 당시 미군은 다양한 형태의 여성들을 만날 수 있었는데, 그 형태를 보면,

 

첫째, 미군이 군부대 안에서 직접 운영하는 장교클럽, 사병클럽

 

둘째, 부대 주변의 기지촌. 관리 주체는 한국인 민간업자였고, 이들을 군의관과 헌병들이 나서서 성병 검사 및 행정지도를 받았다

 

셋째, 부대 근처에 한국인 민간 업자가 만든 미군 병사 전용 클럽

 

넷째, 이런 클럽 형태가 아닌 댄스홀, 카바레, 바, 카페 등등 성매매가 가능한 업장

 

불과 1~2년 사이에 미군은 다양한 형태의 성매매를 즐길 수 있었다. 이게 가능했던 이유는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일제 시대 공창제와 군 위안부를 운영했던 일본군의 경험을 그대로 이식받았고, 한국인들의 거부감이 없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해 당시 미군이 주둔한 지역이 일본군이 주둔했던 지역과 겹치면서 이미 있었던 ‘시설’들을 재활용할 수 있었다는 점도 생각해야 한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애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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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지촌 내 두 연인, 서울 북부(1965). 그린비 제공

 

우리나라에서 ‘양공주’란 말이 공공연하게 사용됐고, 이게 공식 문서에 등장한 게 언제일까? 지금은 많이 쓰지 않는 말이지만, 불과 20여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양공주’란 말은 미군을 상대로 성을 파는 여성들의 대명사로 치부되던 단어였다(‘위안부’, ‘UN마담’, ‘양색시’, ‘양갈보’란 단어들이 병용됐는데, 결국 양공주란 말이 대세가 된다). 이 ‘양공주’란 단어가 언제부터 대중화됐을까? 다들 예상했겠지만 바로 6.25 한국 전쟁 때부터였다.

 

한반도의 성매매 역사는 한국 전쟁 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 있다. 이는 레토릭이 아니라 현실을 그대로 표현한 거다. 너무 과장된 표현이라고 반문할 거 같은데, 되묻고 싶다.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전 세계 어디를 가 봐도 성매매가 없는 나라는 없다. 그러나 집에서 나와 5분 거리 안에 성매매할 수 있는 나라는 한국이 유일하다.”

 

성매매 자체가 불법인 나라에서 이렇게 손쉽게 성매매를 할 수 있는 나라는 없다. 성매매의 업태도 다종다양하다. 안마방, 오피방, 여관바리, 룸살롱, 풀살롱, 다방레지, 대딸방 등등 언뜻 떠오른 종류만 해도 한 손으로 다 꼽을 수 없다. 전통적 개념의 ‘성매매’를 제외하고도 새로운 형태의 성매매 산업은 계속해 등장했고, 성장일로로 뻗어 나가고 있다.

 

“우리나라 국민이 다른 나라 국민들보다 더 음란한 건가?”

 

“우리나라 국민들의 도덕성이 더 낮은 걸까?”

 

“우리나라 사람들이 성에 대해 더 개방적인 걸까?”

 

수많은 의문이 떠오르지만, 어느 것도 확실한 해답이 돼 줄 순 없다. 그러나 확실하게 말해줄 수 있는 건 하나 있다.

 

“성매매란 개념이 전국으로 확산된 시초는 알고 있다.”

 

바로 한국 전쟁이다. 한국 전쟁은 우리나라 성매매 산업의 폭발적인 성장에 촉매제가 돼 주었다. 언뜻 이해가 안 가겠지만, 한국 전쟁은 우리의 성매매 역사를 획기적으로 뒤바꿔 놓았다. 그 이유를 찾아보면 크게 두 가지로 확인할 수 있다.

 

첫째, 사회의 붕괴.

 

성(性)

 

그것하고 하고 와서 첫번째로 여편네와

하던 날은 바로 그 이튿날 밤은

아니 바로 그 첫날 밤은 반시간도 넘어 했는데도

여편네가 만족하지 않는다

그년하고 하듯이 혓바닥이 떨어져나가게

물어제끼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어지간히 다부지게 해줬는데도

여편네가 만족하지 않는다

 

이게 아무래도 내가 저의 섹스를 개관하고

있는 것을 아는 모양이다

똑똑히는 몰라도 어렴풋이 느껴지는 모양이다

 

나는 섬찍해서 그전의 둔감한 내 자신으로

다시 돌아간다

연민의 순간이다 황홀의 순간이 아니라

속아 사는 연민의 순간이다

 

나는 이것이 쏟고 난 뒤에도 보통 때보다

완연히 한참 더 오래 끌다가 쏟았다

한 번 더 고비를 넘을 수도 있었는데 그만큼

지독하게 속이면 내가 곧 속고 만다.

 

김수영의 시다. 이 시는 김수영이 그의 아내 김현경에 관해 쓴 시인데, 그 배경을 알고 나면 시 자체가 다시 보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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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과 김현경이 결혼한 건 1950년이다. 당시 김수영은 일본 유학까지 다녀온 문단의 샛별이었고, 김현경은 이화여대 영문과를 나와 정지용에게 시를 배웠던 재원이었다. 당시 김현경이 그 포지션(문단에서 아이돌 대우를 받았다)을 유지했다면, 여러 문인들의 뮤즈가 됐던가 살롱의 마담이 되어 많은 예술가들을 거느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김현경은 김수영을 택했고, 이들은 신접살림을 차렸다. 그리고 전쟁이 발발했다. 전쟁이 터진 얼마 뒤 김수영은 인민군으로 강제 차출됐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김수영이 의용군을 탈출했다는 정도? 불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한국군에게 다시 체포된 김수영은 거제도 포로수용소로 끌려갔다. 김수영이 포로수용소에서 풀려난 건 1952년 12월이 돼서였다.

 

그사이 김현경은 어떻게 지냈을까? 그녀는 김수영의 선배 이종구와 살림을 차렸다. 김수영의 생사를 몰랐던 김현경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거다. 당시 멀쩡한 남자도 먹고살기 힘들었던 시기에 생계를 유지할 방법은 그리 많지 않았다. 수용소에서 나온 김수영은 김현경과 이종구가 살림을 차린 걸 확인하고, 이들에게 찾아갔다. 그리고 말한다. 내게로 돌아오라고... 김현경은 이를 거부한다(2년 뒤 다시 김수영에게 돌아간다).

 

김수영과 김현경의 관계는 문학적으로 ‘잘’ 포장된 『전쟁의 비극』이었다.

 

(김수영이 사람들 보는 앞에서, 심지어 어린 아들이 지켜보는데 김현경을 우산으로 두들겨 팼던 적이 있다. 이때의 심정을 ‘죄와 벌’이란 시로 토로했던 적이 있다. 그들은 같이 살았지만, 이미 부부의 관계는 아니었던 것 같다)

 

전쟁은 모든 걸 뒤바꿔 놓았다. 도덕이나 윤리, 상식 같은 건 사라진 상황. 살기 위해서는 짐승이 돼야 했고, 사회적 가치나 규범에 앞서 ‘생존’이 우선시 되는 상황이었다. 이 당시 이런 사연 하나 없는 이들이 몇이나 될까? 그리고 이 생존의 옆에는 ‘원초적 욕망’이란 그림자가 따라붙었다. 사회 규범, 법, 도덕이 무너진 자리에 욕망이 채워졌다. 세계가 붕괴되면서 기존의 가치관이 붕괴됐다.

 

둘째, 시스템의 전파.

 

이전까지는 대도시에서나 접할 수 있었던 집창촌과 윤락 여성들이 전쟁통에 전국으로 퍼져 나가게 된다. 아니, 퍼져 나갔다기보다는 한 곳으로 사람들이 모이면서 새로운 문물을 쉽게 접하게 됐다고 보는 게 맞을 거다. 당시 임시 수도였던 부산에는 전국에서 몰려든 피난민으로 넘쳐났다. 작은 공터만 있으면, 천막을 치고 깡통을 엮어 양철 지붕을 만들었다. 부산뿐만이 아니라 전국적으로 피난민이 흩어지고 모이는 게 반복됐다. 전쟁이란 극한 상황에서 욕망은 더 거세게 불타올랐고, 시스템을 처음 접한 이들은 기꺼이 성매매에 돈을 썼다.

 

당시 부산의 주요 간선도로에는 성매매 여성들로 넘쳐났다. 이들은 당시 가장 확실한 ‘소비자’였던 미군과 UN군들에게 몸을 팔았고, 한국 남성들도 이에 질세라 여자들을 끌어안았다. 어느새 부산은 성매매의 천국으로 변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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